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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28)이입사행~이판사판~인연~일념왕생~일주문~입측의례
375. 이입사행 (理入四行)
2입4행은 달마대사의 저서로 불도수행은 이치적으로 먼저 깨쳐 들어가서(理入),
사실적으로 행(行入)을 하여야 하다고 해서
이치 ‘이(理)’자와 행할 ‘행(行)’자로 즉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이입(二入)이라 하고,
사행(四行)은 그 사실적인 행이
첫째 전생부터 맺혀있는 원한을 푸는 보원행(報怨行),
둘째 인연을 따라주는 수연행(隨緣行),
셋째 구하는 바가 없는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법답게 행동하는 칭법행(稱法行)이 그것이다.
376. 이차돈 (異次頓:506-527)
이차돈은 신라의 순교자(殉敎者)로 거차돈(居次頓) 또는 처도(處道), 염촉(厭觸)이라고도 했다.
성은 박씨이고 아진종(阿珍宗)이었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인 법흥왕(14년:527년)이 호승(胡僧) 아도(阿道)가 왔을 때
왕이 불교에 관심을 갖고 절을 세워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불교를 백성에게 알려
대흥(大興)하려 하나 여러 신하들이 불가하다 하여 왕(법흥왕:514-540)이 주저하였다.
그때에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이 여쭈어 아뢰었다.
“소신의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정하옵소서.”
왕이 말했다. “불도(佛道)를 일으키려 하면서 무고(無故)한 사람을 어떻게 죽이겠느냐?”
왕이 대신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니 모두 말하였다.
“승려들은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며 말이 야롯하니 상도(常道)가 아닙니다.
만일 이 도를 행하면 후회(後悔)가 있을 터이니 신들은 왕명을 받자올 수 없나이다.”
이차돈은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고야 비상(非常)한 일이 있는 것이라, 불교는 깊고 오묘한 것이니
믿지 아니 할 수 없나이다.”
왕이 이 말에 신하와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일치하거늘 네가 어찌 딴말을 하느냐?” 하고 옥졸에게 명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때 이차돈이 맹세하며 말하기를,
“내가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사오니, 불법이 신령하오면 내가 죽은 후에 기이한 일이 있으리라.”
그리고 목을 베니 흰 젖이 솟아오르고 천지가 캄캄해지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군중들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감히 불법을 훼방하지 못하였다. 속전(俗傳)에는 목을 찍으니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경주) 꼭대기에 떨어지고 뒤에 그곳에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다 한다.
817년(헌덕왕 9년) 국통(國統) 혜융(惠隆) 등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고
흥륜사 영수(永秀)는 이 무덤에 모여서 예배하는 향도(香徒)들을 결속하여 단(壇)을 만들고
매월 5일에 영혼을 조상하였다 한다.
377. 이참과 사참 (理懺과事懺)
참회(懺悔)의 뜻을 살펴보면 ‘참’은(懺) 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청하는 것이고
‘회(懷)’는 ksama의 의역으로 후회하는 것이다. 즉 남에게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안합니다.’ 라고 하는 경우에는 ‘ksamyatam’ 이라고 하고 ‘제가 저지른 죄를 참고 견디어 주세요.’ 라고 하는 뜻으로 저지른 죄를 부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이참(理懺)’은 보편적(普遍的)인 진실의 모습을 관상(觀想)하는 이성적 참회를 말한다.
즉 이치적으로 참회하는 것이니 모든 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몸과 입과 뜻을 통해 나타낸다.
그런데 그 마음이 본래 비어 있으므로 빈 마음속에서 나타난 죄 또한 참회하면 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마음 이 첫 번에 비어지면 이것을 진짜 참회라 한다.
‘사참(事懺)’은 이참의 반대말로 찬탄, 예배, 송경 등의 규정에 의해 참회하는 것으로
신, 구, 의(身,口,意)의 행위로 몸으로 부딪치며 참회하는 것이다.
즉 사실적으로 참회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지은 죄라도 몸으로 예배하고 입으로 경을 외우며 참회하고
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불사를 하여 그를 기념으로 남기면 다음 다시 죄를 짓게 될 계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보고 깨우쳐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율장에 나오는 참회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시방의 불보살을 영접한다. 2) 경과 주문을 암송한다.
