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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7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과 기독교 선교사들!
(기독교 복음이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받은 해 보다 일본에 235년 먼저 전해진 이유는?)
1467년 아시카가 (무로마치) 막부 쇼군 후계를 두고 “오닌의 난(응인난)“ 이 일어난후 일본은 200
여개 나라로 갈라져 전쟁으로 밤낮을 지새웠으니 센고쿠(전국) 시대라고 하는데, 120년이
지나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끔직한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합니다!
히데요시는 마츠시타 유키츠나 휘하에서 잠깐 군략과 무예를 배운게 전부이니 교양과 학식이 부족
했지만 처세술과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은 일본에서 제일가는데, 병법에 얽메이지
않는 전략과 전술을 펼쳤으며..... 수하들은 실력 위주로 쓰고 아랫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령하에 전국에서 모인 20만 대군이 규슈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해
사쓰마의 시마즈씨를 제압하고 규슈를 손에 넣는데.... 규슈(九洲) 는 옛날 헤이안 시대에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에 66개 주(국) 를 설치할 때 저 이름에서 보듯 9개 주(국) 로 나뉜 곳입니다.
센고쿠 시대에 규슈는 야마구치의 오우치씨가 후쿠오카현인 치쿠젠과 치쿠고 2국을 차지했다가 모리씨로 넘어
갔고, 서북쪽 히젠 (사가현) 은 소니씨와 후임 류조지 다카노부씨, 야나가와에 가마치씨, 오이타지역인
부젠과 붕고는 오토모 소린 그리고 히유가(미야자키) 는 이토씨, 사쓰마(가고시마) 는 시마즈 씨가 지배했습니다.
류조지 다카노부 (龍造寺隆信) 는 히젠(사가현) 을 차지했다가 처남 류조지 아키카네에게 밀려났으나 1553년
가마치씨의 원조로 히젠을 탈환하고 세력을 확대해 159년 한때 주군이었던 쇼니씨를 공격해 멸망시키니
불안을 느낀 히고국(구마모토현) 아리마씨 (有馬氏) 와 오무라씨 (大村氏) 연합군의 1563년 침공도 물리칩니다.
그러자 분고 (豊後 오이타현) 의 기독교 다이묘 오토모 소린 (大友宗麟) 은 다카노부를 경계해 1569년에 대군
을 인솔해 침공했는데, 북규슈를 차지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가 부젠(豊前 오이타현) 에 침공
했기 때문에 철수했지만 이후 1570년에 소린은 남동생 오토모 지카사다를 총대장으로 6만 대군이 침공합니다.
이때 류조지씨의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 (過島直武) 가 건의한 기습책으로 오토모군을 격퇴하니
이마야마 전투로 오토모씨와 유리한 강화를 맺는데 성공했는데,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세력
이 밀리는지라.... 그 후도 오토모씨에게 종속하다가 결국 영토를 인정받아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1573년 서히젠을 거두고 1575년 북히젠을 평정했으며 1576년 남히젠에 침공해 1577년까지 오무라 스미타다
를 굴복시키고, 1578년에는 아리마 시게즈미를 굴복시켜 히젠(사가현) 통일을 완성한후 적장자
류조지 마사이에 (龍造寺政家) 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은거했지만 정치군사 실권은 계속 다카노부가 쥐었습니다.
규슈 남부에서는 히유가(미야자키현) 이토 가문의 요시스케가 1536년에 가독을 상속한후 지방 영주
기타하라씨를 멸망시키고 1569년 사쓰마의 시마즈 다다치카를 격파하고 오비성을 점령해
휴가노쿠니(미야자키현) 48개성을 지어 성세를 자랑하며 사치와 교토풍 문화에 젖어서 안일에 빠집니다.
1572년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 틈을 노려 불과 3백명 병사로 이노성을 공격하니
무사안일에 빠진 휴가군은 3천 병력으로도 패하고 많은 장수가 전사했으며,
1576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다카하라성의 항복을 받은 후 연달아 여러 성들을 점령합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규슈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일념에 불탄 규슈 최대 영주 부젠(오이타현)의 오토모
소린은 시마즈씨를 멸하기 위해 서양인 선교사들 까지 대동해 4만 3천 대군을 이끌고해 3만 사쓰마군과 전쟁
하니 1578년 미미가와 전투인데 대패하고 몰락하자... 이토 요시스케는 다시 이요의 고노씨를 의지하려 떠납니다.
