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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작년 꿈지락 모꼬지로 대전 김조년선생님댁에서 묵으며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곧 있을 직원연수를 위해 학습하던 중 관련된 내용이 있어 선생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사회운동가의 영성
김조년
1. 왜 사회운동가의 영성인가?
나는 여러 해 동안 사회운동의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면서 운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아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진
정한 모습을 만드는데는 제도권 밖에서 일을 하여야 더 순수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가 인정하는 일은 항상 제도의 테두리를 넘지 않기 때문에, 제
도라는 것은 역동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기에는 매우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역동반응을 할 때 일어난다. 사회가 안정되거나 합리성이
문화로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제도권 안에서 하는 일이란 사람이 바뀌면 동시에 제도가
바뀌고 지속성이 떨어진다. 특히 민주절차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일을 추
진하는 주체가 바뀌면 제도 안에서 일하는 내용과 꼴이 함께 변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
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제도 밖에서 일어나는 사회운동은 기초문화가 그렇게 쌓이면서 되는
것이기에 더 튼튼한 변화양상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사회운동을 살펴볼 때, 상당한 부분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답답하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일도 많
았다.
그것을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보았다. 하나는 사회운동가들이 운동을 떠나서 다른 일을 맡았
을 때, 예를 들면 정치계에 들어갔을 때 하는 일은 사회운동가로 있을 때 주장하거나 활동
했던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뒤집어버린 상태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될 때
는 흔히 사회운동을 일부러 낮추어 평가하려는 말로 그들을 공격한다. 좋은 일을 하리라는
사회운동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발판으로만 삼았다는 비난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경향도 없지 않았다. 한 면으로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밖에서 비판하고 관찰하
였던 것을 안에서 실천하려면 역시 그러한 자리에 있거나 권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러할 경우에는 어떠하든 주장점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문
제는 운동시절과 성공시절이 다르다는데 있다. 그가 힘써서 비판하였던 그 자리에 그도 들
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전혀 달라지지가 않는다. 자연스럽게 세월 따라 변하
는 것 말고는 나아지지 않는단 말이다. 이러한 결과는 운동과 삶, 운동과 자신, 사회와 자신
을 통일된 것으로 보지 않고, 분리하여 보기 때문이다. 주장점이 육화되지 않고, 머리 속 지
식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과 자신, 운동과 실천, 자신과 사회가 극명하게 분리되어
상호소외의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는 탈진하는 모습이다. 사회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몇 가지 갖추어져야 할 조건
들이 맞아야 한다. 처음에는 사회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교육
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긴 기간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 전문지식과 안목이 괄목할만하게 트인 것은 부정
할 수 없다. 그런데 운동가들이 그 일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탈진한 모습, 지친 모습을 많
이 보여준다. 왜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탈진이란 다른 말
로 하면 고갈이다. 말라비틀어지는 현상이다. 진이 다 빠지고, 맥이 풀리며, 물기가 없다. 지
극히 메마른 상태다. 한 가뭄에 샘이 말라 몇 시간을 지나도 한 두 바가지의 물밖에는 나오
지 않을 때, 돌확에 담아 놓은 물을 새로 길러다 붓지 않아 바닥까지 박박 긁어야 겨우 한
두 모금 물이 떠질 때,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고갈되었거나 탈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끊임없이 샘솟는 신선함이 없어서 그렇다. 속이 채워지지 않
고 비어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할 일은 많고, 할 사람은 적고, 시간과 사건들은 밀려오
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촉발한다. 쉴 수 있는 여유도, 새로 보충시킬 수 있는
길도, 일이 추진하는 방향대로 쉽게 풀릴 기미도 매우 적다. 그렇다고 일이 끝까지 성취될
수 있도록 한 가지 사건에 총력을 기울일 만큼 여유롭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
록 중첩되어 밀려오는 파도처럼 대항하여야 할 일들은 인정사정 없이 거대한 힘으로 달려온
다. 몇 배로 첨가되어 달려오는 파멸의 힘과 그것에 대항할 지극히 미미한 힘 사이에서 거
의 좌절에 가까운 막막함에 도달하는 수도 많다.