3) 자기의 죄명을 말한다. 4) 서원을 세운다.
5) 가르침대로 증명을 받는다.
378. 이판사판 (理判事判) ☀불교에서 나온 말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을 뜻하는 말로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한 말>
한자말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붙어서 된 말이다. 그리고 이 이판과 사판은 불교 용어로서
조선시대에 생성된 말이다. 조선은 건국 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하였다.
이것은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건국에 신흥 유학자
사대부 세력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불교는 정권의 교체와 함께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천민 계급으로 전락한
승려들 또한 활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찰(寺刹)을 존속시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불법(佛法)의 맥(脈)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는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雜役)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하였다.
한편으로 이와는 달리 은둔(隱遁)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를 두고 앞의 것을 사판, 뒤의 것을 이판이라 하였다.
결국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현대 불교가 융성한 것도 이 두 부류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이 이판사판의 뜻이 전이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태였다. 승려는 최하 계층의 신분이었으며,
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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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판사판 해보자” 물불 가리지 않고 다툴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가 이판사판이다.
일을 처리할 때 순리대로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일반 사전에는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을 뜻하는 말로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이판과 사판을 합쳐 이르는 불교용어이다.
이판((理判)은 세속에 나오지 않고 참선수행(參禪修行)하며 정진하는 스님들을 가르키고
사판(事判)은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스님들을 나타낸다. 즉 이판과 사판은 불교를 유지하는 근간이었고
수행자들을 모두 일러 나타낸 말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 나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 억불정책(抑佛政策)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님들을 비하(卑下)하고 불교를 폄하(貶下)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용어가
세속에서는 나쁘게 자리 잡은 것이다.
379. 인가 (印可) ☀불교에서 나온 말
스승이 제자의 깨달은 마음을 증명하고 인가하여 법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선종사(禪宗史)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가섭존자만을 인가하여 그 징표로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28대 달마 조사를 거쳐 33대 혜능조사까지 전래되어 왔다.
혜능조사 이후 의발(가사, 발우) 전수(傳受)가 폐지됨과 동시에 인가하는 제자의 수적인 제한도 함께
없어지게 되었다.
380. 인과응보 (因果應報) ☀불교에서 나온 말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는 말로 흔히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한자성어이자 불교에서 유입된 불교용어이다.
인과응보 란 인할 인, 과보 과, 응할 응, 갚을 보. 사람이 짓는 선악의 인업에 응하여 과보가 있음,
또는 행한 대로 업에 대한 대가를 받는 일. 다른 말로는 좋은 인연에는 좋은 과보가 오고,
악한 인연에는 악한 과보가 온다는 뜻 입니다.
⌾불교사전에는
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있다는 도리.
그릇된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나쁜 과보.
그릇된 행위를 저지른 대가로 받는 나쁜 일. 이라고 합니다.
즉 뿌린대로 거둔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게 된다.
왜냐 하면 이것이 인생의 수레바퀴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을 종교적 관점에서 풀어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즉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 말과 행동들은
인(因)이며 이것들은 나중에 어떤 연(緣)을 만나 그에 상응하는 과(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연과(因緣果)이다.
<불설삼세 인과경>에서는 ‘만일 전생 일을 묻는다면 금생에 받고 있는 고통이 바로 그것이요,
만일 미래의 일을 묻는다면 금생에 짓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윤회의 틀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바로 불교의 관점이다.
381. 인드라망 (因陀羅網)
고대 인도의 다양한 신 가운데 인드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들의 제왕이었다.
큰 두 팔과 무성한 수염 등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인드라는 윤리적, 지적인 면에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하늘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한 무기는 인드라망이라 일컫는
커다란 그물이다. 그물의 크기가 하늘을 다 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일컬어 ‘시방삼세 제망찰해’라고 표현한다.
부처님은 방방곡곡에 상주한다는 의미다.
