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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0m2xsDLq1Q?si=REZ_qI2G29K5PTsk
미사 크리올라는 스페인의 옛 왕조의 말인 카스티야어를 텍스트로 노래한 미사곡은 1963년에서야 겨우 라틴 아메리카 카톨릭 교단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중세 이후 카톨릭 미사에서 사용된 말은 모두 라틴어였고 이태리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와 같은 자국어는 일상의 대화에서만 쓰이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카톨릭 전례를 토착화하려는 움직임을 로마 교황청이 허용했다고 하니까요. '크리올라'는 남미 지역 출신의 스페인계 후예들을 이르는 말이라지요. 1964년 10월 아르헨티나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무려 40여개 국에서 발매되어 삼 백 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는데요. 작곡가 아리엘 라미레즈가 직접 만든 멜로디에 아르헨티나의 민속음악과 히스패닉계 아메리칸의 토속적인 리듬과 형식이 잘 조화된 <미사 크리올라 Misa Criolla>에는 이중창을 포함한 독창 외에 최소한 40명 이상의 목소리가 섞인 합창과 피아노, 오르간을 비롯한 다섯 개의 이중 현을 가진 기타의 일종인 차링고와 통나무로 만든 플롯인 쿠에나 그리고 볼리비아의 팬파이프인 시쿠 등의 다양한 민속악기들까지 어우러졌다고 하니까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 곡 'Kyrie(키리에-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시작으로 'Gloria(글로리아-영광)'와 'credo(크레도-신앙고백)', 'Santus(상투스-거룩하시다)'를 거쳐 마지막 곡 'Agnus dei(아뉴스 데이-신의 어린양)'에 이르는 시간은 멀고도 긴 삶의 지난한 여정을 떠올리게 하지요. http://www.junnodae.org/ |
Mercedes Sosa 메르세데스 소사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민중 가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폭력에 저항한 대표적 가수이다. 1960 년대에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통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라 일컬어지는 Violetta Parra, 누에바 깐씨온의 선구자 Atahualpa Yupanqui 등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저항 음악 "nueva canción”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75년에 그녀는 체포되었고, 79년 아르헨티나를 떠나 1982년 까지 존 바에즈,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등과 반전 공연을 하다 1982년 2월 군정종식과 더불어 3년만에 소사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고국으로 돌아와 이전의 저항 음악에서 돌아섰다는 일부의 혹평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NUEVA CANCION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노래운동은 한국의 1980년대 정세와 노래운동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보다 10여 년 앞서 전개된 이 노래운동에서 역사는 보편적 진리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누에바 깐씨온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동서 양 진영은 철저하게 서로 다른 색깔로 무장한 채 모든 부문에서 영역 싸움을 해나갔다. 1차 대전, 2차 대전 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공고히 해나가던 미국은 소련의 세력확장에 대해 세계평화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따른 명분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미·소는 한치의 양보 없이 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제3세계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분쟁을 낳았다. 거기엔 한반도 남북분단을 비롯해 베트남 전,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반혁명들이 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념대립의 구도 속에 온전한 제3세계는 없었다. 미국은 좌파정부의 수립을 좌시 하지 않았으며 반공을 위해서 라면 군사쿠데타 지원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의 제반관계에서 미국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라틴 국가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정부세력,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리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낳은 예증들이다.
누에바 깐씨온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인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에 의해 1940년대부터 민속자료의 수집과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전통 민속의 회복 운동 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운동의 시발점은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출범 전후로 볼 수 있으며, 보다 근원적인 동력은 쿠바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8년 쿠바는 독립운동가이며 혁명의 순교자인 호세 마르티(José Marti) 가 이끈 독립운동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자본이 개입하고 대부분의 산업기반이 미국의 소유가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정권은 민중의 삶과 이반된 채 부패의 깊은 골을 형성한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160 여명의 게릴라는 1,000명의 수비대가 지키는 몽카다 기지를 급습하지만 탈환에는 실패한다.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953년 7월 26일이었다. 계속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Che Guevarra, Ernesto)와 함께 혁명을 완수한다. 바로 이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정치영역 뿐만 아니라 제반 문화운동에 대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문화혁명으로서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쿠바혁명과 더불어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해방신학을 비롯한 매판자본론, 종속이론 등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다. 유럽의 전통 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하고 재해석한 해방신학은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ez)신부에 의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형성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최대 해결과제인 민중의 빈곤문제에 대해 인식의 자양분을 제공함으로써 혁명의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감을 형성한 누에바 깐씨온은 민족주의 정신의 파고를 타고 지식인과 예술가의 집단적 문화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미국의 팝과 록에 젊은층의 관심이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민족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자각으로 활성화 되었다. 한편 이 새로운 노래운동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지에 머물지 않고 쿠바에서 진행 중이던 새로운 노래운동 Nueva Trova(대표적 가수: Pablo Milanés 와 Silvio Rodríguez) 에 영향을 끼쳤으며 혁명의 무기로서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에 제공되었다. 또한 대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맞물려 미국 내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에 동시다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데 그 공통된 특징이 있다. 앞서 언급한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와 아르헨티나의 Nuevo Cancionero Argentino, 브라질의 Nova Musica Popular Brasileria 등은 새로운 노래운동의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들이다.
