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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學과 韓國哲學
김동환(국학연구소연구원)
Ⅰ. 머리말
Ⅱ. 논의의 전제-국학의 의미
Ⅰ. 머리말
한국철학의 숙원 과제 중 중요한 것은, 한국철학의 의미를 발는 것과 그 철학사적인 전개를 서술하는 일일 것이다. 개인 집필이든 집단 저작이든 이제까지 나온 한국 철학 관련 저작들의 대부분이 우리 고유의 철학적 사유를 건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전개 역시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동안 우리 철학 연구경향을 보면 종적으로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중국 도교가 주류를 이루었고, 횡적으로는 서양철학이 주종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오랜 기간을 중국의 문화적 영향 속에 기대어 온 결과라 할 수 있으며, 학문적 방법론이 도입& #8228;정착한 시기가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과, 해방 후 노도처럼 밀려드는 서구 사조 속에서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 철학의 가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회가 충분히 않았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우리 민족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논점이라 할 단군의 의미가, 신화학적인 해석을 담은 역사 이전의 역사로서도 대접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틀 잡히지 않은 무속(巫俗)의 우두머리인 양 어설피 취급되어 온 것이 우리의 철학이다. 우리 역사 속에 드물게 드러난 화랑도의 정체성을 신라 무속의 연장이나 중국 불교의 토착화라는 허울을 씌운 것이 우리의 철학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보면 중국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의 우리 철학에 대한 접근은 앞으로도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그나마 승랑(僧朗)의 삼론종(三論宗)에 나타나는 인식방법론과 본체론, 원측(圓測)의 유식철학(唯識哲學), 일심(一心)& #8228;화쟁(和諍)& #8228;무애(無碍) 사상으로 나타나는 원효의 통불교(通佛敎)나, 관음신앙& #8228;정토신앙으로 대표되는 의상의 화엄종, 교선합일(敎禪合一)과 전래 무속을 중시한 의천의 천태종,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 #8228;돈오점수(頓悟漸修)& #8228;간화선(看話禪)을 중시한 지눌의 조계종 등에서, 전래된 중국 불교를 한국화시켰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중국 신유학의 수용을 통하여 이동설(理動說)& #8228;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8228;정좌법(靜坐法)과 함께 전래 무속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황의 신유학이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8228;개혁사상을 주창한 이이의 신유학은, 유교를 토착화시켜 한국적 유교의 위상을 높였다는데 의미가 크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운동은 실천유교를 주창하면서 민족의식을 발아시킴은 물론, 우리 민족 근대화에도 일조했다는 평가다.
더불어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는 서구화를 가속화시켜 한국 근대화에 정신적 인 에너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무속에 나타나는 신명(神明)을 흡수함으로써 한국적 기독교 융성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20세기 초 유학자(儒學者) 이정직& #8228;이인재 등에 의해 서양철학이 적극적으로 소개되었고, 진화론& #8228;ML사상 등도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일제하 유럽 유학파들에 의한 서양철학의 도입과, 1926년 경성대학교 철학과의 설치는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철학의 재편과 범람을 예고한 것이다.
아무튼 시간의 흐름만큼 누적& #8228;정착되었어야 할 한국철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인도 철학의 범주(불교)와 중국 철학의 사유(유교& #8228;도교)를 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은, 진정한 한국철학의 의미 구명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가치에 대한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인 동시에, 외래 가치의 혼재 속에 기준 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정신과 학문에 반성과 지남차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철학을 연구함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체적의 와해로 인한 인식의 부재와 역사적 수난으로 인한 자료적 한계라 할 수 있다. 한국 고유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단군 혹은 신교(神敎) 관련 문헌이 대부분 은닉& #8228;유실되고, 남아있는 자료 역시 서지학적인 문제로 홀대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토대로 한 인식의 자세는, 국수적& #8228;주관적이라는 멍에를 쓰고 학문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국철학에 대한 논의의 전제로 국학의 의미규정을 설정해 보고, 그러한 인식의 정체성 위에서 한국철학의 의미와 논리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뒷받침 자료의 인용에서도, 기본적인 자료 외에 서지학적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 신교(神敎) 혹은 선교(仙敎) 관련 자료들에 대해서도 필요에 따라 활용코자 한다.
