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의 상상력과 풍부한 재능을 세계축구 무대에 제공해 온 아르헨티나 축구. 이제 아르헨티나로부터 출발한 또 하나의 허리케인이 유럽무대를 강타할 채비를 끝마쳤다. 주인공은 후안 로만 리켈메(Juan Roman Riquelme). 그의 유럽행을 두고 긍정과 부정의 시선들이 끊임없이 교차했지만 드디어 활은 활시위에서 당겨졌다. 장장 2년에 걸쳐 진행된 그 쉽지 않았던 궤적을 쫓아보기로 한다.
Revival of Diego
마라도나(Diego Maradona)를 빼놓고 아르헨티나 축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라운드를 떠난 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아르헨티나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그런 이유로 마라도나를 추억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극성 어린 애정은 언제나 새로운 마라도나를 열망해왔고 새로운 인재가 출현할 때마다 그와 마라도나를 연관짓기에 바빴다.
오르테가를 비롯 가야르도, 아이마르, 사비올라, 리켈메까지 이후의 천재들에게 붙여져 온 '뉴 마라도나'라는 애칭은 그들의 재능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그들에게 보내는 아르헨티나 인들의 기대치와 같았다. 그 가운데서도 90년대 말 아르헨티나 리그를 풍미한 신세대 뉴 마라도나 3총사 중 사비올라가 탁월한 골결정력 면에서, 아이마르가 감각적인 경기운영 면에서 마라도나와 흡사한 일면을 보인다면 리켈메는 눈을 뗄 수 없게끔 좌중을 사로잡는 흡인력 면에서 마라도나와 닮았다. 그리고 리켈메를 마라도나와 연관짓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스페인 명문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이력이 마라도나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리켈메가 세계축구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린 97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당시 우승컵을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훗날 전성기를 예견케 할 만한 재목들이 즐비한 팀이었다. 아이마르, 리켈메, 사무엘, 캄비아소, 로메오, 플라센테, 스칼로니 등등. 현재 유럽 주요 명문 클럽에서 주전으로 맹활약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리켈메의 대표팀과의 인연은 한동안 계속됐고 99 코파 아메리카를 통해 대표팀의 확실한 주전자리를 꿰차는 듯 했다. 적어도 비엘사가 2002 월드컵 남미예선을 앞두고 베론 중심의 팀으로의 변모를 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이후 비엘사는 리켈메를 철저히 외면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리그 MVP를 두고 수년째 각축을 벌여온 또래의 라이벌 아이마르에 대한 비엘사의 신망은 여전했다. 비엘사는 이른바 보반 류의 지능적인 플레이메이커에 속하는 리켈메의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베론, 아이마르와 같은 유형의 감각적이면서도 팀 전체와 적절한 균형,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선수들을 선호했다. 특히 유아독존(唯我獨尊)형의 드리블링은 비엘사의 아르헨티나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스타일이 다른 베론, 아이마르, 오르테가와 같은 플레이메이커들과의 포지션 경쟁이 그에게 불리함을 초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월드컵 개막을 앞둔 지난 2월 웨일즈와의 평가전 멤버로 깜짝 발탁되며 기대감을 부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켈메의 월드컵 출장이 애시당초 비엘사의 계획과 거리가 먼 것임이 입증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Don't cry for me, Boca!
박탈감과 소외감 속에서도 리켈메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자국 리그의 마지막 남은 수퍼스타에 대한 아르헨티나 팬들의 기대와 애정은 너무도 뜨거운 것이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리켈메는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에 2년 연속 남미 챔피언이라는 타이틀과 3시즌에 걸쳐 3차례나 리그 우승컵을 안기는 등의 맹활약으로 화답했다.
