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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인(仁)·의(義) 고루 갖춘 목민관, 한강 정구
한강(寒崗)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임진왜란기의 의병장이다. 선조, 광해군 때의 성리학자, 작가, 서예가이고 의학자이다. 자(字)는 도가(道可), 가보(可父)이고 호는 한강(寒岡)·회연야인(檜淵野人),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남명 조식(曺植)·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73년(선조 6년) 학덕을 인정받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1580년(선조 13) 창녕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까지 세워졌다. 이후 주로 지방관을 자원하였으며, 동복현감(同福縣監),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右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남명-퇴계의 학통을 이어 근기(近畿)학파 이뤄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깊고 넓은 학문과 그리고 다채로운 저술활동으로 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한 교육사업, 국유학사에 뚜렷한 위치를 확보한 대현이다. 그가 대현의 자리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천품이 남다를 뿐 아니라 일찍부터 명리를 목표로 한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또한 5백년 유학사에 『영남학파』의 거대한 물줄기를 트는 주역인 남명 조식(曹植)과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큰 행운이 있었다.
정구는 21세 때에 이황을 찾아 인(仁)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전수받았고 3년 뒤 조식을 만나 의(義)를 위주로 하는 기절을 배웠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학문과 정신적인 측면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영남좌도의 『퇴계학』과 영남우도의 『남명정신』을 단순히 이어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두 학맥을 통합하고 다시 세운 그의 학통을 근기지방(近畿地方)으로 전파하여 근기학(近畿學)을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조식(曹植)·정구(鄭逑)는 각각 영남좌우·중간지점에서 태어나고 은거하여 강학의 문을 연 묘한 지리적인 연을 갖고 있다.
같은 해에 이황이 태백산 줄기를 타고 출생했고, 조식이 지리산 맥을 이어받아 세상을 나온 뒤 42년 만에 정구가 가야산 봉우리를 안고 고고성을 질렀으니 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 할수 있을까.
한훤당 김굉필의 증손자
정구는 1593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유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청주(淸州)인 그는 판서벼슬을 지낸 사중(思中)의 셋째 아들이며 임진왜란 당시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진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의 친동생 이었다.
정구의 조상들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동방 5현의 한사람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사위가 되고 또 그의 아버지가 현풍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이씨(星州 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게 됐다.
따라서 정구는 조선조 유학사에서 처음으로 도학의 문을 연 김굉필의 외증손이 된다.
이를 보면 정구의 가문도 외향(外鄕) 또는 처향을 따라 향토에 정착한 사족(士族) 이었다.
정구의 할머니는 학덕 높은 집안의 후예답게 효성이 지극하여 친정아버지 김굉필이 몸이 불편할 때는 국을 맛있게 끓여 성주(星主) 대가(大家)에서 달성(達成) 현풍(玄風)까지 1백여리 길을 한걸음에 달려 대접했다는 일화가 내려오고 있다.
그의 아버지 사중은 주역에 밝아 둘째 아들 곤수가 태어났을 때는 『이 아이는 장차 명 정승이 될 것』 이라 하였고, 셋째 정구의 출생을 보고는 『반드시 명현이 될 아이』 라고 예언했는데 적중한 셈이다.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해에 태어 난 정구는 자라면서 남달리 영특함을 보였다.
5세 때 이미 신동이라 불릴 만큼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고 한 가지 일을 마음속에 작정하면 끝까지 해 내고야 마는 끈기와 투지를 가졌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정구는 7세 때 이미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大義)를 통하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10년을 걸려 배워야 할 과정이다.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曹植)의 고제자였던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마침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익혔다.
겨우 건·곤(乾·坤) 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추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니 오건이 그의 비상함을 탄복하여 칭찬했다.
그가 열 살 안팎에 지은 시를 보면 그의 웅심과 높은 기상을 엿볼 수 있다.
大丈夫心事/白日與靑天/磊落人皆見/光忘正凜然
대장부의 마음가짐은/밝은 해와 푸른 하늘 같아서/사람들은 뇌락 같은 기상을 보지만/빛의 끝 간곳은 바르고 늠름하네.
대부분의 명현이 그랬듯이 정구는 역시 20세를 전후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웬만한 역사·천문·지리 등의 저서를 섭렵했다.
남명과 퇴계와 만남
21세에 동방의 거유 이황을 찾아보고 배움을 청하니 이황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정구의 자질이 보통이 아님을 헤아려본 이황은 오건에게 편지를 보내 『후일 유학자가 될 큰 영재를 얻었노라』 며 치하했다.
이 같은 현상은 조식을 찾았을 때도 대동소이했다.