Ⅱ. 논의의 전제-국학의 의미
어느 집단이건 철학사상의 출발은 신화를 포함한 종교적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동양철학의 근간이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고, 서양철학 또한 고대 희랍사상과 기독교를 떼어 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기존 우리 철학의 서술 양태도, 무속철학을 위시하여 불교철학& #8228;유교철학& #8228;도교철학, 그리고 근대 이후 서구철학 등 다양한 철학이 혼재하고 있다.
까닭에 통일된 한국철학을 서술하는 작업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 한문으로 기술되어 있는 전통철학과 함께 다양한 서구사조로 점철된 서구철학을 동시에 수용해야하는 어려움 때문이다. 즉 전통철학 부분에서도 바람직한 철학 서술을 위해서는 유교& #8228;불교& #8228;도교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점과, 서구 계몽 사상& #8228;사회 진화론& #8228;마르크스주의& #8228;그리고 서양 부르주아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양 사상들이 전통 철학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철학적 관점도, 우선 한국철학이라는 의미 규정을 분명하게 세우지 않고서는 진정한 한국철학의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 역시 집단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충족시켜주는 정체성을 무시 할 수 없는 학문이라는 점과, 그 집단의 속에 녹아 흐르는 타철학들과의 비교& #8228;지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철학을 말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정치적& #8228;경제적& #8228;사회적 경계가 그 의미를 잃어가는 지금, 정신적& #8228;문화적 정체성을 위한 우리의 논리 확립의 필요성과 맞물려 미뤄둘 문제가 아니다. 특히 근자에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의 주도권 다툼이, 단순히 정치적& #8228;경제적 야욕이 아닌 정신적& #8228;문화적 배경, 중국과 일본의 국학적 배경이 강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사조(思潮)와 이념(理念)까지도 동시에 끌어안을 수 있는 우리 논리의 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학이다. 국학이라는 논리는 우리의 세계화를 위한 이론이며, 동북아 어젠다(Agenda)를 위한 우리의 국론(國論)인 동시에, 민족사회의 화합과 통일을 위한 통합의 논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철학을 논하기 위한 전제로, 국학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 규정1)이 필요한 것도 여기에 있다.
1. 국학의 개념
기존 국학의 정의는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2)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 #8228;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3)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위에서는 국학의 본질이라 할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연속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막연한 감이 있고 주변문화의 아류 또는 모방이라는 멍에를 결코 벗을 수 없다. 따라서 국학의 의미규정을 새롭게 정제시킴으로써 진정한 국학연구의 틀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국학의 의미를 정착시킨 일본의 국학을 보면, 에도(江戶) 시대에 발생한 학문으로써 일본의 고대 정신을 토대로 일본의 고전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려는 학풍이라 할 수 있다. 케이추(契沖)와 카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로 시작되는 일본 국학은, 카모노 마부치(賀茂眞淵)& #8228;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8228;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로 이어지면서 사상운동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국학은 학자들에 따라서 화학(和學)& #8228;왜학(倭學)& #8228;황왜학(皇倭學)& #8228;고학(古學)& #8228;황조학(皇朝學)& #8228;황국학(皇國學) 등으로도 불리며 신도학(神道學)으로도 통용되었다. 케이추가 문헌학적 방법을 통해 국학연구의 실마리를 확립한 이래, 아즈마마로는 국학을 신도(神道)와 연관시켜 체계화하였으며, 마부치는 일본 고대가요인 『만요슈(萬葉集)』를 통하여 일본 고대정신을 궁구하고자 했다.
특히 노라나가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써 국학을 집대성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그는 도(道)를 인간의 천성(天性)으로 파악하고,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도는 위대한 신령이 만든 것으로, 천황의 조상신으로부터 천황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리나가는 일반인들이야말로 천황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강조했는데, 국학의 최고 중심에 천황을 연결시키고 있음이 주목되는 것이다.
