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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11월 22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 강연
대종경 부촉품 19장 _ 완소남녀 1단 송종원 교우님께서 강연해 주셨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잘 들으셨죠?
최고령 송종원 교우님 수고하셨습니다. 1971년생이네요. (^^)
나이는, 출생은 순서가 있는데 갈 때는 순서가 없고 더 나아가면 마음에는 차서가 없습니다. 본래 없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다.
우리가 마음을 볼 줄 알고, 더 나아가서 차서도 볼 줄 알고, 앞이 나중에 보면 뒤이며, 뒤가 앞이더라 하는 것까지도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할머니이지만 나중에 손자로 오기도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1단에서 헌배 부장을 맡고, 사업부에서는 영상미디어부 부장이고.
아까 종원교우님이 얘기했는데
까페도 원불교 최고고요, 영상도 사실 원불교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안에 내용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도 충분히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 디지털 문화, 옛날에 대종사님 당대에 대종사님 법문하시면 허공에서 소리를 잡아서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다 하셨는데
그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엮어 가는 현재 역사,문화는 특별한 일 없으면 디지털 아래 저장되서
먼 수천년, 만년 이후에도 엊그제같이 초기 교단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작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촉품 맨 마지막 장을 선택하셨네요. 19장.
스승님이 법을 새로 내는 것이나, 제자들이 그 법을 받아서 후래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나, 또 후래대중이 그 법을 반가히 받들어 실행하는 것이 삼위일체가 되는 일이라.
그 공덕이 다름이 없다. 같다. 다르지 않다. 하는 것으로써 해주셨는데 저도 잘 들었고 여러분도 잘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도 있고 배울 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 공자님도 세 사람이 걸어가면 나에게 스승이 될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하셨다.
종원교우님을 통해서 느끼는 바는 많이 있을 것이다. 자기 일에 대한 프로페셔널, 상당한 자부심과 자신감. 그리고 열정과 의지, 최고가 되겠다 하는 것은 종원교우를 지탱해주고 활력을 주는 힘이다.
맞습니까?
그것이 잘못하면 왕자병이라고 할 텐데, 사실은 왕자병이 좀 걸려야 합니다.
왕자병이 없어도 문제입니다.
내가 맡은 분야에 그 누군가가 감탄할 수 있도록 까지 해야 한다.
내가 글을 하나 써서 남에게 줘도 그 글을 통해서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까페 디자인 하나를 할 때도 그 디자인을 보고 처음 들어 온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영상 하나를 편집을 해도 은혜가 되어야 한다.
간식 하나를 장만해도 아, 뭔가 다르구나.
옷을 하나 입어도 저 사람은 참으로 까닭 있고, 품위 있고 매력과 향기가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이것은 대충 대충의 삶이 아니라, 삼학을 들이대서 까닭 있게 사는삶이다.
우리가 엮어서 만드는 것은 나중에 기록이 되고 새로 되겠지만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비교할 때는 불교, 기독교, 다른 교당의 비교도 필요하지만, 비교할 자리가 없는 무등등한 자리가 사실은 우리의 참 자리이다.
좋다고 할 것도 넘어선 정성과 극치가 들어가 있는 그 자리, 능한 것 같으면서 졸하고, 기가 막힌 것 같으면서 평범한 우리의 문화적 소양, 그 맛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부촉품은 당부한다는 부와, 촉구한다는 촉 자입니다.
아까 종원교우가 말했듯이 수심결에도 지눌스님의 부촉의 내용이 있었다.
대종사님은 부촉품에 정산종사님은 유촉편에 하셨다.
젊을 때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막연한 미래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저도 살아 보니까 제가 모시고 공부했던 스승님들이 다 돌아가셨다.
금방이예요. 여러분들도 사실은 어느 새 제가 죽어있을 겁니다. 저 양반은 안 죽을 것 같고 나도 안죽을 거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갈 수도 있고요.