정구를 맞은 조식은 『자네가 이미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알고 있는데 내 더 무엇을 가르치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사대부의 깨끗한 범절은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감이 분명해야 했다. 두 스승의 높은 학덕과 고고한 정신에 힘입어 그는 22세 되던 해 서울에 올라가 과장(科場)까지 갔으나 느낀바 있어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했다. 그는 두 번 다시 명리를 쫓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오로지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 열중하였다.
후일 31세 되던 해 동향의 절친한 친구이며 절개 높던 선비 동강(東岡) 김우옹이 정구를 추천하여 예빈시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벼슬의 길이 열렸으나 그때 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의 길만을 걸었다.
따라서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이황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뜻과 기상이 원대한 기질은 조식 모습 그대로였다.
목민관으로의 첫발
이황과 조식이 타계한 후 영남유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망을 받고 있는 그를 조정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38세에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관계(官界)에 나갔으나 내직은 한사코 사양하고 외직만을 맡았다.
이것은 사색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지방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지위의 고하나 영전과 좌천 등에 구애되지 않고 초연한 선비의 자세로 선정을 베풀어 어진 목민관으로서의 공덕을 쌓았다.
그는 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방수령으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왜적을 격퇴하는 한편 민심수습 등 내치에도 게을리 하지 않은 솜씨를 발휘했다.
결국 그가 한때나마 지방수령직을 수행한 것은 치민정신(治民精神)의 구체적인 발현인 것이다.
선조가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살제폐모(殺弟廢母) 등의 불상사가 일어나자 그는 그의 부당성을 엄정이 논박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여 제자 교육과 학문연구로 일관했다.
도덕사회 구현을 위한 예학 확립
정구는 소년시절부터 기상이 높고 포부가 매우 커서 우주공간의 모든 일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경서, 병학, 의약,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을 통달한 학자였다.
이점에서 그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맥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예(禮)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조 예학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저술이 대부분 예에 관한 것이며 예조(禮曹)서도 중요한 국가적 의식이 있을 때는 정구에게 물어 집행했다고 한다. 기호학파의 거두며 예학의 종사로 추앙되고 있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도 정구와 더불어 예를 논했다.
정구가 밝힌 것처럼 예는 가깝고 멂을 정하고, 믿고 못 믿음을 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었다.
한마디로 그때의 예학은 윤리적 도덕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규범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엄격한 도덕사회의 윤리 기준이었던 예가 어떻게 해서 현대인에게 부정적으로만 조정되었을까?
예의 근본정신은 경(敬)이다. 경은 불교의 선(禪)과 같은 것으로 유가의 독특한 수양법이다.
인격을 수양하고 면학정진하는 마음의 자세로서의 경은 이황 이후 정통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마음의 학문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마음의 학문으로서의 경은 정신적 주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한 예학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색당쟁과 얽히고 문중간의 과시경쟁 수단으로 변신되어 가자 예의 순수한 내용은 점차 퇴색되고 껍질뿐인 형식만 남았다. 이 결과 조선조 예학은 사회와 국가를 병들게 한 허례허식의 표본으로 간주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그릇 조명되고 부작용만 남은 예이지만 그 본래의 뜻은 『인간 사회는 예가 있으므로 편안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한 가치세계였다.
정구는 그의 저서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오선생은 정호·정이·장횡거·사마광·주희를 가리킴)의 서문을 통해 예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람들은 개인·가정·향토생활을 나아가서 국가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럽고 공경스런 생활태도가 필요한데 이에 참고할만한 책이 없어 내 감히 붓을 들어 생활의 본을 삼고자 이 책을 엮는다.』
이를 보면 정구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충실하게 하는 경을 보다 확산시켜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하는 기준으로서 예를 역설한 도덕 지상주의 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정구의 일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 보고 돌려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교산 허균(許筠)에게 역사책인 '사강(史綱)'을 빌려 10년이 넘도록 주지 않은 것이다. 이에 허균은 정구에게 편지를 보내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 주기는 더디다 하였는데, 더디다는 말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라며 돌려주기를 독촉하였다.
정구는 저술에 남다른 점이 있고, 그의 학문은 가히 전방위적이었다. 성리서(性理書)가 있는가 하면 지리서도 있고, 의학서가 있는가 하면 문학서도 있다. 어쩌면 그는 서적 편찬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서적을 편찬하자면 다양한 책들을 참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때로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빌리기도 했을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허균의 책을 빌려 보고 미처 돌려주지 못한 것도 이 과정에서 있었던 일인 듯하다.
