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아버지는 자유를, 문재인의 아버지는 反日을 가르쳤다! 趙甲濟
최근 별세한 윤석열 대통령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戰後 일본에 대한 좋은 면과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의 아버지는 탈북민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과 일본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영향이 한일관계 파탄을 획책했던 문재인과 한일관계 복원을 통하여 韓美日 관계강화를 이룬 윤석열의 외교로 나타난 면이 있다. 윤기중 교수는 한양대 조교수 시절 한일수교 직후였는데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되어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학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귀국 후 1968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의 창립 멤버 교수가 되었다. 1991~1993년 연세대 상경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97년 정년 퇴임하였고 퇴임 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76년 한국통계학회 회장, 1992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1년 경제학 분야 학술 발전에 현저한 공이 있다고 인정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자유시장 경제의 중요성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문재인의 背恩忘德 문재인의 아버지 文龍炯은 1920년 10월 4일, 북한 함흥에서 출생, 1936년 함흥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 이 학교를 졸업하였고,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이후, 함흥부 흥남읍사무소 농업계 계장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삼팔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정하에서 함주군청 농무과 과장으로 전임했다. 훗날 그의 아들 문재인은 자서전을 통해 "문용형이 소련 군정기와 북한 정부 시절, 당국에 의해 매우 시달렸다"고 주장하였으며, 이 시달림이 흥남 철수 때 미군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흥남 철수 때 미군 수송함 LST를 타고 거제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남 문재인이 출생하였다. 거제 명진리에 거주하며 거제 포로수용소 공사에서 노무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같이 탈출했던 부인 강한옥은 포로들과 물품을 교환해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의 부모는, 알몬드 장군 덕분에 흥남철수선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와 미래의 대통령을 낳았다. 이 부모와 자식들은 평생 미군에 감사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그런 문재인은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고마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할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이 된 직후인 2017년 가을 유엔총회 참석이었다. 여기서 그는 은인(恩人)들에게 침을 뱉었다. 용서할 수 없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반역적 연설을 했지만 한국에선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이게 더 문제다). 유엔군 파병은 유엔출범 이후 최초였고 지금까지도 최대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유엔총회장에서 문재인은 한국전의 본질인 김일성 남침을 덮고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인 내전론(內戰論)을 피력했다. <나는 전쟁 중에 피난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난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를 찾아’ 미군 철수선을 탔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중공군과 북한정권의 책임인데 이를 ‘전쟁’에 돌렸다. 그가 말하는 ‘국제전’이 ‘내전’과 함께 쓰여질 때는 <유엔군이 한민족의 내전에 개입, 국제전으로 확대시켰다>는 뜻을 품는다. 문재인의 좌익적 역사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일성의 남침을 은폐하기 위하여 전쟁의 원인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아니라 ‘냉전구조’에 전가(轉嫁)한 것이다. <세계적 냉전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후략).>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그 자리에서 유엔군의 도움에 감사하고 헌법정신에 따라 자유통일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했어야 하는데, 그는 침략자 북한을 비호하더니 통일 포기를 선언한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물론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위반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제66조는 대통령의 책무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 및 헌법수호,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규정하였다. 대통령에게 인위적 통일을 명령한 것이다. 문재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문재인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북한노동당 정권에 복무한 관료였다고 한다. 흥남시 농업계장과 과장을 지냈다고 한다. 북한정권의 엘리트였던 그가 부인과 딸을 데리고 미군 철수선을 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을 은인(恩人)으로 여기고 공짜로 얻은 자유를 소중히 활용, 성공적 삶을 이어가야 할 터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북한 엘리트로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경우로 보인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문재인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그의 회고록이나 대담록에 편린(片鱗)이 드러나 있다. “말이 없으셨던 아버진데, 세상이나 시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주 어릴 때 한일회담에 대해 반대하시던 말씀, 그 이후에 자유당 독재나 박정희 시절 독재와 민정이양 약속 위반에 대한 비판들, 그런 말씀들이었어요.”《대한민국이 묻는다》 아버지가 비판해야 할 첫째 대상은 김일성일 텐데 이승만·박정희 비판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이승만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판하기 전에 김일성 독재를 비판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정권에 대해선 무비판적 자세와 한국 정부에 대해선 무조건적 비판 자세를 아들에게 가르쳐주었고 이게 지금도 문재인의 행태에 남아 있는 느낌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잘 두어야 한다. 한일회담 반대는 한미일 동맹의 정상적인 작동을 반대하는 것으로 본질이 반미적(反美的)이다. “이웃집에 대학생이 있었는데, 한일회담 때 데모도 하고 그랬던 형이었어요. 그 형이 한 번씩 제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형한테 왜 우리가 한일회담을 반대해야 하는지, 주욱 설명해주기도 했죠.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이 왜 잘못됐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요.” 《대한민국이 묻는다》 아버지는 대학생에게 완전히 틀린 정보를 심어준 것이다. 한일국교 정상화도, 경제개발도 성공했는데 학생에게 이를 반대하라고 선동한 셈이다. 김일성 세상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박정희 근대화를 지지했는데 그는 참 특이하다. 더 특이한 것은 反日을 가르친 그의 손녀, 즉 문재인의 딸은 조선침략파들이 만든 일본 極右대학 국사관(國士館)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드물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사회의식이 깊은 분이었다. 한일회담 때 이웃 대학생에게 왜 한일회담에 반대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는 농촌을 살리는 중농(重農)주의적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데, 박정희 정권이 거꾸로 저곡가로 농촌을 죽이는 정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게 어린 내게 강하게 와 닿았다.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사상계’ 잡지를 때때로 읽기도 하셨는데, 그 시절 주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문재인의 운명》 박정희가 좁은 국토에서 수출입국을 위한 공업화 정책을 펴지 않고 중농정책을 추진했다면 오늘의 번영이 있었을까? 박정희는 농촌 출신으로서 한시도 농민들의 고통을 잊은 적이 없다. 그리하여 농촌의 가난을 없앤 지도자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인물인데, 북한에서 농업과장을 했다는 사람이 그런 위인을, 농촌 죽이는 정치인으로 가르쳤으니 이때부터 문재인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잘 사는 농민들이 이 대목을 읽으면 실소(失笑)할 것이다. 저곡가 정책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유지되었는데 농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물가상승과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인을 줄여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박정희는 농민소득 향상을 통해 저곡가로 손해 본 것의 몇 배를 보상, 가난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저곡가 정책에만 집착, 박정희를 비판했다는데 북한 농업을 망쳐 ‘이밥에 고깃국’ 타령만 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없었단 말인가? 한국은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켜 본격적인 산업화에 착수하기 전엔 국민의 과반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사실상 농업국가였다.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ha(헥타르: 100아르. 1아르는 100㎡)당 쌀 수확량이다.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日帝)시대가 끝나는 시기까지 한국은 ha당 쌀 수확량이 1.14t에서 1.63t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 일본은 면적당 쌀수확량이 늘 한국의 두 배가량이었다. 한국의 쌀 수확량이 급증(急增)한 것은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촌진흥 정책을 쓴 1960년대 중반부터이다. 1966~1970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3.14t으로 일제시대의 두 배로 늘었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해당하는 1975~1979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4.46t으로 같은 시기 일본의 4.25t을 능가하였다. 이는 한국 농업사상 최초의 개가였다. 좌익들은 문재인 아버지처럼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화 정책에 집중,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거짓말한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960년대 말의 농촌은 절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고,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7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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