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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y River(疏勒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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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들은 기자조선 얘기만 나오면...
기자조선은 허구의 나라느니...기자의 봉지는 갸오 서북 구탱이 뿐이였느니...
기자는 단군의 신하일 뿐이였느니...
중국이 한민족역사를 중국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든게 기자조선이고 일제가 도왔다느니... 난리를 치는데...
쓸때없는 발버둥일 듯 하다.
단지,기자조선의 마지막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 대륙의 남부인 삼한(三韓)지역으로 밀리면서...
진조선(辰朝鮮)...또는 진단(震但國)이 유지됐었기에...위만조선의 실체가 부정돼고...
장당경으로 옮긴 단군조선이 동남에선 유지됐기에 기자조선과 중복돼니 기자조선의 실체가 부정돼는 빌미일 뿐이다.
내 예상엔 삼한(三韓)이자 진단(震但)은...
현 중원남부로...황하이남 사천성과 귀주성,호북,호남성 ,광동광서성,복건성,강소성, 하남성..베트남, 태국 일대 같다.
마한의 왕이 다스린단 월지(月支,目支)는...사천성일대와 티벳 동부같은데...
티벳남부으로 밀린 한(漢)의 영토와 맞다으니...마한(馬韓)과 한(漢)은 영토가 중복됄 수 있다.
현 중원을 얘기하는 지나(차이나)도 결국 진단국(삼한)을 뜻하는 우리말 "진나라"의 양키식 발음일까 한다.
원래의 조선(朝鮮)이란...
삼한(진단국)의 상대적 서북인 현 감숙성과 돈황..천산일대를 이른다 보이고...거기가 원조 요동,요서의 땅이라 보인다.
하북과 북경일대는 예맥의 동예(東濊)지역 같다.
거기서 기자에게 쫒겨 당장경(현 서안성?)으로 같다가... 구월산인 삼위태백 아사달로 돌아오셨단 황해도는...
청해성 청해호 서쪽 삼위산(三威山)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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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호 서쪽에 분명 삼위산(三威山)이 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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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고려사, 조선사...
아주 널널하게 기자(箕子)는 단군과 함께 삼국과 고려,조선의 시조로 함께 모셔졌음이 보인다.
조선시대엔 오히려 기자가 더 극진이 모셔졌음도 분명이 눈에 뜨인다.
그런데 역사공부하며 아무리 따져봐도...
이 중국 은나라(殷) 기자(箕子)라는 분 말이다...
현 중국인들 조상이 아닌...선비족류인 키타이(거란)족과 오히려 유사한 인물임이 들어난다.
기자의 본향은 은나라(殷)다.
은나라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공히 동이족의 나라라 하니...중국인이 아니라 할 수도 있으나...
은나라의 정식 국호인 상나라(商)나라로 봤을땐...북적(北狄)에 더 가깝다.
은나라(殷)라 함은...그 왕도가 동이지역인 은허(殷墟)에 있어서 별칭 은나라(殷)라 한거지...
정식 명칭은 그 상대적 서쪽인 상나라(商)라 한다.
상나라의 중시조는 탕왕이라는데...본 시조를 보면...글(契)이란 인물이 시조다.
전욱고양, 제곡고신의 후예라고도 하니...신라 고구려와도 관련 많은 혈통이 분명하다.
전욱고양이 황제헌원의 자손이라니...동이족이라고만 할 수도 없지만...
그들의 선대인 복희 수인씨 시대를 올라가면...또 동이(東夷)이라 하고...
그들의 아랫대인 요순(堯舜)은...요임금(堯)은 북적(北狄)이요 순(舜)은 동이(東夷)라 하니...
황제헌원도...큰 틀에선 동이(東夷)나 북적(北狄)의 혈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민족 사서들엔...
한결같이 단군이 기자씨를 피해 장당경으로 물러나 본향인 황해도 삼위태백의 아사달로 돌아와 신이돼셨다 하는데...
이는 단군과 기자를 함께 조상으로 모시던 한민족들의 완곡한 표현일 뿐...
돌궐 제2 부흥기인 당나라 패망시기 돌궐의 본향인 동돌궐의 동북경계지로 보이는 외몽골 아르한가이일대의
돌궐비문들에 새겨진 사건기록을 보면...
