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호 관련기록】
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년(173년) 「倭女王卑彌呼 遣使來聘」
위지 왜인전 「倭國亂 相攻伐 歷年 乃共立女子爲王 名曰卑彌呼」
위지 왜인전 「景初2년(238년) 倭女王遣使 大夫難升米等諧郡...후략」라고 나오는데, 일본서기와 양서에는 景初3년으로 나온다.
위지 왜인전 「正始元年(240년) 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雋...후략」
위지 왜인전 「正始4년(243년) 倭王復遣使 大夫伊聲者掖邪拘等 八人上獻」
위지 왜인전 「正始6년(245년) 詔賜 倭難升米黃幢」
위지 왜인전 「正始8년(247년) 遣塞曺緣史」
북사 왜인전 「正始中(240∼247년) 卑彌呼死」
위지 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중략...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이라고 나오는데 「남왕을 다시 세웠더니 나라 안이 복종하지 않아 서로 다시 주살하여 당시 천여 인을 죽였다...중략...나이 13세인 비미호의 종녀인 일여를 다시 세워 왕으로 삼았더니 나라 안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晉의 起居注에 「晋武帝 泰初2년(266년) 倭女王遣重譯貢獻」
위지의 마지막 기사는 명백히 비미호 사후다.
소국에서 천여 명이 죽을 정도면 큰 난리다.
그러다 비미호 가계의 신녀 지위를 물려받은 인물로 보이는 일여(壹與)를 다시 여왕으로 세운 것이다.
나이도 13세라고 했으니 비미호도 처음 지도자가 된 것은 이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위지에 나오는 비미호의 대위(對魏) 사신파견 기록상 서기 247년까지라면 비미호 생전이고,
여성지도자가 계속 비미호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대엔 이름에 수직으로 돌림자를 쓴 경우가 보이기 때문이다.
북사기록을 보면 서기 240년에서 247년 사이에 몰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또 비미호란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아달라왕 20년조와 위지 왜인전의 최초기록, 북사 뿐이다.
비미호란 이름은 그들 집단에서 제정일치의 유습에 따른 신녀적인 성격을 띤 여성지도자의 수직돌림자로 보인다.
'集解'에는 일본서기의 신공기 39년, 40년, 43년, 66년 대륙사서 인용기록이 후세인이 가필한 것으로 간주되어 전부 삭제되어 있다고 한다.
가) 고사기 개화기(開化記)에 대오왕(大 王)이라고 나온다. 발음이 오호마다[大 ]다.
바) 서기 민달기 12년 7월조에 「...지금 백제에 있는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인 아리사등(阿利斯登)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가 현명하고 용감하다...」라고 나온다. 동년 10월조에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형부·차부아리사등(刑部· 部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日羅)는...」라고 나온다.
신대기를 제외하더라도 인대기의 개화기(開化紀)부터 계체기(繼體紀)까지 수백 년에 걸쳐서 동일인이 이름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계속 등장한다.
오호마다[大 ]왕=큰마다왕, 임나국인(任那國人) 소나가시지[蘇那曷叱知], 오호가라[意富加羅/大加羅]의 왕자 쯔누가아리시또[都怒我阿利斯等] 또는 우시기아리시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가라왕(加羅王) 고노모도간기[己本旱岐], 임나왕(任那王)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阿利斯等], 화·위북국조(火·葦北國造) 아리시또[阿利斯登] 또는 형부·차부(刑部· 部) 아리시또[阿利斯登] 등,
형부(刑部)란 법(法)을 관장(管掌)하고 차부( 部)란 병권(兵權)을 말한다. 형부·차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고대엔 곧 왕이다. 다시 보면 임나인=대가라왕자=대가라왕=대오왕=임나왕=화·위북국왕인 것이다.
'오호[意富]'는 '오호[大]'와 같고 '고노[己能]'는 우리말 '큰[大]'의 이두표기 '근(近)'이 '오'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켜 '곤'이 되고 다시 받침 없는 열도발음으로 '고노[己能/近]'가 된 것이다.