1578년 오토모 소린이 미미가와의 싸움에서 사쓰마(가고시마현)의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대패하면서,
히젠의 류조지 다카노부는 오토모씨의 혼란을 틈타 영지 탈취에 박차를 가해 덴쇼 8년(1580년) 까지
지쿠젠이나 지쿠고(후쿠오카현), 히고와 부젠 (구마모토현과 오이타현) 등을 세력하에 두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1580년에 자신과 가문을 도와준 은인인 지쿠고릐 야나가와의 가마치 아키모리의 아들
가마치 시게나미를 모살하고 야나가와성의 가마치 일족까지 몰살했으며 인질로 맡았던
아카호시 무네이에의 아들을 죽이는등 “은헤를 원수로 갚으니” 가신단에게 실망을 안깁니다.
덴쇼 9년(1581년) 에는 사가라씨를 물리친 사쓰마(가고시마현)의 시마즈군이 북상하자, 류조지 다카노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1583년 마사이에를 히고(구마모토)에 침공시켜 한 때는 시마즈 군을 압도했습니다.
1584년에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 씨를 배반하니 이것을 기회로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모든 호족들이
동요하는지라, 류조지 다카노부는 스스로 대군을 인솔해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류조지 군은 5만 대군이었지만, 적의 지장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에게 오키타나와테
전투 (沖田畷の戰い) 에서 크게 지고 많은 장병과 함께 류조지
다카노부 자신도 56세 나이로 시마즈씨의 가신 가와카미 다다카타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중신인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주군 다카노부의 유해를 방치한채 도망쳤는데, 나베시마는 14년
전에 이마야마 싸움에서 오토모 가문의 대군을 격퇴시키면서 이름과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후 류조지군의 선봉에 서서 다카노부가 북규슈 지역을 제패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나베시마는 과거의 전공을 인정받아 시마바라 전투에서 다카노부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마사이에와 류조지
가문의 일족으로 부터 히젠국 통치를 위임받게 되는데, 승리한 사쓰마군은 규슈를 80% 정도 점령했으나
오토모씨와 나베시마씨의 요청으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대군으로 규슈로 들어오니.... 중과부적으로 패합니다.
한편 히유가(미야자키) 를 뺏긴 이토 요시스케의 아들 스케타카는 에수교도가 되어 하시바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지만, 아버지 요시스케는 명색이 후지와라 가문의
삼위입도가 어찌 하찮은 히데요시 따위를 섬길 것이냐며 알현을 사양하고 떠돌다가 객사합니다.
아들 이토 스케타카 는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배려로 조카인 이토 요시카타와 함께 다시 히유가국
(미야자키현 니치난시) 오비성으로 돌아오는데 그후 임진왜란에 출진했으니, 예수교도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요시카타는 병사했으나 이토 스케타카의 후손들은 대대로 오비성을
지켰으니 1871년 메이지유신으로 휴가번이 폐지될때까지 이토씨는 무려 14대 284년간 성주를 지냅니다!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침공한 히데요시는 규슈 다이묘 오토모씨나 나베시마씨등의 도움까지 얻어 사쓰마
의 시마즈씨로 부터 항복을 받은후, 교토에 주라쿠다이 (聚樂第 취락제) 라는 대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일왕(천황)을 초청했고,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으며 규슈
기독교도들의 횡포를 목격한 후에는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 선교사) 을 내려 기독교에 압박을 가합니다.
센고쿠(戰國) 시대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를 우상숭배라 하여 때려부수는가 하면 일본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아넘겼으니, 일본인 수십만명이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려 동남아
와 인도 등지로 끌려갔으며 임진왜란때는 조선인 포로 7~8만 중에 상당수가 마카오 국제 노예시장에 팔렸습니다.
또 고니시등 수많은 다이묘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니 일본도 유럽의 식민지가 될수 있다는 두려움에, 히데요시나
이에야스는 기독교가 일본에 크나큰 해가 된다고 생각해 기독교 금지령을 내려 서양인 선교사들을
내쫓고 일본인 기독교도들한테는 기독교를 버리라고 강요하며 거부하면 필리핀등 해외로 추방하거나 죽입니다.
