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 름 밤 의 꿈 - 0 5 -
민기 혼자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갔다. 지영은 자신도 가겠다며 떼를 쓰려고 했지만
점심 먹고 천천히 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민기 덕분에 아직 집에 남아 있었다.
1분에 한 번씩, 민기와 수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지영을 보던 지영의 아버지는
지영의 머리를 토닥였다.
" 바람이 여기까지 분다. "
" 아빠, 이건 바람이 아니라. 아휴, 됐어. 내가 무슨 말을 해. "
" 우수? 너가 우수에 차있다고? 왜, 민기가 너 맘도 몰라주냐? "
" 맘은 무슨. 나 이제 병원 가볼게요! "
귀머거리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지영은
새빨개진 볼을 감추고 병원으로 마구 뛰어갔다.
도착하자마자 할머니의 병실로 들어갔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은 민기와 수희가 아닌
도현과 검은 양복을 입은 무리들이었다.
깜짝 놀라 지영이 움츠러들자 도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지영을 향해 손짓했다.
" 아, 손님들이야. 많이 놀랐지? "
" 손님...이요? "
" 응, 내 손님이자 할머니 손님들. 이제 마무리는 다 된거죠? "
" 네, 이제 다 처리 됐습니다. "
" 수고하셨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
도현과 손님은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등을 졌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무겁고 냉정한 분위기 탓에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 들었다.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지영을 발견한 도현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 여기 와서 앉지 그래. "
" 괘, 괜찮... "
" 지영아. "
도현의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지영이 움찔 몸을 떨었다. 분명히 부르는 목소리 같았는데
그 느낌은 불호령을 내리는 것만 같아 지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 그동안 고생했어. 앞으로 계속 이 시골에서 살거니? "
" 그게 무슨... "
" 그동안 할머니랑 아버지 모시면서 살아왔다면서.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낼생각이니? "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곧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지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영의 대답을 기다리던 도현이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냈다.
" 서울로 가자. "
" ....네? "
" 아직도, 노래하고 있는 거지? "
귀머거리 아버지 앞에서만 불러왔던 노래를, 민기를 다시 볼 날을 기다리며
몰래 숨어서 키워왔던 꿈을 도현에게 들켜버리자 지영은 깜짝 놀라 몸을 바르르 떨었고,
도현은 지영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내가 알기로는 넌 재능이 있어. 아저씨는 내가 좋은 곳에 모실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울로 가자. "
" .....하지만... "
" 서울로 가면, 민기도 계속 볼 수 있을거야. "
민기에 대한 지영의 감정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지영은 도현이 건넨 제안보다
자신의 꿈, 감정 모두를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서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긴장감에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생각해보겠다고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 그래. 잘 생각해 봐. 알았지? "
도현은 어쩔 줄 몰라하는 지영을 뒤로 하고 병실을 잠시 빠져나왔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몰려드는 피로함에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눈을 감으니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따라가자 울고 있는 수희와 달래고 있는 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 너 이러다 쓰러지겠다. "
" 흐윽....흡.... "
"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일단 좀 쉬자. "
민기가 수희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희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머리는 산발에 힘없이 축 늘어진 수희의 모습이었지만
도현은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 아, 형. "
"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
도현이 살짝 다가가는 듯 하자 수희가 몸을 움찔 떨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수희는 아직 민기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자신을 겁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수희를 알아챈 도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 일단 좀 눕혀야겠어. 빈 병실이 있는지 좀 찾아주라, 형. "
" 알았어. "
도현이 빈 병실을 찾기 위해 자리를 피하자 수희는 정신을 놓듯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수희의 몸이 자신에게로 기울자 민기는 당황해 주변의 의료진을 불렀다.
도현이 빈 병실을 찾았다고 알리기 전에 의료진들은 수희를 침대 위에 눕히고,
링겔을 꽂아 상황을 수습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시래? "
" 잘 모르겠어. 말없이 몇 시간을 울기만 하다가 방금 잠들었어. "
" 그동안 너무 무리하셨나보다. 선생님 대타는 내가 알아서 구할테니까 넌 강제로라도
선생님 쉬게 해드려. 알았지? "
" .......응. "
핼쑥해진 수희의 얼굴을 보니 민기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수희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수희의 얼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 * *
늘 조용했던 기차역이 꽤 시끄러웠다. 범상치 않은 머리색을 가진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병원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들고 이리저리 길을 헤매고 있었다.