하여간 의외로 먹고 자며 이 시간 저 시간을 빼고 나면 금방 가는 것입니다. 언제가 우리가 맞이해야 할 일이 아닌가.
정말로 순간순간을 알뜰하게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이 법을 내었다, 하는 것은 바로 제법주이다.
제법주가 되려면 최소한 출가 이상이 되어야 한다. 출가 이상이면 법을 낼 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교리에 정통하여야 한다.
그리고 출가위는 어떠한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하더라도, 천신만고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과 죽을 경지를 말한다.
그래도 이 법을 떠나지 않고 은혜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출가위이다.
함지사지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인선진님들이 만든 것이다.
울컥하는 심경의 사무여한이 아니라, 죽어도 다시 죽음이 없는 자리를 알기 때문에 사무여한의 자리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출가위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서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는 것이다. 출가위는 나라는 국한을 넘어서서 온 우주 전체가 나와 둘이 아닌 것이다.
이순신은 임금보다도 국한이 더 크다. 자기에게 죽음을 내린 임금에게 용서와 아량을 베풀 수 있는 것이 바로 출가위의 심법인 것이다.
간디가 영국 사람들에게 대항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도 우리 식구 아니냐 한 것은 바로 국한이 넘은 출가위 심법이다.
그런 분들은 대소유무를 알아서 법을 짤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공덕이 얼마나 큰가.
더구나 과거 성자들은 지역의 민심에 맞게 법을 내셨지만, 우리 대종사님은 정전을 내놓으셔서 세계의 어느 사람에게 내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여 주셨다.
그리고 그러한 법을 만난 우리들이다.
대종사님의 법을 내놓은 공덕은 우리가 머리로 짚신을 삼아도 갚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법을 낸 스승님에 대한 보은의 삶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삶인 것이다.
천지보다 더 큰 은혜가 바로 스승님의 은혜이다. 성자가 나오지 않으셨다면 인생은 빈껍데기인 것이다.
약육강식에 인면수심 살육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성자들이 나왔기 때문에 비로소 도덕이 나오게 된 것이며 서로 나누고 베푸는 것이 있었다.
성자들이 내놓으신 법률의 은혜는 그와 같은 위력이 있었다.
성자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성자는 부모은에도 해당되며, 법률은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그런 법을 만나셨다.
지금 이 세상 물질이 얼마나 개벽되고 있는가. 개벽이 되니 서로 윤기가 흐르고 도와주고 그러한가?
여러분 미국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미국은 현재 상태로는 거의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달러를 막 찍어내서 막 풀어내잖아요.
100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4배를 가져다가 쓴 것이다.
이것이 뭐냐면 덩치 큰 미국이라는 존재가 설마 부도가 나겠는가 하는 착각을 하고 살았다.
그 머리 좋다는 통계하는 사람들이 보험회사나 금융회사에 들어가 다 분석하는데 그 근간이 법에 바탕 하지 않고 양심에 바탕 하지 않고, 진리에 바탕 하지 않고, 욕심에 바탕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국은 성자들이 내놓은 법을 우습게 생각하며, 머리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가치와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잘 생각하기 바란다.
두 번째는 전하는 길이다.
교화죠.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아무리 그 사람이 큰 일을 해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회사가 좋은 물건을 잘 만들어 놓아도 홍보하지 않으면 물건이 팔리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교화하는 공덕, 그리고 교화를 위해 돕는 불사는 대종사님이 법을 내놓은 공덕에 적지 않으며, 목숨을 바쳐서 할 만 하다.
굳이 내가 법을 새로 낼 필요 있는가? 대종사님이 낸 법에 할 필요가 있다. 신심으로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깨치는 것 아닙니다. 서원으로 깨치는 것이다.
전하는 것도 신심과 서원이 있어야 법을 알아보고 전하지.
그런데 거꾸로 요란해지면 어리석어지고 글러지기도 하지만 어리석기 때문에 요란해지고 글러지기도 하는 것처럼
내가 깨쳐서 전하기도 하지만, 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깨치기도 한다.