자퐁 (Japon 일본) 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271년 부터 1295년 까지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치핑구(지팡구)” 라고 나온게 처음으로, 원나라가 1274년과 1281년 고려군을
앞잡이로 침공한 일본 원정에 실패한 후에 저작되었으니 치핑구는 금이 가득한 엘도라도로 묘사됩니다.
“치핑구는 육지에서 동쪽으로 해상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매우 큰 섬이고, 주민들은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생겼다. 우상숭배자들이고, 다른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않고
자기들끼리 독립해 있다. 또한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그곳에서는 헤아릴수도 없이 많은 황금이 난다”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시아 무역항로를 열고 무역 거점을 확보해 일본인과 접촉
하게 되면서, 1512년부터 포르투갈의 무역거점 말라카에서 활동한 상인
토메 피레스(Tomé Pires) 의 “동양에 대한 보고” 에 일본인에 대한 묘사가 다시 나옵니다.
얀 후스에 이어 마틴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세력이 줄어드니 종교재판으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뿌리뽑아 없애려 했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성과가 부진하자, 식견이 뛰어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청빈과
독신으로 예수를 닮겠다고 서약한 프란시스 자비에르 등과 1539년에 “예수회 (Jesuite)” 를 창설합니다.
토메 피레스가 일본인을 묘사한지 30여년이 지나 인도 고아에서 말래카를 거쳐 1549년에 일본에 온 첫
예수회 선교사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이니, 규슈 가고시마에는 자비에르 공원 (ザビエル 公園)
이 있고 공원 안에 일본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자비에르" 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으며
또 혼슈 야마구치시에도 기념비와 성당이 있고 그 외에 시모노세키시 항구에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 Α-Ω 알파에서 오메가“ 라 적힌 비문은“聖 フランシスコ サビエル 下関上陸記念碑” 란 이름인데,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인도 고아에 파견돼 전도하다가 말레이시아 말래카의 저팬타운에 거주하던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 전도하고 인도 고아에 보내 신학공부를 시키면서 일본 포교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안지로를 고아의 성바울 대학에 보내기 수십년전에 이미 말래카에 거주하던 “베르나도” 로 알려진
일본인이 유럽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하고 교황 바오로와 이그나시오 로욜라를 만났으며
그후 1557년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죽었고.... 1582년에는 기리시탄 영주들인
아리마 하루노부 와 오무라 및 오토모 요시시게 등이 4명의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 에 보냅니다.
조선인은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을 띄우지 못하고 단 한명의 상인도 자율적으로 해외로
나가지 못했지만, 일본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무역선을 타고 중국 영파와 필리핀,
베트남 호이안과 캄보디아, 태국의 아유타야와 인도네시아및 말레이시아 무역항
말래카에 저팬타운을 건설하고 무역했으니..... 예수회 선교사를 만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은 나라에서 쇄국정책을 실시한 탓도 있지만 “효” 의 나라인지라 외지에서 부상을 당해 부모님
걱정끼치는 것을 큰 불효로 생각했으니... 때문에 무역도 중국에 사신이 갈때 연줄을
잡아 돈을 내고 상인으로 따라가는데, 화물 종류와 수량등 국경 및 사신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으며..... 북경 사신관 마당에서 찾아온 중국 상인과 거래하는게 전부였습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등 예수회 수사 3명과 세례받은 일본인 3명이 말래카에서 배로 안지로 고향
규슈 가고시마에 도착 한건 1549년 8월이니, 가고시마에서 안지로의 친척들에게
포교한 것을 시작으로 1549년 9월 자비에르는 이찌우지성에서 타카히사
성주에게 천주교를 전도한 에후 규슈 센다이로 가서 포교활동을 해 100명의 예수교인을 얻습니다.
1550년 7월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 나가사키현 히라도로 쫃겨난 후에는 교토로 가려고 후쿠오카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상륙후 야마구치 (山口) 에 갔는데, 나가토와 히로시마등 6국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의 31세손 오우치 (大內)씨 영지였으니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을 바친후 빈 절을 하사받고 예수교 전도에 편의를 제공받습니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야마구치에 몇달동안 길거리에서 포교한 결과 무려 500여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고는 1551년 동양 정신의 원천인 유교가 발생한 나라 중국 전도를 위해 일본을 떠나는데, 하지만
중국에는 입국금지로 상륙 못하고 1552년 11월 27일에 광둥성 앞의 상치안섬에서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자비에르가 떠난지 12년이 지난 1563년 31세의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요코세우라 (横瀬浦, 나가사키현 사이카이시) 에 상륙해 선교활동을 시작하는데....
