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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01화 . 길흉의 시작_5
영문도 모르고 녀석에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하기 직전. 막 출입문을 통과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어디 가냐고 불러제끼는 반이로운 녀석 때문에 나를 끌고 몰래 빠져나가려던 녀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 몰래 뭐 맛난 거라도 먹으러 가냐며, 같이 가자고 따라 나오려는 이로운 놈의 행동과 내 손을 잡고 무작정 뜀박질을 시작하는 문지완 녀석의 어이없는 행동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난 그저 이유도 모른 채 녀석의 손에 잡아끌려 덩달아 뛰었다.
물론 다른 때 같았으면 온갖 발악을 해서라도 녀석의 손을 뿌리치곤 하이킥이나 한 방 날려줬을 테지만, 이번만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 곳에 계속 죽치고 앉아 있다가 나중에 주정뱅이 놈들 택시 셔틀이나 해주긴 절대로 싫다. 뭐- 선배들에게 한 소리 들을게 뻔하지만, 대충 문지완 녀석이 끌고 나갔다고 나도 피해자라며 적반하장을 해대면 될테니 걱정은 없다. 빌어먹을 문지완 놈이었지만 이럴 때 만큼은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이, 이제 그만 놔주지? ”
터벅터벅, 엇박자로 들려오는 발소리는 무척이나 어색했으며, 더욱이 녀석과 맞잡고 있는 오른손은 거슬리다 못해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왠지 모르게 멋쩍은 기분이 들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자, 조금 앞 서 걷던 문지완 녀석이 그제야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급히 손을 떼었다. 따뜻하던 녀석의 손이 사라진 빈자리가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 지금, 어디 가는 거냐? ” “ ……. ” “ ……. ” “ 술…… 마실래? ”
잠시 뜸을 들리던 녀석이 동문서답을 해댔다. 난감함에 머리만 긁적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분이다! 뭐, 어차피 들어간 술. 조금 더 들어간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 좋아! ”
―따위의 쓸데없이 긍정적인 마인드는 진즉에 폐기처분 했어야 했다.
* * *
- RRRRR…… RRRRR…….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메슥거리는 속에 의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손만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 ……여보세요. ”
잔뜩 갈라진 음성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갔다. 속이 안 좋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머리를 짜증스럽게 헝클였다. 휴대폰 너머에서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곧 정적을 깨고 잔뜩 화를 억누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어디야. “ ……. ” - ……. “ 누군데 반말……. ” - 니 누나다, 새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잘못 거셨습니다. ”
급하게 종료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끊어버리곤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망했다, 젠장! 이 여자,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휘둥그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왠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 ……여긴 또 어디― 끄아아악!!!! ”
콧구멍이 벌렁벌렁, 심장이 쿵덕쿵덕, 머리는 지끈지끈, 속은 울렁울렁. 후덜덜한 두 손으로 비명을 지르는 내 망할 입을 콱 막아버렸다. 대체, 대체 저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그것도 왜 옷은 훌러덩 벗고 있는 거냐구!!!
녀석의 탄탄해 보이는 상체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시끄럽게 다시 울려대는 휴대폰을 배터리와 분리시키곤 머리를 싸맸다. 진정해. 생각을 하자, 생각을! 이세흔! 정신 차려! 아무리 술을 좀 마셨기로서니 설마 내가 저 빌어먹을 녀석과 XX해서 XXX하는 둥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했을 리가 없잖아! 더욱이 둘 다 남잔데!!! 라는 현실 부정은 나 또한 나체라는 착각 아닌 착각에서 산산조각이 났지만, 착각은 착각일 뿐. 속옷을 입고 있는 내 몸뚱아리(녀석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에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그나저나 이 녀석, 역시 잘생겼단 말이지. ” “ 알아. ” “ 으어억! ”
맨 처음의 저질스런 발상과는 거리가 먼 듯 해 잠시나마 땅 파고 들어간 내 엄청난 삽질에 경의를 표한 뒤였다. 에라, 재수 없는 놈! 하며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문지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왠지 모르게 나빠진 기분에 잘 자고 있는 놈을 짜증스럽게 발로 두어 번 툭툭 찼다. 그랬더니, 별안간 자고 있던 놈이 눈을 뜬 것도 모자라 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던 내 두 발목을 콱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 이, 일어났냐? ” “ 덕분에. ”
잡고 있던 내 발목을 거칠게 놓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녀석이 빙글 웃었다. 허허헛,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새끼, 일어낫으면 말을 좀 해주던가. 졸라 놀랐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써 화재를 돌렸다.
“ 여긴 어디냐? ” “ 모텔. ” “ 아, 그래 모텔……. ” “ ……. ” “ 뭐어어엇?!!! ”
오, 하나님.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 자식과의 13년 악연이 끊어지지 않고 2년 만에 재회를 한 것도 모자라, 재회하자마자 모텔이라니! 이런 부적절한 관게가 어디 있습니까! 정녕 제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어 이러시는 겝니까? 있지도 않은 신앙심을 찾아 하나님을 부르짓고 있으려니 문지완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지었다.