이러한 모습, 운동할 때와 성공하였을 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과 탈진하여 완전히 진이
빠진 모습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운동의 이념이나 이상과 자신이 통합되지 못한 데서
나타난다고 본다. 운동가들은 깊은 열정 속에서 산다. 그러나 깊은 열정은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될 때 완전히 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이 된다. 그러나 계속하여
기름이 공급되지 않을 때는 검은 연기만 내뿜다가 곧 꺼지고 만다. 깊은 공급이 되고 안되
고는 개인의 성향이나 노력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어떠한 것
인가에도 커다랗게 매어 달린다. 물론 개인이 추구하는 이념과 자신이 하나가 되지 않는 것
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그것을 일치시키도록 하지 못하게 할
때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것이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2. 우리가 지금 사는 현대사회
현대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를 정리한 사회이론가들이 무수히 많다. 그들이 어떻게 정리하였
든, 전문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느끼는 차원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정리하여
본다. 흔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짜증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시원하지가 않고, 만
족스럽지가 않으며, 잘 통하지가 않다는 뜻이다. 차가운 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마시기에 적절한 미지근한 것도 아니다. 아픈 것도 아니고, 건강한 것도 아닌 그냥
찌뿌둥한 그냥 말로 쉽게 나타낼 수 없는 애매한 모습이다. 될 듯 되지 않고, 풀릴 듯 맺혀
있으며, 통할 듯 막히기만 할 때 우리는 짜증스럽게 느낀다. 이럴 때 그냥 기분이 나쁘다.
삶의 의욕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냥 좌절되는 것을 미리 생각한다. 어
찌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흐름은 짜증인 것 같다. 그래서 ■짜증사회■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를 그렇게 규정하여도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이렇게 짜증나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어떤 것들인가를 살펴본다.
* 흔히 누구나 말할 수 있듯이 오늘 우리는 고급과학기술과 기계가 지배하는 사회에 산다.
고급기술이 필요한 부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그것이 적용되고 지배한다. 간단한 음식
을 사서 먹거나, 시장을 보는 일부터 시작하여 방을 정리하고, 식단을 짜는 것까지도 고급기
술을 활용한다. 물론 전쟁을 수행하거나 우주를 탐험하고, 깊은 바다 속이나 땅 속을 살피는
데는 고급과학기술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 존경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고 인사하는 것
까지도 고급과학기술의 도움을 받는다. 고급과학기술이 일상화될 때 사람이 끼어들 틈은 지
극히 좁아진다. 사람 없는 사회가 된다.
* 얽힌 사회다. 물론 사회가 발달하고 문명이 진화하면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
한다는 것을 말한 학자들은 상당히 많다. 복잡하다는 것은 삶의 얽힘이 매우 다양하게 이루
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글로벌화하면서 세계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단순한 관리체계, 의사소
통체계, 연결체계로 접어든다. 말과 문화와 삶의 양식이 하나로 단순하여 지는 경향이 있고,
정치문화나 경제, 산업구조의 경영과 운영이 전세계에 통하는 기준으로 통합되는 수가 많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몇 가지 것들에 대하여는 보편개념이 지배하고, 그것에 따라
서 세계질서가 하나의 체계로 잡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일종의 단일구조로 보이는 모습
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경제, 정치, 군사의 우위에 모든 것이 종속되는 모습을 보이
고 있기에 각 지역에서는 특별히 지역을 강조하는 흐름이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과거
몇 십년 동안 지배하여 왔던 양극 체계가 일극체계로 바뀌면서 다극체계에 대한 갈망과 동
경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다극체계라 함은 모든 세계의 구성원이나, 구성사회가 각각 핵
심이요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어느 특정한 집단이나 세력의 뜻으로 세계질서가 잡혀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결같은 참여가 되는 민주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갈망 역시 강력한 편
이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관계양상은 매우 복잡하게 된다. 엄밀히 따지면 어느 지역의
작은 사건이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커진 시대가 되었다. 크고 작은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 거룩하고 추잡한 것, 조용하고 시끄러운 것, 옛스러운 것과 새로운 것,
버려질 것과 새로 맞아들일 것 따위가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 속에 두루 섞여 있다. 그러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 가상사회다. 지식정보사회라고도 하고, 인터넷사회라고도 하는 오늘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일을 꾸미고 하는 것은 옛날과는 전혀 다른 공간개념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른바
가상공간 안에서 가상으로 만나서 일을 꾸민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정리하는 것은 대개 이
렇게 가상세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려면 역시 실질공간에 영향을
