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과 사울왕
삼상15:1-3
(삼상 15:1, 개역)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 15:2,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삼상 15:3, 개역)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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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라!”는 명령은 끔찍합니다.
사적인 감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윗 선에서 “죽여라”고 한다면
밑의 사람으로서는
자아 정체성에 혼란이 오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차가운 기계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식이나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과 사울왕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이고 싶지도 않는 자를
남이 죽이라고 해서
쉽사리 죽일 수가 없습니다.
사울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잔혹한 명령을 내리시는 취지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냥 대충 전쟁에 이기면 될 법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차마 양심있고
양식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어린이 살해’와
‘젖먹이 살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겁니다.
이것은 적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내부에
도저히 남아 있으면 안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이지
사울왕 소유의 나라도 아니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방식의 나라로
이스라엘을 유지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왕을 구한 것이
그 예의 하나입니다.
사울왕을 원했던 그 정신이
실은 이스라엘 내부에 남아 있어서는
않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처음 이스라엘에게 벌어진 사건을
다시 끌어오십니다.
처음 광야에서
난데없이 마주친
아말렉 민족과의 전쟁을
다시 치르게 하십니다.
도대체 거기서
하나님께서 다짐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미리 말씀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서 4:15-16에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상반되는
원칙이 나옵니다.
하나는 율법에 속한 노선과
다른 노선은 은혜에 속한 노선입니다.
즉 율법의 노선은
구원받지 못하는 노선이며
은혜에 속한 믿음의 노선만이
구원되는 자들의 노선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구원받을 자가
자신의 노력으로는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 3자의 개입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민족에게
진노를 마음껏 표현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심정으로
전쟁에 임해야 하는 사울왕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대충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나섭니다.
즉 진노없이
아말렉 민족을 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율법이 진노를 이룬다’는 의미를
사울왕은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않되는 요소가
여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로마서 4:4-8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이냐 행함이냐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운전기사의 운전 실력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속한 겁니다.
가능성이요 확률이요
숙달됨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숙달하면 도달할 수 있는 일은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태가 죽은 상태에서
이삭을 낳은 사라의 출산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믿음의 속한 내용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고,
경건치 않는 자가
자신의 죄를 가리움을 받고
지워지는 현상’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믿음에 속한 일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모든 것이 결론지어지는 차원에서는
로마서 같이 표현될 수 있지만
본문 사무엘시대에는
이 믿음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까?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아말렉 민족이 쳐들어왔습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보이는 차원에서 치르게 하십니다.
전쟁의 승패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아말렉 민족의 군사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들고 있었던 지팡이였습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지팡이를 주목해야만 했습니다.
지팡이가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지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아론과 훌이 지팡이가 내려가지 않도록
옆에서 모세의 팔을 지탱시켜서
결국에는 아멜렉이 완전 패배할 때까지
지팡이를 높이 들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장군을
직접 전쟁터에 투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장군의 활약과
지팡이의 높낮이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를
보게 했습니다.
결코 여호수아 장군은
지팡이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인간적인 노력을
다 쏟아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모세의 지팡이,
아말렉, 여호수아, 이스라엘
이 네 주체들의 관계가
이스라엘 초기부터
정립되어 버렸습니다.
즉 ‘지팡이 자리’가
여전히 이스라엘에 유지되느냐에 따라
계속 이스라엘이 존속되느냐가
판가름 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투를
다시 재현시키므로서
그 지팡이 자리의 은혜를
확인시키려 하십니다.
만약 이 ‘지팡이 자리’를 무시하면
현 이스라엘이
곧 진멸되어야 될 아말렉 처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므로서
지팡이 자리가 지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여호수아 장군이 되어서
인간이 할 도리를 다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오로지 은혜와 선물로만 주시는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에
유지해야 여전히 성도인 것입니다.
참된 교회란
조용한 교회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이처럼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