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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월천 조목의 생애와 학문-정만조; 주화오국과 퇴계집 간행 보완 8.15 광복절 61주년| 월천 성재 간재 유일재 비지 백담
이장희 추천 0 조회 38 14.08.15 10: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천 조목의 생애와 학문-정만조; 주화오국과 퇴계집 간행 보완 8.15 광복절 61주년| 월천 성재 간재 유일재 비지 백담

松河 李翰邦 조회 4 |추천 0 | 2011.06.01. 17:58 http://cafe.daum.net/yngeo/3HCU/26

       정만조, 월천 조목의 생애와 학문, 퇴계 문하 6哲의 삶과 사상  51-55쪽

 

   월천 조목은 15세 되던 중종 33년(1538년) 마침 모친상을 당해 향리에 머물던 퇴계를 처음으로 찾아 뵙고 학업을 청하였다. 이 때 퇴계는 38세로 아직까지는 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관인적官人的 자세를 갖고 있던 시기였다.(퇴계 역시 당시의 다른 사류士類들과 마찬가지로 27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시험 준비를 했으며 34세 때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부정자 홍문관수찬 성균관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군주를 보도輔導하여 경륜을 폄으로써 유학자의 이상인 道學정치를 실천하겠다는 관료의 길을 밟았다.

 

그러나 곧 당시의 정치상황에 실망한데다 주자대전을 처음 접하여 주자학에 크게 심취하게 되는 43세 때부터 이미 물러날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하며,특히 46세 때 발생하였고, 그 자신이 한 때 파직되기도 하였고, 친형인 온계 이해가 장살되는 비운을 겪었던 을사사화 이후 완전히 관료생활을 청산하고 양진암養眞庵 정습당靜習堂 한서암寒棲庵 등을 지어 본격적으로 산림학자로서의 길에 정진하게 된다. 따라서 적어도 43세 이전까지 퇴계는 관료적 자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맺은 인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퇴계의 학문적 성취에 따라 월천 또한 성장함으로써 퇴계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서 그 의발衣鉢를 전해 받은 으뜸가는 제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월천의 존재가 중앙 정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선조 6년(1573년) 三公(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 정인홍 최영경 김천일 등ㅇ과 함께 월천이 천거되면서였다. 그는 다섯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참상參上(조선 시대, 종육품 이상 종삼품 이하 관직. 조회 참석하고 목민관(牧民官) 있었음)의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1604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를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월천이 벼슬다운 벼슬을 한 것은 53세 때인 선조 9년(1576) 봉화현감으로 2년 남짓 재직한 것과 65세 때인 선조 21년(1588년) 2년간 합천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지방관 시절 향교를 중수하고 유학을 일으킨 것 외에는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고집을 부려 막힌 부분이 있다는 물의를 빚었으며(학봉선생문집 보유,연방세고 권 7, 안동대학 퇴계학연구소) , 또 탐오貪汚했다는 평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김시양,부계기문部-우부방 대신 삼수변,거품 부溪記聞,대동패림大東稗林 권 22) 이치吏治에는 능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월천 조목은 퇴계의 여러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그 의발을 전수받은?(퇴계선생은 의발을 전수하지 않았다는 설이 우세함/남명 조식선생은 경의검이란 칼은 정인홍에게,성성자 방울은 문인이자 외손서인 동강 김우옹에게 전수) 으뜸가는 존재였던데다가,과거를 멀리하고 정쟁에 초연하며 산림에 은거하여 천리독실踐履篤實하게 수기修己에 힘쓰는 경명행수지사經明行修之士로서 조야에 신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산림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하는데 충분했다.

 

  산림으로서 월천의 역할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강화론에 대한 배척운동이었다. 월천은 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모집하고 의병조직을 지휘하였으며 군자감주부의 자격으로서 강화론을 성토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동문인 류성룡이 영의정으로서 난국의 수습에 임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화론을 펴는 자를 진회(南宋의 강화론자/악비장군을 모함하여 죽게한 자)에 비유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는 논의로서 비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체찰사 이원익이 찾아 왔을 때도 화의설에 대해 분연히 "오늘날로 보건대 진회가 옳고 제갈량이 그르다고 하겠구나"하면서 배척해 마지 않았다. 그의 강화배척론이 당시의 강화론을 철회시키는데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는 의문이지만,훗날 강화론에 참여했던? 류성룡과 남인정권에 대한 여론의 향배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어 남인 실각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산림으로서 월천의 위치에는 하나의 큰 취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기반이 같은 퇴계문인이 주축이 된 남인에게서가 아니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북인에게 있었던 점이다. 류성룡을 중심으로 하는 한 안동지역 퇴계문인들과 월천 중심의 예안지역 퇴계문인들과의 사이에 현실 인식의 차이에 따른 대응방식의 상이성(서애 理氣隨乘論과 월천의 理氣分對論 군자소인론)에서 비롯된 의견 대립과 갈등은 끝내 두 세력에게 모두 커다란 정치적 상처를 남겼으며,월천 개인에게도 산림으로서의 위상을 정인홍에게 가리게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퇴계문인 내에서 월천의 위상을 보기로 하자. 이 문제는 퇴계문인들의 분기分岐와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도산급문제현록에 수록된 퇴계문인은 모두 368명이라고 하지만 그 중에는 시 한 수나 한 두통의 안부 편지만으로 문인을 자처하는 경우가 상당하므로 퇴계의 법통 제자를 엄선한다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그 하나의 기준으로서 퇴계문집 편찬(서정문,1993,퇴계집 초간初刊과 월천 서애是非, 북악사론 3호)에 직접 관여하였던 인물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김부륜(예안,천거) 조목(예안,천거) 김취려(안산) 정탁(예천,문과) 금응협(예안,천거) 금란수(예안,천거)