일본어를 배운 뒤, 1564년 규슈 히라도에서 교토로 향했으며 1565년 1월 31일 교토에
입경해 가스파르 빌레라와 일본인 수사 로렌소 료사이 (ロレンソ了斎) 등과 선교 활동을 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교토 니조성 건축 현장에서 대면하였는데, 노부나가가 불교계와
사이가 나빠지자 신임을 받아 기나이에서 포교를 허락받고 선교사 오르간티노와 함께 선교활동
으로 많은 신도를 얻었는데 노부나가는 이교도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규슈 선교중인 1580년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에 즈음해 통역으로 동행해 비와호 아즈치성
에서 노부나가를 배알했으며, 1583년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일본 예수회의 활동사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
하였으니, 프로이스는 심혈을 기울여 전국으로 견문을 넓혔는데 이 기록이 후에 “일본사" 라고 불리게 됩니다.
히데요시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 잘 나가던 예수회의 선교사업은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해
사쓰마 (가고시마) 영주 시마즈씨의 항복을 받은후인 1587년 션교사 추방령을 내리면서
된서리를 맞는데, 예수회가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하는데 위험을
느낀데다가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인들을 사서 노예로 전세계에 판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입니다?
일본사에 히데요시가 선교사 코엘류에게 힐문하는데 “상거래를 위해서 온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인
을 사들이고 그들이 조국, 부모, 자식, 친구를 잃고 노예가 되어 여러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알고 있다. 용서할수 없는 행위이니 너희 선교사는 인도와 그밖의 나라로 끌려간 일본인
들을 돌아올수 있게 조치하라. 불가능하면 포르투갈인들이 구입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풀어주라!”
오니즈키 히데아키 저서 “천황의 로사리오” 에 도쿠토미 소호 저서 “근세일본국민사”를 인용해서 기독교
를 믿는 지방 영주들이 화승총이나 화약 또 그 원료인 초석을 구입하기 위해 여자들을 짐승 처럼
서양인 에게 팔아 넘기니 여자들이 울고불며 소리지르고 몸부림치니 참담함은 지옥과 같다고 적었습니다.
1582년에 기리시탄 영주인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및 오토모는 4명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는데,
1590년에 귀국해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랴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알
할 때 함께 갔는데, 네명의 소년들은 서양 악기를 연주하자 히데요시는 감탄해서 몇곡을 더 연주하게 합니다.
소년들이 쓴 기록에 보면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 앞으로 지나가는 일본인 노예들, 소년 소녀
들을 보았는데 싼 값에 가축처럼 팔려와서 짐승처럼 취급을 받는데도 우리나라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니 그저 분노하는 마음이 인다” 라며 경악했는데... 일본인 노예는 흑인의 3분지 1 가격이었기로
소년사절단이 싼 값에 팔렸다고 분노했는데, 훗날 조선인들은 마카오에서 흑인의 7분지 1 가격에 팔립니다.
자비에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들을 일본어로 번역해 전도용 책자를 만들어 창조의 역사를 설명하니 일본인
들이 "창조주 하느님" 을 알게 되었으며, 조슈(야마구치) 와 규슈등에서 600명의 그리스도인을 만든후
자비에르는 1551년 11월 듀알트 드 가마의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나 다네가시마섬을 거쳐 중국으로 갑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중국에 관심가진 이유는 "일본인들의 정신 속에는 중국 문화" 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니 중국을 통해 일본에 복음이 다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데..... 중국 선교는 30년 후인 1582년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본인 수사 로렌스는 히데요시를 알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정권을 잡은후인 1586년 3월 16일,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 와 루이스
프로이스는 공사중인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서 천주교 포교 에 대해 도움을 받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 는 일본은 동생 히데나가에게 맡기고 자신
은 조선과 중국을 정복 하고자 하니, 지금 2천척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목재를 모은다면서
선교사 들에게 대포와 총을 갖춘 대형 서양 선박 나우선 2척의 조달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조선과 중국 곳곳에 교회 를 세우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두 크리스천이
되도록 명령할 것이며 그후 일본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또 장래 일본인의 절반 혹은
대부분이 크리스천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사카성 천수각과 재보가 저장된탑의
문을 열어 구경시켜주는데 오르간티노 신부의 기록에는 포르투칼 배를 알선하겠다고 말합니다.
