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4.10.08. -
가을이다. 새털구름 사이로 하늘이 청명하다. 물도 차가워져 정신이 한결 차분해지고 선명해진다. 이런 때는 누렇게 익은 벼들과 살랑대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금빛 들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겸허한 모국어’로 천지의 아름다움과 따뜻하게 내리비치는 가을 햇빛을 노래하고 싶다.
무엇보다 ‘호올로 있’고 싶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이 기꺼운 감각을 누려보고 싶다. 김현승 시인도 이를 느껴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고독의 시인’이 갈망하는 기도의 시간 속엔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가 들어있지만 가을이기에 영혼은 그것들을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표표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깃털이 된다. 세상의 영화에 머물지 않고 한없이 솟구치는 성령의 구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