김성일(안동,문과) 류운룡(안동,음서蔭敍) 금응훈(예안,천거) 이덕홍(예안,천거) 류성룡(안동,문과)

우성전(서울,문과), 남치리(안동), 김택룡(예안,천거)-연령 順

 

    이들은 문집 간행에 각각 일익을 담당하였고,편집 방침을 놓고 각기 의견을 제시하며 수십 년간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잇었던 만큼 퇴계문인 중 핵심이 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거주지에 따라 예안과 안동으로 구분되며 연령의 차이와 과거 급제냐 천거냐에 따라서도 달랐다. 대체로 보아 김부륜 조목 금응협 금난수 금응훈 이덕홍 김택룡 등 예안 출신은 연배가 높은 편으로서,이른 시기에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또 주로 천거를 받은 데서 보듯이 관직보다는 향촌에서의 사족 생활에 만족했던 인물들이었다. 반면 류성룡 김성일 류운롱 우성전 정탁 등은 안동을 거주지로 하였고 적어도 퇴계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인 명종 7-8년(1553년) 이후에 사제관계를 맺었기에 상대적으로 후배들이었으며, 또 문과에 급제하였던 만큼 관료로서의 활동에 적극적인 세력이었다.(겸암선생만 소극적임)

 

   두 계열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 사후 예안과 안동에 마치 경쟁하듯 도산서원과 여강서원(도산서원은 1574년 건립되어 1575년 사액되었고,여강서원은 1576년에 건립되어,100년 뒤인 숙종 2년 1676년에 호계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또 월천이 광해군 7년 1615년에 도산서원에 추배된데 비해 서애와 학봉은 광해군 12년 1620년에 여강서원에 추배되었다)을 세웠던 데서 알 수 있듯이,점차 상호간의 구별 의식을 쌓게 하였고 마침내 퇴계문집을 편찬하면서 그 편찬 방침을 놓고 심각한 의견 차이를 드러내게 하였다.

 

즉 전자는 선생의 글은 한 마디 한 글자라도 모두 빠뜨리지 않고 실어야 한다는 전고全稿 수록 원칙을, 후자는 퇴계 사상의 정수만 담아 마치 朱子大全 같은 보전寶典으로 삼아야 하기에 사소한 문자는 과감히 깍아서 줄이는 정선의 원칙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과 관련된 글의 수록을 통하여 향촌세력 상호간의 결속 강화를 도모하려 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학연에 대한 적통성嫡統性 확보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두 세력간의 숨은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후자의 견해는 류성룡이 주장하였으며, 반면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그 논리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월천이었다. 퇴계문집은 결국 서애측의 반대를 외면한 채 월천의 주관 아래 선조 33년(1600년) 간행을 보게 된다.

 

   퇴계 작고 후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향화香火를 받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강학활동을 벌려 퇴계의 학풍을 계승 확대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월천은 퇴계문집의 간행을 통하여 기라성 같은 퇴게의 문인들 가운데 단연 퇴계의 의발을 받은 적통 제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산림으로서의 명성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할 것이다. 선비들의 여론의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거나 광해군 때 북인들의(이산해 정인홍) 지원을 받았다는 등의 잡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월천이 도산서원에 유일한 배향자로서 입향되며, 또 인조반정 이후 월천문인들이 일거에 쇠퇴하여 명맥조차 부지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향 자체에 별다른 시비가 없었던 사실은 이 시기에 쌓아 놓은 퇴계문인으로서의 월천의 확고한 지위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행장에 보면 월천은 저술하기를 즐기지 않아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한다.(남명 조식,성성재 금난수도 같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행을 보게 된 문집마저도 서애와의 갈등 관계를 담은 내용 때문에 문인 김택룡이 지은 월천언행록(서애의 문인 학사 김응조의 서애변무록西厓辨誣錄에 보면 동계 정온에게 신도비명을 요청하던 인조 18년까지는 언행록이 있었다) 등의 기록을 제외시켜 버려서 월천 학문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선조 연간 이이와 성혼 사이에 <人心道心論辨>을 거쳐 율곡이 '人心道心圖說' 을 지어 임금께 올리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氣發이며 리理로 말미암지 않앗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서도 월천은 분연히 "망령되이 자기 주장을 朱子의 리발기수理發氣隨 기발리승氣發理乘"의 定論(이기수승론)을 동요시키려 하니 이야말로 복심腹心의 적이라"고 배척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월천은 퇴계 이상으로 주자를 받들어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나 이설을 벽이단僻異端의 차원에서 극력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 점은 훗날 송시열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바, 같은 산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동계 정온(정인홍 문인)은 월천의 신도비를 지으면서 그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였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를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제자로 거둠으로써 더욱 빛나게 되었도다.

선생이 아니라면 어찌 퇴계의 마탁磨琢을 물려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었다면 어찌 선생의 깨우침을보장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 마디로 퇴계의 충실한 조술자祖述者로서 월천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후대 송시열의 인증예(경신환국,1680년 후 김익훈-김장생 손자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의 의견이 분렬되었을 때 大老로서 추앙받던 우암 송시열은 김익훈을 신구伸救하면서 조목처럼 스승의 손자인 김익훈을 잘 인도하지 못한 자신의 허물을 말하고 있다.)에서 보듯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학설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런 만큼 홀로 깨우쳐 얻은 독창적인 견해나 새로운 경지의 개척이란 면에서는 미흡하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그 동안 월천의 학문적 존재가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고 할 것이다.(여기에다가 인조반정 후 북인세력 몰락에 따라 월천 再傳제자들과 예안사림이 몰락하고,후손들의 세가 번창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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