제가 군대에서 일주일에 한번 하는 군종. 불교 진행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중대에 불교 진행을 할 사람이 없어 제가 맡게 됐다. 그 때에 대종사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떤 스님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해 주었다. 그때 출가 전이죠.
그 때 느낀 것이 뭐였냐면 제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밑에 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은 못 참았었다. 그때는 군대에서 많이 맞았습니다.
밑에 아이가 잘못한 적이 있어서 혼을 내려다가 아, 나의 형식이 나의 내용을 조절하기도 하는구나.
내가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자로서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제가 당구를 하는데 150 쳤는데 200을 치려고 하니 치게 되더라, 250을 치려고 하니 250이 되더라.
아, 대통령도 자리에 들면 오바마도 47세밖에 되지 않지만, 대통령 자리에 드는 순간 바로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때로는 부족해도 하다보면 채워집니다.
대산종사님 당대에 법위사정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은 출가위가 아니된 것 같다고 하니, 대산종사님께서 채우라고 하셨다. 채우다보면 채워지는 것이다.
마음에는 그 정도의 위력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법을 체받아서 전하는 것은 나는 소극적이예요, 나는 얼마 안됐어요, 나는 재가인데, 나는 바쁜데 이게 아니라 하다보면 그 속에서 역량이 생긴다.
교회 간 사람은 어제 교회 간 사람이 바로 교화활동에 뛰어든다.
우리 원불교는 내가 성불도 안했는데 어찌하냐 하는데, 성불하면 제중 안할 수 없고, 제중 하면 성불 안할 수 없는 것이 원리이다.
성불을 일단 한 다음에 제중 하겠다 하는 사람은 절대 성불하지 못한다.
대종사님께서도 그 무식한 사람들을 일제 초에, 석 달 훈련마치고 교무로 내보냈다.
저는 사실 원불교 출발하기 전에 교전 6번 봤지 사은도 잘 몰랐다. 서원도 잘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다. 원불교 가도 정전 이렇게 공부할 기회 많지 않아요.
대종사님 같은 공덕을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 법을 받아서 전하면 된다.
깨치지도 못하고 전하려 하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양비론으로 부정적 생각으로는 오히려 맞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키워쓰고 살려 쓰고. 하다보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잘하겠는가.
하다보니 역량이 터지고, 쭉쭉쭉 나아가는 것이다.
대종사님 그러셨잖아요. 우리에게는 누구나 무궁한 보물과 조화와 묘리가 이미 갖춰져 있다. 그런데 왜 빌어먹고 다니냐. 다 갖춰져 있는 것이다.
뭐, 저는 처음부터 잘했나요? 아니다. 저 그리 똘똘한 사람 아니었다.
제 친구들 다 좋은 직장에, 다 잘났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다르죠.
지금은 그 친구들이 내게 달려든다. 누가 죽어가고 그러면서 오히려 저를 막 자랑하고 다닌다. 원불교에 출가한 친구가 있다고.
아까 종원교우님이 많이 강조한 것이 그 법을 반가히 받들어 실행한다.
반가히 받드십니까?
오죽 했으면 출가 전에 출가를 망설이던 것이, 오히려 감동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기쁘더라고.
여러분 훈련 나고 헌배하거나 때로 기도할 때도 그렇지만 정말 착하게 되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인정할 때, 내가 전력할 때 나에게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예술인이 감동을 줄 때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이다. 따로 놀 때가 어색하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어색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억지로 받들어서 마지못해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삼아서 하는 것이다.
우리 종원교우님에게 큰 장점이 있는데 바로 한번 하기로 하면 하는 것이다. 혜향교우도 그렇다.