리켈메의 진가는 2000년 12월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은 인터컨티넨탈 컵-도요타 컵,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과 남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 간 대결-에서 유감 없이 발휘됐다. 그는 공을 몬다기 보다 감싸 옮긴다는 표현에 가까운 드리블 퍼포먼스로 유럽 정상급 플레이어들인 이에로, 제레미 등을 완벽히 유린했다. 경기 전 언론들은 이 대결을 라울과 팔레르모의 대결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철저히 피구와 리켈메의 싸움이었고 결과는 리켈메의 완승으로 시시하게 끝이 났다.
당시 충격의 파장은 전 유럽에 생생히 전달됐다. 리켈메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물론이었다. 이탈리아의 자이언트 AC 밀란이 서둘러 리켈메에 관심을 보였고,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도 리켈메의 재능에 목말라 했다. 그러나 곧장 성사될 것만 같았던 리켈메의 유럽행은 당초 예상처럼 순탄치는 않았다.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의 장벽이 리켈메와 유럽사이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일찌감치 자신의 목적지를 우상 마라도나가 뛰었던 FC 바르셀로나로 정했지만, 리켈메를 둘러싼 주위의 혼선은 결코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에이스를 헐값에 놓아줄 수 없다는 소속팀 보카의 입장과, 아직 검증이 필요한 미완의 대기에게 수천만 달러를 들이기 힘들다는 FC 바르셀로나 측의 현실적인 이유가 상충했던 때문이다.
그 와중에 라이벌 리베르 플라테로부터 영입제의가 날라들기도 했다. 구단주 선거 후보에 나선 우고 산틸리(Hugo Santilli)가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리켈메 영입을 선거공약으로 내건 것이었다. 이는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행에 비견될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물론 성사되기 만무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재계약과 해외진출 문제가 얽히는 가운데 클럽이 리켈메의 고액연봉에 곤란을 겪자, 구단 서포터들이 돈을 걷어 리켈메의 연봉을 보전해주겠다 나설 만큼 리켈메의 에이스로서의 입지는 확고부동한 상태였다.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다. 하지만 이는 옳은 해결방법은 아닌 것 같다. 팬들은 경기장을 찾기 위해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맙지만 이러한 부분은 나와 구단이 해결할 문제다." -리켈메-
Expectation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 경제 전반에 불어닥친 침체의 바람은 리켈메 본인에겐 오랜 숙원을 가능케 만든 순풍과도 같았다. 결국 리켈메는 당초 기대치의 절반 수준인 1130만 달러의 몸값에 바르셀로나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바르셀로나로서는 히바우두라는 오랜 간판을 내리고 리켈메라는 새 간판의 현판식을 거행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1월 발렌시아를 향해 떠난 아이마르의 쉽지 않았던 스페인 적응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리켈메 스스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한단계 도약한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은 불가피한 수순이며 이제 보카에서의 영광은 단지 지나간 과거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포지션 문제로 촉발된 미묘한 신경전으로 끝내 히바우두를 내몰았던 반 할과의 타협문제도 관심이 가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히바우두에게서 10번의 배번을 물려받았지만 이제 당당히 실력으로 주인을 잃은 에이스의 자리를 넘겨받는 일만 남은 것이다.
리켈메의 플레이는 매끈하지도 시원스럽지도 않다. 생김새만큼이나 끈적거리면서도 흐느적대는 듯한 몸놀림은 마치 사치스런 재능을 태연스레 과시하는 듯한 나태한 면모로 비춰질 정도에다, 신기에 가까운 볼키핑 능력은 이미 지구상에 그를 대적할 상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마저 갖게 만든다. 그래서 베론 보다 우아하고, 시메오네 보다 섬세한 테크닉을 보유했다는 평가에 더해 새 시대의 마라도나로 그를 지목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리켈메를 두고 요한 크루이프는 유럽축구의 스피드에 적응하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오히려 유럽의 스피드가 리켈메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망상일까?
"리켈메가 공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준의 놀라운 재능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리켈메는 감히 지단과 같은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였고 자신이 대단히 인상적인 플레이어란 점을 뚜렷이 입증하고 있었다." -호나우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