단군올칸은...키즈(기자?)의 무리들에게 목이 잘려 돌아가셨다"고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쇠사슬에 묶여 돌아가시기전...울먹이는 백성들에게...뒷날 다시 당굴(탱그리)이 돌아올 것이니...
홍익인간하고 잘 살면 좋은 세상이 도래할거라 예언도 하시며 돌아가셧다고 ...
아주 친절하게 사건당일의 알리바이까지 돌에 단단히 새겼다.
돌궐족은 통상 중국을 거란(키타이)이라 표기하고...그들이 늘상 돈과 물질로 자신들을 분열시킨다고 경계한다.
돌궐사서는 고구려를 형제국으로...단군을 같은 조상으로 표현했는데...키즈(기자)의 무리는 키타이(중국)으로 취급한 것이다.
먼저, 탱그리올칸(檀君)을 죽인 키즈(기자)무리의 시조 기자의 몽타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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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않나...?
단군의 전유물인 그 빵떡모자를 똑같이 쓰고 있다.
단지, 의복만 더 발달해...고대 중국과 한민족들의 도포를 두른 형식이다.
그런데 이상한게 있다.
기자조선을 멸한 연나라 위만의 무리는...기자조선으로 망명하면서 상투를 틀고 넘어왔다 명기했는데...
단군님이고 기자씨고...상투가 없는 민머리라야 가능한 빵떡모자를 쓰고 계신다...?
근대의 왜곡 조작 초상화일까...?
왜?
단군과 기자가 우리 조상이라 선전하려면...상투를 틀어 근세의 조선인들과 같은 두발형식으로 왜곡해 그렷어야 정상인데...
쌩뚱맞게 중앙아시아 위그루인들과 키타이(거란)...지중해 터키인들 전통복장과 같은 빵떡모자를 씌워 왜곡했을까...?
단군과 기자의 빵떡모자는 지중해 유대인들의 전통복식이기도 하고...
서유럽 카톨릭사제들의 전통복식이기도 하다.
단군과 기자가 우리 조상님이라 하면서...
쌩뚱맞게 서역인들의 복식을 단군과 기자에게 착용시켜 초상화를 그려놓을 이유가 뭘까...?
그러니 근대의 조작됀 초상화라 보기 어렵다.
그럼, 고대에 저런 모자를 쓸 수 있는 두발형식의 문명은..?
곤발을 한 거란(키타이)과 그 유사한 두발형식의 몽골족... 근세의 청나라인종이다.
역사가 말한 한족과 고려 조선족은 정수리의 상투때문에 저 빵떡모자를 쓸 수 없었다.
그럼, 이런 결과가 나온다.
상나라(商)령 은나라의 기자씨는...거란(키타이)이나 청나라인들과 더 유사한 복식을 했고...그게 고대의 중국복식였다.
동이지역에 도래해 신시 배달국을 창건하신 환웅의 아들 단군(檀君)도 그 유사문명족이다.
이를 현대의 세계인종들과 대입했을땐...
최소한 신장위그루인들의 복식...그 서역 넘어 이스라엘 랍비들의 복식...터키의 전통복식...카톨릭사제들의 전통복식이니...
단군과 기자의 복식은...아무리 동쪽으로 땡겨도...신장위구루 동쪽으로 오질 못한다.
물론, 한반도의 유주자사 진의 묘에도 같은 빵떡모자는 나오니...
고구려시기에 극동에서 빵떡모자를 아예 않 쓴건 아니지만 말이다.
최대한 동쪽으로 봐도...그 중심은...
단군과 기자의 본향은...알타이인근 신장성 천산일대란 얘기다.
더 서쪽일 수도 있지만...돌궐후손들과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알타이에서 왔다 우기니...
원 발원지는 파미르 서역은 아닐듯 싶다.
극동의 한반도 묘지의 "유주자사 진"도 그걸 쓰고 처질러 앉아있으니 말이다.
키타이(거란)의 선대는 동호(東胡)니 선비(鮮卑)니 한다.
중국 수,당의 선대는 탁발선비라 한다.
중국 진나라(秦),위나라(魏)나라 공히 선비족이라 한다.
중국 한나라(漢)는 마한(馬韓)과도 관계있다하고...유방도 동이와 관련있다 하니...동이족이다.
중국 주나라(周)는 역시, 선비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다.
중국 상나라(은나라)는...시조가 거란을 의미하는 글(契)씨이다.