그런 사람은 그러한 고집을 잘 쓰면 아주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못 쓰면 똥고집이 된다. 하기로 한 것은 해야 하는데 거기에 자꾸 핑계와 조건이 들어가면 안된다
우리 종원교우는 헌배 하기로 했으니 하고, 사경 하기로 했으니 하고 영상 책임졌으니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영상에 대해서 걱정이 없다. 내가 할 때마다 불안하여 보라, 교무 하겠는가.
그 하나 자기가 맡은 것을 책임짐으로써 얼마나 큰 공덕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자세에서 내가 맡은 것을 내가 최대한 프로페셔널하게 해 나간다, 하면 그 속에서 역량이 터지고 거기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고 큰 보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산종사님이 앞에서 마당 쓸고 있는 어린 간사에게 네가 지금 세계 일 하고 있다고 하셨다.
각자 맡은 분야 하는 것이 바로 천지은이지 다른게 아니다. 그리고 내가 힘이 좀 남으면 공도자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누가 안도와 주겠는가.
사람들이 무식해서 안도와주면 사은님이 반드시 도와준다.
거꾸로 적당히 하고, 하다가 말면 될 일도 안될 뿐만 아니라 주위에 시샘에 사은님도 안도와 주신다.
여러분들 원불교를 믿는 사람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사은님이다.
사은님은 미운 일 할 때도 감싸주긴 해요. 때로는 냉정하다. 안한 것은 안도와 주신다. 그것이 은혜고 인과이다. 한 것은 하게끔 도와주신다. 그것이 진리이다.
안한 것을 도와준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죠.
그 누가 봐도 진솔하게 한다면 어찌 안도와 주겠는가.
내 안의 내 자성자리가 감동한다.
아까 따라올 수 없는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게 프라이드죠.
내가 어떻게. 그럴 필요 뭐가 있어요. 내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겠죠.
하다못해 옛날에 어느 교무님이 교무 발령 받으며 가면서 나는 법력도 없는데 천도재는 어떻게 지내나요 했더니
야, 대종사님이 내놓으신 법으로 정성으로 해라. 정성이 법이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뛰어난 역량이 있는 사람도 대충하면 일이 안되고, 설사 역량이 부족해도 정성으로 하다보면 역량이 트이고, 주위사람들이 도와주고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고.
아주 빼어난 예술 작품도 알고 보면 정성 속에서 꽃이 피는 것이다.
잔머리로 하면 안된다.
옛날에 어떤 화가가 기가 막히게 그림을 그려왔어요.
어떤 그림이냐, 아버지가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아주 능한 사람이었다. 심사를 해서 제일 좋은 그림이라고 임금께 갖다 주니 임금이 딱 보더니
아니다, 왜그러냐 정말 잘그렸다. 하지만 아니다.
왜, 너희 아버지가 너 밥 먹여 줄 때 어떻게 하는가. 정성으로 그린 사람은 ‘아-’ 하고 아버지가 입을 벌린 모습을 그린다.
설사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 모습을 그린 사람이 1등이다.
정성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정성을 성즉성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가장 정성스러운 것은 천지요, 이보다 정성스러운 것은 성인이다. 그것이 성자이다.
정성 속에서 꽃이 피고, 무궁한 조화와 묘리가 나오고, 기적이 나오고 안되는 일도 되어버린다.
옛날에 한겨울에 기도정성에 잉어가 솟아올라오기도 한다. 철이 아닌 시절에 효자가 약초를 얻기도 한다.
정성을 들이대면 상상을 초월한 기적과 이적이 나오는 것이다..
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기러기떼가 함께 브이자를 그리고 날아갈 때 너희들 가라. 나는 혼자 간다. 그러는데 그게 몇 배나 더 힘든 줄 모른다.
뭔 이야기이냐. 교당에서 교육과 훈련으로 법열이 충만한 교당.
헌배와 사경으로 그리고 주위 인근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고 교화 모델을 한번 만들어 보자.
교화모델 교무님 만드시죠. 아니죠. 내가 내 나름대로 모델을 만드는 거죠.
함께 배를 탔을 때 함께 하면 참 수월하다.