물어물어 병원을 찾아온 남자들은 병실을 찾기 위해 로비로 들어가기도 전에
세수를 하고 나온 민기를 발견하곤 반갑게 달려가 안겼다.
" 혀엉!!!! "
" 이민기!! 왜 연락도 안돼!! "
" 형 납치 당한 줄 알았어요! "
" 대표님이 화 엄청 많이 났어!! 너 큰 일 났다. "
제각기 한 마디씩은 하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민기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로바에 있는 간호사가 정숙을 요구하자 그제서야 민기와 남자들은
제대로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 야, 니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 "
" 어쩐 일이긴. 이게 다 형이 연락이 안 되서 벌어진 일이야. "
" 대표님이 우리 보고 형 잡아오라고 명령 내렸어. "
" 뭐? 아...아직 안 되는데. "
" 뭘 안돼. 그냥 할머니 뵈러 내려 온 거라며. 이쯤 되면 그만 올라가야지. "
눈치없게 민기를 재촉하던 남자는 일행에게 꼬집히고, 발을 밟히고, 뒤통수를
맞고 나서야 민기의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미안함을 표했다.
민기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며 남자들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섰다.
" 할머니, 손님 왔어! "
" 지숙이냐? "
" 아니, 여기는 나랑 같이 서울에서 음악하는 친구들이야. "
" 안녕하세요, 할머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한 명씩 돌아가며 할머니께 악수를 청하거나 포옹을 하고는 빈 병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시끌 시끌한 분위기에 민기의 할머니의 기분은 굉장히 좋아보였다.
" 형, 잠깐 얘기 좀. "
" 어, 어. 나랑 민기는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넌 할머니 잘 보살펴드리고 있어. 알았지? "
" 네-. 형, 올 때 메로나요! "
" 메로나 같은 소리 하네. "
가장 맏형인 붉은 갈색 머리가 민기를 쫓아 병실을 따라나서 문을
닫자마자 민기는 두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 형, 제발. 조금만 더 끌어주라, 응? "
" 야, 임마. 니가 연락만 잘 됐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 "
" 잘모 한 거 아니까 비는 거야. 형이 대신 잘 말 해주라. 응? "
" 아오, 진짜.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수명 줄이기에 신이 났나. "
" 형, 내가 진짜 존경하는 거 알지? "
" 이럴 때만? "
한시름 놓은 민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잠시 멤버들에게
맡겨놓은 채 민기는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민기야. 할머니는 괜찮으셔? ]
" 할머니보다 네 몸 먼저 챙겨라. 밥은 먹었어? "
[ 응. 방금 먹었어. ]
" 그래,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어서 얼른 와야지. "
민기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울다 지쳐 쓰러졌는지 궁금했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날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 저....지금 병원에 누구 있어? ]
" 아, 오늘 멤버들이 잠깐 놀러와서 멤버들하고 있어. 너한테 소개시켜줘야 되는데. "
[ 나중에 내가 병원으로 갈게.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
" 도현이 형은 일 때문에 잠깐 자리 비웠고, 지숙이는 영 보이질 않네. 무슨 일이 있으려나. "
민기는 그제야 지영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원을 오던 아이였는데 못 본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다.
수희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병원 로비를 왔다갔다 하던 민기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챙겼다. 멤버들이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민기는 또 다시 할머니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는
병실을 뛰쳐나갔다.
"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 아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
지영의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작은 듯 했지만
주변이 워낙 고요했기 때문에 또렷이 들리기도 했다.
민기는 숨을 죽이고 서서히 다가가자 낡은 기타를 매만지며 흥얼거리는 지영이 보였다.
" 그 좋은 손길에 까무룩 잠이 들어도 잠시만 그대로 두어요.
깨우지 말아요 아주 깊은 잠을 잘 거에요. 깊은 잠을. "
노래와 연주는 이미 끝이 났지만 민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담담했던 지영의 목소리와는 달리 말 한 마디만 건네도 금방 울어버릴 것 같은
지영의 표정 때문에 민기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지영 또한 그 여운을 즐기고 있는지 기타를 잡고 있는 손과
떨리는 입술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멈춰있다.
눈을 느리고 천천히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던 지영은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민기는 어느새 걸어와 지영의 앞에 서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초점이 없던 지영의 눈과 민기의 눈이 마주쳤다.
" .........지숙아. "
" ........... "
" 같이 가자. "
" .....나는.... "
" 네가 보고 싶었어. "
단 오일이었다.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