중국 하나라는 순임금(舜)을 이었으니...동이와 관련있고...순임금(舜)은 요임금(堯)에 선위(사실은 강탈?)받았다는데...
요임금은 본시 북적(北狄) 이라니...선비계라 볼 수 밖엔 없다.
역사서의 중국은
한무제의 한나라(漢)와 명나라(이도 의심스럽다.)때 잠깐 빼곤...공식적으로 계속 선비족과 동이족이 다스린 역사다.
고로, 은나라(殷) 도래인인 기자(箕子)가 선비족류인 거란(키탄)인들과 그 복식이 유사함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중국 자체가 북적(北狄)과 동이(東夷)가 번갈아 다스린 문명이기에 그렇다.
은(殷)을 도성으로하던 상나라(商)는...인육을 먹었단다.
상의 폭군 걸주가...주나라 무왕의 아비인 주문왕의 큰아들을 솥에 삶아 죽을 만들어 주문왕에게 먹이며...
본시 성인(聖人)은 인육을 먹지 않는다는데...그대는 성인이 아니구만...하며 조롱했다 하니...
당대 상나라인들이 공공연히 인육을 복용했단 반증이다.
공자도 말년에나 이를 끊었다니 분명한 사실같다.
군자국인 동이의 전통엔..최소한 역사시대인 부여때부터도 공식적으론 인육복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럼, 통상적으로 고대에 인육을 즐기던 이들은 중국 상나라 말고 누굴까...?
스키타이다.
인육을 먹었는진 몰라도...사서들엔 그들이 사람을 잡어 고사지낸다 했다.
조선사서들엔...
부여는 우제점(소발굽점)을 치고...
고구려는 기자(箕子)에 제사하고...성신(星神)과 해(日)에 제사한다 하고...
숙신(肅眞)은 호시,석노(石弩)를 놓고 제사하고
금나라(金)는 숲에 둘러서 제사하고...
마한(馬韓)은 소도에 제사하고...
흉노는 사람을 잡어 제사한다 했다.
고대 중국인 상나라(은나라)가...가장 북적(北狄)과 흉노(匈奴)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
키타이(契丹)를 의미하는 글(契)씨가 시조인 상나라(商)의 윗대는 하나라(夏)다.
당대(기원전 2000년에서 400년간)에... 중앙아 서쪽엔 힛타이트란 미지의 문명이 있었음이 근세에 밝혀졌다.
중국 하나라(夏)와 같은 연대다.
히타이트가 의문의 바다에서 온 종족들에게 무너지고 싹 사라졌다는데...
상나라(商)가 하나라(夏)를 인수한 시기 전후다.
하나라(夏)의 도성은 대하(大夏)라 했다.
공교롭게도 대하(大夏)는 박트리아로...힛타이트가 누비던 지역이다.
아직도 러시아는 중국을 키당(키탄)이란 발음으로... 키타이(거란)로 속칭한단다.
아직도 몽골인들은 중국을 햣다트(정복자,학살자)라 별칭한단다...햣다트"...힛타이트"와 너무도 유사한 발음이다.
서역인들은 공히 "ㅎ" 발음을 "ㅋ"발음으로 한다.
징기스한을 "딩기스칸"이라 발음한다.
힛타이트를...키타이"라 발음할 개연성은 지대하다.
한자문명은...이 힛타이트(햣다트)를 약칭 하(夏)로 적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려시기 패망 하라키타이(거란)이 서쪽으로 도망쳐...카자흐스탄 정도에 만든 나라의 명칭이 서하(西夏)임도...
하우씨의 하나라(夏) 위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역인들 발음으론 "카라 키타이"지만...동녁인들 발음으론 "하라 힛타이트"라 해도 무방하겠다.
공교롭게 박트리아를 의미하는 대하(大夏)가 도읍인 하나라(夏)를 인수한 상나라(商)의 시조인 글(契)씨는...
거란(키타이)를 의미하는 계(契)자로 표기되며...이는 한글(韓契)할 때의 글(契)자로...
글(契)은...키타이(거란)와 그 시조 글(契)씨...란 아주 제한됀 영역의 적용외엔...조각도로 새긴 글자(契字)를 의미한다 한다.
거북등에 새기는 갑골문이나...점토판에 새기는 글씨를 의미하는 글(契)이다.
슈메르나,이집트등도 그렇치만...힛타이트"의 글씨가 다 이 점토판에 새기는 글(契)이기도 하다.
