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亦快哉行 이 또한 호쾌하지 않겠는가? 丁若鏞(조선의 시인)
奕棋曾不解贏輸 바둑의 어려운 국면을 바로 풀지 못해 끙끙대다
局外旁觀坐似愚 바둑판 밖에 등신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는구나
好把一條如意鐵 여차하면 한 자루의 철심 여의봉을 움켜쥐고서
砉然揮掃作虛無 붓을 휘두르듯 반상을 거침없이 쓸어버린다면
不亦快哉 이 또한 통쾌하지 않을쏘냐?
난마처럼 얽힌 세상을 천재인 다신인들 쉽게 풀 수 있겠는가?
결이 닮은 서구 시의 원문을 몇 편 찾아 번역해주고
그대 청연 또한 차운하여 다산의 답답한 심사를 풀어주게나
참으로 다산다운 시로다.
이 시는 바둑을 말하지만, 실은 세상을 말한다.
정약용은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수천 수를 계산해도 답이 없는 현실 앞에서 문득 외친 것이다.
"차라리 여의철봉 하나를 들어 모두 쓸어버리고 싶구나."
그러나 마지막의 "不亦快哉(이 또한 통쾌하지 않은가)"에는 혁명의 함성이 아니라 억눌린 선비의 자조와 웃음이 숨어 있다.
이런 정서는 서양에도 드물지 않다. 결은 다르지만, 세상의 난맥을 향해 같은 한숨을 내쉰 시들이 있다.
1. 윌리엄 블레이크 《A Poison Tree》 (독나무)
I was angry with my friend:
I told my wrath, my wrath did end.
I was angry with my foe:
I told it not, my wrath did grow.
번역
벗에게 노하여
화를 말했더니 화는 사라졌네.
원수에게 노하여
말하지 않았더니
분노는 자라나 나무가 되었네.
...
강평
블레이크는 세상을 뒤엎지 않는다.
대신 마음속 분노가 얼마나 거대한 독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정약용이
"반상을 쓸어버리고 싶다."
고 외친다면,
블레이크는
"쓸어버리지 못한 분노가 결국 세상을 죽인다."
고 말한다.
2. 퍼시 비시 셸리 《Ozymandia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번역
내 위업을 보라.
강대한 자들이여,
그리고 절망하라.
...
그러나
그 거대한 제국은
모래뿐이었다.
강평
정약용이
"차라리 다 쓸어버리고 싶다."
고 한다면,
셸리는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라.
시간이라는 철봉이 이미 다 쓸어버렸다."
3. 매슈 아널드 《Dover Beach》
Ah, love, let us be true
To one another!
번역
아,
그대여.
우리는 서로에게만은
진실하세.
세상은
아름다운 듯 보이지만
기쁨도
빛도
평화도
없다.
강평
정약용은 세상을 향해 철봉을 든다.
아널드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
둘 다 같은 절망에서 출발하지만
도달한 길은 다르다.
4. W. B. 예이츠 《The Second Coming》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번역
모든 것은 무너진다.
중심은 더는 버티지 못한다.
세상에는
혼돈만이 넘친다.
강평
이보다 다산의 심정과 가까운 서구시는 드물다.
바둑판의 형세는 이미 무너졌고
어느 수를 두어도 답이 없다.
그럴 때
사람은
철봉을 들고 싶어진다.
청연, 다산을 차운하다
次丁茶山〈不亦快哉行〉
世局千盤手已遲
人心九曲更難知
莫將鐵棒空揮盡
且借秋風洗亂棋
若問快哉何處在
一輪明月照寒枝
번역
세상은 천 겹 바둑판이라
내 손은 이미 늦었고,
사람 마음은 아홉 번 굽은 물길이라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
철봉을 들어
모조리 쓸어버리려 하지 말고,
차라리 가을바람을 빌려
흩어진 바둑돌을 씻어 보내세.
통쾌함이 어디 있느냐 묻는다면,
차가운 가지 끝을 비추는
둥근 달 하나가 있을 뿐.
청연의 강평
다산은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끝내 유배되었다.
그가 말한 철봉은 폭력의 무기가 아니라 답답한 가슴속에서 한 번쯤 휘둘러 보고 싶은 상상의 철봉이었다.
그러나 다산 자신은 끝내 그 철봉을 들지 않았다.
대신 붓을 들었다.
18년 동안 수백 권의 책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렇게 차운하고 싶다.
鐵棒掃局一時快
筆墨開天百世春
철봉으로 반상을 쓸어버리면 통쾌함은 한순간이지만,
붓과 먹으로 하늘을 열면 그 봄은 백세를 간다.
그렇기에 다산의 "快哉"는 파괴의 환희가 아니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마저 학문과 성찰로 승화시킨 한 유학자의 웃음이다. 그 웃음은 분노를 감추는 웃음이 아니라, 분노를 이겨낸 뒤에야 비로소 가능한 웃음이었으며, 오늘날 난마처럼 얽힌 세상을 마주한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과연 청연답도다 어찌 바람의 심사인들 다산과 다를쏘냐
바람이여,
그 말을 들으니 문득 다산의 또 다른 시구가 떠오르는구려.
萬折必東(만절필동).
황하는 만 번을 굽이쳐도
끝내 동쪽 바다로 흐른다.
다산의 답답함은 세상을 미워해서가 아니었네.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에 답답했던 것이지.
바람 또한 여러 차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고전을 공부하는 까닭이 단순히 옛글을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세상을 비추기 위해서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네.
그래서 다산의 "砉然揮掃作虛無(홱 쓸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끝내 선택한 길이 붓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큰 울림을 주는 것이겠지.
문득 바람을 위해 한 수를 지어 보았네.
贈風
世事如棋局未終
千般黑白亂心中
莫愁今日無佳著
長看秋月照長空
세상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바둑판.
흑백의 수만 가지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오늘 묘수가 없다고 근심하지 말게.
오래도록 가을달이 긴 하늘을 비추는 것을 바라보게.
바둑에서는 한 수를 잘못 두었다고 끝나는 판이 아니네.
오히려 명수들은 가장 난해한 형세에서 비로소 솜씨를 드러내지.
인생 또한 그러하네.
다산은 유배지에서 다산이 되었고,
사마천은 궁형을 견디며 《사기》를 남겼고,
소동파는 유배지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을 써 내려갔네.
그들이 고난을 원해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겠지.
그러니 바람이여.
답답함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네.
답답함은 생각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손님이니.
다만 그 답답함이 철봉을 들게 하기보다,
다산처럼 붓을 들게 한다면,
언젠가 그 글 또한 누군가의 어지러운 바둑판을 바로잡는 한 수가 될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