민중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끝끝내 승리하리라.
Hasta Siempre, Mercedes Sosa!
"메르세데스 소사여, 영원하라!"
뚜꾸만의 딸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을 상징했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출생했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2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소사가 출생한 '뚜꾸만'(Tucuman)은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포한 곳이기도 했다. 뚜꾸만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전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의 본산으로 음유시인 '아따우알빠 유팡키'(Athaualpa Yupanqui)가 소년시절을 보내며 인디오 전통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확인하고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곳이다. 소사가 출생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소사가 평생을 걸쳐서 걸어가게 될 '자유를 향한 여정'을 예감하게 된다. 소사의 조부는 께추아족 인디오였으며, 조모는 프랑스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누이 '코차'가 푸른 눈을 가진 반면, 소사는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 그대로다. 전통 춤을 가르치는 강사로 생활하던 소사는 1965년 코치킨 포크 페스티발에서 안데스의 전통의상을 입고 안데스의 전통북인 '봄보'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페스티발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필립스사는 그녀와 첫 음반 계약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설은 시작된다.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뮤지션들이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였던 것과 달리 소사는 작곡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사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누에바 깐시온의 최고의 해석자로서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라미레즈와 레온 히에코,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 그리고 브라질의 밀톤 나시멘뚜와 쉬쿠 부아르키 등 소사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들의 노래는 마치 소사 자신의 말과 음악인 것처럼 완벽하게 해석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타 파라의 'Gracias a la vida', 아따우알빠 유팡키의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스탠더드가 되는 노래들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부독재시대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를 낳은 암울했던 아르헨티나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물론,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는 방송될 수 없었다. 소사는 비밀경찰이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대중 앞에서 노래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매순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한다)에서 "모든 것은 변합니다 /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 생각하는 것도 /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고통 당하는 민중들과의 굳은 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번역을 필요치 않는 노래
노랫말의 의미가 중요한 누에바 깐시온 가수인 소사에게 '언어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소사의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목소리에 있다. 소사의 목소리는 그녀가 펼쳐온 음악의 정수였다. 소사의 목소리는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소사의 목소리에 신들리듯 빨려들어 여느 음악 공연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사의 목소리는 놀랍게 변화한다.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들려주기도 하며, 때로는 신념에 찬 우렁찬 외침을 거침없이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을 담기도 하며,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소사의 천부적인 목소리는 그녀의 전인격과 일치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소사의 노래는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노래로 전 세계인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목소리이며 이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전인격뿐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삶과 음악을 일치시킨 위대한 가수에게 바치는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었다.
'희망'을 노래하기 위한 끝없는 여정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군사정권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남편과의 사별 직후에 당한 일이었기에 그녀에게 아르헨티나를 떠난다는 것은 뿌리로부터 찢겨져 나가는 처절한 아픔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음 둘 곳 없는 쓰린 망명 생활 속에서 소사의 아티스트적 면모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시기에 소사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음악들을 실험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로리카'(Folklorica) 가수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잊지 않았다. 드디어, 소사는 1982년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다행스럽게도 소사가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을 맞이했다. 귀국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음악 생활의 초반과 이후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던 아리엘 라미레스와 아르헨티나의 밥 딜런이란 별명을 가진 록 가수 레온 히에코, 찰리 가르시아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극장을 가득 메운 아르헨티나 국민들과 더불어 소사의 귀국과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을 축하하는 감동과 환희의 축제가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과 더불어 소사의 레퍼토리는 사회적, 지역적인 것에서 범 아메리카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스팅, 닐다 헤르난데스, 프란시스 카브렐, 밀톤 나시멘뚜 등 세계적인 대중음악 스타들과의 공연과 앨범 작업도 이루어졌다. 또한 음악 생활 내내, 자국의 작곡자들과 아티스트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소사의 노력도 이보다 한층 활발해져 아르헨티나의 작곡자들의 작품을 노래한 앨범 [Vengo a ofrecer mi corazon(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을 발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97년까지 활발한 앨범 활동과 공연활동을 펼치던 소사는 오랜 동안 감춰져 있던 정신적 상처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망명 기간부터 쌓여왔던 불안과 고통이 소사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무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극심한 탈수현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간 끝에 소사는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체중이 무려 30Kg이나 줄었지만, 반년동안의 고통 끝에 1998년 기념비적인 앨범 [Al Despertar(잠에서 깨어나)]를 발표하여 평론가들과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펌글)
글쓴이 : 베토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