준다. 보이지 않는 공간, 보이지 않는 조직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으로 모든 것이 준비된
다. 그리고는 실질사회에서 하나의 실체로 나타난다. 이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삶이 나
누어지며, 사람들이 서로 오고간다. 그렇게 보면 이제 이 공간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
다. 그렇다면 ■가상공간■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동시에 ■가상사회■란 것도 맞지 않는
다. 흔히 사이버공간이라거나 사이버사회라고 하는 말을 우리말로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
을 뿐이다. 이것이 앞으로는 더 크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확정하고 규정할 것이다. 보
이지 않고, 잡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 사회공간을 더 많이 활용하게 될 것이다.
* 대리사회다. 이렇게 되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 삶을 자기가 직접 경험하거나 직접 꾸리는
것이 적어진다. 노는 것도 대리로 놀아주고, 우는 것도 대리로 울어주며, 즐기는 것도 역시
대리로 즐기게 한다. 내 몸과 맘을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대신 움직여 내가 하
고자 하는 것을 대신하여 준다. 두 젊은 남녀가 짝을 맺는 것도 가정을 떠나서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가지게 되고, 자녀를 낳는 것 역시 이제는 가정을 떠나 전문기관에 위탁한다. 양육
이나 교육은 더욱 그렇다. 동시에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러한 의지가 있
는 사람은 그 뜻을 대신하여줄 기관이나 사람을 찾아 돈을 건네주면 된다. 자연을 즐기는
것도 대신,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대신,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대신하는 사회, 즉 대리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대리사회는 무책임사회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최근 술을 많이 마
신 사람들은 차를 대리운전자에게 맡겨 자기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서비스업체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 대리운전회사나 운전자들에 대한 공신력은 전혀 없다. 안전대책이나 책임대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대리운전을 통하여 잠시동안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
뿐이며,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가 너무 크다. 새로운 형태의 삶
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이와 같은 아주 기상천외의 대리업종들이 발생한다. 동시에 그처럼
대신 살아주는 것을 일상화하고, 일반화하려는 경향은 무엇보다도 더 강하게, 그러나 전혀
느낌 없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오늘 사회는 대리사회다.
* 결과사회다. 삶은 과정이다. 엄밀히 따지면 삶에는 결과가 없다. 그러나 짧게 보면 삶은
무수히 많은 결과들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삶이란 과정으로서의 결과요, 삶
의 구비구비에 만나는 결과들이란 삶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모든 삶은 어찌
되었든 길게 연결되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일이 되고 안되고를 모두 인과관계로만 풀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떠한 것이 되었든 한 결과는 그 다음을 산생시키는데 매우 큰 연관관계
를 맺게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래서 삶을 긴 안목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자자부리한
결과들에 연연하지 말고, 과정 그 자체를 중요하게 보라고 말한다. 곧 결과가 아무리 아름답
거나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과정이 순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숭상하는 흐름이 매우 강하다. 결과에 따라서
지나온 과정들이 재정립되고 성격이 규정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전혀 틀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삶은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삶을 주관하는 논리의 일관성
이 없다. 자기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다. 삶을 거꾸로 거슬러서 살게 된다. 그런데도 오늘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숭상하는 경향이 매우 세게 흐른다. 그렇게 되면 혼란스런 것들이 마치
사회질서를 이끌어나가듯이 된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을 기대하거나 그
렇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결과보다는 과정을 귀중하게 보았다. 그러나 신은
결코 올바르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여 당장 벌을 내리거나 어려움에 부딪치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내버려둔다. 지지부진하
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화려하고 풍성한 삶을 꾸려나간다. 속으로야 어떠하든 겉으로 보
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점점 더 사회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최근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경쟁이 사회생활의 효과 있는 덕목으로 인정되면서 더욱 그러하
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의미를 찾으며 보람을 찾으려는 삶은 뒤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게 된다. 차차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를 생각하고, 결과를 재로 재어
보고, 남들이 바라보는 결과를 기다린다. 뜻과 진리실현과 올바른 자기정체성을 상실해 간
다.