후일 노리나가의 고도학(古道學)을 계승한 아츠타네에 와서 신비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국학으로 나타나는 배경도 이것과 무관치 않으며, 아츠타네에 와서 일본의 신도가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게 된 것 또한 우연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국학을 이해하는 데는 신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의 국학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사유 속에서 움튼 일본의 문화연구라는 점과 그 중심에는 신도가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4)
중국 근대 국학의 개명(開明)도 일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이나 『수서(隋書)』의 「백관지(百官志)」등에서 국학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천자(天子)나 제후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체계적 개념으로서의 국학이 언급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영향이었다. 근대 중국 학자로서 일본의 국수보존운동에 최초로 주목한 인물은 황치에(黃節)와 량치차오(梁啓超)다. 황치에는 1902년 발표한 글에서 일본의 국수주의운동이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소개하였으며,5) 량치차오는 1901년에 이미 국수(國粹)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고 1902년 황쭌샨(黃遵憲)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민양성을 위해 국수보존을 중요시해야 함을 강조했다.6) 물론 량치차오는 문호를 개방하고 新學을 고취해야 한다는 황쭌샨의 답장 이후, 더 이상 국수(國粹)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치에는 국수보전과 국학의 고취를 잡지 『정예학보(政蘂學報) 』의 중요 방침으로 정하고, 1905년 짱빙린(章炳麟)& #8228;류시페이(劉師培)& #8228;덩시(鄧實)& #8228;류야지(柳亞子)& #8228;첸커빙(陳去病) 등과 『정예학보』의 뜻을 이은 『국수학보(國粹學報)』를 창간함으로써, 본격적인 국수보전운동에 나섰다. 다만 일본의 국학이 편협한 국수적 성격을 가졌다면, 당시 중국의 국학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중국 고유문화의 유산 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일본의 편협한 국학과는 무관한, 우리 순수국학의 의미를 올바로 세움으로써, 포괄적 국학의 의미와 함께 향후 세계화를 위한 창조적 국학의 정립도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찍이 백수 정열모도, 국학이란 민족사상의 발로로써, 국어와 국사를 기초로 하여 민족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학문이라는 것과, 과거의 연구를 토대로 미래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온고지신의 학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7)
그러면 순수국학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먼저 ‘국학(國學)’이라는 단어에 나타나는 ‘국’의 의미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국학’이라는 말은 ‘국(國)’과 ‘학(學)’의 합성어로써, ‘국’이란 정체성을 내포한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의 국가란, 조직체나 지역단체 혹은 통치권력단체나 최고단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영구적 단체라는 성격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영구적 단체로서의 국가란, 단순히 현재의 국민뿐만이 아니라 선조(先祖)의 생명을 받고 후대 자손에게 그 생명을 전할 국민 전체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통일체이며, 그 구성분자인 각 개인의 생명과는 다른 영구적 생활체를 영위하면서 독자적 목적과 의사를 갖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8)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학을 우리의 민족사를 관통& #8228;통섭하는 학문으로서의 고조선학& #8228;부여학& #8228;고구려학& #8228;백제학& #8228;신라학& #8228;발해학 나아가서는 고려학& #8228;조선학을 시대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학문이 되는 동시에, 공시적으로는 체제분단적인 학문, 즉 남쪽의 한국학이나 북쪽의 조선학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학이 될 수 있다. 또한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국학(National Learning)'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개념으로서의 ‘국학(Koeanology)’으로 옮겨가는 근거 기준 역시, 이러한 국가 개념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한편 국학의 개념을 도출해 내는데 있어 국문학의 개념 설정을 원용해 보는 것도 방법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찍이 가람 이병기가 우리 국문학의 개념을 정의할 때에도 순수한 조선문학과 광범한 조선문학으로 구분한 바 있는데,9) 이러한 구분은 국학의 개념 정리나 속성 파악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즉 사상적& #8228;공간적& #8228;시간적 요소들을 고루 갖춘 국학을 순수국학의 의미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안재홍이 협의(狹義)의 조선학을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 것도 이러한 순수국학과 흡사하다.10)