붓으로 유연하게 쓰는 한자(文)이전에...갑골과 점토에 새기던 상형문이나 쐬기문자가 글(契)의 기원이며...
그 시원은 거란(契丹)이나 상나라(商) 시조 글(契)씨와 어떻게든 연관됀다 보인다.
알타이인근에서 서역으로 간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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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象形文字 Hittite hieroglyphic writing 고대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뒤 시리아와 히타이트의 여러 나라에서 BC 10~8세기에 루비어의 동부방언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 상형문자체계(학자들은 상형문자로 씌어진 초기 루비어의 문자가 중부방언이라고 생각함).
히타이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문설주 조각(BC 900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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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발견된 점토판, 히타이트 역사의 서광을 비추다
1887년,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이집트의 한 시장. 현지인들이 마치 굴러다니는 돌처럼 여겼던 설형문자가 새겨진 점토판들이 유럽인들의 눈에 띠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련의 점토판들의 존재가 알려지자 1888년에는 200여 개의 점토판과 그 조각들이 카이로에서 팔려 나갔다. 보가즈쾨이의 유적이 히타이트의 것임을 주장했던 세이스는 이 사실을 목격하여 본국에 보고했고, 곧 몇몇 단체들과 수집가들이 이 점토판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독일의 베를린 박물관도 한 수집상에게서 160여 개에 이르는 점토판들을 사들였고, 이것들은 곧 학술적 조사를 위해 당시 이집트 지역 발굴 전문가였던 영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페트리(William Petrie, 1853-1942)에게 인수되었다.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점토판. 일련의 점토판을 해독한 결과 히타이트 왕의 이름과 재위 연대가 밝혀지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히타이트 제국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페트리는 이 점토판의 출처가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라는 것을 알아내고, 189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자, 그럼 이 아마르나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약 BC 1351-1334)의 도시였다. ‘아크나톤’으로도 알려진 이 파라오는 이집트 역사에서 람세스 2세만큼 유명한 인물로, 다신교인 이집트에서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자는 유일신주의를 내세우며 수도를 테베에서 아마르나로 옮겼다.1) 수많은 점토판들은 바로 이 새로운 수도의 왕실 문서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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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
돌궐과 선비, 거란의 왕을 한자문명은 흔히 가한(可汗)이라 표기했다.
가한(可汗)은 한(汗)보다 높은 왕이라는 건 무식한 소리다.
가한(可汗)과 한(汗)은 발음차이다.
서역인들은 "한"을...칸"이라 발음하기에...
이를 다시 받아적은 한자문명은...칸"을 가한(可汗)이라고...정확한 음가로 표기했을 뿐이다.
그런데...
역사서를 보니...신당서에 고구려는 별과 해...그리고 기자가한(箕子可汗)에 제사했다 명기했단다.
이를 구당서에는...기자신(箕子神),가한신(可汗神)에 제사했다 했다는데...오기라 한다.
당,송시기엔...기자(箕子)를 돌궐이나 선비족(거란도 포함)들 왕과 같이 불렀단 얘기다.
심지언 당태종 이세민도...돌궐과 거란등의 추대로 천가한(天可汗)에 추대되고...
본인도 자랑스럽게 천가한(天可汗)자칭해서...근세 조선사가들의 빈축을 사는 대목도 보인다.
천가한(天可汗)...칸 중의 칸(可汗)...돌궐용어로 "탱그리칸"이다.
이를 보건데...아르한가이 알란하(올론강&셀렝게?)에서...한(汗)중의 한(汗)으로 등극한 태무진(鐵木眞)은...
돌궐과 선비족들 전통대로 천가한(天可汗)에 추대됐을게 뻔하니...
징기스칸(성길사한)이란 호칭도...
현재의 "큰 바다의 왕"이 아닌...텐그리칸(天可汗)의 변음인 "딩기스칸(성길사한)"일까 싶다.
기자가한(箕子可汗)의 아들 중에...선우(鮮于)씨가 있다.
흉노나 선비의 왕 호칭에 선우(선于)가 있다.
한자가 공용어가 아닌 흉노의 왕 호칭을 한자가 다르게 적었을 뿐이라 예상한다.
기자가한은...선비족(거란족)의 유종일 수 있고...
그의 본향인 은나라를 수도로 하는 상나라는 ...글(契)씨를 시조로 하는 키타이(거란)유종이자...
