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임스 애그리(James Aggrey,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는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우화를 소개하였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새끼를 사로잡아 자기 집 닭장에 넣어 키웠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성장하면서도 날개를 펴서 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조류 연구가가 들렀는데 날지 않는 독수리를 보고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독수리라면 날아오를 것이다."라고 말하며 실험에 나섰다. 이 사람은 독수리를 그 집 지붕에 올려다 놓았다. 그러나 독수리는 여전히 날지 않고 비틀거리며 걸어서 지붕에서 내려오려는 것이다. 조류 연구가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 독수리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독수리가 걸어서 내려오기 어려운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독수리는 거기에 앉아 자기의 눈 아래 보이는 넓은 천지를 여러 번 둘러보더니 그 큰 날개를 활짝 펴고 날기 시작했으며 먼 지평선을 향하여 사라졌다고 한다. 독수리의 날갯짓은 높은 바위 위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독수리가 될 수 있는 위치는 닭장이 아니라 산꼭대기 높은 바위 끝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험하고도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으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바위는 실상 새 출발의 장소이며 행복을 탄생시키는 진통의 장소인 것이다. 당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자로서 신앙과 삶을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아가고 계십니까? 빌 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 5월도 종반에 접어 들었습니다. 날씨가 이제 무더워져 갑니다. 아직 활동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주의 일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기도하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이루어지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새 나의 발견 본문 : 빌 3:7-9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가끔 절망스러운 일에 빠진다. 신자라고 고통이 반드시 비켜가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들이 고통 속에 빠져있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면 간단하게 말해서 "기도하고 무조건 감사하고 그리고 기뻐하라"하고 말해 버릴 수는 없다. 각자가 빠져 있는 고통은 너무도 심각해서 그 아픔이 내게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다. 총각 전도사 시절에는 곧장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병을 차라리 내게 달라고 울부짖기도 하였다. 연세 많은 권사님이 하루는 나를 불러서 절대로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남의 고통은 목사로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는 자기 아버지가 심방을 다니다가 길에서 우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바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신자들은 남들보다 고통을 덜 고통스럽게 경험하면서 꿋꿋이 견디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특별히 목회자들 가운데서 그러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또한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종종 만나게 된다. 어려울 것 같아서 심방을 하면 오히려 목사를 위로하는 것이다. 이 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강하고 또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가 무대에서 어려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장 가느다란 줄이 끊어져 버렸다. 이 줄이 없으면 연주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으나 즉흥적으로 계속 연주를 해 나갔다. 그러다가 지휘자가 기겁을 하는 가운데 또 한 줄이 끊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셋째 줄 마져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의 바이올린에는 세 개의 끊어진 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거장은 남아있는 한 줄을 가지고 끝까지 연주해 냈다.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환호했다. 그들은 외쳤다. "파가니니, 한 개의 줄!" 그는 다시 그 한 줄 바이올린을 턱 밑에 고이고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한 개의 줄"은 곧 "불굴의 용기"요 "불굴의 의지"였던 것이다. 연주는 줄이 아니라 열정이 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 시에 유태인 빅톨 프랭클 박사는 여러 해 동안 나치 수용소에서 수치와 학대를 당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석방되었다. 그와 같이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가 거기서 죽었고 그저 한 줌의 사람들만이 전쟁 후에 구출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의 획기적인 방법을 내놓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치료했던 방법이었다. 시련의 초반에 그는 게쉬타포에게 끌려갔다. 별안간 어느 날 모든 것 집과 가족, 모든 소유물, 권리, 자유, 손목시계와 결혼 반지까지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박박 밀었고 벌거벗겨진 그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았고 너무도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유태인들은 급속히 죽어갔다. 또한 이것이 당국자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미 주위의 유태인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울고 웃고 미치고... 그도 역시 잔악행위를 즐기는 자들 앞에 세워진 인간 이하의 무력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소망도 없었다. 그리고 모욕과 배고픔과 불결함은 끝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저주였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비참한 동물로 만들어져 갔다. 죽음보다도 못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살아남게 만들었던가? 그는 문득 아직 자기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 비록 목숨을 빼앗는다 해도 그것만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든,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던, 삶의 태도를 선택하는 권한만은 그에게 있었다. 분노에 몸을 던져 버릴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갈 것인가? 참고 아직도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 갈 것인가? 자포자기 속에 그리고 자기 연민 속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소연하고 슬퍼하고 동정받고 이성이 마비되어 미쳐 갈 것인가? 이 상황은 마치 "빅톨 프랭클, 한 개의 줄!" 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한 개의 줄을 가지고도 최상의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을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무엇 이길래 그토록 강하게 우리를 붙들고 힘을 제공하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이 새 생명을 주고 힘을 주고 미래를 향한 소망을 주는 것이었다. 파가니니는 음악을 향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빅톨 프랭클은 자신의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그들의 태도가 나온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이것이 없어야 하겠는가! 우리 속에도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도 파가니니의 음악 같고 프랭클의 의지 같은 아니 그 이상인 무엇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찾아내고 의지한다면 우리의 삶은 놀라운 것으로 변할 것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슬픈 일을 경험한다. 