헌배도 마찬가지이다. 헌배를 집에서 할 때는 300배, 500배 못하는데 함께하면 처음 온 사람이 천 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함께 할 때 상상할 수 없는 기운과 협력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아무리 악독한 사람도 법당에 들어오면 싹. 사그러져 버린다.
그래서 교당 식구들이 가능하면 비전을 세워서 헌배하고 사경을 하겠다. 훈련을 하겠다. 그런데 너희들 해라. 나는 안한다.
헌배와 사경 놓고 디지털 시대에 웬 몸으로 하는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우리의 신앙이 관념과 이론과 어떤 생각에만 멈추면 안된다.
그걸 내가 손과 발로 허리로 몸으로 해야지 신앙의 체험. 수행의 체험이 나온다.
생각하지 못한 그 맛을 느낀다.
헌배만 해도 부처님 소리가 나온다. 얼굴만 봐도 도인이다.
그 사람들 헌배 전에 그런 소리 안한다.
일기를 써보면 알아요. 일기를 기재해 놓으면 나중에 보면 내가 그 때 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까 기독교인이 2시간 했다 뭐 그런 얘기를 했는데
천주교는 하루에 5번 기도한다. 수녀님들 꼭 가서 기도 합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에누리 없다고 하죠. 딱 시간이 되면 딱 기도한다. 불교도 오전 오후 딱 정해서 한다.
오히려 일상 수행인 원불교는 아침에는 바빠서 못해, 저녁도 바빠서 못해. 어쩔것인가.
그래서 제가 제시해 준 것이다.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헌배랑 사경해라. 양도 알아서 조절해라. 내 형편에 맞게 해라.
우리가 생각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종원교우가 말했듯이 실행이 나투어 지도록 해야한다. 기본적으로 하루 일과에서 상시훈련을 통해서 나투어져야 한다.
저도 할 만큼 다 해주었다. 좌복에 CD에 비전선언문까지 하고, 헌배 수행의 밤도 하고, 그 정도 하였으면 된 것이 아닌가.
아직도 하다 말다 한 사람이 있다면 못한 사람이 있다면 횟수는 강요하지 않으므로 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그 공덕이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종원교우님 칭찬 하나 해드릴 것이 있다.
아 내가 착한일 해야 겠다 한 것이 아니죠.
내가 담배꽁초를 주운 것에 대해서 사은과 연관을 시키죠. 천지에 은혜가 될까 안될까.
그리고 영상을 하나 만들어도 연출한 감독의 세계관 가치관을 대종사님 법으로 분석해서
저 사람은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을 반어적으로 표현해서 달콤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우리 원불교 시각으로 보니 대소유무 이치를 보면 다 기쁜 것도 절망적인 것도 하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원불교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저런 사람이 이제 영화를 만들면 원불교라는 용어가 안 들어 갔어도 많은 사람에게 대소유무의 진리가 느껴지도록 만들 수 이다고 봅니다.
우리 현우같은 경우에, 얼마 전에 좌산상사님께서 육사에 찾아 가셔서 교장을 만나 원불교 법회를 만들게 해 달라고 하셨다.
좌산님 직접 원광 중고등학교에 전화하셨다. 내년에 육사 15명 들어간다니 그럼 법회 만들 수 있다.
우리 좌산상사님 대단하시다. 30년을 해놓으신 것이다. 30년만에 그것을 이루어내셨다.
지금 현재 원불교에 국방 문제 해결은 좌산님 아니면 성공 못하셨을 것이다.
기어이 되게 하시는 양반이시다.
원산에 법 통과하게 만드시고, 논산에, 그리고 하사관 학교, 각 부대에 책을 집어 넣으시고 이제는 육군 사관학교다. 이 안에서 후에 장교, 국방장관, 대통령 누가 나올지 모른다.
그걸 다 생각하시는 것이다.