근대 중국 국학의 근간이 되는 국수의 이해에서는 정신적 속성을 특히 강조하고있음이 주목된다. 황치에가 “국수란 국가 특유의 특별한 정신”(앞의 글,「保存國粹主義」)이라고 하여 정신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나, 허치헝(許之衡)이라는 인물이 국혼(國魂)을 내세우면서 한 나라의 국수 속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11) 특히 허숴우웨이(許守微)는, “國粹란 精神의 學이며 歐化란 形質의 學”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의 국수를 서학(西學)과 대비시켜 설명했는데, 국수를 버리고 구화(歐化)를 받아들인다면 허수아비에게 비단옷을 입히는 것과 같아서 중국의 영혼(정신)은 없게 될 것이라고 역시 강조하고 있다.12) 근자에 중국 인민대학 지바오청(紀& #23453;成) 교수가 “국학은 중국 전통학술이며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라고 중국 국학을 개념화했는데, 이 또한 유교라는 정신을 중심으로 국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人民日報』한국발행처, www.einmin.com) 우리 순수국학의 개념 규정에 있어도 많은 점을 암시받을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요소와 주변 정황을 통해 우리의 순수국학의 개념을 간추려 보면, 순수국학이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줄기로 하여 우리 민족사에 연면히 이어온 인문학적 사상(事象)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13) 다만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 #8228;사상& #8228;문화& #8228;풍습& #8228;언어& #8228;제도 등, 우리 순수국학의 줄기에 습합되어 자리 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대별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국학의 범위
이제는 국학의 학문적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넓은 의미로서 국학의 범위는 그 국가의 시& #8228;공을 어우르는 모든 학문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인문학의 토대이면서 응용학문의 정신적 근간이 되는 문(文)& #8228;사(史)& #8228;철(哲)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문& #8228;사& #8228;철은 고전학의 근본인 동시에, 인간의 정신가치와 가장 밀접하다는 것과, 전근대 사회까지 동북아에 국학으로 통념화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무제 당시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B.C 179-104)의 건의에 따라, 일찍이 유교를 국학으로 채택한 바 있다.14) 근대 중국의 후즈(胡適)는 국학을 국고학(國故學)의 약어라고 전제하고 중국의 모든 과거의 문화& #8228;역사는 중국의 ‘고유문화(國故)’로, 이러한 모든 과거의 역사& #8228;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국고학(國故學)이며, 생략해서 국학이라고 정의했다.15) 또한 19세기 서양문화가 중국으로 밀려들 때, 당시 중국 사람들은 서양과 중국의 문화를 서로 대비하여 서학(西學)& #8228;중학(中學)이라 부르거나, 혹은 신학(新學)& #8228;구학(舊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6) 이것은 중국의 국학이라는 용어가 유교 혹은 중국고유의 인문학적 배경 아래서 생겨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근대 중국 국학의 학술관(學術觀)에서도 제자학(諸子學) 중심의 종교철학과 소학(小學)이라 칭해 왔던 언어문자학, 그리고 모든 학문의 중심으로 이해했던 역사를 국학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던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17) 또한 현재 중국 인민대학의 펑치융(憑其庸) 국학원 원장이 국학원 졸업생들에게 문& #8228;사& #8228;철에 능통할 것을 전제로 개인적 특기를 겸비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도,(『人民日報』한국발행처, www.einmin.com) 중국 국학의 범위 역시 문& #8228;사& #8228;철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일본의 국학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만의 문화적& #8228;역사적 유산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써 18세기 국학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일본 국학의 집대성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코지키(古事記)』가 일본만의 독특한 ‘고도(古道)’ 즉 신대(神代)에 예시된 자연 그대로의 유토피아적 선(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으로 더렵혀졌다고 주장했다.18) 이것은 일본의 국학 역시, 일본고유의 신도(神道)와 함께 그들의 문학적& #8228;역사적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짐을 암시하는 것인데, 케이추(契沖)가 『만엽집대장기(萬葉集代匠記)』를 통해 국학의 발단을 마련한 이래 『만요슈(萬葉集)』『코지키(古事記)』『니혼쇼키(日本書紀)』등 문학& #8228;역사서를 통해 일본 고유의 신도정신(神道精神)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일본 국학자들의 대부분이었음이 이를 반증한다고 하겠다.
물론 여기서 국학의 범위를 중국이나 일본 것을 무조건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학이란, 국가를 지탱하는 보편적 근본학이라는 점을 전제로, 응용학문 이전의 순수기초학문, 즉 문& #8228;사& #8228;철을 중심으로 한 학문으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그 집단의 말& #8228;글& #8228;얼& #8228;삶의 토대가 되는 학문으로, 인간 사고의 원형이 되는 학문인 동시에 집단을 지탱하는 원리& #8228;공식이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기초학문을 전제로 한 응용학문은 가능하지만 응용학문을 전제로 한 기초학문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도, 이와 같은 논리에서 공감하게 된다.
또한 인문과학은 사고의 학문으로 전환을 선도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 학문의 국제적 위상과 세계사적 사명에 대한 자각을 뚜렷하게 하고, 보편적인 의의를 찾는 이론의 일단을 그 속에는 이미 이루고 있으며, 경험을 나누고 성과를 확대할 수 있는 학문이 바로 인문과학이라는 주장19)에서도, 문& #8228;사& #8228;철을 중심으로 한 국학의 범위 설정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주변에서는 국학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자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다양화& #8228;다원화& #8228;다지화(多枝化)된 지금의 학문구조 속에서 구태여 문& #8228;사& #8228;철을 고집한다는 자체가 국학의 자폐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염려도 해 볼만 하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사고의 학문으로써 전환을 선도할 수 있다는 것과,20) 그 중심에 문& #8228;사& #8228;철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볼 일이다.