그 제망이 바로 인드라망이다. 그물망 코마다 촘촘히 구슬이 박혀 있는 인드라망은 하나의 구슬에
수많은 다른 구슬이 비춰지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 서로 비추는 모습이 중첩되어 다함이 없이
상대방의 입장을 비추는 불교의 무한법계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382. 인연 (因緣)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의 ‘hetupratyaya' 의 번역이다.
⌾불교사전에서 살펴보면
인연(因緣)의 산스끄리뜨어는 ‘헤뚜 쁘라띠아야(hetu pratyaya)’
또는 ‘니다나(nidāna, 음역 尼陀那)’이다. 결과를 낳는 내적인 직접 원인(原因)이 인(因 hetu)이고
주변에서 이를 돕는 간접적인 원인이 바로 연(緣 pratvava)이다.
헤뚜 쁘라띠아야는 일반적으로 연기(緣起,pratītya samutpāda)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니다나의 경우 불교의 초기 경전을 12가지로 나눈 십이부경(十二部經) 또는 십이분교(十二分敎)의
여섯 번째인 연기·인연 등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인연이라 하면 전자를 가리킨다.
연기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인연은 인과 연을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우에도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원인과 그것에 대한 조건을 뜻하는 경우,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씨앗을 인(因)으로,
그리고 햇빛ㆍ물ㆍ땅ㆍ온도 등의 조건을 연(緣)으로 본다. 이 때 인을 친인(親因)ㆍ내인(內因) 등으로,
연은 소연(疎緣)ㆍ외연(外緣) 등으로도 부른다.
이와 같은 설명은 『아함경(阿含經, Āgama)』과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 śāstra) 등 초기 경론들에서부터 자주 등장한다.
또한 『아비달마구사론』에서 극도로 발달시킨 4종의 연(緣)의 첫 번째를 가리킬 때도 이 인연이 쓰인다.
이 사연(四緣)은 인연(因緣)ㆍ연연(緣緣)ㆍ차제연(次第緣)[또는 무등간연(等無間緣)]ㆍ증상연(增上緣)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승 유부(有部)의 논서인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Abhidharma jñāna prasthāna)』과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Abhidharma mahāvibhāṣā śāstra)』뿐만
아니라 대승 유식사상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원인과 조건을 뜻하는 인연에 이은 연연은 능연(能緣) [인식주체의 마음(識)에 생기는 연]과
소연(所緣)[마음 밖의 인식대상] 두 가지를 가리키기 때문에 능연, 소연을 줄여 연연이라 부른다.
등무간연이라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차제연은 오직 마음[식(識)]에 그침 없이[무간(無間)] 작용하는
것으로 마음의 원인이 곧 결과가 되어 작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삼연들이 그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에는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 영향을 주고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을 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 사연 속에 포함된다.
연기의 다른 이름인 인연과 사연의 첫 번째인 인연과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주로 원인과 조건으로
형성되는 과(果), 즉 인과(因果)의 인으로 보는 것이지만 후자는 각각의 연을 나누어 이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상징되는 유식사상에서 마음의 작용까지 그 영역을 확충한 것에 있다.
반야부의 공사상을 발전시킨 중관사상의 창시자인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는 그의 대표저작인『중론(中論)』,「제26품.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고찰」에서 전자를 연기와 동일한 의미로 보고 옹호하지만 사연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이 한역하면서『중론(中論)』, 「제1 관인연품(觀因緣品)」
이라고 산스끄리뜨어 원문 소제목의 ‘쁘라띠아야(pratyaya)’를 인연으로 옮겼으나
그 내용은 4종의 연에 대한 것으로 용수는 이것들을 시종일관 논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4종의 연에 대한 계차가 아닌 연기, 십이연기와 같은 의미로 보는 인연은 이후
공사상이 한역 경전권에 널리 전파되면서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인과의 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현황 및 의의>
업과 윤회를 특징으로 삼는 인도의 문화적 풍토에서 출발했던 연기의 다른 말인 인연이라는 개념은
불교와 대치점에 있었던 브라흐만교와 그 뒤를 이은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주체인
‘아(我, ātman)’ 가 아닌 연기적인 존재라는 ‘무아(無我, anātman)’ 이론을 강조하면서 십이연기로
구체화되었고 윤회를 부정하는 인도의 유물론자인 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a 또는 Cārvāka)’와
명확한 대치점을 형성하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교학적 측면을 토대로 이후 인도 불전 문학의 원형을 이루는 『본생담(本生譚, Jataka)』,
『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carita)』,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Mahāvastu)』등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불교가 인도 문화권 밖으로 전파, 정착되면서 불교와 인연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금생의 어떤 인물로 태어났다는 인과와
윤회사상의 일부가 된 인연은 『삼국유사』에 두루 실려 있다.
