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기가천재
19세기말 격동의 구한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당시 조선은 개화의 바람이 급격하게 불어닥치기 시작합니다.
특히, 1882년 조선은 서양국가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통교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전권대사를 임명하고 공사관을 조선에 설치하자
본래 조선도 외교관례상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공사를 파견해야 했지만,
당시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상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미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보빙사 (報聘使)
고종의 명으로 1883년 7월 15일 조선이 최초로 서양 국가인 미국으로 파견한 외교사절단 입니다.
구성원: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청국 통역가)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일본 통역가),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전권대사: 민영익
0. 빈약한 보빙사 국내기록
본래 보빙사의 여행기록은 당대 조선 내에서도 공식적으로 남아있었으나,
아시다시피 홍영식, 서광범 등이 갑신정변 등의 반란에 가담하였기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짐으로써
국내기록은 아쉽지만 남아있는게 거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미국 내에서 보빙사를 수행하고 따라다닌 전담 기자들이나 각 종 언론을 통한 기록이 잘 남아있어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볼 수 있다고 합니다.
1. 미국에 도착하다
보빙사 일행은 일본을 거쳐 퍼시벌 로웰과 미야오카의 인솔 하에 미국의 국빈급 대접을 받으며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합니다.
보빙사 일행은 바로 대통령을 접견하기 위해 워싱턴 D.C 백악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보빙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는데
바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정작 다른 지역에 가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보빙사는 워싱턴에서 다시 대통령이 있는 뉴욕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2. 최초로 조선인이 미국의 대통령을 접견하다.
1883년 9월 18일 접견 장소로 약속된 뉴욕의 벤돔호텔에 도착한 후,
대통령을 접견하기 전에 서양 국가와 외교 경험이 거의 없던 보빙사 일행은
미 대통령에게 어떤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은 결국 조선의 예법대로 왕에게 하듯 큰절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미 대통령과 주위 참모, 기자들은 당황했으나,
서광범이 절을 하는 방식이 조선에서 왕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법이라는 것을 잘 설명하자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도 합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보빙사의 인사방식을 조롱하거나 신기하다는 식으로 평가한 경우는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전권대사 민영익은 아서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한을 공식 발표합니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아미리가(아메리카) 합중국
대백리새천덕
(대통령 president의 음차)께 아뢰옵니다.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과 대아미리가 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민영익의 말에 아서 대통령도 답사를 남깁니다.
"우리 미국은 조선 사절단 여러분들을 환영하며,
우리 미국은 조선의 상황과 역사에 대해 절대 무지하지 않습니다.
조선은 충분히 미국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국가이며,
조선도 우리 미국의 발전된 문화와 기술, 문물을 받아들여 혜택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미국은 강대한 힘을 지녔지만 절대 타국을 침략하거나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조선과 우호관계를 통한 혜택을 주고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미국은 조선과 첫번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되어 매우 기쁩니다.
조선 사절단은 조선의 국왕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주시고 조선의 국왕 또한 우리 대사관에 방문하시어
우리의 우호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사절단 여러분들도 미국에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3. 보빙사, 미국 순방과 세계일주를 하다.
아서 대통령을 접견한 이후 보빙사 일행은 본격적인 미국 순방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종 박람회, 박물관, 차관협조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고
1883년 10월 12일 미국 순방 마지막날 다시 백악관에서 보빙사 일행은 아서 대통령을 접견합니다.
아서 대통령은 보빙사에게 군함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더불어 보빙사 일행에게 세계일주를 권유합니다.
여기서 보빙사는 각자의 목표에 따라 다른 길을 택합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을 결정하면서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탄생하게 됩니다.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유럽으로 건너가 세계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홍영식을 포함한 나머지 일행은 바로 조선으로 귀국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먼저 세계여행을 한 일행의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웬만한 사람들도 하기 힘든 세계일주를
가장 폐쇄적이이고 보수적이었던 조선 유생들이 겪었으니 얼마나 격세지감을 느꼈을까요?
특히 대영제국박물관에서는 청 유물이 약탈당해 타국에 버젓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도 했고,
피라미드 방문시에는 당시 유행하던 피라미드 내부탐사나 등반 등의 체험은 극구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당시 그들을 수행하던 미국의 포크의 기록에 따르면
일행들이 배멀미는 했어도 그렇게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타 문화에 대한 적응과 이해가 빨랐다고 합니다.
4. 보빙사 그 후의 일
약 6개월 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이들은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요?
민영익은 귀국 직후 미국 공사관을 만나
"나는 광명의 세계를 보고 다시 내가 태어난 암흑의 세계로 돌아왔다"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순방에다 세계일주까지 한 민영익이 차후 수구, 보수계열로 돌아서고
세계일주를 마다하고 조선에 귀국한 홍영식이
오히려 개화파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보면 상당히 아이러니 합니다.
민영익은 섣불리 개방하다간 조선은 살아남을 수 없을거라 느꼈을거고
홍영식은 죽음을 늦출지언정 멈출순없으니 도박을 걸어보고 싶었을 테고
그 후의 과정들을 보면 두 방향성 모두 일리는 있었겠지요.
미국의 선진 행정체계를 높이평가한 홍영식은 우정총국을 세워 조선에 우편시스템을 도입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효수당하고
서광범 또한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때 귀국하여 조선의 개혁에 동참하게 됩니다.
최경석은 농업 근대화를 위해 황실로부터 농장을 하사받아
젖소를 기르며 연구를 시작하지만
1886년 병사하여 조선의 농업근대화 계획은 흐지부지됩니다.
변수는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미국으로 가 1887년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하여 무사히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미국 대학 최초의 조선인 졸업생이 됩니다.
실제 재학중에도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으나,
1891년 열차에 치여 사망합니다.
유길준은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1년 정도 유럽을 탐방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갑신정변이 터지고
1885년말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그 유명한 서유견문을 집필합니다.
첫댓글 마지막은 정말 안타깝다...ㅠㅠ 그래도내용 자세히 정리해주니 엄청 흥미롭고 재밌다 ㅎㅎ
와.. 너무 재밌게 읽었어 여샤
한능검 공부하고 이거 보니까 ㅇ왜이렇게 재밌고 와닿지??
와.. 너무너무 재밌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