3. 국학의 실체
우리 국학과 관련하여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위와 같은 우리의 국학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학의 근본인 한국정신사의 기본을 세우는 작업으로, 한국의 고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 사상(事象)의 출발이 종교와 뗄 수 없다는 인식과도 밀접하다. 중국 국학의 근본이 유교와 뗄 수가 없고 일본 국학의 토대가 그들의 신도와 별개가 아님도 이것과 유사한 것이다.
일본의 국학이 일본 신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중국의 근대 국학 역시 고학(古學) 부흥을 제창했는데, 중국의 고학이란 유학(儒學)을 포함한 선진(先秦)의 제자학(諸子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1) 이것은 중국의 근대 국학에서도 종교철학적 속성을 강조했음을 확인시켜 주는데, 근자에 중국 인민대학의 국학원 설립이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고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에서도, 현금 중국 국학의 뿌리도 유교에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흔들리는 사회주의의 이념 문제를 중국의 전통 가치인 유교에서 찾아 세우려는 것이다. 근자(2005년 9월 초)에도 200명이 넘는 중국 지도자와 화교(華僑) 학자들이 모여 유학연구대토론회(儒學硏究大討論會)가 벌어졌다. 여기서 도출된 것이 “유학에서 사회 충돌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世界日報』, 2005년 9월 27일자) 즉 중국의 국학도 중국의 전통 종교인 유교의 토대 위에서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사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부분이 토착고신앙(土着古信仰)이며, 그 자체가 중요한 맥락을 이루면서 한국사 전반에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 또한 토착고신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22) 특히 고신앙 방면은 일제시대 민족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배경에도 단군신앙의 영향이 컸다는 것도 주목된다.23) 이러한 면은 20세기 초 단군신앙을 근대적으로 부활시킨 홍암 나 철의 사상 속에 국학의 실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많은 요인이 발견된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나 철의 사상 속에는 국학적 요소인 국어& #8228;국사& #8228;국교& #8228;철학& #8228;민속& #8228;수행 등이 두루 나타고 있다. 나 철의 국학은 사상적 정체성과 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공간적 차별성과 보편적 개방성의 속성을 두루 갖춘 국학으로, 문& #8228;사& #8228;철이 회통되어 나타나는 국학이라는 점에서 우리 국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가치가 우리 고유의 단군신앙 중흥과 함께 성숙되었다는 것은, 나 철 국학의 정신적 배경을 알게 해 주는 동시에, 우리 국학을 말함에 있어 단군 혹은 고유신앙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국학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닫혀 있는 국학이 아니라 열린 국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향후 세계화 시대의 국학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국학을 통해 학문의 보편적 원리와 그 의의를 정립하고, 세계학문의 길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길을 모색해야 하며, 국학을 넘어서는 국학을 해야 세계를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주장24)에도 부합되는 가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무튼 기존 국학연구의 업적이 삼국시대를 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의 시대로 국학의 자취를 재구(再構)해 감에 있어 사료의 빈곤과 재야사서의 문제25)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조 세조의 수서령(收書令)에도 나타난 서책26)들인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8228;대변설(大辯說)& #8228;조대기(朝代記)& #8228;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8228;지공기(誌公記)& #8228;표훈(表訓)& #8228;삼성밀기(三聖密記)& #8228;삼성기(三聖記-安含老元董仲)& #8228;도증기(道證記)& #8228;지리성모(智異聖母)& #8228;하사량훈(河沙良訓)& #8228;문태산옥거인업등삼인기록(文泰山王居仁業等三人記錄)& #8228;수찬기고(修撰企所)& #8228;동천록(動天錄)& #8228;마슬록(磨& #34417;錄)& #8228;통천록(通天錄)& #8228;호중록(壺中錄)& #8228;지화록(地華錄)& #8228;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우리 순수국학의 중요한 맥이 될 수 있는 신교사서(神敎史書)와 연관됨을 상기한다면, 우리 고신앙의 흐름이 험난한 역정 속에서도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끊임없이 흘러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민족적 특징이 고조선 원민족(선민족 proto-nation or pre-nation)27)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민족의 형성사는 고조선 원민족의 형성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민족사회학적 분석이 주목된다.28) 또한 민족국가의 형성은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원민족에 나타나는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지배지역과 지역주민을 끊임없는 정복에 의하여 확대해 가려는 강렬한 운동을 촉발시켜 꾸준히 민족형성으로 팽창해 가는 동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9)