예를 들어 제5권의 제9「효선(孝善)」에 실린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에서는 불국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김대성이 전생에 무밭 세 개를 보시한 공덕으로 후생에 재상집에 태어난 인연이
소개되어 있다.
환생과 무관한 경우에도 이 인연은 한국인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구비문학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전』에서처럼 일반 민중들의 도덕율을 형성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인연이 있다. 인연이 없다.”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쓸 정도로 한국어의 일부가 되었다.
383. 일념삼천 (一念三千)
천태(天台)의 철학에서 말하는 일념(一念)은 범부의 사소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 일념 속에
세계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한다.
‘삼천’이란 무엇인가.
십계(十界;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사람ㆍ하늘ㆍ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님의 각각의 경계)가 각각 10계(界)를 갖추고 있고 그 하나하나가 또 십여시(十如是 : 相, 性, 體, 力, 作, 因, 緣, 果, 報, 本末究竟)등 10의 범주를 갖추고 있다. 또한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 등의
세 가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10x 10x10x3=3000이 된다고 하는 것이 ‘삼천(三千)’이다.
요컨대 전 세계를 가리킨다. 얼핏 생각하기에 번다(繁多)하고 추상적인 논의(論議)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매우 훌륭한 철학이다. 즉 우리들 범부(凡夫)의 마음속에 전 세계가 들어 있고, 그 속에 지옥의 요소도
있고 부처님의 요소도 있다.
이것은 깊은 인간통찰의 사상(思想)이다. 신(神)으로 되기도 하고 악마(惡魔)로 되기도 하는 현실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 속에서 부처님의 요소를 신장(伸長)시키고 악(惡)한 요소를 없애 나가야 발전이 있게 된다.
☀ 일념삼천(一念三千) <백과사전>
우리의 일념[一念] 가운데 삼천[三千]의 세계가 갖춰진다는 천태사상의 세계론이다.
삼천이 되는 까닭을 알아보면 이 삼천은 십계[十界]ㆍ십계호구[十界互具]ㆍ십여시[十如是]ㆍ
삼세간[三世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계[十界]란 세계를 가치질서에 따라 10종으로 총괄하여, 지옥ㆍ
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하늘의 세계와.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ㆍ불승[佛乘]의 깨달음의 세계로 나눈 것이다.
십계호구[十界互具]란 십계 속에 또 각각 십계가 갖춰져 있다는 사상이다.
말하자면 인간계 가운데 지옥계에서 부처님의 세계까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악한 마음과 동시에 착한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가능성으로서 모든 세계는 그 내면에 모든 다른 세계를 갖추고 있으며, 다만 그 많은 세계 가운데 인간 혹은 다른 한 세계가 현실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십여시[十如是]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까지의 열가지 세계가 각기 그 독자적인 십여시를 갖는다.
[1] 여시상[如是相]-표면에 나타난 모양
[2] 여시성[如是性]-변함 없는 내면의 바탕
[3] 여시체[如是體]-바탕과 모양이 일체가 된 구체적인 물체
[4] 여시력[如是力]-내면에 잠재한 힘
[5] 여시작[如是作]-내면적 힘이 밖으로 나타난 작용. 동작
[6] 여시인[如是因]-작용에 필요한 직접적인 제일원인
[7] 여시연[如是緣]-인[因]을 도와 과[果]를 낳게 하는 간접적인 보조원인
[8] 여시과[如是果]-인연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결과
[9] 여시보[如是報]-과[果]에 의해 일어나는 갚음
[10]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상[相]부터 보[報]까지의 9여시[九如是]가 일관되고 평등한
진리의 열 가지이다.