히데요시는 “ 이 방에는 금 이 가득차 있고 다음방에 은과 견사, 그 옆방에 다마스커스 직물, 또 다른 방
에는 차 도구, 다음은 도검과 무구가 있다” 고 말하고는 다른쪽 방으로 가니 유럽산 홍색외투
12벌, 또 금실로 재봉된 조립식 침대, 그리고 황금으로 장식된 다실 등을 일일이 구경시켜 줍니다!
선교사들은 성 안의 크리스천 부인들을 통해서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가 남편 히데요시에게 선교사
들에게 특허장을 내려주라고 부탁하니, 효자이자 애처가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에서
천주교의 포교를 허락하며 교회에 대해 일체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병사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허장 2장 을 발부해 주면서 한통은 인도와 포르투칼 에도 보내랍니다?
선교사들에게 오사카성을 손수 구경시키며 입에 혀처럼 놀던 친절했던 히데요시는 규슈를
정복한 후에 돌연히 표변 해, 기리시단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선교사들을 힐문하더니..... 1587년 6월 19일 청천벽력같은 선교사 추방령 을 발표합니다.
대원군이 러시아 침입에 프랑스 도움을 얻고자 했다가 러시아인이 물러가자 프랑스 도움이 필요 없어지고
내실에 천주교도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돌자 태도를 180도 돌변해 천주교 탄압령을 내렸듯, 히데요시도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80% 를 장악한 규슈를 정복하는 전쟁에서 서양 무력의 도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모양인데 규슈를 정복했으니 더이상 서양 무력을 빌릴 필요가 없으니 배척하게된 것으로 봅니다?
“너희 예수교는 왜 일본 방방곡곡 거리에서 포교 하는가? 왜 말고기 와 소고기 를 먹는가?
왜 너희 유럽 상인들은 우리 일본인 부녀자들을 돈을 주고 사서는 외국에 노예로 파는가?”
그러니 토사구팽 이라는 것은 동서고금 어느시대나 있던 것으로 필요할때는 간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
에서 다이묘들 까지도 천주교도 가 되어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데다가 서양 상인들이 저
일본인 부녀자들을 노예로 마카오에 파는게 심기를 거슬린 것인데 규슈정복 후에야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추방령에는“일본은 신국(神國) 이므로 크리스천 나라에서 악마의 가르침 을 설교하기
위해 온 것은 나쁘며, 예수교 신도들은 신과 부처의 사원을 파괴 하니 일본의 법이 파괴
되는지라, 선교사들은 20일 내에 떠나라, 단 포르투칼 나우선들이 상거래 를 위해 오는 것은 허락 한다”
노부나가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비와호수에 천수각을 금으로 도배한 이즈치성 아래에 교회를 설립하는
편의 를 봐주었으며 후임 히데요시도 그런 정책을 취하는등 몇년간 봄날 이었는데,
전혀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선교사들은 나가사키로 가서는 숨어지내게 됩니다.
나가사키의 교회들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히데요시는 이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는
지라 흐지부지 되었다가, 나우선의 사령관이 예방하고 선교사 발리냐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이라 칭하고는.... 교토 취락제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모두 없었던 일이 됩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선교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
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 이다.“
“그가 지은 오사카성에는 300여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려서, 성이라기 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
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으며, 이에 반해 그의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 라고 호평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스의 평가는 선교사로서 기독교적인 감성이나 이해관계를 감안해 분석해야 하는데, 프로이스는
불교 행세를 하던 무신론자 오다 노부나가를 냉소적으로 보았고, 오토모 소린은 아버지가 다른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려고 하자, 소린의 가신들이 아버지 요시아키를 야습하니 이 사건
으로 요시아키의 두 딸과 시오이치마루, 시오이치마루의 생모가 사망하고 요시아키도 사망합니다.