우리 민족도 단군 시대부터 종교와 군대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은 일찍이 최남선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30) 이러한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신채호의 주장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이, 단군시대의 무사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31) 특히 그는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32) 까닭에 그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것이 화랑이라고 극찬했한 것이다.33)
한편 신채호가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을 국학(國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주목되는데,34)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 #8228;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 #8228;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 #8228;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 #8228;이문진& #8228;고흥& #8228;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 #8228;설총& #8228;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 #8228;연개소문& #8228;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국학(國學)과 불학& #8228;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된다.35) 더불어 신채호는 양학(洋學)에 대비하여 국학의 의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36) 그의 국학 의미가 공간적 차별성까지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채호에 있어서의 국학과 국수(國粹)의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용어라는 것도 확인된다. 그는 일찍이 국수의 정신을,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 #8228;관습& #8228;법률& #8228;제도 등의 정신이라고 주창한 바 있는데,37) 이 국수정신의 출발을 단군에 접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 #8228;국어(國語)& #8228;국문(國文)& #8228;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38)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 #8228;국어& #8228;국문& #8228;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 #8228;국문& #8228;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 #8228;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 #8228;사(史)& #8228;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채호가 단군의 선교(仙敎)를 중국의 선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단군선교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종교의 침체를, ‘국수(國粹)의 무너짐’이라고 한탄함을 볼 때,39) 신채호의 국수 혹은 국학이 단군신앙에 연결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박은식도 단군신앙을 부흥시킨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삼신을 믿는 최고(最古)의 종교로 보고 그 신조(信條)가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40)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 국혼(國魂)의 토대가 단군신앙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최남선의 ‘부루교(敎)’나 ‘신도(神道)’, 정인보의 ‘조선얼’ 그리고 안재홍의 ‘한& #8228;& #58960;’이나 ‘태백진교(太伯眞敎)’, 안확의 ‘종사상(倧思想)’과 이능화의 ‘신교(神敎)’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호상은 전래 단군신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철학을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개념화시키기도 했다.41) 따라서 순수국학의 본체 혹은 사유범위를 우리의 단군신앙(神敎 혹은 仙敎)과 연관된 문& #8228;사& #8228;철로 테두리 짓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국학적 요소들이 보편성을 내포할 수 있는가가 문제될 수 있지만, 이들의 국학적 사유에 원동력이 되었던 나철의 개방성을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의 국학의 범위와 연관하여, 배달글(한글)을 국어로 하는 우리의 사회가 언중(言衆)과 민족 그리고 국민이 일치되는 집단으로써 지구상에 보기 드문 언어사회라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역사의 인멸 속에서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이 대신해 온 한국사학사에, 근대민족사관의 틀을 제공한 것이 신교사관(神敎史觀)이라는 것을 더욱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한국의 불교사상이 인도철학의 연장 위에서 성립하고 우리의 유교사상 또한 중국철학의 기반 위에서 의미를 가짐을 볼 때,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한국철학(한철학& #8228;삼일철학)이 단군신앙의 기반 위에서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4. 국학의 속성