모든 법은 지옥에서 부처님의 세계까지 열 가지로 구분되고 이 10계는 10계가 상호간 갖추어지므로
100계가 되며, 여기에 10여시의 범주가 덧붙여져서 천의 세계가 된다.
여기에 각각 세 가지 세간이 있게 되는데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세간[五蘊世間]과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인 국토세간[國土世間], 그리고 거기에 거주하는
주체적인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말한다. 이 삼세간을 일천의 세계에 곱하므로 여기에 삼천의 세계가
나오게 된 자리가 마음에 없다면 모르되 티끌만큼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순간의 일념에도 반드시
삼천의 진리를 나타내며, 그 삼천의 세계가 그대로 미혹한 세계도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된다는 것이
곧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384. 일념왕생 (一念往生)
일념왕생은 정토교에서 말하는 것인데, 이 경우에 ‘염(念)’은 염불을 뜻한다.
선도(善導)가 1회의 칭명(稱名)으로도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한 뒤 그 이상 염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종파도 생기게 되었다.
이 밖에 선종(禪宗)이나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일념불생(一念不生)’
화엄종과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일념성불(一念成佛)’ 같은 것도 중요한 사상이다.
전자는 일념의 마음의 움직임도 그 근저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후자는 <화엄경>에서의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깨달음을 향해 마음을 발하면
곧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이라는 사상의 발전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소한 것 속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 일념의 사상이 불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됐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85. 일원상 (一圓相) ☀불교에서 나온 말
일원상
둥근 원을 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하는데,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本源) 또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법을 상징한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일원상을 1천7백 공안(公案:話頭)의
하나로 삼고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원의 근본(根本)을 추구(追求)하는 것이 ‘○자’ 화두(話頭)다.
예로부터 선방에서는 일원상을 벽에 그려 놓고 참선, 정진해 오고 있다. 이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장처인 일원의 진경(眞境)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방법(修行方法)이다.
서산대사가 쓴「선가귀감:禪家龜鑑」에 보면 중국의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가 이르기를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했다.
서산대사는 주해(註解)에서 한 물건을 일원상으로 표시했다.
삼조(三祖) 승찬대사는 일원상을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했다.
“허공같이 뚜렷하여 모자랄 것도 없고 남을 것도 없다.”
법정스님은「선가귀감」역주에서 일원상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마음ㆍ성품ㆍ진리ㆍ도라 하여 억지로 이름을 붙였으나 어떤 이름으로도 맞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도
그 참 모양을 바로 그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o 그것이 무한한 공간에 가득 차서 안과 밖이 없으며 무궁한 시간에 사뭇 뻗쳐 고금(古今)과
시종(始終)도 없다.
o 또한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 시비할 수 없으며, 거짓. 참 등 온갖 차별을 붙일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 동그라미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더 자세(仔細)히 설명하기 위해 당(唐)나라 혜충국사<慧忠國師(?-775)>는 97가지 그림으로
가르쳐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도저히 그 전체를 바로 가르칠 수 없어 이것을
가르친다면 입을 열기 전에 벌써 가르친다며 '알거나 알지 못한 데에 있지 않다' 고 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이치를 분명히 알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나 모든 성인이 소용없다고
법정스님은 설명을 덧붙였다.
불문(佛門)에 들어와 이러한 공안을 참구(參究)한 뒤 원불교(圓佛敎)를 개교(開敎)한 소태산은
일원상을 원불교의 상징 즉 종지(宗旨)로 삼았다. 따라서 원불교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원상(圓相)은 일체중생의 마음이 두루 평등함을 표시한다. 원은 우주 만유의 근본자리요, 모든 불,
보살의 마음자리이며, 일체중생의 불성자리인 동시에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다.
나고 죽고 가고 오는데 변함이 없는 자리이며, 선악의 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다.”
386. 일주문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수미산(부처님세계)에 들어갈 때 거쳐야 하는 세 가지 문(삼문,三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一柱門,天王門,不二門)중 첫 번째 문으로, 건물을 신축할 때는 일반적으로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기 마련이나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一直線上)에 한 줄로 되어 있는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일주문으로 불리 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학적으로 중심의 힘을 이용하여 절대의 건축미를 살린 불교특유의 양식이다. 일주문은 불교의 핵심인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을 일컫는다.
