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냉엄한 현실인식과 자성부터 해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출간한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보인 외교안보 정책은 객관적 사실보다 북한 김정은의 말을 더 믿어왔음을 알 수 있어 세간의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실패한 비핵화와 굴욕적 대북 저자세에 대한 자성은커녕 자기 합리화와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도보다리’에서 독대한 김정은이 “ 딸 세대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며 “ 핵을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상응하는 조치가 있다면 비핵화 하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 김정은 과의 남북정상회담 및 두 차례의 미. 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중재자 역할을 자신의 성과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미. 북 정상회담에서 핵 담판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고, 결과적으로 이런 정상회담이 북한의 핵 무력 고도화를 가져오는데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되었다.
김정은은 2018년 3월 문 전 대통령이 보낸 대북 특사단에게 ‘비핵화 의지’를 표했고, 당시 정부는 충분한 입증이나 여과 없이 이를 미국에 그대로 전달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미. 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당시 청와대는 ‘한국이 빠진 상태에서 미국과 북한끼리라도 종전선언을 해도 좋겠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고 한다. 미. 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무리수를 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2019년 ‘하노이 노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의 협상팀은 북한의 제안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며 핵 담판 실패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트럼프 국무부 대변인을 지낸 모건 오테이거스는 최근 미국 우선주의 연구소 정책 자료집에서 “문 전 대통령이 북한에 더 많은 양보를 하려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문 전 대통령을 배제 했다”고 증언했다.
문 전 대통령은 싱가포르 미. 북 회담 협상 동안 북한의 핵 장거리 미사일 실험 유예를 위한 조치로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명문화 했어야 했다”는 주장도 폈다. 이는 사실상 북한. 중국. 러시아가 북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연합훈련을 동시에 중단하자고 요구한 쌍중단(雙中斷)을 수용하는 것이다. 합법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의 한미연합훈련을 북한의 불법적 도발과 같은 금지선에 비유하며 등가(等價)로 맞바꿀 수 있다는 인식을 갖다니 너무나 어이가 없다.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서 “ 핵무기연구소와 위성발사 구역의 완전한 중단 및 영변 핵물질 생산시설의 불가역적 폐쇄”를 제안한데 대해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냉각탑과 풍계리 핵실험장의 폭파쇼까지 벌였던 북한이다. 북한은 최근에 이곳 시설들의 봉인 해제와 갱도 복구 등 핵 활동을 재개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김정은은 얼마 전에 “유사시 핵 무력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북한은 미 본토를 공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전술핵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공개한 날에도 북한은 탄도미사일 여러 발을 동해안 상으로 발사했다. 그런데도 무슨 근거로 김정은의 핵 포기 의사를 진심이라고 확신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김정은 자신도 믿지 않았을 비핵화 의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믿으라고 강변하다가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문 전 대통령이다. 더욱 어이없기는 ‘유엔 안보리 제재가 남북관계 개선 국면마다 애로로 작용했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다니 말이 되는가.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한마디로 김정은의 말을 더 믿는다는 식이다. 한국 답방, 직통 전화 가동, 이메일 소통 등 김정은의 약속은 어느 것 하나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북측 사정을 이해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김정은이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고통 겪는 주민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거나 친서에서 “ 폭파한 남북연락사무소 재건 문제를 협의해 보자고 제안했다”고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문 전 대통령은 이를 전적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지력이 모자란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인지 밝혀보고 싶다. 결국은 외교적 수사와 진짜 속내를 구별할 줄을 모른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제라도 자화자찬만 늘어놓지 말고 냉엄한 현실인식과 자성부터해주길 바란다.
장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