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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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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기자(箕子)는 키타이(契丹)유종이고...하나라(夏)는 "히타이트"다.
궐한 추천 0 조회 615 14.07.11 14:59 댓글 2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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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12 00:50

    첫댓글 돌궐비문이라는 것이 명칭이 다른데 우리 명칭을 차용한 거 아닌가요?
    우즈벡인가 키르키스탄인가에서 역사를 배우는 한국 교수가 단군과 연관이 있다고 아마
    밝힌 사람일 건데요. 그분의 주장이 아니면 그냥 원어 그대로 쓰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겁니다.
    저도 한번 들었는데 언어도단이 심하더군요. 말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단어를 단군을 끌어 쓰니
    그게 말이 되더군요. 그런식으로 비역사전문가들이 글자 비슷하다고 같다 쓴 역사들이 왜곡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궐한님 글만 보면 정말 기자가 다군의 목을 배었다고 쓰여진 듯 하지만 정작 몇칭은 다르잖아요.
    그 명칭대로 하며 그게 기자가 단군의 목을 자른 게 됩니까?

  • 작성자 14.07.12 07:44

    키즈의 무리들...기자가 직접 베었단게 아니겠지요...
    돌궐비문의 "키즈"가 정확히 "기자'를 이르는진 확정할 수 없으나...
    당대 단군을 죽일 이유와 위치가 돼는 세력은 기자세력 뿐이니 그리 해석한 겁니다.
    탱그리"가 '당굴(단군)"의 정확한 표현인지도 확정할 순 없지만...전체적 시기와 이야기는 거의 단군의 얘기니...
    그리 해석할 수 밖엔 없겠고요...
    한 참 더 공부해야 좀 진실에 다가가겠지요...
    동서역의 발음 자체가 많이 다르니...방음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비문해석학자의 견강부회식 억지대입이라 보기는 좀 억울한 면도 있겠습니다.

  • 14.07.12 08:36

    @궐한 단군이라는 말이 제가 알기로는 우리가 쓰던 말이 아닙니다.
    기자는 우리가 쓰던 말이죠. 근데 자기나라 역사를 쓰는데 안 쓰는 말을 써서 넣었을 까요?
    돌궐이 산스크리스트어를 썼다는 증거가 있나요? 그랬다면 기자가 산스크리스트어로 키즈던가요.
    기본적으로 이런 상식으로 바라보면 가당치도 않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 단군으로 불릴 만한 분은 있지만 그분이 단군으로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현 사학계의 입장일 겁니다. 그래서 단군을 함부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단어는 다르다
    뭐 이정도죠. 근데 돌궐비문을 연구하는 분은 전문 사학자는 아닌 듯 합니다.
    예전에 다큐로 본 기억도 나는데요. 어거지에 가까워요.

  • 14.07.12 08:35

    @마포대사 이와 유사한 경우가 어떤 것이었냐 하면 한 20년 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인의 후예다!" 거의 황당한 수준의 주장인데 책이 좀 팔립디다..^^!
    저도 샀어요. 거기에 보면 환국의 12지파 중에 수밀이 국이 있는데 이 나라가 지금
    수메르 근방이다. 그런데 어느날 사라졌다. 라고 하면서 시작하여 억측이 나오더군요.
    수밀이구 수메르 비슷하죠. 그래서 상상은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저도 그때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수메르는 국명이 아니라 아키이드 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머리색이 검은 사람들이다. 라는 뜻으로 그 인종을 부른 말이더라고요. 황당하잖아요.

  • 작성자 14.07.12 20:04

    @마포대사 한국인의 국수주의적 시각이 섞인 돌궐비문 연구가 아니라...
    동궐이나 고구려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북유럽인이 연구한거라니 객관성과 과학성은
    우리보다 한 10배 난 연구라 예상합니다.

  • 14.07.12 11:14

    힛타이=키타이!! 이런 관점 이 중요하다는 생각 입니다 / 공자님이 사인육 했다니 금시초문 입니다 하기는 위영공이 자로를 죽여 젓을 담갔고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집안에 있는 젓을 모두 내다 버렸다네요 고대엔 더러 사인육 하는 인간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인간들이 갑자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14.07.12 20:36

    글 잘보았습니다.
    문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베일에 쌓인 역사를 훔처보는 느낌입니다.
    契자에 많은 뜻이 있었군요....
    1,맺을 계 2,애쓸 결 3,종족이름 글(북이(北夷)의 칭호) 4,사람이름 설(고신씨(高辛氏)의 아들.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을 세움)
    궁금한 것은
    1, 상나라를 세운 탕왕의 선조가 契(설? 글?)씨이고(14대선조?) 契은 고신시의 아들로 우(禹)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웠다 하니 우임금의 치수지역과 상나라의 위치는 아마도 같은 지역이거나 인근지역이라 추정할수 있습니다. 우임금은 요순의 뒤를 이었으니 요순시대와 하은주의 역사 강역은 우사공의 치수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요순과