일심은 온전하고 참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으로서 무한한 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이 일주문을 기준으로 문 밖을 속계(俗界:사바세계), 문 안을 진계(眞界:부처님의 세계)라 하며,
이 문을 들어 설 때는 세속(世俗)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일심으로 부처님께
귀의(歸依)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신성(神聖)한 땅에 왔으니 어수선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성을 나타낸다.
또한 일주문은 승(僧)과 속(俗)의 경계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구분, 생사윤회의
중생성(衆生界)과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불국토(佛國土)를 구분 짖는 의미가 있다.
일주문의 양식 중 일주삼칸(一柱三間)으로 되어있는 일주문의 공간구성 의미는 삼승(三乘) 즉
부처님 제자인 성문(聲聞)과 인연법을 홀로 깨달은 연각(緣覺)과 중생을 교화하며 성불하려는
보살(菩薩)<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이 삼승중(三乘中) 어느 한 길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삼승(三乘)이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성(一佛乘)으로 나아간다는 법화경 의 회삼귀일사상
(會三歸一思想)을 나타낸다.
현상계(現象界)에는 제각기 다른 것 같지만 절대적인 진리(眞理)의 입장에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진리(眞理)의 세계를 표현해주는 것이 일주문이다.
⌾위와 같이 사찰의 관문으로 일주문의 핵심적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 살펴보면
다음은 <사찰100美100選, 불교신문사, 허균저> 상권17쪽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사찰의 일주문을 일반적으로 일주문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 어떤 문도 일주문이라고 쓴 현판을 달고
있지 않다. 다만 사찰의 위치와 이름을 알리는 ‘00山 00寺’등의 현판만 걸려있을 뿐이다.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일렬로 서있는 문’이라는 뜻을 새긴 것으로, 문의 모양을 근거로 해서 지은
이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구조를 가진 홍살문도 일주문이고, 충렬효행(忠烈孝行)을 기리는 정문(旌門)도
일주문이며, 조선시대 어용(御容) 봉안소인 집경전(集慶殿) 입구에 세운 문(門)도 일주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주문 형식의 문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비루(碑樓), 또는
패루(牌樓)라고 하는 일주문 형식의 문이 있고, 일본에도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일주문 형식의
신문(神門)이 있다.
패루는 왕릉 또는 사묘(祀廟)입구에 세우는 문으로, 3칸 일주문, 5칸 일주문 등이 있다.
대부분 중앙 칸이 양쪽보다 높게 되어 있고 화려한 장식 조각이 베풀어져 있다. 패루는 능ㆍ묘(陵廟)
영역임을 알리는 표지(標式) 기능과 함께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성역임을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북경 근교의 명13능의 패루와 산동성 곡부 주공(周公) 묘(廟)의 패루가 유명하다.
일본의 도리이는 신사(神社) 입구에 세워진 상징적 관문으로 신성한 공간과 일상의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도리이는 보통 두 개의 둥근기둥 위에 두 개의 직사각형 보를 가로로 올려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의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을 지나 바깥쪽으로 뻗으면서 약간 위로 반전하고, 아래쪽 가로대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이 있는 것을 패루라 하고 지붕이 없는 것을 패방(牌坊)이라고 하므로 도리이는 패방에 속하는
일주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남 진도에 전해 오는 독특한 장례풍습인 ‘다시라기’ 현장에서 우리는 말린 숭어를 매단
간단한 목조 구조물을 볼 수 있다. 문짝은 없고 두 기둥과 문설주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양으로만 보면 이 또한 일주문이다.
이 문은 굿마당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는데, 문 이쪽은 이승,
문 저쪽은 저승으로 상정(想定)되어 있다. 문설주에 매달린 숭어는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특성을 가진 물고기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영혼의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다.
