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
박 보 현
둥둥둥 북소리가 들렸다. 쿵쿵 가슴을 치는 공명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갔다. 에메랄드빛 물가에 붉은 깃발이 펄럭인다. 입구를 막고 있는 대나무 깃발 앞에서 멈칫했다. 커다란 카메라를 맨 사람들이 가득하다. 방송국 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주 구좌읍 전역의 잠수회와 어촌계 외에도 여러 단체 명단이 빽빽하게 붙어있다. 무슨 행사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굿판이 한창이다. 모든 액운을 쓸어 날리려는 듯 북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상에는 탐스러운 과일, 떡, 해산물이 차려져 있다. 벽에는 붓글씨로 쓴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붉은 옷을 차려입고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심방이 제를 올리고 있다. 구슬픈 타령은 30여 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마 둘 이상 짝을 지어 물에 들고 물 숨 들이켜는 일 없도록 조심하라는 충고인 듯하다. 등 더덕, 괭괭 장구와 징 소리에 맞추어 사뿐사뿐 걷다가 빙빙 돌며 간곡히 애원한다. 이번에는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다. 굿이 절정에 치닫는 것인지 심방의 애절한 몸짓에 분위기가 고조된다. 제관보다 많아 보이는 카메라맨들이 일제히 초점을 맞춘다. 방송국 피디도 몹시 바빠 보인다. 수첩을 꺼내 기록하는 사람의 손도 재바르게 움직인다. 옆 사람이 해녀들의 안전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잠수굿이라며 조금 있으면 점차 분위기가 더 흥겨워질 것이라 귀띔해 주었다.
건너편 회당으로 건너가 보았다.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 굿은 죽은 자의 혼령을 달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축제처럼 들뜬 분위기가 생경하다. 20년 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었듯이 올 한해도 무탈하길 비는 굿이란다. 물질하는 어머니를 위해 떡과 음료를 준비해 온 딸과 며느리들도 여럿 있다. 나이 지긋한 해녀가 오메기떡을 권하며 옛날이야기를 했다. 삶은 달걀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운을 뗐다. 돈을 벌려 독도에 물질을 갔을 때이다. 챙겨 간 보리쌀이 동이 나서 바닷가에 지천이던 갈매기알을 삶아 허기를 면했다. 또 그 이야기냐며 핀잔을 주는 이들의 웃는 얼굴 위로도 긴 한숨이 스쳤다. 그들의 신비로운 언어를 젊은 해녀의 도움으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물때에 맞춰 바다에 들고 밭일까지 하는 해녀들이다. 굿판이 벌어지는 오늘만큼은 온종일 쉬며 즐기고 싶어 보인다.
심방과 해녀들이 바다로 나섰다. 낯선 이방인의 표정이 딱해 보였던지 시어머니를 뵈러 왔다는 며느리가 귓속말로 알려줬다. 한해 망사리가 그득하기를 빌기 위해 좁쌀을 뿌리러 나간단다. 용왕길 닦기라 부르는데 굿의 하이라이트인 모양이다. 제물을 살피는 정성이 해녀들의 주름진 얼굴에 묻어났다. 액을 막고 한 해 벌이에 대한 염원을 담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까. 행사 기간에는 상가에도 가지 않고 외출도 삼간다고 했다. 물질은 바다의 자연적 조건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두렵고 거친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내는 삶이다. 바람의 방향과 물살의 세기에 순응해야 하는 길, 안전과 풍요를 비는 마음이 오직 간절할 것인가.
바로 옆에는 서양화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화가는 제주 무교(巫敎)의 정신을 첫 회화전의 주제로 삼았다. 굿과 심방의 모습 외에도 제주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작품에 담았다. 그녀는 2021년 제주의 큰 굿이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앙과 미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들린다. 해녀의 딸과 며느리들은 학교에서 제주 사투리 사용을 금지당했다. 더구나 미신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고 자란 세대다. 그들에게 샤머니즘이라고 치부되던 무속이 종합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무형문화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변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하다. 제주의 무교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곳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을지. 삶에 대한 굳은 의지가 꽃 피워낸 특별한 문화라 여긴다.
굿판을 빠져나와 해변을 따라 걸었다. 김녕 바닷가, 이곳은 제주에서 물이 맑고 해안선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비치파라솔 아래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낭랑하다. 만삭 기념 촬영을 하는 젊은 부부의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시선을 끌었다. 북적이는 여행객들 사이로 결혼사진 촬영 중인 신부가 돋보인다. 하얀 모래밭을 따라 걸었다. 동네 어귀, 마무리를 마치지 않은 시멘트 블록 담장에 멈춰 섰다.
“I dive for a living.”
“I am a mother.”
투박한 글씨 앞에 묵직한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벌떡 일어났다. 넘실대는 거친 파도를 넘으려 테왁에 몸을 실을 때 어찌 두렵지 않으랴. 해녀들은 어머니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내일 또 물에 들 것이다.
빨간 등대와 풍력 발전기, 그리고 쪽빛 바닷물이 어우러진 마을풍경이 한 폭의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나선 올레길이다. 바람을 안고 때로는 바람에 떠밀리며 살아가는 삶을 보았다. 그들 앞에 여행자의 달뜬 마음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 옥색 물빛 위로 펄럭이는 새신부의 하얀 망사 드레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