사람을 잡아 고사지내는 "스키타이"의 조상일 확률이 지대하다.
기자칸(箕子可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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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2하 | 원문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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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신라 내물왕 37년, 고구려 고국양왕 9년ㆍ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 백제 진사왕 8년ㆍ아신왕(阿莘王) 원년(진 효무제 태원 17, 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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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궐비문이라는 것이 명칭이 다른데 우리 명칭을 차용한 거 아닌가요?
우즈벡인가 키르키스탄인가에서 역사를 배우는 한국 교수가 단군과 연관이 있다고 아마
밝힌 사람일 건데요. 그분의 주장이 아니면 그냥 원어 그대로 쓰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겁니다.
저도 한번 들었는데 언어도단이 심하더군요. 말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단어를 단군을 끌어 쓰니
그게 말이 되더군요. 그런식으로 비역사전문가들이 글자 비슷하다고 같다 쓴 역사들이 왜곡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궐한님 글만 보면 정말 기자가 다군의 목을 배었다고 쓰여진 듯 하지만 정작 몇칭은 다르잖아요.
그 명칭대로 하며 그게 기자가 단군의 목을 자른 게 됩니까?
키즈의 무리들...기자가 직접 베었단게 아니겠지요...
돌궐비문의 "키즈"가 정확히 "기자'를 이르는진 확정할 수 없으나...
당대 단군을 죽일 이유와 위치가 돼는 세력은 기자세력 뿐이니 그리 해석한 겁니다.
탱그리"가 '당굴(단군)"의 정확한 표현인지도 확정할 순 없지만...전체적 시기와 이야기는 거의 단군의 얘기니...
그리 해석할 수 밖엔 없겠고요...
한 참 더 공부해야 좀 진실에 다가가겠지요...
동서역의 발음 자체가 많이 다르니...방음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비문해석학자의 견강부회식 억지대입이라 보기는 좀 억울한 면도 있겠습니다.
@궐한 단군이라는 말이 제가 알기로는 우리가 쓰던 말이 아닙니다.
기자는 우리가 쓰던 말이죠. 근데 자기나라 역사를 쓰는데 안 쓰는 말을 써서 넣었을 까요?
돌궐이 산스크리스트어를 썼다는 증거가 있나요? 그랬다면 기자가 산스크리스트어로 키즈던가요.
기본적으로 이런 상식으로 바라보면 가당치도 않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 단군으로 불릴 만한 분은 있지만 그분이 단군으로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현 사학계의 입장일 겁니다. 그래서 단군을 함부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단어는 다르다
뭐 이정도죠. 근데 돌궐비문을 연구하는 분은 전문 사학자는 아닌 듯 합니다.
예전에 다큐로 본 기억도 나는데요. 어거지에 가까워요.
@마포대사 이와 유사한 경우가 어떤 것이었냐 하면 한 20년 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인의 후예다!" 거의 황당한 수준의 주장인데 책이 좀 팔립디다..^^!
저도 샀어요. 거기에 보면 환국의 12지파 중에 수밀이 국이 있는데 이 나라가 지금
수메르 근방이다. 그런데 어느날 사라졌다. 라고 하면서 시작하여 억측이 나오더군요.
수밀이구 수메르 비슷하죠. 그래서 상상은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저도 그때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수메르는 국명이 아니라 아키이드 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머리색이 검은 사람들이다. 라는 뜻으로 그 인종을 부른 말이더라고요. 황당하잖아요.
@마포대사 한국인의 국수주의적 시각이 섞인 돌궐비문 연구가 아니라...
동궐이나 고구려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북유럽인이 연구한거라니 객관성과 과학성은
우리보다 한 10배 난 연구라 예상합니다.
힛타이=키타이!! 이런 관점 이 중요하다는 생각 입니다 / 공자님이 사인육 했다니 금시초문 입니다 하기는 위영공이 자로를 죽여 젓을 담갔고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집안에 있는 젓을 모두 내다 버렸다네요 고대엔 더러 사인육 하는 인간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인간들이 갑자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글 잘보았습니다.
문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베일에 쌓인 역사를 훔처보는 느낌입니다.
契자에 많은 뜻이 있었군요....