우리는 국학이라 하면 국가정체성의 학문 이전에 국수주의적 학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국학 인식의 본보기가 되는 일본의 국학이 국수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42) 그러나 국학의 속성을 파악함에 있어, 그 내적 속성(특수적& #8228;민족적 속성) 이상으로 중요시되는 것이 외적 속성(보편적& #8228;인류적 속성)이라 할 것이다. 내적 속성만 강조된다면 배타적 학문으로 전락할 수 있고 외적 속성만을 지향한다면 이미 국학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국학은 우리 학문의 근본이요 출발인 동시에, 세계학문으로 나가기 위한 토대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43)
기존의 학문풍을, 우리 현금 학계의 주류 학풍으로써 남의 학문 가져와서 자랑하기인 ‘수입학’, 초입 학자들에게 매력적인 학풍으로써 남의 학문 가져와서 나무라기인 ‘시비학’,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국학풍으로써 우리 학문으로 남의 학문 막아내기인 ‘자립학’, 국학을 세계화하는 학풍으로써 우리 학문으로 남의 학문 넘어서기인 ‘창조학’으로 구분한다면,44) 우리 국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자립학을 토대로 창조학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학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궁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타 국가학 또는 민족학들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진정한 세계학을 추구할 때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국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먼저 그 동안 우리 국학에 대한 연구 성향은 국학의 속성을 분명하게 개념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즉 우리 것에 대한 기준이 없이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개념 설정과 학문의 제업적에 대한 나열형식의 탐구, 그리고 역사적 상한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학이 국학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내적 속성인 ‘사상적 정체성’과 ‘공간적 차별성’, 아울러 우리 민족의 형성으로부터 민족사를 관통할 수 있는 ‘시간적 연속성’을 새롭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외적 속성이라 할 ‘보편적 개방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국학은 ‘사상적 정체성’을 내포해야 한다. 사상적 정체성이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성에 근접한 가치로써 타집단(타국가& #8228;타민족)과 구별되는 철학적 사유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 불교가 인도철학의 정체성 위에서 자리 잡은 사상체계라면 한국 유교는 중국철학의 정체성 위에서 체계화된 사유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나 유교는 한국사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국철학으로는 간주하기 힘들다. 철학은 학문 이전의 학문이요 사상 이전의 사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철학분야 수사과정(修士科程) 및 박사과정(博士課程) 교과과정을 보면, 일본유학사(日本儒學史)가 중국철학 속에, 불교사상사& #8228;지나불교사(支那佛敎史)& #8228;일본불교사가 인도철학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45) 한국의 불교나 유교의 정체성 또한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이다. 특히 학문의 정체성 문제가 세계화 시대의 학문교류과정에서는 더욱 중요시될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를 가장 잘 성숙시킨 중국이 불교가 아닌 유교를 국학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나, 불교와 유교가 다양한 문화로 자리 잡은 일본이 신도를 국학의 모태로 세우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숙고해야 할 일이다.
다음으로 ‘공간적 차별성’ 또한 국학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공간적 차별성이란 중국& #8228;일본& #8228;미국 등의 다른 지역 학문과 구별됨을 말하는 것으로, 지역적 차별성보다는 학문적 대상 혹은 방법의 차별성을 일컫는 것이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우리 국학의 의미에 부합하는 학문적 대상을 연구하는 경우는 이 속성에 포함되는 것이요,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라도 우리 국학의 의미에 벗어나는 학문적 대상을 연구할 때에는 이 속성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인종이 어울리는 지구촌사회가 가속화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다.
이것은 철학하면 당연히 서양철학을 생각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타성을 성찰케 하는 기준인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 안목과 해석을 외면하고 서양의 방법론(랑케사관)에만 반세기 이상을 허비한 우리 사학계에도 도약을 위한 또 다른 준거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외래사조에 의해 유린당한 우리 어문학의 현실을 청산하는 데도 중요한 방향타가 될 것이다.
먼저 철학에서는 불교나 도교 그리고 유교의 가치는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의 정체성 위에서 행세해 왔고, 현금에 유행하는 철학풍조도 모두가 정체성이 애매한 서양사조에 불과하다. 지식의 상아탑을 자처하는 대학에서도, 철학과의 의미는 서양철학과를 말하는 것으로 당연시된 지도 오래다. 혹 우리의 철학을 말하려는 식자는 홍두깨나 뚱딴지로 열외되기 일쑤다. 지금의 우리 철학에서는, 우리가 긴 세월을 향유해온 삶의 슬기와 가치를 대변해 주는 논리는 찾아볼 길이 없다. 한 마디로 짐승처럼 생겨나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온 민족이 우리 무리인 것이다. 우리의 철학 현실이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대접하고 있다.
