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과 우리들의 천국
오랜만에 고흥과 보성 일대를 다녀왔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마음속의 고향처럼 자주 가는 곳, 소록도가 있어서이고, 그리고 다시 고흥을 좋아하는 것은 금강죽봉을 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소록도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곳,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전북대학교 근처에서 당신들의 카페를 개업하고서다. 이청준 선생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업한 첫날, 손님으로부터 첫 전화를 받았다.
“당신들의 천국이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문득 소설 속의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국을 지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있다. 섬을 문둥이의 천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자를 더욱 환자답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는’것이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소록도에 진정으로 세워져야 하는 천국은 환자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힘의 행사에 의한 천국이다.
그 천국은 이상욱까지를 포함한 환자들 모두의, 일인칭 복수 우리들의 천국이다. “
나는 결국 나의 천국을 만들고자 했던가? 아닌데,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고자 했는데, 어떻게 대답하지, 대답은 촌각을 다투는데 내 마음속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에 대한 상념이 수천 수 만 가지가 찰라 속에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깨달음처럼 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내가 만든 카페가 나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으로 변화한 것이다.
소록도, 나환자들의 나라, 그곳에 천국을 만들고자 했던 조백헌 원장의 꿈은 무산되고 결국 그들이 피와 땀으로 간척된 오마도는 환자가 아닌 뭍(육지) 사람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주정수 원장 때도 그는 이 섬에다 문둥이들의 천국을 꾸며 주겠노라고 함부로 장담을 했지.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우리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하지 않았나.(...)문둥이의 천국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지” 황장로의 말이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고자 했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었던 천국은 건설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런데 타인들의 천국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 꿈이 가당치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고, 결국 그 가게를 접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고, 그때부터야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어디 소록도나 나의 경우만이 그럴까? 여기 저기 난리가 아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요순시대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유토피아, 즉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설정하고서 꿈꾸고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어째서 올바른 者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며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가고
나쁜 놈들이 도리어 날쌘 말을 타고 횡행하는가?“ 하이네의 시가 절규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이 새벽,
“지상에서 천국의 생활을 즐기려고 한 많은 사람들은, ‘나는 홀로 멀리 떨어진 들에서 살리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인 조르다노 부르노의 말처럼, 나홀로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만 많고 우리 모두의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리 없으니,
무엇이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는 천국일까?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 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운명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당신들의 천국> 에 나오는 몇 구절이 내 삶의 진로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살고자 했는데, 잘 모르겠다. 내 삶이 내 의도대로 흘러왔는지, 아니면 다른 길로 벗어난 삶은 아니었는지,
2022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