우리 현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1학년이니 어떻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 보세요. 딱 4년 전에 내가 대통령 되고 싶다 하여 정계 들어서서 되었다. 하버드 편집장도 흑인 최초로 하였다.
그 연설한 내용을 보니, 별거 아니다. 남자도 여자도, 흑도 백도 아니면 중간도 미국이라는 곳 내에서 모두 하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라고 한다.
우리는 더 큰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세계적 종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대종사님 법 안에서 분석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종사님 법 안에서 작은 욕심이나 소아주의적 사고, 나태의 생각을 하였다면 그것은 대종사님의 법을 만난 깊은 기쁨에 합류하지 못한 것이다.
짧고 굵게 살겠다는 사람 싫어한다고 하셨는데 길고 굵게 산다.
돌아가신 교무님께서 사무여한은 그런 것이여. 죽을 마음으로 일하면서 오래 사는 것이다. 그러시더라고요. 교사 공부할 때에.
길고 굵게 살라는 것도 이생을 놓고 살아서는 안된다. 영생을 보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영생을 굵게 살자, 그런 교법에 바탕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소아주의와 대아주의로 살 때, 관계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면 소아주의로 살 때는 자기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잠시의 기쁨과 위안, 편안함이 있을지언정 소아주의를 잘 보면 자기가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불안감은 가중되고 진리가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아주의라는 큰 뜻을 가지면, 우리는 일원주의는 대세계주의라고 하였다.
대아주의이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나의 전공과 파트를 살려서 보은하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면 내 스스로도 떳떳하고 알아서 사은님이 도와주신다.
여러분은 어쩌든 저쩌든 한국만을 아시아만을 위한 삶도 아니고 대세계주의 법을 만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큰 일 하셔야 한다.
그런데 아직은 힘이 적으니 내가 교당에서라도 또는 맡은 것만은 잘 하자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 그 마음. 내 본래의 마음.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요. 이 마음 실현하고 살자는 것이 대종사님 뜻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며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과 답변
질문 : 박원허 교우님
부촉품 6장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요.
본인이 어떤 공부를 하다가 심히 만족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경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만족하다가 내가 이정도 하면 되겠어, 하고 나태를 부리게 되면 중근병에 떨어지게 되는거 같은데. 6
장에서 중근병을 해결하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 구체적인 대안이 뭐가 있을지 궁금하다.
답변 : 교무님
내가 약해졌을 때는 타력에 의존하라, 그리고 내 자력에다가 들이대라고 하셨다. 서원을 반조하고, 그러면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라.
중근병을 통해서 중간에 거꾸러진 사람이 많음도 알라, 그 사람이 최후 말로를 어떻게 마치는지 보라,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관념 유희에 그칠 수 있는데, 나에게 다가오면 피부에 다가오고 절박해 지고 절실해 집니다.
60대 넘어가는 교무님들께서 많이 그런 말을 하세요.
내가 법이 좋아 이 일생을 다 바쳤는데, 그래도 다르더라. 60이 넘어가니 다 다가오더라, 다 피부로 다가오더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언제 피부로 다가오느냐 그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저는 20대 중반에 이미 생사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다. 행복을 고민하고, 나는 죽을 때 어떻게 웃으면서 눈감고 죽을까. 잠도 안자고 고민했고 그러다 보니 이런 삶을 살겠다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 멀리 있다고 한 사람은 이후에 절박해진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빨리 철들어 공부하느냐가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살 수 있냐를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피부로 생사의 문제 등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가,
그 속도와 간격이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가 하는 것에서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얼마나 은혜가 되느냐 안되느냐가 결정된다.
내가 70먹어서 피부로 느꼈다. 그럼 다음 생에도 똑같은 쳇바퀴 돌 것입니다.
지금 법문을 듣지만 원불교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소득과 많이 다닌 사람이 느끼는 소득이 달라질 것이다.
내 국량의 크기 지혜의 차이, 신심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진다.
