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전서(二程全書) / 주자대전
정군공재(程君公才) 묘표(墓表)
소희(紹熙) 2년 겨울에, 번양(番陽) 정군정사(程君正思)는 자신의 병세가 장차 위독(危篤)해자 내게 편지를 보내와 영결(永訣)을 고(告)하고, 또 그의 선대부(先大父) 부군(府君)의 행사(行事)를 써 보내와서, 나로 하여금 그 묘표(墓表)를 기록해 줄 것을 요구(要求)하였다.
나는 이미 ‘정사(正思)가 배움에 힘쓰고 도(道)를 자임(自任)해 왔는데도 불행(不幸)하여 일찍 죽게 된 것’을 슬퍼하고 있던 차에 또 ‘그의 대부(大父)의 현명(賢明)함이 이와 같은데도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그 명성(名聲)이 전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물며 정사(正思)가 장차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깊은 슬픔을 간직한 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이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참으로 정사(正思)의 요청(要請)에 대해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다.
紹熙二年冬, 番陽程君正思病且革, 以書抵予告訣, 且書其先大父府君之行事, 而求識其墓. 予旣哀正思之力學任道而不幸蚤死, 又知其大父之賢如此而無所聞於後世, 矧其將死, 深悲之屬不在它人, 是固不可以無言也.
정사(正思)의 말에 따르면, 부군(府君)의 휘(諱)는 여능(汝能)이고 자(字)는 공재(公才)이다. 천자(天資)가 순수(純粹) 독실(篤實)하여 학문(學問)을 말미암지 않고서도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저절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 부친(父親)의 성격(性格)이 엄격(嚴格)했지만 부군(府君)은 순종(順從)하며 섬겼다.
그러나 그 행사(行事)하는 가운데 미안(未安)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 간(諫)했고, 간(諫)해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면 물러나 근신(謹愼)하며 가만히 헤아려 보고, 뜻이 이해되면 다시 간(諫)하였는데, 부친께서 끝내 들어주신 다음에라야 그만두었다.
모친(母親)은 말질(末疾)을 얻어 3년 동안 옷을 입고 벗을 때 띠를 풀 수 없었고 앉아 있다가 혼자서는 방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에 부군(府君)은 몸소 모친의 기거(起居)와 음식(飮食)을 때에 맞추어 조절(調節)해드리며 봉양(奉養)을 극진히 했다. 비록 똥오줌을 받아내는 일조차 타인(他人)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았다. 부군(府君)은 또 형(兄)을 섬김에 있어서도 매우 근신(謹愼)하였다.
그의 형은 술을 마시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에 부군(府君)은 형의 잘못이 드러나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게 될까 두려워, 그 사이에 위곡(委曲)하여 지극히 미봉(彌縫)했고 끝내 이간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그 유산(遺産)을 나누는데, 형(兄)이 좋은 전택(田宅)을 가지고 싶어 했다.
이에 부군(府君)은 형이 취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서도 아무런 난색(難色)도 하지 않았다. 평소(平素) 악언(惡言)이나 망어(妄語)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그의 족적(足跡)이 관부(官府)의 문(門)을 밟을 일이 없었다. 향리(鄕里)의 사람들을 대할 때는 순순(恂恂)하면서도 근엄(謹嚴)하고 신칙(申飭)했기에 그가 성내는 일이 없어도 사람들이 공경(恭敬)하고 두려워하였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면 기필코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와주었는데, 간혹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따져 문제 삼지 않았다. 향인(鄕人) 중 자식 없이 사망(死亡)한 자가 있었는데, 부군(府君)은 매우 신중하게 그의 상(喪)을 돌봐주었다. 혹자가 그 망인(亡人)이 남긴 재산을 빼앗으려 함에, 부군(府君)은 관(官)에 고(告)하여 그의 후사(後嗣)를 세워주었고 지금까지 그 후사(後嗣)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집을 돌볼 때 부군(府君)은 자애(慈愛)하면서도 근엄(謹嚴)을 잃지 않았다. 이에 자제(子弟)들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조금도 저지르지 않았다. 지금 부군(府君)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향인(鄕人)이나 행려(行旅, 나그네) 중에 부군(府君)의 일을 말하면 아직도 그를 사모(思慕)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오호(嗚呼)라! 정사(正思)의 부군(府君)이야말로 공부자(孔夫子)께서 이른바 “10호(戶)쯤 되는 조그만 읍(邑)에 있는 나처럼 충신(忠信)한 자”가 바로 그 분이 아닌가? 이런 분은 삼대(三代)의 유민(遺民)으로서 금세(今世)의 선비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가령 정사(正思)의 부군(府君)께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듣고 강학(講學)을 통해 그 가르침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더라면, 그가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로다!