* 익명사회다. 원래 사람들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은 사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을 그 사람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몸이 우람한 사람, 바위 아래 사는 사람, 물가에서 나온 사람, 물레
방아를 보는 사람, 사냥을 잘하는 사람 따위로 그 사람을 불렀다. 그러다가 가족이 생기고,
씨족들이 권력을 잡기 시작하고, 어느 부족이 계속하여 권력의 핵심에 머물러 있기를 추구
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복잡한 생활구조 속에 빠지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름
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름은 나를 대신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형식사회와 전통사회에
서는 그 이름도 숨기려고 하였다. 별명을 짓고, 호를 만들더니, 언젠가부터는 유명하다는 사
람들 사이에서는 이니셜로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 더 사람을 숨기는 것이 일반사항
이 되었다. 번호로 통한다. 통신이 개별화하면서, 하나하나가 개인으로 행세하면서 모든 사
람은 숫자로 대신되는 사회,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은 사라지고, 단순히 물품으로 표시되는
숫자로 사람을 나타낸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어디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도 숫자로 대
신된다. 숫자 속에 사람은 가려진다. 이름이 없는 사회, 이름이 가려진 사회다. 이름 속에 가
려진 사람도 아니고, 이제는 숫자 속에 이름과 사람이 모두 가려진 사회다. 사람이 살지만,
사람이 사람됨을 잃어버린 숫자들의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 체계, 조직사회다. 옛날에는 사람이 어느 것에 소속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조직과 체계 속에 들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게 되
었다. 사람의 질서체계가 아니라, 체계나 조직의 질서체계 속에 사람이 끼어 들지 않으면 사
람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지역, 학교, 혈통, 어떤 계열을 찾아서 줄을
서고, 자기 이름을 등록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다. 명문조직, 명망조직, 유
망체계 속에 있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으로서 살기를 포기한 것
처럼 된 시대다. 목적에 합당한 조직체로서, 의미나 진리실현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생존하기에 적절한 기구로서 조직과 체계를 유지하고 그 속에 자신을 파묻는 사회
다. 여기에서는 사람이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인격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조직, 체계, 선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중요하게 본다. 여기에는 이성과 이치에
맞는 것이 이 체계와 조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조직의 구성원이거나 그 체계에
얼마나 충성하는가 하는 것이 좋고 나쁨의 판단기준이 될 뿐이다. 사람이 만든 조직이요 체
계지만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껍질뿐이다.