관동지방의 인문지리서인 '관동지'를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무(軍務)로 대단히 바쁜 시기에 한강은 조금의 여가라도 있으면 관동지방의 지지(地誌)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 인재 최현(崔晛)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그는 "완급은 진실로 다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겨를이 없다고 해서 놓아두고 지나칠 수는 없다. 지금 서적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만약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해 두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에 보일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군사적인 일과 지방지 편찬이 그 완급의 측면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있는 자료들을 수집·정리해 두지 않으면 훗날 그 지방을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구는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면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역사서와 지방지였다. 64세 때 편찬한 '치란제요(治亂提要)'에서 밝히고 있듯이 역사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바로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지방지 편찬에는 참으로 집요한 측면이 있었다. '안민(安民)'과 '선속(善俗)', 즉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고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작으로 동복현감, 함안군수, 통천군수 등 여러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문화를 지방지로 정리하여, 도합 7권이나 되는 지방지를 남겼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1587년 함안군수로 재직하면서 오운(吳澐) 등과 함께 편찬한 '함주지(咸州志)'가 유일하다.
정구는 주자학에 깊이 침잠하기도 했다. 주자와 관련된 운곡(雲谷)·무이산(武夷山)·백록동(白鹿洞)·회암(晦庵)에서 마지막 자를 따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를 편찬하는가 하면,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보고 그 느낀 점을 기록하기도 하고,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 특히 주자의 '무이구곡시'에 차운을 한 '무흘구곡시' 10수는 그가 얼마나 주자를 그리워하면서 주자학을 철저하게 체현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한다.
'무흘구곡시'는 정구가 배향되어 있는 회연서원(晦淵書院) 뒤편 봉우리인 봉비암에서부터 대가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의 용추에 이르기까지 절경 아홉 굽이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는 대가천 맑은 물소리에서 진리의 소리를 들었다. 이 시의 서시에서 밝힌 '주부자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紫陽況復曾棲息),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萬古長流道德聲)'이라고 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땅에서 주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무흘구곡시'의 첫 수는 이러하다.
一曲灘頭泛釣船
風絲繞夕陽川
誰知捐盡人間念
唯執檀奬拂晩煙
첫째 굽이 여울목에 고깃배 띄우니,
석양 부서지는 냇가에 실같은 바람 감도네.
뉘 알리오, 인간 세상의 근심 다 버리고,
박달나무 삿대 잡고 저문 연기 휘저을 줄을.
이 시에는 정구의 성리학적 자연관이 내포되어 있다. 성리학적 자연관이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수양논리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봉비암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면서 인간의 다양한 감각적 욕망에서 발생하는 인욕(人欲)을 막고 물의 근원을 찾아 인간 심성의 근원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의 근심을 모두 버리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구의 성리학적 자연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여름이면 수려한 자연을 찾아 고성방가로 산천의 고요를 찢어내다가 급기야 환경오염에 일조를 하고 돌아오는 소위 문명인들의 반문화적 작태, 여기에 그의 성리학적 자연 인식은 강한 비판력을 행사한다. 정구의 무흘구곡 유적은 1782년 영재(嶺齋) 김상진(金相眞)이 그린 '무흘구곡도'가 남아 있어 그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구는 역사서와 지리서를 편찬하면서 민족의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주자학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면서 성리학적 자연관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탐험해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강학(寒岡學) 연구는 갈 길이 멀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인식하여 한강학의 어떤 부분은 퇴계를 계승하였고, 또 어떤 부분은 남명을 계승하였다는 수준에 그친다. 그러나 한강은 퇴계의 한강이 아니듯이 남명의 한강도 아니다. 남명이 퇴계를 비판한 근거로 든 구담천리(口談天理)가 한강에게는 없으며, 퇴계가 남명을 비판할 때 즐겨 거론한 노장적 기미 역시 한강에게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사적 현실과 주자학의 재인식을 통해 학문적 독보를 이룩하면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틀어 가장 많은 342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따라서 한강학 연구는 아직 출발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벼슬 상징 붉은 띠, 7세 때 두른 일화
한강이 7세 때의 일화이다.
백씨 참찬공 괄이 일찍이 손님과 함께 앉아 있는데 7세의 한강이 붉은 띠를 두르고 나와 그 손님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손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무슨 벼슬을 했느냐?" 한강이 대답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대부의 벼슬을 해왔으니, 저는 마땅히 금빛 나는 옷과 붉은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험 삼아 입어 본 것일 뿐입니다." 이에 백씨가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뜻만 커서 그렇습니다." 한강이 다시 말했다. "제가 뜻만 큰 것이 아니라 요순의 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은 책읽기를 산 오르기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개 독서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름에 있어 반도 가지 않아서 그만 두는 사람도 있고, 두루 돌아다니기는 하나 그 정취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반드시 그 산수의 정취를 알아야 비로소 산을 올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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