1,맺을 계 2,애쓸 결 3,종족이름 글(북이(北夷)의 칭호) 4,사람이름 설(고신씨(高辛氏)의 아들.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을 세움)
궁금한 것은
1, 상나라를 세운 탕왕의 선조가 契(설? 글?)씨이고(14대선조?) 契은 고신시의 아들로 우(禹)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웠다 하니 우임금의 치수지역과 상나라의 위치는 아마도 같은 지역이거나 인근지역이라 추정할수 있습니다. 우임금은 요순의 뒤를 이었으니 요순시대와 하은주의 역사 강역은 우사공의 치수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요순과
하은주의 역사 강역이 현 중원(황하와 그 인근지역)이 아닌 신쟝성이나 중앙아라면 현 중국에 있는 치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나 하은주의 역사와 문화는 모두 왜곡의 산물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현재 황하나 양자강 하류식의 강 구조와 주변 지형였다면...
하우씨가 어디(용문)를 뚫어 홍수를 해결하느니의 방식은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중원이란 곳은 신장성지역였으며...타클라마칸과 돈황일대 포창해지역등의 저지대들이 9년 홍수로 수량이 급격히 늘어...신장성 일대가 다 물바다가 돼어...천산과 곤륜산,티벳 파미르지역 고지대들만 섬처럼 떠잇는 형상의 물난리였다 예상합니다.
이 큰물은 감숙성 북단 산대적 저지대를 따라 고비사막의 일부인 파단길림사막들지의 상대적 저지대를 더 근 내륙해로 만들면서...동황,감숙성등지의 산대적 저지대들도 물에 잠기는데...
현재의 역사 그대로...하우씨든 단군의 제후든 당시의 사람들이...고비사막 횡토고원에서 섬서성 장안일대로 내려오는 물길(龍門)을 내면서...신장성(중국?)의 홍수가 한층 완회됐을 수 있었단 얘기로 해석해 봅니다.
당시 황하의 상류는...파단길림사막 저지대와 감숙성북부 상대적 저지대 골짜기...포창해와 타클라마칸 타림하를 잇는 라인였다 생각합니다.
@궐한 카레스(坎爾井,Karez, 칸얼정 .지하동굴수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칸얼정은 중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만리장성, 남북을 잇는 대운하와 함께 고대의 3대 공청(공사) 중 하나로 꼽히는 수리시설이다.
2000년 전의 한(漢)대 이미 처음으로 시작되어 그 후인 수나라 실크로드를 따라 발전하여 중앙아시아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맑은영혼 카레즈(칸얼정)은 지하수를 지면으로 끌어올린 방법으로 만든 수로로서 통계에 따르면, 투루판분지에 칸얼정이 1,237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853개이며 총 길이는 5,000km를 넘는다.
칸얼정 하나하나가 일반적으로 대략 3 ~ 8km 사이이며, 가장 깊은 곳은 90m 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카레즈가 생긴 것이 무려 2천 년 전이라고 하니 이 척박한 땅에 물을 대기 위해 노력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맑은영혼 카레즈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곧 그 지역이 과거(2000년전)나 현재나 건조지대인 것 같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그 지역 저지대에 물이 차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시기는 역사시대 훨씬 전인 만년이나 그훨씬 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돌궐비문의 발견과 그 해석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돌궐비문에 관한 정확한 해석이 없기 때문에 각 연관된 나라나 종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해설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나라는 중원황제요, 그 중원황제에게서 기자가 나온 것입니다. 기자 이전에도 조선은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록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은나라의 인육이야기는 주문공이 서쪽의 제후중에서 패자로 근림하니, 인질을 요구했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자 인육으로 젖을 담아 문공에게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일종의 충성시험입니다. 이러한 예를 은나라는 인육을 먹는........이렇게 과대포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인육을 아침저녘 주식으로 먹었단게 아닙니다.
종종 먹었단 근거들은 나옵니다...별식정도로...
물론,전쟁이나 권력유지의 공포정치를 위해...의도적으로 자행한 만행일 가능성이 많고요...
정작, 중요한건...흉로와 흉로계인 스키타이도 그랬단 근거가 많이 나온단 공통점입니다.
2, 단군의 초상에 보이는 방떡모자(?)와 얼굴은 분명 우리의 선조에 대한 상식과는 다릅니다. 그 최초의 출처도 어느 독립군의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태극기(?) 책(?)인가에서 비롯되었다는말이 있더군요...어찌되었건 1900년 이후이것 같습니다. 실제 단군의 상이 알려진 그대로라면 그 본향이 님의 말씀처럼 현 천산과 알타이일대라 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지금도 그 문화가 남아 있으니여...하지만 덕흥리 고분의 유주자사 진이란 분도 그 빵떡모자를 쓰고 있으니 방떡모자의 문화가 신장성 서쪽사람들의 전유물인가는 의심이 됩니다. 현 중원이나 그 북쪽에도 그러한 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걸까요 ..? 기자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기자가
현 중원의 인물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합니다만....