  • 14.07.12 20:37

    하은주의 역사 강역이 현 중원(황하와 그 인근지역)이 아닌 신쟝성이나 중앙아라면 현 중국에 있는 치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나 하은주의 역사와 문화는 모두 왜곡의 산물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 작성자 14.07.13 20:36

    현재 황하나 양자강 하류식의 강 구조와 주변 지형였다면...
    하우씨가 어디(용문)를 뚫어 홍수를 해결하느니의 방식은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중원이란 곳은 신장성지역였으며...타클라마칸과 돈황일대 포창해지역등의 저지대들이 9년 홍수로 수량이 급격히 늘어...신장성 일대가 다 물바다가 돼어...천산과 곤륜산,티벳 파미르지역 고지대들만 섬처럼 떠잇는 형상의 물난리였다 예상합니다.

  • 작성자 14.07.13 20:43

    이 큰물은 감숙성 북단 산대적 저지대를 따라 고비사막의 일부인 파단길림사막들지의 상대적 저지대를 더 근 내륙해로 만들면서...동황,감숙성등지의 산대적 저지대들도 물에 잠기는데...
    현재의 역사 그대로...하우씨든 단군의 제후든 당시의 사람들이...고비사막 횡토고원에서 섬서성 장안일대로 내려오는 물길(龍門)을 내면서...신장성(중국?)의 홍수가 한층 완회됐을 수 있었단 얘기로 해석해 봅니다.
    당시 황하의 상류는...파단길림사막 저지대와 감숙성북부 상대적 저지대 골짜기...포창해와 타클라마칸 타림하를 잇는 라인였다 생각합니다.

  • 14.07.13 22:05

    @궐한 카레스(坎爾井,Karez, 칸얼정 .지하동굴수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칸얼정은 중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만리장성, 남북을 잇는 대운하와 함께 고대의 3대 공청(공사) 중 하나로 꼽히는 수리시설이다.
    2000년 전의 한(漢)대 이미 처음으로 시작되어 그 후인 수나라 실크로드를 따라 발전하여 중앙아시아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 14.07.13 22:06

    @맑은영혼 카레즈(칸얼정)은 지하수를 지면으로 끌어올린 방법으로 만든 수로로서 통계에 따르면, 투루판분지에 칸얼정이 1,237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853개이며 총 길이는 5,000km를 넘는다.
    칸얼정 하나하나가 일반적으로 대략 3 ~ 8km 사이이며, 가장 깊은 곳은 90m 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카레즈가 생긴 것이 무려 2천 년 전이라고 하니 이 척박한 땅에 물을 대기 위해 노력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 14.07.13 22:12

    @맑은영혼 카레즈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곧 그 지역이 과거(2000년전)나 현재나 건조지대인 것 같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그 지역 저지대에 물이 차 있었다면 아마도 그 시기는 역사시대 훨씬 전인 만년이나 그훨씬 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 14.07.12 20:37

    돌궐비문의 발견과 그 해석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돌궐비문에 관한 정확한 해석이 없기 때문에 각 연관된 나라나 종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해설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나라는 중원황제요, 그 중원황제에게서 기자가 나온 것입니다. 기자 이전에도 조선은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록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은나라의 인육이야기는 주문공이 서쪽의 제후중에서 패자로 근림하니, 인질을 요구했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자 인육으로 젖을 담아 문공에게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일종의 충성시험입니다. 이러한 예를 은나라는 인육을 먹는........이렇게 과대포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 작성자 14.07.12 21:43

    인육을 아침저녘 주식으로 먹었단게 아닙니다.
    종종 먹었단 근거들은 나옵니다...별식정도로...
    물론,전쟁이나 권력유지의 공포정치를 위해...의도적으로 자행한 만행일 가능성이 많고요...
    정작, 중요한건...흉로와 흉로계인 스키타이도 그랬단 근거가 많이 나온단 공통점입니다.

  • 14.07.12 20:38

    2, 단군의 초상에 보이는 방떡모자(?)와 얼굴은 분명 우리의 선조에 대한 상식과는 다릅니다. 그 최초의 출처도 어느 독립군의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태극기(?) 책(?)인가에서 비롯되었다는말이 있더군요...어찌되었건 1900년 이후이것 같습니다. 실제 단군의 상이 알려진 그대로라면 그 본향이 님의 말씀처럼 현 천산과 알타이일대라 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지금도 그 문화가 남아 있으니여...하지만 덕흥리 고분의 유주자사 진이란 분도 그 빵떡모자를 쓰고 있으니 방떡모자의 문화가 신장성 서쪽사람들의 전유물인가는 의심이 됩니다. 현 중원이나 그 북쪽에도 그러한 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걸까요 ..? 기자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기자가

  • 14.07.12 20:39

    현 중원의 인물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합니다만....