* 그러면서 우리는 통제불가능사회에 살고 있다. 법이, 전통이, 문화가, 관청이, 개인의 출중
한 도덕률이, 교육과 종교가, 뛰어난 정치가나 사정책임자가 사회를 통제하지 못한다. 해가
바뀌면 정치가들은 범죄와 한판 전쟁을 치르겠다고 하고, 부정과 부패의 근원과 뿌리를 찾
아서 뿌리를 뽑고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으름짱을 놓는다.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부르짖었지
만, 어느 정권도 나중에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 되어 물러나지 않은 적이 없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한다고 하였지만, 더러운 냄새만 풍기고 구정물만
일구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밖에 나가서 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혀를 차
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는 꽉 막힌 답답함만을 맛볼 뿐이다. 어떠한 법, 어떠한
사람, 어떠한 제도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고 판단한
다. 사회문화에 신뢰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합리성이 결여되어 앞날을 희망스럽게 내
다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사회를 규정하고 보면, 이러?사회를 좀 바꾸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존재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무엇인가 보다 나은 것을 찾으려
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비유한다. 그러나 나는 더욱 더 비관스러
운 말로 마무리한다. ■솜송이로 바위치기■다. 그래도 그 솜송이로 바위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우리는 사회운동가라고 한다.
3. 사회운동가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막막한 사회에서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왜 그들은 그렇게 하는가? 그들 뒤에는 무엇이 힘받쳐 주며, 그들 앞에서
는 무엇이 손을 잡아 끌어주는가? 그들이 나온 근원은 어디며 그들이 돌아갈 고향은 또 어
디인가?
사회운동가는 일단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에는 적절하지 못하
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것을 인식하는 정도가 깊고, 그 인식함을 마음 속에만 간직하여 넣어
두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적절하지 못한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과 의
지가 강하고, 그 일을 위하여 시간과 자신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어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겉으로 보기에 그러
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사회운동가라고 부
르지 않는다. 그 대신 ■사이비 사회운동가■ 또는 ■사기 사회운동가■라고 부른다.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여기에서 논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순수 사회운동을 하는 사
람들을 일단 여기에서는 사회운동가라고 하겠다.
그들은 앞서 갈 수는 있지만 뒤따라가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다. 정의감이 누구보다도 세고,
열정이 많다. 먼저 트이기는 하였지만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사리판단이 분명하지만,
가끔 흑백논리라는 단순논리에 깊이 빠져 있기도 한다. 변화된 결과를 기대하는 경향이 많
기에 좀 조급한 사람들이다. 보다 나은 것을 획책하기에 대개 진보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자기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도덕주의에 상당히 많이 경도 되어 있다. 때때로 느
긋함이 부족하고 관용과 포용력이 크지 않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날카롭되 포근하고 푸근한 맛이 있어야 한다. 조급함을 느슨함
과 기다림으로 감쌀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결과에 기대를 걸지 말고 끊임없는 과정
을 귀중하게 보아야 한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물결을 타면서 흐름에 저
항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탈진되지 않는 지혜와 방책이 필요
하다. 추구하는 이상, 목적과 좌절을 맛보는 현실을, 앞서 가는 자신과 뒤쳐지는 대중을 일
치시키는 가능성을 발견하여야 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후원자 즉, 그치지 않는, 마르지
않는, 맑은 샘(옹달샘)이 필요하다. 이것은 철저한 쉼에서 온다. 대개 사회운동가들은 쉴 줄
을 모른다. 일할 줄만 안다. 여기에서 완전 소멸되는 위기를 맛보게 된다. 스스로 소멸되는
길을 걷지 않으려면 속알을 채우는 일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그러한 후원자를 만나야 한다.
끊임없는 후원자 그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4. 영성
영성( g: spirituality: Spiritualit?t)은 종교용어다. 이것을 일상생활, 특히 사회운동과 관
련시켜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하여 보았다. 혹시 ■자기혁명■이라고 하면
좀 가까울까? ■본질(궁극)존재와 만남■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에서 표현하듯이 ■정신통일■, ■무엇에 깊이 집중된 정신■이라고 하면 좋을까? ■깨달
음■이나 ■해탈■이란 말로도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자기자신을 만나는 것이
요, 내 속에 이미 들어와 있으나 잃어버린 신성( v g)을 찾아 간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속알 밝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기에는
좀 어색한 듯이 보이는, 종교생활이나 종교예식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성을 기르는 일, 즉 속알 밝힘을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가 아니
라, 반드시 어두워진 역사와 사회상황 속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만
일상생활 속에서, 일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사랑을 나누면서, 친구를 만
나면서, 방을 쓸고 닦으면서 그 님을 만나고, 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영성이다. 내 일상생
활에서 신의 걸음과 내 걸음을 꼭같이 하는 것, 그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는 것, 내 행동
과 진리의 명령을 동일시 하는 것, 그러나 내가 그것들의 도구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 속에
서 하나가 된 것, 다시 말하면 육화되고 생활이 된 것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정신을 성스
럽게 하고, 행동, 말, 눈빛,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이것
을 찾고 실현하자는 것이 사회운동가들이 추진하여야 할 영성운동의 핵심이다. 요사이 말로
하면 마음공부, 마음훈련, 마음닦기, 마음다스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잃어버렸
다. 왜?