契은 '설'로 고신씨의 아들입니다. 고신씨는 당시 천자였으며, 이 분의 후손들이 중원의 왕조를 이었습니다. 언어의 전음이 토착어, 방언등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큰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도움되는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역사 연구 과정에서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역사연구는 추리나 가정, 상상등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출처있는, 근거있는 이런 글들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로 기자의 초상화도 올렸고...
기자간한(箕子可汗)이라 동궐이나 선비족 왕의 명칭으로 기자를 표기한 신당서 내용도 올렸습니다.
전혀 무근거한 음운학으로만 추리한단건 억울합니다.
기자가한기록도 후대의 조작...기자의 거란이나 돌궐같은 빵떡모자 진상도 후대의 조자이라 가치없다 할거면...
도대체 조작않됀 진실의 원본이란 근거들은 누가 어떤경로로 확인해주는 걸까요...?
중요한 것은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와 누구에 의해 그려진 것인가? 하는 것이겠죠. 위의 것으로 보면 말입니다. 최소한도 이것에 대한 출처가 없다면 아무런 의가 없다는 뜻이며, 위의 초상화와 같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초상화를 올려서 글을 읽는 분들이 상호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요즈음 조선사를 찾자는 카페등지에서 유언비어식 주장들이 난무하고, 일부 회원들은 그것에 대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등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곳(카페)들이 많습니다. 이런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래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느 원전이고 그 당대에 쓴 글이 그대로 전해졌다면 종이가 다 문드러져 읽지도 목했을 겁니다.
선대의 기록과 구전등을 후대가 계속 이어 기록하거나 구전하는게 역사고...그 와중 각자의 계산이 가미돼어 왜곡의 소지도 있기 마련인건 맞으나...그렇다고 원래의 기본부터 허구요 조작였다 할 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들이 전해 필사한 진상이던 어떻든...그 얼굴이 다르던 어떻든 공통되게 나타나는게...돌궐식 빵떡모자란데 집중해야 합니다.
근세조선의 조작이라면...근세조선인들 같이 상투를 튼 산신령처럼 조작했어야 했는데...
단군과 기자의 진상이 근세조선인들의 복장이 아님은...상고대의 원전 그대로 베낀것이란 반증입니다.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진영님, 예전에 환인에서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며 새롭게 세운 나라의 지역과 관련하여
'기자'의 위치로 이집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는데,
이 글에서 기자의 세력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현재 입장에서는
이집트 기자는 기자가 밀리고 밀려 마지막에 근거지로 삼은 지역으로 생각하시는지
또는 별개인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반갑습니다 서선생님...네. 현재까지의 공부결과론 이집트는 기자씨의 직접통치구역은 아니였다 보입니다.
단지, 키타이(스키타이)의 문명은 이집트까지 미친거고 ..이집트의 왕가계보도 알타이에서 발원한 정황이라 기자씨와 무관친 않은 방계정도로 수정했습니다.
단군조선도 파내류의 동부 동서 2만리의 환국영토내에 없어야 신천지 개국조건이 돼니...
파미르 이동에는 개국할 신천지는 없는 이치니...카자흐 아스타나 정도가 아사달의 원조지역이라 예상했으나...
나름 다시 주섬주섬 공부해본 결과...환국내의 영토중에 청해성 기련산맥 정도에 분봉받은 환웅의 자손이 단군이고...이후 환국의 주도권은 이 단군조선과 그 또다른 후예격인 선비계들에 주도됐으며...황웅과 황제헌원도 혈통상 무관치 않고..단지 치우씨가 그 상대적 동쪽 동이계통의 천자로서 황제를 제압하는 역사가 중국의 전설상 시조역사라 해석하는 입장으로 수정됐습니다.
항상 변하는 논지라서 헤깔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시 보니
예전에 대륙조선사 연구회에 관한 언급하시면서
이집트 기자에 관한 설은 폐기하신다고 하셨었네요.
제가 요즘 집중력이 떨어져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