손에 피를 묻혀 당주가 된 소린은 반대파 가신들은 모조리 죽였으며 독실한 기리시탄임에도 호색한이었으니
미녀를 찾아 교토까지 갔으며, 가신의 반반한 처 들을 강제로 빼앗는 등 인간성에 문제가 많은데도
프로이스는 칭찬했는데, 오토모 소린이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네네의 경우는 선교사등 이방인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변을 돌보아 줬기 때문에
칭찬한 것인데....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실제 보다 지나치게 폄하했다고 여겨지며, 히데요시 같은 평민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키가 작았으며...... 그 때는 육손을 성형 수술로 바로잡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기독교에 긍정적이었지만 태도를 바꿔 1587년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천하인으로서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정서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로 일본이 식민지가 될 위험이 있다는것과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꼽힙니다.
서양 상인들이 규슈등지에서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한게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직접적
원인인데,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해 제재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가 선교사를 의심한 동기였습니다.
선교사 발리냐노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신경이 쓰였으니.... 1587년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며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도 선교사들을 곤혹
스럽게 했으니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에 향료를
들여오고 대신 은과 수공예품 및 일본인(나중에는 조선인 포로) 을 노예로 사서 가져갔습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으며, 그들과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데요시는 16세기말 천주교 금압과 함께 일본에서 노예매매를 금지시키게 되지만 완전히 금지시킨건 아니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로 바꿨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일본의 노예무역은
17세기초에도 막부에는 사실상 사라지면서 조선인 노예들은 일본인 노예들만큼 많이 팔려나가지는 않았습니다.
히데요시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 제재에 나선 것은 종교적인 이유 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강했으니 애초에 바테렌 추방령은 이후 에도 막부의 금교령 처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독교도 박해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테렌 추방령의 내용은 신토나 불교에 대한 배척과 강제개종을 금지하되, 영지의 백성들이 제 뜻대로 기독교를
믿는 것 까지는 막은게 아니었고 다만 다이묘가 기독교인이 되려거든 허락을 받고 되라고 함으로써, 예수회가
다이묘들에게 선교를 빌미로 접촉해 연계하고 나아가 그들을 지원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규슈 지역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아리마 하루노부(돈 프로타시오),
타카야마 우콘(유스토), 오토모 소린(돈 프란체스코), 오무라 스미타다
(돈 바르톨로메오), 가모 우지사(레오) 같은 기독교 다이묘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과 연줄을 통해 남만이라 불리던 유럽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 선교사들이기독교인
다이묘들에게 종교 지도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영향을 주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
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난 히데요시에게는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시코쿠 토사 이치죠가문 당주 이치죠 카네사다는 기독교인이 되어 돈 파울로 세례명을 받았으며
하리마의 쿠로다 요시타카도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인이었고 규슈 부젠
의 오토모 소린은 아예 불랑기포 (서양 대포) 뿐만 아니라 그 제조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586년 3월 16일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와 접견했으니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계획을 털어 놓으면서“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교회를 지을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할테니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소개해
달라” 고 요청했고,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겠다며 회유했습니다.
훗날 히데요시의 전쟁은 명분도 정의도 없다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당장 히데요시의 제안을
들었던 그 오사카성에서 선교사들은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 계획을 대놓고
말리거나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히데요시의 계획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에, 가스파르 코엘류는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해 드릴테니까, 그들과 합동해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지요" 라고 제안했는데..... 그는 1년 전인 1585년 규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과
일본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지원하고자 루손 (필리핀) 에 일본으로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 프로이스 외에도 30명이 넘는 가톨릭 사제 및 수도자도 함께 있었는데, 조선과 명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서양식 군함과 항해사를 히데요시에게 제공하는 안건을 논의한 자리에서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 신부는 "서양식 군함 및 항해사를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맞춰
제공하는 안건은 히데요시가 아니라 프로이스와 코엘류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고 기록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조선 침략을 부추겼다는 말인데,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 신부는 북오미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 의 누나인 쿄고쿠 마리아에게 세례성사를 준 사람이며
다이묘 호소카와 (훗날 구마모토 번주) 의 부인 가라샤가 집에 불을 지르고
죽은 뒤에..... 그 유해를 수습해서 오사카 사카이의 크리스찬 묘지에 매장한 것도 그입니다.
