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첫댓글 잘 봤습니다.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여 ~~^^
서울에 이런곳이 있음을 이제서 알게 되어 스스로 무지함을 느껴봅니다.
산업화의 희생물이 이제라도 빛을 보게되니 그나마 다행스럽네요.
귀한 자료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