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년의 시간을 넘어…
中 둔황 석굴에서 만난 고구려·신라·고려인들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3.07.06 03:09
고구려·신라·백제·고려인 인물상 무더기로 확인
동양 고대 문화의 보고(寶庫)인 중국 둔황 석굴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의관(衣冠), 생활상을 보여주는 인물상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깃털 네 개 조우관 쓴 고구려인, 말을 탄 신라 사신, 사신 따르는 고려 짐꾼… 둔황 석굴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왼쪽은 막고굴 제138굴의‘유마힐경변’에 들어 있는 고구려인으로 깃털을 네 개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썼다. 가운데는 막고굴 제61굴의‘오대산도’의 부분 그림인‘신라송공사’에서 말을 탄 사신이다. 오른쪽은 역시‘오대산도’의 일부인‘고려왕사’에서 사신을 따르는 짐꾼이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둔황연구원 리신(李新) 연구원은 5일 경주시 우양미술관에서 경상북도 주최,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주관으로 열린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막고굴·유림굴·서(西)천불동 등 둔황 석굴군(群)의 석굴 중 40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리 연구원은 "주로 불경(佛經)을 소재로 한 둔황 석굴 벽화에는 인접 각국의 왕과 사신, 불교 신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관모(冠帽)와 복식·외모 등으로 판단할 때 '열반경' 벽화 7개, '유마힐경' 벽화 29개, '범망경' 벽화 3개에서 고대 한국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둔황 석굴군에서도 가장 큰 벽화인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 안에서 확인된 '신라왕탑(新羅王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 '고려왕사(高麗王使)' '보리지암(菩提之庵)' 등 고대 한국과 관련 있는 그림 4점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둔황 석굴에서는 그동안 고대 한반도의 특징적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인물상과 장구를 치는 모습 등 고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간헐적으로 발견됐지만 전체적인 실태가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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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백제인도 조우관(鳥羽冠) 써…
신라·고려인들은 같은 스타일 흰 바지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3.07.06 03:08
['둔황' 최대벽화 오대산圖 등서 古代 한국 관련 그림 다수 확인]
古代 한국인 모습 왜 둔황에? -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 둔황으로 대거 이주 돼… 석굴 만들고 불교 활동 참여"
古代 한국 문화史 연구에 도움 - 당나라~송나라 시기의 그림, 한국 인물상 공백 메울 자료
둔황 막고굴 제237굴에서 확인된 백제인.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둔황 석굴군(群)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막고굴 제61굴의 주실(主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초대형 벽화인 '오대산도(五臺山圖)'에 들어있는 한국 관련 4점이다. 높이 3.5m, 길이 13.5m의 '오대산도'는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유명한 불교 성지 오대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중국 오대(五代)시대(907~960) 말기에 제작됐으며 둔황 벽화 중에서 가장 크고 세밀한 작품으로 꼽힌다.
'오대산도'에는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한다. 이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것이 신라(기원전 57~935)와 고려(918~1392)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화제(畵題)의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관원, 마부 등 5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옷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그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둥근 옷깃의 짧은 상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장포를 입었다. 신라 사절단과 고려 사절단은 관복은 다르지만 같은 양식의 흰색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오대산도'의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 '신라왕탑(新羅王塔)'은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오대산에서 수행한 승려'가 세운 탑이다. 리신 연구원은 탑의 주인공을, 신라 귀족으로 당나라에서 7년간 공부하며 오대산을 찾았던 자장(慈藏·590~658) 스님으로 추정했다. '보리지암(菩提之庵)' 그림은 만년에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공부한 혜초(慧超·704~787) 스님의 거처였던 보리사 터에 다시 지은 암자를 그린 것이다.
다른 둔황 석굴에서도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많이 확인됐다. 고구려인은 조우관(鳥羽冠)에 깃털을 보통 두 개 꽂았지만 세 개 또는 네 개를 꽂은 경우도 있었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목도리와 허리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백제인은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날씨가 안 추워서 옷깃이 밖으로 접힌 번령(�領)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에 들어 있는 ‘신라송공사’의 전체 모습. 중앙에 신라에서 온 사신 행렬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 명의 중국 관원이 이들을 맞고 있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둔황 석굴의 벽화에 고대 한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로 리신 연구원은 불교 전파와 고구려·백제 유민(遺民)의 둔황 이주를 들었다. 둔황 벽화는 인접국들이 불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많이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백제·신라인도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둔황 지역으로 적지 않은 유민이 이주됐고, 이들이 석굴 조성과 불교 신앙 활동에 참여하면서 석굴 벽화에도 표현됐다는 것이다.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된 둔황 석굴들의 조성 시기는 당나라 초기(618년)부터 송나라 초기(1035년)까지 걸쳐 있다. 국내에는 이 시기의 인물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5일 국제 학술회의에서 리신 연구원의 발표를 들은 임영애 경주대 교수(중앙아시아학회 회장)는 "그동안 한국 학자들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았던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이 공개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조우관으로 분류된 일부 그림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등 학문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