중국 정복이라고는 하지만 일본군이 진격하는 길이 어디를 거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히데요시 의 명나라 공격에 찬동한
시점에서 중도에 반드시 거치는 조선에 대한 침략까지도 동의한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12권)를 일본어로 완역한 일본 사학자 마쓰다 기이치(松田毅一)
는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남만인” 에서 정황상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의
증언대로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대한 서양 군함과 항해사 제공에 대해
히데요시가 아니라 루이스 프로이스와 가스파르 코엘류가 먼저 제안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 근거로 코엘류 본인이 히데요시와 접견하기 2년 전인 1583년부터 "일본의 가톨릭
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고 루손의 스페인 총독에게 지속적으로 군사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에 루손에서 활동하던 사제 알론소 산체스도
스페인이 중국을 무력 정복해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산체스 신부의 명나라 정복 구상을 1586년에 루손 총독은 실제로 승인하고, 산체스를 마드리드로
보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고하도록 했으니,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구상하기
이전에 이미 스페인이나 예수회의 종교적인 '콩키스타도르' 대상에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산체스 등 가톨릭 신부들은 명나라에서 기독교 전도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던
마테오 리치를 앞세우면 쉽게 명나라를 정복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한 규슈 예수회 영지를 되찾겠다며 스페인 병력을 일본에 지원해 달라는 코엘류
의 요청을 거절하고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라고
딱 잘라 말할 정도로 온건파 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조차 히데요시의 중국 정복에는 찬성했습니다.
선교사들이 먼저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나라 침략에 대한 지원을 제안했든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으로의 침략 계획에 못 이기는척 맞장구친 것이든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최고 권력자
가 된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더욱 수월하게
하고, 나아가 조선과 중국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겠다는 욕심에 "우리가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과 교섭을 돕겠다.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보자. 본국에 말해 항해사와 군함도 지원해
줄수 있다" 라며 히데요시에게 찬동하는 선교사들을 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이들 선교사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기리시탄 영주들이 사찰이나 신사를 '우상숭배' 내지 '미신' 으로 파괴해
버리는등 강압적으로 굴었다는 점, 나가사키에서 일본인이 기리시탄 다이묘에
의해 노예로 팔려나가는 점에서, 통치자로서 히데요시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민심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반역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던 히데요시 였습니다.
또 서양 선교사들이 소와 말을 식용으로 도살한다는 사실도 그의 불교적 감성으로는 못마땅
했는데,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기 전날 가스파르 코엘류에게 힐문한 내용에
"왜 함부로 소나 말을 식용이라고 도축해 먹느냐" 라고 하는 내용도 들어 있는데 당시
일본은 불교 등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고 고기를 먹는 이들을 매우 천하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고기를 먹으면 몸이 더러워진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고, 그래서 메이지
유신 시대에 정부가 소고기를 먹으라고 권장하자 이에 반발하여 궁궐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19세기 말에 메이지 정부는 이런 일본인에
고기를 먹이기 위해 남비 전골인 나베와 돈까스에 카레라이스와 비후까스등이 탄생하게 됩니다.
코엘류나 다른 선교사들과 만남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으며 또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에게 큰 영향을 주니 매루 위험하다는 위기감을 품게 됩니다.
코엘류가 히데요시의 중국 대륙 침공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그 사람들하고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봅시다" 라고 호언하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센고쿠시대 불교 잇키 처럼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뒷배가 되는 꼴을 연상시켰습니다.
히데요시는 다시한번 기리시탄 다이묘 뒤에 있는 예수회나 기독교의 '위험성'을 자각하게 되는데,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가스파르 코엘류는
다시 자신이 타고 온 범선인 푸스타 (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합니다.
상선이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있는 예수회 소유 범선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본
히데요시는 놀랐으니 이때의 경험도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 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는데, 17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온 범선들은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코엘료는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있다며 환심사기
용으로 예수회가 가진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평화적으로
종교를 전도하러 왔다는 인간들이 무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 했을
뿐더러 그 무장력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함을 확인하고서 위험을 느낀 것입니다.
일본 내에서도 중앙으로 부터 독립성이나 반골 기질이 세기로는 정평이 나 있었던 규슈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반대파 다이묘들이 언제고 예수회의 무장력을 끌어들여 히데요시의
권력을 끌어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으니 훗날 기독교도 4만
여명이 궐기해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켜 포르투칼군의 구원을 기대하며 하라성에서 농성합니다.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는 히데요시가1587년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고 나가사키 등 일본 내의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히데요시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며 무력으로
몰수당한 예수회 영지를 되찾기 위해 키리시탄 다이묘들로 부터 군수 물자를 지원받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키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 요청을 거절하는지라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할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는데 그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로 '흑인 사무라이' 로 유명한 야스케를 소개한 인물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