‘다시라기’의 일주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자 두 세계를 잇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숭어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명한 일주문을 살펴보면
①범어사: 삼칸일주문(三間一柱門) 형식으로 되어있는 범어사 일주문은 기둥처럼 긴 화강석 주춧돌 위에 결구(結構)없이 공포와 지붕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한 칸 일주문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특별한 건축적 의미를 가진 문이라 할 것이다. 현재 일주문 중앙에 ‘조계문(曹溪門)’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 칸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오른 쪽 칸에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라고 쓴
비교적 큰 현판이 걸려 있다. 종전까지만 해도 좌우의 기둥에 ‘불지종가(佛之宗家)’ 와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②순천 선암사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제96호)은 조선시대 건축으로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두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린 구조로 된 일주문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귀공포 사이에
세 개의 공포를 더 두어 공예미를 한껏 높였다.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③완주 송광사 일주문(전북유형문화재 제4호)은 조선 중기 건물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사찰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일반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원숙한 비례감이 돋보인다.
④곡성 태안사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제83호)은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올린 다포식 구조로, 양쪽 기둥 앞뒤에 보조기둥이 세워져 있다. 내부의 천장 아래에 용두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문 앞쪽에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들 일주문 외에도 함양 용추사 일주문(경남유형문화재 제54호), 하동 쌍계사 일주문
(경남유형문화재 제86호), 불곡사 일주문(경남유형문화재 제 133호)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387. 일합상 (一合相)
일합상(一合相)이라는 말은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말로서 물질의 무더기, 세계의 무더기를
일차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o 삼라만상(三羅萬像)을 접하는 眼ㆍ耳ㆍ鼻ㆍ身ㆍ意로 분간(分揀)하는
상대적인 모든 형상들을 하나로 보는 마음가짐 심상(心相)을 뜻하고
o 수행의 경지가 높아지면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범아일여(凡我一如)의 경지를 뜻한다.
오취온(五取蘊)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我)가 아니고, 나의 자아(自我)가 아닌데 나(我)라고
취착(取着)하므로 아상(我相)이라 하고 수자상(壽者相)이라 하고 인상(人相)이라 하고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상(相)을 말한다.
무더기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을 뿐인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고정된 상(相)을 가져서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유위법은(一切有爲法)은 무상(無常)하고 고(苦) 이고 무아(無我)이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조건(條件)지어 일어나고 조건(條件)지어 멸(滅하)는 법(法)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이런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에 대하여 갈애(渴愛)하 고 집착(執着)함이 일어나고
멸(滅)하는 것이 그친 다면 적멸위락(寂滅爲樂) 갈애(渴愛)가 完全히 소멸(消滅)하여 고요하고
열반 (涅槃)이니라.
산스크리트어로는 한 덩어리의 무더기 즉 일합집(一合執)이다.
현장(玄裝)스님은 고명일합집(故名一合執)이라고 번역(飜譯)하였고 구마라집스님은 금강경(金剛經)
여러 곳에 상(相)이란 단어(單語)를 사용(使用)하였고 여기서도 상(相)이라고 번역(飜譯)하였다.
그래서 이후에 이 일합상(一合相)이란 단어(單語)를 금강경(金剛經)의 본래의미(本來意味)를 벗어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교리(理致)와 현상(現狀)으로
이해(理解)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388. 임제종 (臨濟宗)
선종사(禪宗史)에 가장 걸출하게 남아있는 선승이 임제의현 선사다.
임제종은 바로 임제의현 선사의 선풍을 따르는 선장들의 모임을 뜻한다.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라는 선풍과 무위진인
(無爲眞人)을 주창했다.
임제선사는 백장의 법을 이은 황벽희운선사의 제자다. 중국 하북성 진주의 임제원에서 종풍을 진작해
북부 중국에서 종파를 성립한다.
임제종은 자명초원 문하에서 황륭혜남과 양기방휘가 배출되어 임제종 화류파와 양기파로 나뉜다.
양기파의 원오극근선사와 그의 제자 대혜종고선사에 의해 임제종은 후대까지 가장 큰 영항력을 지닌
선종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임제선사는 전통을 지닌 철학적 권위나 교권적 인습에 대해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기행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해탈을 지향했다.