〔모도(牟都), 마다[末多]계 이칭들〕
그런데 여기서 '마다'계 이칭들을 보면 전부 같은 이름인데 발음과 한자가 약간씩 달리 표기되어있다. '마다[오]'와 '마다[末多]'는 같고 '모도[本]'와도 같은 말이다. 모대(牟大), 모도(牟都). 마다[派], 마다[岐], 무쯔[六], 무지[貴], 모지[持], 마다[股], 말통(末通), 모태(牟泰), 마동[薯童], 모태(慕泰/募泰)도 전부 같은 이름이다.
최초에는 (ㅁ+아래아)(ㄷ+아래아)에서 파생된 기본적인 조합(組合)이 4개인데 '마다', '모도', '모다', '마도'로 발음이 분화되고 이 아래아의 발음의 특성을 이용하여 반도어와 열도어를 번갈아 사용하고, 교차하여 사용하고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 쓴 것이다. 기·기와 사기·유사에 나오는 용례를 전부 열거해서 보자면
가 ; '마다'는 마다[오]=마다[派]=마다[岐]=마다[股]=마다[末多]로 만들어 쓰고
나 ; '모도'는 반도어 모도(牟都)를 같은 발음의 열도어 모도[本]로도 쓰고 다시 열도발음으로 읽어 무쯔[牟都]로 놓고 한자를 바꾸어 무쯔[六]로도 쓰고 여기서 다시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무지[貴]로 바꾸어 쓰기도 하고 이것을 또다시 모지[持]로도 쓴 것이다.
다 ; '모다'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모다[牟大]로 놓고 모다[牟泰]를 만들어 쓰고 반도어로 발음이 같은 모태(慕泰/募泰)도 쓴 것이다.
라 ; '마도'는 반도어를 열도식으로 받침 떼고 읽어서 마도[末通], 마도[薯童]로 쓴 것이다. 마도[薯童]는 '훈+음'으로 조합한 것에서 받침 없이 읽은 것이다. 받침을 붙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동'이다. * 마다[오]> '人 변에 입 口 밑에 하늘 天'이다.
성씨록을 보면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河內國諸蕃)으로 나오고
곤기왕(琨伎王)은 사기에 나오는 곤지(昆支)와 동일인물로서 동성왕의 부왕이다. 같은 성씨를 더 찾아보면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河內國諸蕃)로 나오고 이 인물이 바로 동성왕이다. 역시 증조부인 아라사등의 이칭 마다[末多]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륙측 기록 중에는 모도(牟都)가 동성왕의 부왕의 이름이라고 한 것도 있다 한다. 말하자면 이 모도(牟都)라는 이름은 가라왕족들의 수직돌림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지승람'의 말통대왕능(末通大王陵)은 동성왕의 능인 것이다.
비조호조(飛鳥戶造)란 동성왕의 후손들 성씨도 뜻을 풀어보면 "아스까의 문을 만든", "아스까의 문에 닿은", "아스까의 문턱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실사상 가야계 동성왕이 열도출신으로서 대화왕조 네 왕 이후에 다섯 번째로 혜성 같이 등장하여 백제까지도 장악함으로써 대륙 두 백제군과 백제본국, 열도까지도 아우른 대제국을 이루었으나 부여씨 무령왕에게 암살 당하여 그 후로는 가야계 왕통이 끊겨버렸다.
그 후 후국시대를 지나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서 일본이란 나라로 새롭게 출발할 때 백제계왕실 입장에서 기술함으로써 무령왕시대는 아스까로 치고 "동성왕이 아스까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뜻에서 그 후손들 성씨에 그런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서 지어 붙여 창씨한 것이다. 동성왕은 기원 이후 우리 고대사에 있어 최고의 대왕이었다. 이 정도 되니 위나라의 수십 만 대군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추풍낙엽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이나 '남제서'의 기록이 "아닌 땐 굴뚝에 난 연기"가 아닌 것이다.
마다[末多]를 서기 본문에서 확인해 보면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以立島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후략]라고 나와 무령왕 직전의 왕이 동성대왕이고 마다[末多]왕으로 불렸던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모도', '마다'의 변형이칭들은 서기·고사기·성씨록 등에 숱하게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