질문 : 김현우 교우님
초반에 겉모양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기가 부족하지만 그 자리에 맞게끔 바꿔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일면으로 다른 곳에서 보면, 해탈이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후줄근하게 다니기도 하는데 겉모양을 중시하는 것과 후줄근하게 다니는 것,
어느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 교무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외수 같이 하고 다니는 것, 법정스님 같이 사회를 등지고 있는 것 어느 것이 낫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도란 것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면서 첫째는 사람에 근간해야 한다.
원불교의 특징은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이다. 몇 사람만 갈 수 있는 길이며 몇 사람만 특이하게 가는 길이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대종사님을 보면 후줄근하게 다니지 않았다. 대종사님께서 길을 가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다 아니라고 하였다.
대 자리에 빠진 사람은 그럴 수 있으나 대소유무를 다 깨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형식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대이다. 그러나 내 몸은 철저하게 소 자리에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황 속에서 운용하는 것이 유무자리다.
과거 종교의 모습들 속에서 대도란 어떤 것인가.
과연 우리 모든 국민이 법정스님처럼 살면 되겠는가.
법정스님이 정말 소중한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시며 나는 너무나 존경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법정스님처럼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그 길이 바로 사은사요 삼학 팔조의 법이다. 그것이 일원대도다.
오죽하면 대종사님께서 산에 가서 뱀을 부르는 사람을 보고 웃기고 있다고 행각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원불교 사람들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고 하였다. 그 판단을 여러분들이 하셔야 한다.
그래서 어떤 형상을 볼 때에도 대소유무로 판단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대소유무를 알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고, 사람이 원만해지고 묘한 매력이 풍겨 나오게 된다.
질문 : 박만오 교우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이 은혜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다.
맡은 바 소임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은혜가 되는 것은 알겠는데, 언제나 그러하겠는가.
예를 들어 히딩크가 축구선수일 때는 그렇게 인정을 못 받았다, 그런데 자기가 맡은 바 소임이 축구선수라 믿고 쭉 밀고 나갔다면 보통 축구선수로 은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맡은 바 소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헷갈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변 : 교무님
좋은 질문이다.
마음의 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히딩크는 축구는 제대로 못했다 할지라도 지속적인 연구와 그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계속 커나간 것이다.
우리가 공부한다는 것은 대 자리를 깨치고 소 자리는 밝히고 유무자리는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업하고도 연관이 있어요. 전생에서 해 온 것은 수월하다.
우리가 정각정행이라 하는데, 정각에서 먼저 정견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견하기는 힘들다.
그럴 때에는 솔성요론에도 나오죠. 열 사람의 법을 물어봐서 제일 좋은 법을 믿는다.
나 스스로를 객관화 시키려는 노력, 나 스스로 문답하거나 스승에게 또는 동지들에게 자문자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다 하는 사람에게 공부에 취미가 없지만 효심으로 공부하라,
이걸 잘하는 사람이 어지간하면 저거 잘한다. 이걸 못했어도 저걸 잘했다면 그건 그 안에서 마음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원리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소 자리에서는 자기가 해 왔던 것을 안 만나면 터덕거리기는 한다. 그러나 마음에 힘이 있으면, 우리 요훈품 1장에 보면 만사가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이다.
마음에 힘을 갖추고 하다보면 자기 것을 알아서 스스로 찾아가기도 하고 만들어 가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수만 생을 살면서 어찌 한 가지 일만 했겠는가. 많은 일들을 해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초반에 그것을 잘 선택해야 한다. 아까 대학을 선택할 때 잘해야 한다. 그런데 대충 해놓고 나중에 책임지려고 바꾸려 하니 힘든 것이다.
첫댓글 은전교우님~!! 감사합니당~~ㅎㅎ
감사합니다~~ 못생긴 사진 지워주삼~
아.... 이런 공덕을.... 감사합니다 은전교우님 ^^
앗 '''' 제 이름이 이현우로 나왔군요
죄송합니다. 수정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