“ 뭐냐. 그 순결 잃은 처녀를 연상케 하는 몸부림은. ”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쪽팔림에 머리를 긁적였다. 증거인멸을 위해 놈을 죽여야겠다는 둥의 삽질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
“ 왜 네 녀석과 내가 이렇게 홀딱 벗고 있는 지나 말해 보시지. ” “ 기억 안 나냐? ” “ 기억이 안 나니깐 묻지 그럼 내가 왜 묻겠냐? 기억이 나는 데도 불구하고 설명하라며 윽박지르는 취미는 없단다. ”
까칠한 내 대답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허파에 구멍이 휑하니 뚫려 허구한 날 바람이 드나드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하도 웃어서 그대로 얼굴 근육에 마비가 왔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저 녀석 자체가 무지무지 웃음이 헤픈 놈이라던가. 뭐, 엔돌핀 과다분비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엄청나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 흐응,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 “ 그렇다니……. 윽! 뭐, 뭐냐……? ” “ 진짜로, 기억 안 나? ”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가까이 다가와 지그시 내 눈을 응시하는 놈의 행동에 놀라 숨을 훅 들이켰다. 침대헤드에 머리를 쿵하고 찧은 것에 아파한 것도 잠시.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녀석을 경악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설마, 너……. ” “ ……. ” “ 게이냐? 군대에 있던 2년 새에 취향이 바뀐 거야? ”
날 덮친 거야? 그런 거야? 뒷말은 생략했다. 녀석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져 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까 내가 했던 발상이 삽질이 맞긴 맞나 보다.
“ 미안하다, 농이란다. 얼굴 좀 풀어. 너 지금 존나 무서워……. ” “ ……. ”
잔뜩 굳은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녀석에게 허허로이 웃었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별 쌩쇼를 다하는 구나. 이런 농담 한 번만 더 했다간 사람 죽일 놈이다, 저 놈은. 멱살 잡을 곳이 없어 목 언저리를 헤매는 듯한 녀석의 손길에 흠칫했다. 설마, 너 이 새끼. 지금 내 목 조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거냐? 당황스러움에 더욱 어색하게 웃어보였더니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역시 목을 조르려는 걸까? 지금 어디를 어떻게 조르면 좋을까 고민하는 걸까? 나는 진정 녀석의 손에 의해 죽고 마는 것일까? 그런 걸까? 아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녀석의 손이 내 목을 조르기 전에 내가 먼저 놈을 쳐단하는 수 밖에. 이대로 녀석의 손에 죽기엔 내 23년 인생이 너무 가엾잖아.
“ 씨발. ”
한참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내 목을 노리던 녀석이 나지막한 욕설을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녀석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험상궂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느새 다시 생글생글 웃는, 허파에 바람 드나드는 놈으로 돌아와 있었다.
“ 어제 네 녀석이 토하는 바람에……. 아, 지금 생각하니까 또 열 받아. 됐고. 세탁비 내놔. ” “ ……에엑? ”
그리고는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란다.
“ 네 녀석 와이셔츠랑 바지 세탁비, 재킷 드라이클리닝비, 내 티셔츠 세탁비까지 포함해서 도합 16,000원. 아, 까먹을 뻔 했다. 술도 마셨었지? 술이랑 안주 비용 47,000원, 모텔비 56,000원. 더치페이로 반반씩 놔눠야 하니까……. 총 67,500원이네. ” “ 에에에엑?! ” “ 지금 당장 내-놔. ”
내 눈 앞에 제 손바닥을 들이밀며 녀석은 씨익- 엄청나게 재수 없는 웃음을 내지었다.
* * *
“ 돈은? ”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화를 참으며 끙끙대고 있는데, 달칵 하는 문소리와 함께 녀석이 욕실에서 나왔다. 물기가 잔뜩 흐르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휘적휘적 걸어오는 얄미운 문지완 녀석을 눈이 빠져라 노려보았다. 저 쳐 죽일 놈!!! 이내 손에 들린 영수증들을 보란 듯이 박박 찢어버렸다.
“ 찢어도 소용없어. 내-놔. 67,500원. ” “ 증거를 대 봐, 증거를. ” “ 무슨 증거? ” “ 내가 술 마시고 오바이트를 했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난 기억 안 나. 더욱이 네 녀석이랑 술 마신 기억조차 없거든? 증거도 없이, 너 그러는 거 아니다? ”
구라다. 그것도 개구라. 술 마신 기억은 있다. 뭐, 도중에 필름이 끊겨 오바이트를 했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도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기억도 안 나는 일로 삥을 뜯길 순 없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문지완 녀석이 대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뭐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고작 67,500원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쪼잔스러운 짓은 하지……. ” “ ―않겠지. 어디, 경찰에 신고해서 되겠어? ” “ 네 녀석… 설마……. ” “ 빙고―. ”
녀석의 입술이 길게 포물선을 그렸다.
“ 네 누님들이 널 아주 그냥 애타게 찾고 계시더라구. ”
……저 놈은 악마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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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아주신 ‘자음’님, ‘별이해삼’님, ‘하직’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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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ㅋㅋ 누님이 아주 애타게 찾고 있구나....ㅋㅋㅋㅋㅋㅋㅎㄷㄷ;;;
모텔에서 눈을 떴다길래 지완이가 드디어 일을 쳤나했더니 두둥..!돈이나 뜯어내고 짜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지완이도 지금은 아무맘 없는걸까요?ㅎㅎ지완이 맘이 더 궁금하네요 좋아하는것 같기도하고 그냥 즐기는것같기도하고ㅎㅎ담편 기대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