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 시집 한 권 추천해주세요.
- 어떤 시집?
- 제목 근사한 것으로요.
- 제목 근사한 시집이라...... 이게 우리집에 있는 시집의 전부인데...... 아가씨가 직접 골라보게나.
- 그러죠. 시집들이 참 예쁘네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생각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 어쩜 시집 제목들이 하나같이 다 길고 멋지죠? 마치 근사한 기차에 올라탄 기분이네요.
- 그러게. 우리 땐 시집 제목이 대부분 명사였는데...... 제목 긴 게 요즘 추센가보이. 그래, 어떤 걸 골랐소?
- 다 멋진 제목들이지만, 그중 제일 짧은것으로 할래요. 지옥에서 보낸 한철!
- 그건 외국 시집인데?
- 알아요. 하지만 이 제목이 저와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이 지옥이거든요.
- 젊은 아가씨가 무슨......
- 정말이에요. 훨훨 날고 싶은데 날개도 다리도 다 잘린, 하는 일마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모든 게 캄캄해서 숨을 쉬고 있는데도 죽은 것 같은, 그런 지옥을 국경 너머 외국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지금의 제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무척 궁금해지거든요. ...... 그리고 할아버지, 이 시집 다 읽고 나면 다음번엔 제목에 '천국'이 들어가 있는 시집, 사러 올게요. 꼭 갖다놓으세요.
- 허허, 그러지요. 지옥 다음에 천국이라...... 아주 재밌는 아가씨군.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