“참된 출가는 하루에 천금만냥을 쓰는 삶과도 같다” 고 말한 임제선사는
“함께 도를 닦는 벗들이여, 선문의 대스승들을 만나서 깨달음의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낳아줌으로서 바로 안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각고분투하고 몸으로 부딪쳐 연마한 결과
하루아침에 투철히 깨달은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선의 길을 가는 납자들에게 가장 강렬한 빛을 남긴 임제종은 현재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선종의 한 종파이다.
389. 입측의례 (入廁儀禮)
입측의례란 측간(廁間) 즉 변소에 출입할 때의 의례를 규정한 것을 말한다.
절에서는 변소를 ‘근심을 푸는 장소’ 란 뜻으로 해우소(解憂所)라 부른다.
또한 해우소는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함께 삼묵당(三黙堂)에 속해
‘일체 언행을 삼가며 침묵속에서 자신의 행위 위의를 관(觀)하는 곳이다.
☀ 해우소 ‘입측오주(入厠五呪)’ 진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입측진언(入厠眞言)’ (화장실 들어가서)
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일세 탐진치 어둔 마음 이같이 버려
한 조각 구름마져 없어졌을 때 서쪽에 둥근 달빛 미소 지으리.
옴 하로다야 사바하 (세번)
⌾ ‘세정진언(洗淨眞言)’ (뒷물 하면서)
비워서 청정함은 최상의 행복 꿈같은 세상살이 바로 보는 길
온 세상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 청정한 저 국토에 어서 갑시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세번)
⌾ ‘세수진언(洗手眞言)’ (손을 씻으면서)
활활 타는 불길 물로 꺼진다 타는 눈 타는 경계 타는 이 마음
맑고도 시원스런 부처님 감로 화택을 건너뛰는 오직 한 방편
옴 주가라야 사바하 (세번)
⌾ ‘거예진언(拒穢眞言)’ (더러움을 버리고)
더러움 씻어내듯 번뇌도 씻자 이 마음 맑아지니 평화로움 뿐
한 티끌 더러움도 없는 세상이 이 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소원
옴 시리예바혜 사바하 (세번)
⌾ ‘정신진언(淨身眞言)’ (몸이 깨끗해지고)
한 송이 피어나는 연꽃이런가 해뜨는 푸른 바다 숨결을 본다.
내 몸을 씻고 씻고 이 물마저도 유리계 푸른 물결 청정수 되리
옴 바아라 놔가락 사바하 (세번)
⌾ 해우소 즉 정랑의 법도는 수행 방편으로도 연결됩니다. 중국 청규의 한 종류인 입중수지에서는
해우소 가는 자는 모름지기 입측, 세정 등의 진언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주를 염하지 않으면 혹 대해의 물로 금강의 세계를 다 씻는다 해도 깨끗하지 못할 것이요, 가사를 착용하거나 경을 볼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또 불가나 민가에서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정랑에는 측신과 담분귀가 있는데, 입측오주를 하지 않고
들어가면 담분귀가 똥을 먹다가 미처 비킬 새도 없이 똥을 그대로 뒤집어써서 화를 내며 똥 누는 이의
배를 걷어차 배탈이 나게 만든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입측오주를 석문의범에 주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정랑에 들어갈 때는 손가락을 세 번 튕기면서 입측진언, ‘옴 하로다야 사바하’라고 염하고,
볼 일을 본 후 변을 씻거나 닦아 낼 때 하는 세정진언,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를 염하고,
손을 씻으면서는 세수진언, ‘옴 주가라야 사바하’를 염하고,
다시 더러움을 버리고 난 뒤에는 거예진언, ‘옴 시리예 바혜 사바하’를 염하며,
마지막으로 법당에 들어갈 때는 정신진언,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를 합니다.
이렇게 입측오주를 외워야만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의 여유도 생기며 또한
신들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 해우소에 관한 고승의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인 도선율사는 계행이 청정하기로 이름난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졌는데, 아차 하는 순간 누군가가 와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냐 물었더니 북방 비사문천왕의 아들, 장경이라고 하며 스님의 계행이 청정하여 모시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어야 되지 않느냐고 스님이 물었더니, 스님께서 입측오주를 하지 않아
잘 닦아도 몸에서 구린내가 남아 30리 밖에서 따라다닌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도선 스님은 입측오주를 빠뜨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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