. 닭
- 한 마리를 뜯으며 우리는 그렇게 상처를 견텼네 -
늦여름 끝물 더위에 영양 보충으로 백숙만 한게 없다. 요리의 상초보도 실패를 확률이 없으니 그 또한 백숙이 가진 매력 중 한 힐링이니 자연식이니 하는 유행에 혹해 농가에서 직접키운 토종닭을 살 생각이라면 아서라 육질이 질긴 탓에 가마솥 장작불을 한나절 넉끈히 지필 환경이 되는 분에게만 추천 압력 솥은 고기가 너무 무르니 퍽퍽해질 우려가 있으니 바닥 두꺼운 냄비가 좋다. 여기에 마트에서 산 영계를 안친 후 마늘 한줌 대추 약간 알싸한 향을 위해 뿌린 달린 대파를 뚝뚝 분질러 넣는다. 양파 반개는 선택 사항
냄비가 끓기 시작하면 닭 특유의 노린내와 마늘 익는 냄새가 눅눅한 공기를 타고 퍼진다. 물이 흘러 넘치고 지직거리며 마차 바퀴 소리가 날 때 닭을 건져 내고 불린 찹쌀을 넣는다. 이때 넣을 찹쌀양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언제나 적어야 한다. 짤순이 절친에게모처럼 받은 축의금 액수처럼 닭죽의 포인트는 묽기 한술 뜬 숟가락을 기울였을 때 뽀얗게 우러난 육수 사이로 푹 퍼진 찹쌀이 호르룩 흘러내려야만 진정한 닭죽이다. 노르스름한 죽 위에 살포시 솟은 닭.
우리는 닭의 질깃한 부위와 말랑한 부위를 교대로 뜬으며 허기를 끄고 기운을 얻는다. 근원을 알 수 업는 울분과 허기를 참지 못할 때 먹는 것이 백숙이다. 죽까지 말끔히 비운 뒤에도 울분을 삭일 수 없다면 호령하듯 소리를 질러도 무방 하리 "이 나쁜 놈들아!" 나 아직 안 죽었다!"
소설가 권여선의 장편 '푸르른 틈새'의 주인공에게 닭은 기억의 화살이고 상처 입은 몸을 치유는 도구다 이사를 앞둔 여자는 마지막 축제를 위해 닭집 앞에 멈춰선다. 사내가 도마 앞에서 닭을 토막 치고 그 옆에선 열살쯤 된 딸 애가 닭 속에 손을 넣어 내장을 흝고있다. 여자는 생각한다. 저 닭집 남자는 늙어 어떻게 되고 닭집 계집애는 커서 어떻게 될까?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버지는 중공군처럼 인해 전술을 쓰며 몰려든 처가 식구들 전부 거둬 먹였다. 그 시절 어머니는 닭을 한마리 푹 고아서 쟁판에 담은 후 擧案齊眉(거안제미) 식으로 아버지 앞에 공손히 가져왔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여자는 아비 없이 사는 외사촌들의 피눈물을 자이내 아버지가 바라준 살을 옴싹옴싹 받아 먹었다.
아버지는 여자의 입에 닭살을 넣어 주며 어머니에게 매번 이런 주문을 했다. "닭 뼈다귀 몇개는 한데 넣고 끓여야 진짜 친킨 수프가 되는거라."
무궁무진한 권력을 향유하던 아버지 처가 식구들 먹이다가 가산이 줄고 마침내 실직한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부여한 자리 가장 비천한 자리에 앉는 걸 거부했지만 털 빠찐 짐승처럼 자연스레 그 자리에 길이 든다. 말년에 취직한 곳이 시민공원 청소부 "나 다녀오리다" 혹은 '아버지 다녀오꾸마"하는 인사말 뒤론 항상 메다 붙이는 문소리가 이어졌다. 아버지가 얼근히 취해 귀가 해도 방문을 어너미는 안 방문을 빼곰 열곤 빠르게 치흝고 내리흝은 뒤 아버지의 숨통을 틀어 막듯 문을 쾅 닫아버린다. 그러면 아버지는 하루도 거른 적 없는 대사는 낭송한다. "이년들! 이 나쁜년들아 ! 나 손재우 아직 안 죽었도다!"
닭 봉지를 든 여자가 땀을 흘리며 비탈길을 오른다. 셋방 문틀에는 여자가 꽃무늬 이불 홑청을 찟어서 철사에 걸어 만든 커튼이 걸려 있다. 여자는 '누군가 날 어딘가로 날라디 팽개쳐주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라며 지난 2년 동안 그 방에 빌붙어 백수로 살았다. 여자는 셋방에서 아버지가 일러준 방법대로 살을 발라낸 닭뼈와 불린 찹쌀을 넣고 오래오래 백수들 끓인다.
여자는 끓는 냄비 앞에서 설령 모든 것이 나빠진다 해도 기억을 믿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기도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모든 인생이 풍요로워질 테니까 또 다른 삶의 간이역에서 누군가 작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여자에게 백숙은 젊음을 통과하는 신성한 의례인 것이다. 세 든 방을 떠나기 전 백숙을 맛본 여자의 혀가 말한다.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에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흥업면 매지리가 나온다. 그곳에 유난히 백숙 집이 많다. 닭과 궁합이 잘 맞는 황기를 넣어 끓인 매지지 황기탕은 육질이 쫄깃하고 고습다. 부근에 토지문학화관이 있어서 덤바위식당이나 엄나무집에 가면 민낯에자업복 차림의 알만한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주문 후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리기 때문에 예약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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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泉 池古瓮
첫댓글 작가들의 상상력에 그저 경탄(?) 할 뿐입니다! 감사
이렇게 글을 쓰는 분들 머리 속엔 작은 우주가 들어있나 상상의날개를 이리피니
닭백숙이 이야기 꾼의 손에 잡히면 한 시대의 흐름이 알알이 박혀 오는 군요...감사
참 대단하지유 글 솜씨가 우리 닭백숙 먹으러 갔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