병에 들기도 하고 사업의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너무 기분 나쁜 일을 당하기도 한다. 큰 손해를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픔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는 비통해 한다. 홀로 이 넓은 세상에서 아픔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것으로 태도를 정하고 행동한다. 그것은 바로 좌절이요 자포자기요 추태이다.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삶의 태도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교만하게도 하고 그것이 비참한 느낌을 갖게도 만든다. 그러나 지금 말하려는 것은 파가니니나 프랭클 같은 삶이다. 한 가닥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을 때 나오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위대함인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고 그 대신 아픔이 오는 수가 있다. 또는 기약 없이 오래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순경 속에서 아름다운 것보다 인간은 역경 속에서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각자는 자기 속에 있는 것으로 아픔을 딛고 삶의 태도를 만들어 간다. 작가는 그저 글을 쓰고 선생은 그져 가르친다. 각자 자기의 일에 몰두하여 작품을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바울은 분명히 지적한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의 임재가 그의 말씀이 그리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태도를 만들어낸다.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자기가 세상에서 유익하다고 보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무엇을 해 주셨는지 아는 그 지식으로 자신을 보고 거기서 부터 삶의 태도를 결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온 그의 태도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가 주신 의를 자기의 의로 삼는다. 그는 그리스도가 주신 능력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가 주신 비젼을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았는가!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태도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더 나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다. 슬퍼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문득 문득 절망할 시간도 없다. 남을 미워하고 저주할 여유는 더욱 더 없다. 나는 한 일들을 뒤에 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달려 갈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빈 한데도 처해서 비굴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부 한데서도 오로지 겸손했다. 만유 위에 뛰어난 그의 위대한 삶, 나는 터키의 광활한 땅에서 그가 걸었던 춥고 힘들었던 길들을 따라 걸어 그가 외친 장소들을 보았다. 그곳에는 옛날 그가 세운 교회당의 기둥들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이미 사라졌어도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외치는 음성을 듣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과 가르침은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서 영원히 영원히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지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말했다. 내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일을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이토록 무서운 역경이 그의 숭엄한 태도를 빼앗아 갈 수 있었는가? 그가 피곤하고 배고프고 억울하다고 비굴 댈 수 있었는가? 그럴 수 없었으니 그는 이러한 역경을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는 삶의 태도를 확실하게 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강하다고 하면 강하게, 그리스도가 의롭다고 하면 의롭게, 그리스도가 참고 기다리며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라면 그렇게, 그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자신을 정의하면서 살아갔다. 비록 모든 소망은 끊어지고 마지막 목숨까지 위태로워졌을지라도 마지막 한 줄의 연주를 계속했다. 자 이제 우리에게도 같은 삶이 펼쳐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이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도 비참한 느낌까지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울고 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아니면 아픈 일을 만나도 스스로를 위해서 아름다운 태도를 만들고 선배들처럼 일어날 것인가? 파가니니처럼 연주하고 빅터 프랭클처럼 꿋꿋이 살고 바울처럼 숭엄하게 말이다. 얼마 전에 어떤 고통에 빠진 분과 함께 시편 23편을 읽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영감의 말씀을 읽었지만 상처받은 두꺼운 가슴에는 전혀 이 말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나와는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말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와 닿는다고 여기십시오. 그렇다고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만들어 보십시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기로 결정을 했다면 그렇게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말씀을 하나 하나 음미하며 그 내용이 내 영혼과 내 마음과 내 전체를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첫째로 할 일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 안에 그의 임재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그 말씀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이 기본 원칙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이란 원칙이 신자들에게는 있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설교 연습을 하는데 매우 산만하고 호소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좀 더 열정을 가지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해도 힘이 나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없어요." 다시 그에게 말했다.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할 때는 정말로 열정을 가지고 말하시오. 속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끄집어내어 말해 보시오." 그는 여전히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제 속에 없는 열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란 말입니까?" 그는 너무도 부정적인 삶을 살아왔고 그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오. 그 말씀은 모두 믿는 자에게 주는 것이요. 그렇다면 느낌이 오지 않아도 그 내용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 태도를 취해 보시오." 그는 마지못해 수긍하였다. 다음 연습할 때 다시 그 원칙을 상기시켰다. "당신의 기분이 무엇이건, 그것으로 자신을 보면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보는 눈으로 나도 내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태도를 취하시오." 그는 정말로 몰두하였다. 결과 청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자신도 대단히 고무되어 일어났다. 그는 자기가 모든 설교자 중에 가장 열정적인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쉬지 않고 고난을 맛본다. 기대에 못 미치는 불쾌한 상황을 맛보게 될 때 아픔을 경험하게 될 때 거기에 대처하는 태도가 우리의 위대함을 결정한다. 수동적으로 참고 있을 것인가?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태도를 취할 것인가? 마지막 목숨만 남아 숨 쉬어도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져야한다. |
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선교와 설교와 목회와 치유와 자비와 화평과 사랑과 총명과 지혜와 지식과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