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갑신정변 3 - 결과
갑신정변이 어설픈 쿠데타였지만 성공한 김옥균과 개화당은 곧 신정부 수립에 착수한다.
신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구성한다. 개화당으로서는 신정부를 튼튼히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었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효의 큰형님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유사이래 최대 개혁조치인 정강 정책을 발표했다.
이러한 고종의 개혁조서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곧 바로 폐기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개혁은 십 년후로 늦춰지고 만다. 그것도 외세인 일본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 된다.
갑신정변이후 본래 이들이 내놓은 개혁 정강의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개혁 시책 중 14개 조항이 김옥균의 일기인《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4.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폐지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7.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8.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혜상공국 설립목적은 '외국상인의 불법적 상행위를 막고, 외읍무뢰배의 불량행상의 폐단을 일소함으로써 보부상의 권익을 보호함과 동시에 민폐를 근절'하는 것. 그러닌 목적과 달리 어용성이 된 보부상들의 행패가 심했다.)
9.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묻고, 무고한 죄인은 석방시킬 것.
10.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11.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임명할 것.
12.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13.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
14.의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이들의 개혁안 중 하나인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단절에는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문벌과 양반 등 신분제도 폐지와 과거 제도 폐지 조항은 많은 양반들과 과거를 통해 나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지방 유생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지금 로스쿨설치로 사법시험폐지에 대한 반발과 비슷했다.
규장각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개화파에게 내심 동조하고 있었던 북학파 출신 지식인과 중인 계층에게도 반감을 사게 된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백성들이 이러한 조치에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 당시 백성들은 이 개혁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조차 몰랐다. 백성들에게 이런 개혁 조치를 홍보하고 설명할 기회조차 없이 3일 만에 스치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개화파의 근대화 정책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한양의 상인·빈민들은 개화파에 강한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기반을 신상품으로 위협해오는 일본에 밀착된 개화파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또한 이번 조치로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이 침투해서 조선인들을 죽이고 잡아 먹는다. 아녀자를 노리개감으로 삼는다. 등등 유언비어들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퍼져 있어 개화파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또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소수의 병력으로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당일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군 1,500명은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개입을 시작한다. 원세개 청군은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해 들어 왔다.
안타갑게도 이처럼 명성황후의 계략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한다.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1500명의 청군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허술한 쿠데타였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개화파가 추진하려 하였던 각종 개혁 조치는 모두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한성 조약, 청과 일본 사이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텐진 조약은 청 · 일 양국 군대가 모두 철수할 것, 이후 청 · 일의 군대가 장차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이 조약은 뒤에 청 · 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형식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김옥균은 1885년 1월부터 1894년 3월까지 10년 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다.
박영효의 회고록에 보면 김옥균이 일본에 있었던 이 십 년동안 주색잡기, 도박 등에만 빠져 있다며 김옥균을 크게 비난하는 글이 나온다.
이 부분은 타국에서 실패한 혁명가 김옥균의 허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큰형님 뻘 타락한 김옥균을 크게 비난할 정도로 아직도 혁명가의 기운이 펄펄 살아있던 젋은 박영효가 나이가 들수록 차츰차츰 철저한 친일파로 변하는 과정이 궁금하다.
현 정치인들 중에서도 젋었을적 진보적인 운동권 출신들이 나이들어 가장 극우 보수파 정치인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갑신정변 삼일천하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정권은 김옥균등 주동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정부에 이들을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만국공법(萬國公法)상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다고 일본정부가 김옥균등을 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상당히 홀대한다.
1894년 3월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청의 이홍장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 간다. 이 틈을 노려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인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우리에게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하여 킬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우리나라 최초 블란서 유학생으로 당시 조선의 초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김옥균도 홍종우의 그러한 점을 높이 사 자기 옆에 있게 했다.
홍종우도 나름 조선의 초지식인으로서 애국적 신념이 넘쳤고 개화파 못지 않은 개혁의지도 강했다.
단지 개화파와는 다르게 홍종우는 절대왕권주의자 였다.
그런 신념에 의해 고종의 밀명을 받고 김옥균 암살이라는 큰 일을 한 것이다.
홍종우가 국내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개화파가 정치일선에서 일단 후퇴하는 아관파천 이후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홍종우는 고종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황제 칭호식을 거행하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홍종우 제안이 큰 의미를 지닌다.
18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홍종우는 비서원승이 되었고, 이후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 판사, 중추원 의관, 태의원 소경 등 외교·의전·행정·사법·입법·산업 등을 관장하는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 때 홍종우는 정치·사회 문제에 관해서는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에 대한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대, 불평등 조계의 개정,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서양종교에 대한 반대,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을 주장한다.
홍종우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황제권의 절대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군사권의 확립과 정부의 자립이 있어야 되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과감한 사회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홍종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김옥균을 암살한 단순한 킬러가 이니었다.
홍종우 말년에는 전남 무안에 은거하면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을 풍미하자 7월 12일 홍종우는 10원을, 그의 부인 박씨는 금반지 1량을, 자녀들도 각기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짧은 이야기도 전해질 만큼 애국심 만큼은 김옥균에 뒤지지 않았다.
김옥균, 홍종우 이 두 사람의 나라사랑하고 개혁하는 방법이 틀렸을 뿐이다
김옥김옥균이 암살되자 청은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정부에 인도했다. 조선에 들어온 김옥균의 시체는 부관참시로 능지처참되었고 전국에 효시되었다.
갑신정변이 위에서 부터 개혁이라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우리 역사속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중세봉건체제를 청산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우리 역사상 첫 번째의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둘째,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주었다.
셋째, 한국 민족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갑신정변 그 실패 휴우증도 너무 컸다.
실패 가장 큰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백성들과 함께 못했고 몇몇 엘리트들에 의한 외세 그것도 일본의 힘을 빌려서 하려고 한 위에서부터 혁명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준비기간, 자금력의 부족, 그리고 일본의 배신도 주 요인 이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이 자주독립을 외쳤지만 일본의 힘을 빌려 청을 몰아내려 했던 것도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런 문제때문에 어떤 역사학자는 갑신정변을 갑신왜란으로 불러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렇다고 갑신정변에 일본이 큰 힘을 보태준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주둔군 150명 그리고 자금 조금이었다.
그것조차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은 재빨리 발을 뺀다. 아직은 일본으로서는 청과 일전을 치룰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옥균등 개화파는 일본을 믿고 정변을 일으켰지만 일본은 청을 시험하는 정도로만 김옥균과 개화파를 이용했을 뿐이다.
김옥균과 개화파들이 서구 열강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정변을 일으켰으나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점도 실패 요인이다.
이처럼 김옥균의 삼일천하는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고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국가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사실, 후에 자세히 나오겠지만 갑신정변과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십 년의 기간은 청도 일본도 자국의 내부 사정때문에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런 시기에 갑신정변같은 우리 민족 스스로 변혁운동이 성공하여 십 년간 자립자강을 했더라면....
이처럼 우리 역사는 시기시기마다 왜 이리 이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일까?
어쩟든 역사적 결과로 보았을 때 갑신정변은 우리 역사에 큰 흔적만을 남겨 놓았지만 조선을 더 나쁜 상황으로 몰아 가고 말았다.
자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