紈扇歌 흰 비단 부채의 노래 班婕妤(한나라의 여류시인)
新裂齊紈素 제나라의 흰 비단을 새로 마름질하니
皎潔如霜雪 밝고도 깨끗하기가 눈.서리와 같구나
裁成合歡扇 재단하여 짝을 맞추어 부채를 만드니
團團似明月 둥글고 둥글기는 밝은 달과 다름없다
出入君懷袖 님의 품속이나 소매에 넣거나 꺼내어
動搖微風發 흔들어 움직이면 산들바람 불어온다
常恐秋節至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날이 도래하면
涼飈奪炎熱 소슬바람이 불볕더위를 빼앗아가리라
棄捐篋笥中 돌보지 않고 버려져 상자속에 있으면
恩情中途絶 애틋한 정도 중도에 끊어져 버리리라
*마름질: 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치수에 맞도록 재거나 자르는 일.
부채 하나에 애틋한 정을 담아 행혀 변할까 싶은 님의 마음에 애태우는 여심
아마도 지금은 박물관에나 있을 것이네
결이 닮은 서구의 시 원문을 몇 편 번역해주고
그대 청연도 짧은 영시로 여심을 드러내 주게나
참으로 절창(絕唱)이로군.
반첩여(班婕妤)의 **〈紈扇歌〉**는 단순히 부채를 노래한 시가 아니라, 사랑이 계절처럼 식어가는 두려움을 흰 비단 부채에 실어 보낸 한나라 궁녀의 절절한 독백이라네.
부채는 여름에는 품속에서 사랑받지만, 가을이 오면 상자 속으로 버려진다.
그 부채는 곧 총애를 잃은 여인 자신의 운명이기도 하네.
'상자 속의 부채(篋笥中)'는 이후 중국과 조선 시가에서 버림받은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서양에서도 놀랍도록 비슷한 정서를 노래한 시인들이 있었네.
1. Christina Rossetti 〈Remember〉
Remember me when I am gone away,
Gone far away into the silent land...
번역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내가 조용한 땅으로 멀리 떠난 뒤에도.
당신이 더는
내 손을 잡을 수도,
돌아서 함께 갈 수도 없을 때에도.
하지만...
기억이 당신을 아프게 한다면,
차라리 나를 잊으세요.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슬픔 속에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편이 더 낫습니다.
강평
반첩여가 '버려질까 두렵다'고 노래했다면,
로세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를 잊어도 좋다."
사랑의 소유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동서양의 시가
같은 눈물을 다른 방식으로 흘리고 있음을 보게 되네.
2. Elizabeth Barrett Browning 〈If Thou Must Love Me〉
I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ought
Except for love's sake only.
번역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아름다워서도,
미소가 예뻐서도,
목소리가 좋아서도,
잠시 기분이 좋아져서도 말고,
오직 사랑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테니까.
강평
반첩여가 두려워한 것도 바로 이것이라네.
여름이 지나면 부채는 버려지고,
젊음이 지나면 총애도 사라질지 모른다.
브라우닝은 말하네.
변하는 이유로 사랑하지 말라.
그러면
변하지 않는 사랑이 된다고.
3. Edna St. Vincent Millay 〈Time Does Not Bring Relief〉
Time does not bring relief;
you all have lied.
번역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말,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사람의 발자국은
여전히 들리고,
문은 아직도 열리는 듯하며,
마음은 아직도
그를 기다립니다.
강평
반첩여는 앞으로 올 이별을 두려워했고,
밀레이는 이미 지나간 이별을 견디고 있다.
한 사람은 예감의 슬픔,
다른 한 사람은 기억의 슬픔.
그러나 둘 다
사랑은 계절보다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네.
청연의 짧은 영시
The Fan
I was the wind
before autumn learned my name.
Folded once
inside your gentle sleeve,
I believed forever
could be carried by silk.
Now dust remembers
what your hands forgot.
Yet if one summer
returns to your heart,
unfold me—
not for the breeze,
but for the love
that once breathed through us.
우리말 옮김
〈부채〉
나는 바람이었습니다.
가을이
내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당신의 고운 소매 속에
한 번 접혀 들어가며
나는 영원도
비단처럼 접어 품을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먼지만이
당신의 손이 잊은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의 마음에
한 번의 여름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를 펼쳐 주세요.
바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이를 스쳐 갔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숨 쉬게 하기 위해.
청연의 여심이 절창일세 반첩여가 조금 위로를 받앗을 걸세 그러나 제행무상이니 애달픈 여심인들 어찌하리오
바람의 말씀이 참으로 불가의 한 구절처럼 마음에 스며드는군.
제행무상(諸行無常).
만나는 것도 인연이요,
헤어지는 것도 인연이라.
반첩여 또한 그 이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네.
다만 사람의 마음은 진리를 알아도 슬픔까지 곧장 놓지는 못하는 법이라네.
부처는 집착을 놓으라 하셨고,
반첩여는 놓지 못하는 마음을 노래했네.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로 나아가는 길목의 두 풍경이라 할 수 있겠지.
문득 반첩여에게 이런 시를 바치고 싶어지는군.
To Ban Jieyu
The moon is never
kept by one window.
It leaves,
not because
the house has lost its worth,
but because
the night itself
keeps walking.
Grieve,
if your heart must.
Yet know—
even forgotten fans
remember
the wind.
우리말
반첩여에게
달은
한 창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집이
가치를 잃어서가 아니라,
밤이라는 시간이
계속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십시오.
마음이 그러해야 한다면.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상자 속에 잊힌 부채도
한때 자신을 스쳐 간
바람만은
끝내 잊지 않습니다.
아마 반첩여가 이 시를 들었다면,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미소 짓지 않았을까 싶네.
"버려진 것은 부채였지, 내가 품었던 사랑까지 버려진 것은 아니었구나."
사랑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미 한 사람의 삶을 빛낸 것이니,
그 빛은 계절이 바뀌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