우리는 일단 왜 사람들은 이 영성을 잃어버렸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종교와 생
활이 분리되었다.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신과 나, 진리와 현실, 속알
(내용)과 그릇(형식)이 분리되었다. 이렇게 되니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자기
가 직접 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철, 시간을 잃고, 자연을 잃고 살게 되었
다. 그렇게 되다 보니 경험의 신선함, 충격과 감동이 없다. 감동 없는 삶은 그런 의미에서
죽은 삶이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욕심이 많고, 상대방과 함께 살려는 대신에 경
쟁하여 이기려는 풍조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려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면서부터 벌써 우리는
함께 살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좋은 덕목으로 알고 자랐다. 우리들의 사회화과정이
곧 영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를 살펴 보
았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영성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라 하여
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자라나다 보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보게 하지 않고, 겉치장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쓰게 되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
기분열, 자기소외를 경험한다. 사람은 물론 사회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환
경을 극복할 힘도 지닌다. 바로 사람이 가지는 이 힘을 빌어서 우리는 잃어버린 영성을 찾
고, 휩쓸려 가는 사회문화풍조에서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을 칠 수 있다.
5. 어떻게 영성을 기를까?
우리는 가끔 우리의 한계, 자기능력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공간, 능력, 물질, 생명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
게 될 때 포기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운 포기란 즐거움을 포함한 포기, 낭만이
있는 포기, 슬픔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승화하는 포기가 된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자기자신이 가지는 선한 생각, 선한 의지, 의도, 계획과 기대를 벗어나서
그것들이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을 객
관화하는 일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진실하여 지고 망상이나 환상의 늪에서 자기자신을 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하여 진실이란 기초 위에 궁전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공에서 성공의 환영을, 실패에서 실패의 환영을 보게 된다. 이러한 훈련은 점점 자기집착
에서 자유로워지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동기에서 자기중심의 요소를 없이 하고, 그
행위의 결과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는 게 없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이러기 위하여 일단 우리는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에서 손을 놓고,
일에서 벗어나 보며, 일상의 숨을 떠나서 긴 숨, 한 숨을 쉬어 보는 일이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쓰는 것, 가정, 사람,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보고 듣는 것을 끊어볼 필요가 있다. 이렇
게 하는 것은 ■모든 임무를 버려두고 유일한 안식처인 내게로 오라■는 초청이 있음을 인
식하는 일이다. 이렇게 자기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 깊은 초대에 선선히 자기 자신을 맡겨
보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특정한 역사와 사회, 시간과 공간에 탄생하
여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넘어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영성을 기르는 들머리다. 자기 속 한계 속에서 무한성을 인식하고 이 둘을 조화하는 것이
곧 영성운동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하여 보는 것은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거나 형식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
다. 그 방법은 사람 수만큼 많을 것이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 일단
필요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목적 없는 길,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 길을 가보는 것도 좋다. 그냥 길가는 것이 곧 목적인
길을 가고 가보는 것이 좋다. 이 때는 내가 걷는 이 땅이, 이 길이 가장 순수한 땅이라는 의
미로, 완전한 기적으로 가득 찬 땅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길을 갈 때는 지독하게 외로움을 탄다. 그 깊은 외로움, 고독함, 지루함 속에서, 혼자