  • 14.07.12 20:45

    契은 '설'로 고신씨의 아들입니다. 고신씨는 당시 천자였으며, 이 분의 후손들이 중원의 왕조를 이었습니다. 언어의 전음이 토착어, 방언등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큰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도움되는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역사 연구 과정에서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역사연구는 추리나 가정, 상상등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출처있는, 근거있는 이런 글들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14.07.12 21:48

    출처로 기자의 초상화도 올렸고...
    기자간한(箕子可汗)이라 동궐이나 선비족 왕의 명칭으로 기자를 표기한 신당서 내용도 올렸습니다.
    전혀 무근거한 음운학으로만 추리한단건 억울합니다.
    기자가한기록도 후대의 조작...기자의 거란이나 돌궐같은 빵떡모자 진상도 후대의 조자이라 가치없다 할거면...
    도대체 조작않됀 진실의 원본이란 근거들은 누가 어떤경로로 확인해주는 걸까요...?

  • 14.07.13 13:34

    중요한 것은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와 누구에 의해 그려진 것인가? 하는 것이겠죠. 위의 것으로 보면 말입니다. 최소한도 이것에 대한 출처가 없다면 아무런 의가 없다는 뜻이며, 위의 초상화와 같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초상화를 올려서 글을 읽는 분들이 상호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요즈음 조선사를 찾자는 카페등지에서 유언비어식 주장들이 난무하고, 일부 회원들은 그것에 대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등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곳(카페)들이 많습니다. 이런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래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 14.07.13 20:29

    어느 원전이고 그 당대에 쓴 글이 그대로 전해졌다면 종이가 다 문드러져 읽지도 목했을 겁니다.
    선대의 기록과 구전등을 후대가 계속 이어 기록하거나 구전하는게 역사고...그 와중 각자의 계산이 가미돼어 왜곡의 소지도 있기 마련인건 맞으나...그렇다고 원래의 기본부터 허구요 조작였다 할 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들이 전해 필사한 진상이던 어떻든...그 얼굴이 다르던 어떻든 공통되게 나타나는게...돌궐식 빵떡모자란데 집중해야 합니다.
    근세조선의 조작이라면...근세조선인들 같이 상투를 튼 산신령처럼 조작했어야 했는데...
    단군과 기자의 진상이 근세조선인들의 복장이 아님은...상고대의 원전 그대로 베낀것이란 반증입니다.

  • 14.07.14 10:40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진영님, 예전에 환인에서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며 새롭게 세운 나라의 지역과 관련하여
    '기자'의 위치로 이집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는데,
    이 글에서 기자의 세력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현재 입장에서는
    이집트 기자는 기자가 밀리고 밀려 마지막에 근거지로 삼은 지역으로 생각하시는지
    또는 별개인 것으로 파악하시는지 궁금하네요..~

  • 작성자 14.07.14 11:14

    반갑습니다 서선생님...네. 현재까지의 공부결과론 이집트는 기자씨의 직접통치구역은 아니였다 보입니다.
    단지, 키타이(스키타이)의 문명은 이집트까지 미친거고 ..이집트의 왕가계보도 알타이에서 발원한 정황이라 기자씨와 무관친 않은 방계정도로 수정했습니다.

  • 작성자 14.07.14 11:21

    단군조선도 파내류의 동부 동서 2만리의 환국영토내에 없어야 신천지 개국조건이 돼니...
    파미르 이동에는 개국할 신천지는 없는 이치니...카자흐 아스타나 정도가 아사달의 원조지역이라 예상했으나...
    나름 다시 주섬주섬 공부해본 결과...환국내의 영토중에 청해성 기련산맥 정도에 분봉받은 환웅의 자손이 단군이고...이후 환국의 주도권은 이 단군조선과 그 또다른 후예격인 선비계들에 주도됐으며...황웅과 황제헌원도 혈통상 무관치 않고..단지 치우씨가 그 상대적 동쪽 동이계통의 천자로서 황제를 제압하는 역사가 중국의 전설상 시조역사라 해석하는 입장으로 수정됐습니다.
    항상 변하는 논지라서 헤깔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 14.07.15 10:15

    다시 보니
    예전에 대륙조선사 연구회에 관한 언급하시면서
    이집트 기자에 관한 설은 폐기하신다고 하셨었네요.

    제가 요즘 집중력이 떨어져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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