按正思言, 府君諱汝能, 字公才, 天資純篤, 不由學問而孝弟忠信自有以絶人者. 父性嚴, 府君事之順焉. 於其行事有未安者, 必以正諫, 諫而不入, 則退而謹伺之, 意解復諫, 卒聽從乃已. 母得末疾, 三年衣不解帶, 居不入室, 時其起居飮食之節而躬致養焉. 雖矢溲之役, 不以累它人也. 事兄謹甚, 兄好飮佚遊, 府君懼顯兄過以貽親憂, 委曲其間, 彌縫甚至, 卒以無間言. 親沒析其産, 兄欲善田宅, 恣所取無難色. 平生口無惡言妄語, 足迹不涉官府之門. 居鄕接物恂恂謹敕, 不怒而人敬畏之. 周人之急必盡其力, 雖或負之不計也. 鄕人有死而亡子者, 治其喪甚飭. 或欲沒入其貲産, 爲告官立後, 至今不絶. 處家慈愛而能嚴, 子弟不敢爲纖芥非理事. 今沒三十年, 鄕人行旅言之, 猶有思慕出沸者. 鳴呼! 玆非夫子所謂十室(7-4610)之邑, 忠信如己者乎 是乃三代之遺民, 而非今世之士所能及也. 使其得聞聖賢之敎而講學以明之, 其所至可量哉!
정사(正思)의 병이 그토록 다급했는데도, 그가 써 보낸 글의 내용이 이처럼 상세했고 또 그 자획(字畫)이 근엄(謹嚴)하면서도 세밀(細密)함이 평상시와 같았다. 정사(正思)는 또 ‘그 밖에도 부군(府君)의 아름다운 행실이 있지만 이를 다 편지에 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정사(正思)의 집안을 묻고 이에 그 세계(世系)를 얻었으니, 곧 번양(番陽) 정가(程哥)들은 모두 양충장공령세(梁忠壯公靈洗)를 조상으로 여긴다. 당(唐) 건부(乾符) 연간에, 유(維)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겸 해주염철사(海州鹽鐵使)로서 군대를 거느리고 도적(盜賊)인 황소(黃巢)를 토벌(討伐)했으나 상황이 불리(不利)하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요주(饒州) 낙평(樂平)의 은성(銀城)에 거주(居住)하게 되었다. 후에 신건(新建)으로 옮겨갔는데 그 지역이 나뉘어져 덕흥현(德興縣)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금 덕흥(德興) 사람이 되었다. 그 염철사(鹽鐵使)로부터 12세(世) 내려와서 부군(府君)의 부친 굉(宏)이 태어났다.
그도 또한 향리(鄕里)에서 덕행(德行)이 있었으며 제씨(齊氏)에게 장가들어 부군(府君)을 낳았다. 부군(府君)은 囗씨(囗氏)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성(晟)과 역(易)을 낳았다. 성(晟)은 부군(府君)보다 먼저 죽었고 역(易)은 지금 수직랑(修職郞)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게다가 정사(正思)가 그 집 아들이니 아마도 정씨(程氏)는 앞으로 흥성(興盛)해질 것이로다!
이제 정사(正思)는 비록 불행하였으나, 그의 두 동생 역시 학문(學問)에 대한 안목을 지니고 있으니, 이 집안이 앞으로 얼마나 흥성(興盛)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이에 이 글을 써 주어, 이를 돌에다 새겨 묘(墓) 왼쪽에다 두게 하고 후인(後人)을 기다리노라. 정사(正思)의 부군(府君)의 묘(墓)는 囗향(囗鄕) 囗리(囗里) 모처(某處)에 있다. 성(晟)의 아들에 단우(端友)와 백운(伯雲)이 있다.
또 역(易)의 아들로는 단성(端誠)과 단몽(端蒙)과 단림(端臨)과 단본(端本)이 있는데 정사(正思)가 바로 단몽(端蒙)이다. 나는 또 이들의 이름을 그 묘(墓)에 특별히 기록해 둔다. 3년 임자(壬子) 가을 9월 병자(丙子)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이 글을 쓰노라.
正思病亟, 作書其詳如此, 而字畫謹細如常時. 且謂它行之懿, 猶有不及書者. 今問其家, 得其世系, 則番陽之程皆祖梁忠壯公靈洗. 唐乾符間, 有名維者, 以金紫光祿大夫․海州鹽鐵使將兵討巢賊不利, 始居饒州樂平之銀城. 後徙新建, 而地析爲德興縣, 故今爲德興人. 自鹽鐵十二世而生府君之父諱宏, 亦有鄕行. 娶齊氏, 生府君. 府君娶囗氏, 生二子, 曰晟․曰易. 晟先卒, 易今以修職郞致其事, 而又有正思爲之子, 意者程氏其將興乎!今正思雖不幸, 而二弟亦知爲學, 是固未可知也. 乃書此, 碑刻石墓左以竢. 墓在囗鄕․囗里某處. 晟之子曰端友, 曰伯雲. 易之子曰端誠, 曰端蒙, 曰端臨, 曰端本. 正思卽端蒙也, 予亦已別識其墓云. 三年壬子秋九月丙子, 新安朱熹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