또한 실증사학을 주요한 방법론으로 떠받들어 온 우리 사학계의 문제는, 비단 어제와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치른 우리의 희생 또한 적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중화사관과 식민주의사학 극복을 위한 많은 부분이 그 논리 앞에 밀려났다. 더욱이 주변학문들과의 발전적인 협력연구도 초지일관 빗장을 건 상태다. 그 연구의 외연은 더욱 좁아졌고 정체성 또한 갈수록 모호해 보인다. 일본의 한국사 경시풍조나 중국의 한국사 찬탈 행위 뒤에는, 이러한 우리 사학계의 내조가 한 몫을 했다는 핀잔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언어는 어떠한가. 근자에 미국의 촘스키(Chomsky)가 창안한 변형생성이론이 국내 어학계의 유행처럼 번진 상태다. 변형생성이론이란 연역논리를 토대로 실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문법을 해명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국어의 역사를 모르고도, 문헌고증방법 같은 것은 행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문학비평의 방면에서도 원형비평과 구조주의를 넘어 미국의 신비평과 러시아의 형식주의& #8228;정신분석학적 연구& #8228;마르크스주의문학론& #8228;문학사회학& #8228;수용미학& #8228;해체주의& #8228;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수용되면서, 짧은 한 시대 속에 서양의 이론과 방법 대부분이 우리 문학계에 난립하고 있음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외래의 방법론을 무조건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국학연구의 대부분을 외래의 방법론에 맡겨온 까닭에 창조적 시각을 잃어버린 우리의 안목을 균형적으로 교정해 가자는 의도일 뿐이며, 뼈를 깎는 성찰이 없이는 우리 중심의 학문을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더불어 국학은 ‘시간적 연속성’을 소중히 해야 한다. 시간적 연속성이란 우리의 역사 속에 단절되지 않고 흘러온 우리 것에 대한 통시적 가치라고 규정짓고 싶다. 특히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가치가 유입되어 습합 또는 혼재되어 온 우리의 경험에서는 이러한 연속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건국이 한 번의 조국(肇國)으로 관통하는 당위성을 제시해 줌은 물론, 다양한 외래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융회와 통섭을 가능케 한 사상소(思想素)의 연면한 흐름을 긍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불교로 윤색된 듯한 신라의 화랑도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 불교사회에서 행해진 팔관의례 역시 고구려 동맹이나 신라 토속신앙의 계승의식이 나타나고 더 근본적으로는 단군 시대의 소도정신까지 소급되어 올라간다. 또한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의 제례 속에도 전래의 선가적 정신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근대 국학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신채호나 박은식도 우리 국학의 줄기를 상고 시대로부터 연면히 흘러왔음을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국학의 시간적 연속성에 대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근대문학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전통단절론에 토대를 둔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은 서양 혹은 일본의 영향 속에 만들어진 모방문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전통계승론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이 조선조 실학문학을 계승한 발전적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제 질곡의 시대를 일제식민지시대로 보느냐 임시정부시대로 보느냐도 이러한 시간적 연속성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끝으로 국학의 ‘보편적 개방성’은 국제화를 지향하는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개방성이란, 국학의 집단(국가 혹은 민족)적 속성을 넘어 타집단 학문과의 조화& #8228;지양을 통해 상생의 논리를 추구해 가는 상대주의적 가치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문화& #8228;다종교& #8228;다인종 사회가 보편화되는 추세에서, 국학의 국수주의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세계화 시대의 국학으로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근자에 추진 중인 중국의 국학이 개방성을 중요한 속성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人民日報』한국발행처, www.einmin.com)
우리 민족의 성정은 개방적이요 이타적이다. 우리의 건국이념이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것은 우리 국학의 정체성 속에 인류보편적 속성이 배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국학의 미래지향성의 좌표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국학이 국수적이요 폐쇄적이라는 한계는 이미 경험한 바다. 그들의 군국주의적인 과거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의 욕심 뒤에도 일본의 국학이 상존해 있다. 중국 국학의 중심인 유교 역시, 중국인에 의해 그 폐쇄적 한계가 이미 지적된 가치다. 일찍이 류시페이가 지적한 유가(儒家)의 네 가지 단점 중에서,46) 상호 비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이설(異說)을 배척한다는 지적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현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중화사관의 욕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우리 국학이 중국이나 일본의 국학보다는 개방성에서 앞선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달리 말하면 미래의 국학 경쟁(동북아시대의 논리& #8228;상생적 세계화의 논리)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경험을 보더라도, 불교나 도교 그리고 유교의 전래과정에서 나타난 우리 고유의 정신적 속성은 배타와 대립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가치로 나타났다. 일찍이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우리 국학의 정체성을 풍류도로 규정하고, 그 정신의 운용이 현묘지도로 나타나며, 그 속에 숨어있는 조화적 속성을 접화군생의 가치로 단정한 것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특히 근대 국학의 선각으로 우리 국학의 정체성을 제시했던 나 철의 사례에서도 국학의 보편적 개방성이 잘 드러난다. 나 철은 근대 우리 민족에게 홍익인간의 보편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인물인 동시에 홍익인간의 삶을 몸소 실천코자 했던 인물이다. 나 철의 사상을 국수주의적 방향으로 몰고 가는 학계 일부의 시각도 있으나, 이것은 나 철의 독립운동에만 의미를 두었을 뿐, 사상의 본령을 올바로 보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사상이 오로지 사해일가(四海一家)나 만교합일(萬敎合一)의 인류보편적 성격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