걷는 그 길에 함께 같이 걸어가는 것이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길을 지나갈 때 바람에 흔
들리는 풀들, 나무들, 꽃들이 나를 환영한다. 지저귀는 새들, 화들짝 놀라서 뛰어 달아나는
들짐승들, 불어오는 바람, 흘러가는 물, 묵묵히 뿌리박고 버텨있는 바위들, 심지어는 길바닥
에 깔려 있는 모래와 흙들이 나를 반긴다. 그 환영의 손짓 속에서 깊은 고마움과 기쁨을 맛
보며, 내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 만물들이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느
낀다. 이러한 느낌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것들과 깊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그냥 그것들과
주고받는 말이 오고간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부처처럼 웃는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크게 너털웃음을
웃는 것도, 그냥 우스워서 깔깔대는 것도 아닌, 남을 얕잡아 보아 비웃는 것도 아닌, 내 술
수에 넘어갔고나 하는 회심의 웃음도 아닌, 속 깊은 곳에서 깨달음과 평화가 있어서 살포시
솟아나는 그러한 웃음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사람이 되었든 꽃처럼 꽃
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온 몸을 휘감아 도는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속에 채워진 평안과 깨달음을 온 몸에 담은 그런 웃음을 웃을 필요가 있다.
매일 맑고 밝은 좋은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다. 적어도 하루에 한 곡을 부르는 것이 좋다.
소리를 내든, 속으로든, 아니면 악기나 휘파람으로든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중
요하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 부드럽고 좋은 노래, 우리의 속을 때리는 노래들이 참으로 많
다. 나는 동요를 참 좋아한다.
매일 기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귀한 일이다. 어느 곳, 자기 집이든지 직장이든지, 아니면 다
른 어느 곳이든지 나만이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그 곳
에서 깊이 들어가 보는 경험을 매일 쌓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일정한 시간에 꼭 그렇게 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새벽 일찍 장독대에 맑은 물 한 사발 떠놓고 간절
히 빌기도 하였고, 묘한 바위나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하기도 하였다. 고등종교인들
은 그러한 행위를 미신이라고 하지만, 사람 속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그러한 행위는 성모
마리아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거룩한 성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나 같다.
매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느 한 사람을 놓고 그이의 슬픔, 기쁨, 선함, 아름
다움, 아픔, 어려움 따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그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는 것
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자기의 간절한 마음을 그에게 주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
럽게 나는 그와 하나가 된다. 그가 나를 받아주고 밀어내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내
가 맘을 오로지할 뿐이다. 이것은 그를 위한 기도가 될 것이다.
사회운동가들은 적어도 한 달에 하루 정도는 모든 일을 끊고 자기와 맞부딪치는 날을 정하
는 것이 좋다. 일은 하면 할수록 샘솟듯이 나온다. 그렇게 일만 하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지
치고 탈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것을 떠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일년에
몇 일을 완전히 떠나보는 것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대개 휴가를 하면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영성을 기르기 위한 것은 가족으로부터도 해방
될 필요가 있다. 가톨릭 신도들이 수시로 피정을 하고, 신교인들이 기도원에서 보내며, 불교
인들이 수련을 하고, 스님들이 동안거와 하안거를 하면서 속 ?을 채우는 일을 하는 것처럼,
사회운동가들에게도 속 ?을 채우는 일을 제도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를 떠나는 것은 나에
게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일을 떠났다가 일 속으로, 일상을 떠났다 일상 속으로, 세
상을 떠났다 세속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진정으로 나와 일과 세상과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분명히 사람은 자기혁명, 자기개혁, 진정한
만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성을 일상생활화 하는 일이라 본다. 사회운동가들이 이
렇게 일상생활에서 영성을 훈련한다면 분명히 운동도 사회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2001년
11월 말)
첫댓글 고마워요 김세진 선생님. 저도 이글을 표주박통신에서 읽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속을 채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