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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37,3-4.12-13ㄷ.17ㄹ-28
복 음 : 마태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꿈꾸는 우리들
-절망은 없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꿈꾸는 자가 승리합니다. 꿈꾸는 자가 아름답습니다. 꿈꾸는 자가 매력적입니다.
하느님 꿈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정말 하느님 꿈꾸는 자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활용하여 선善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 꿈을 이루십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역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깨달아 알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꿈꾸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 만 30년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침 일출日出 장면입니다.
날마다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은 바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망애信望愛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날마다/새로이/찬란히
떠오르는 황홀한 태양太陽/하느님의 고백은
이런 것
“나는 너희를 믿는다/나는 너희를 희망한다/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신망애信望愛의 고백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크고 /환한
둥근 모습으로 살자!-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느님을 닮아 크고 환한 둥근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여 저도 얼마전부터 “둥글게 살자!”로 좌우명을 정했습니다.
여기 불암산 배경의 수도원에 살아오면서 막막하고 답답할 때는 있었어도
절망하거나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막막하거나 답답할 때는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면서 신망애의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있어/산이 좋고
산이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지금도 막막하거나 답답할 때 바라보는 하늘과 산이요 되뇌어 보는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과 산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날로 깊어져 하늘이신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 모두 꿈꾸는 사람이 됩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요셉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하는 하느님의 원대한 꿈을!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느님을 꿈꾸는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요셉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 상황에서도 르우벤, 유다 형의 도움에 힘입어
구사일생 살아나 은전 스무 닢에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넘겨지는 요셉입니다.
흡사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겨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모든 시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든 사건이 하느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신神의 한 수手’ 같은 당신 사람들을 통해 당신 꿈을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요셉의 삶을 통해 점점 분명해 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밭 소작인들을 그 백성들이요 포도밭 주인이 파견하는 종들은
무수한 예언자들이고 마지막 보낸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들 소작인들의 적대적 행위는 마치 오늘 제1독서 요셉을 궁지에 몰아넣은 요셉의 형제들을 닮았습니다.
소작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살해함으로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켜 당신의 꿈을 관철시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꿈쟁이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은 ‘하느님의 나라’였고 그 꿈은 당신 사람들을 통해,
또 교회를 통해 부단히 실현되고 있습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눈에 놀랍기만 하네.”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체험한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시편을 통한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하느님 꿈의 사람, 요셉이요 예수님이십니다.
요셉과 예수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꿈은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일 기억하여라.”
오늘 화답송 후렴처럼, 요셉을 통해, 또 예수님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주님이 이루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자주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매일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강사가 강의를 듣는 청중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매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야
내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시죠? 솔직히 없지 않습니까?
내 자신이 매를 맞거나 또는 비난이나 욕을 듣게 되면
아무리 내 자신이 틀렸다고 해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한 사람을 향해서 적의를 표현하게 되지요.
이 강사는 이렇게 매를 맞거나 비난이나 욕을 들어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고
행동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동의를 했지요.
그러자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군가는 좀 맞고 비난을 들어야 그 행동을 고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부모의 행동들이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의 따끔한 말과 행동이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곤 합니다.
스스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은 과연 바뀌어 질까요?
이렇게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남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모든 폭력성은 무조건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지극히 관대한 우리들이기에
이러한 비합리적인 모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못된 소작인들을 보면 우리들은
‘어떻게 저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연히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폭력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포도밭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모든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합리화시키고 있었을까요?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내 이웃과 주님께 드리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언제나 다가오십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처럼 모든 것들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주셨고,
변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이 세상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요?
죄에 대해 합리화시키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져만 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으로 다가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지순례를 가면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을 보면서 묵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성지의 건물 한 쪽에 작은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 글을 읽으면서 묵상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있던
“우리는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지만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있는 베드로 수위권 성당에는 그리스도의 식탁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작년에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도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올해는 수위권 성당의 벽에 이런 글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표징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물을 던질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지금도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베짜따 연못과 안나 성당이 있습니다.
안나 성당에서 찬미의 성가를 부르는 것도 좋았습니다.
베짜따 연못의 모습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았습니다.
베짜따 연못의 담벼락에도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이나 아팠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십시오.”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검게 휘감아 도는 연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이며, 주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아름다운 글을 읽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결석을 많이 하는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였던 선생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난 아침에 혼자 밥을 먹는데 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학생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자신을 위해 기다려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한 선생님이 제안을 하였고, 한 학생이 응답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백여 명의 학생이 아침을 먹으러 학교에 온다고 합니다.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애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사랑의 노래는 그 애절한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사랑의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을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고 계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
구원의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일 것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에 주시는 회개의 때를 잘 붙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한상우 바오로 신부
봄의 새순이 움트듯
새순과 새순 사이에는
생명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하느님의 땅에서
버젓이 살인이 자행됩니다.
우리의 욕심은
하느님까지도 겨냥하며
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매순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욕심입니다.
사순시기는
비뚤어지고
병든 우리 마음을
바로잡는 시간입니다.
존중 없는 관계는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참다운 기쁨입니다.
가장 먼저 부패되어가는
우리의 마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욕망의 꺼풀을
벗겨내는 길은
생명의 질서가 되시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생명의 힘을 얻는지를
다시 깨닫는
생명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자비를 얻는 법은 자비뿐
전삼용 요셉 신부
어느 부부의 사연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결혼하려고 할 때 기쁨에 설레어 혼수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신혼살림을 할 아파트를 샀고 신부는 혼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얼마 앞두고 신부 측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고
신부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지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갚느라 혼수도 제대로 마련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은 전에 보여주었던 아파트는 자기 것이 아니라며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혼수도 제대로 해 오지 않은 처지라 신부는 다 이해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 전에 말했던 봉급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아내의 아버지가 지병을 털고 일어나 다시 사업을 재개하여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괜찮아보이던 남편의 모든 것이 속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행동하는 모든 것도 다 자기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씩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에게 남편이 결혼 전에 말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었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는 수 없다며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네 신랑은 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우리 사정과 맞추기 위해 집을 옮겼고
그 남은 돈으로는 아버지 병원비에 보탰었던 거야. 물론 매달 얼마씩 계속 병원비를 대줬단다.”
아내는 남편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감사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려면 마중물이라는 것을 먼저 부어야합니다.
물을 올리려면 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의 사랑이 솟아나려면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흙을 넣고 물을 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비는 안 그렇겠습니까? 자비로운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심판만 이길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어찌 살았건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질투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셔서 미래에 닥치게 될 흉년을 넘길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형제들의 생각대로 요셉을 죽였더라면 그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들 안에는 자비를 가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르우벤과 유다입니다. 르우벤은 그를 구해내려고 합니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또한 유다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요셉이 야곱의 가문을 구하기는 하지만, 이 두 형제의 자비가 없었다면 요셉도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둘마저 무자비했다면 그 댓가로 무자비한 멸망을 맞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비가 우리를 구원해준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라과디아 판사는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일까요? 노인?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 노인은 천국에서 라과디아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고, 그리스도도 그 노인의 증언을 듣고
라과디아 천사를 당신 자녀라고 증언할 것입니다.
라과디아는 자신의 자비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자비만이 자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