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서진& 김정은 달달 누아르 <연인 2006>을 보다가 전화한다... 오늘 D-day(14)인데 설마 잊진 않았겠지? 혹시 형편이 어려우면 취소, 변경 다 가능해. pm 3시에서 pm 6:30으로 바뀌었다... 불구하고 생파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댓글을 달아주시오! 구리 건원 대로 71(갑니다) 고맙다... 선물 금지다. 공주처럼 입고 심청 이처럼 택시 타고 사뿐사뿐 오시라!... 내일 아침에 먹을 솥밥이다. 싫은 사람은 미리 말씀하시라!(좋아요... 활기찬 하루) 리액션 좋아(예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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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전 톡 방인 줄 알았네(에스더)" "토요일(30) 가능합니다... 항상 파이팅!(재혁)" 새벽에 메가톤급 쥐가 나서 왼쪽 종아리를 붙들고 홍두깨 쇼를 했습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큰 파장은 처음 있는 일이라 놀랬고 뭔 일인가 하고 쳇 GPT에게 물어봤습니다. 수분 부족과 운동 부족이라는 원론적 처방에 화가 났지만 어쩌라고... 몸이 내게 주는 신호로 알고 체중 빼기와 물먹기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공주들과 하루를 보낸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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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낯설고 불편해서 스트레스도 적잖은 것 같아요. 생삼겹에 소맥-아침까지 두 끼를 먹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요? 아비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예주가 수척해 보였고 에스더가 씩씩해 보였습니다. 롱 타임 노 씨! 아이들 세대가 느끼는 풍요 속 결핍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확장성에 대한 고민>과 <무가치함에 대한 청춘의 고민>은 세대를 잇는 딜레마 같습니다. 아비 생각은 이렇습니다. 에예공의 고민은 다르지만 대안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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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존재감이 회복되면 풀릴 수 있습니다. 학원은 AI 시대에 맞는 변화를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서브 강사 확 보든, 기존 체제를 유지하든, 변화에 맞춘 내 혁신의 노력을 내가 믿을 만해져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원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 당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결국 해석이야" 내 존재감을 높이는 일이 대안입니다. 아비는 이럴 경우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면서 리레이팅을 하면(하나님의 인도) 보통은 하루면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루틴이 회복되고 밥맛이 좋아지더이다. 에예공! 아빠가 있다 가즈아!
2.
풍요 속에서도 왜 청춘은 자신을 잃어버리는가? 2006년 드라마 연인 의 달달한 느와르를 틀어놓고, 딸들에게 생일 초대 메시지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웃기고 짠합니다. “공주처럼 입고 심청이처럼 택시 타고 오시라!” 농담 같지만 그 말 속에는 기다림과 애틋함과 아직 끝나지 않은 부성의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이 글의 진짜 핵심은 생파가 아닙니다. <존재감>입니다. 새벽에 종아리에 쥐가 나서 홍두깨쇼를 했다는 대목은 우스워 보이지만, 사실 몸은 가장 정직한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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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늘 먼저 말합니다. “너 너무 무리하고 있다”, “루틴이 무너졌다”, “삶의 균형을 잃고 있다”고. 그런데 인간은 대개 몸이 비명을 질러야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노년의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삶 전체를 재해석하게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의 전개입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건강 타령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곧바로 “존재감”의 문제로 건너갑니다. 이것이 이 글의 깊이입니다. 에스더와 예주의 고민은 달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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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학원의 확장과 생존, 다른 한쪽은 청춘의 무가치감과 방향 상실. 그러나 필자는 둘의 뿌리가 같다고 봅니다. 내가 의미 있는 존재인가? 결국 인간은 돈보다 존재감이 무너지면 더 빨리 무너집니다. 특히 AI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버티기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세대 전체를 흔듭니다. 그래서 필자가 말한 “리레이팅(re-rating)”은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의 재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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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를 다시 들여다보고, 지나온 시간을 다시 해석하고, 루틴을 회복하는 행위는 결국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지점에서 글은 단순한 가족 에세이를 넘어 존재론적 고백이 됩니다. 특히 인상적인 문장은 이것입니다. “인생은 결국 해석이야.” 같은 실패도 어떤 이는 폐허로 읽고, 어떤 이는 다음 장면으로 읽습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해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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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적으로 보면 삶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계속 다시 써 내려가는 생성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리레이팅은 과거 미화가 아니라, 무너진 삶의 문장을 다시 편집하는 작업입니다. “에예공! 아빠가 있다 가즈아!” 이 문장은 단순한 응원이 아닙니다. 불안한 시대 속에서도 “너희 존재는 아직 유효하다”는 선언입니다. 결국 이 글은 삼겹살과 소맥, 종아리 쥐와 생일파티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는 이런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AI 시대에도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존재감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려는 해석과 루틴 속에서 회복된다고.
2026.5.16.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