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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우지사토 (蒲生氏鄕) 1556~1596 가모가의 가주로 가타히데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노부나가의 면전에서 자신들이 남오미의 주요세력이므로 자신들을 이용해 남오미의 토호를 설득시킬 수 있으므로 걸맞는 대우를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노부나가는 우지사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무시한채로 가모 우지사토와 정세를 논의하고 교섭조건을 토의했다고 한다. 또한 이 교섭으로 우지사토는 노부나가의 차녀를 노부나가에게 요구하기 까지 하여 결국 아내로 맞게 되었다. 혼노지의 변 당시에는 교토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족을 구했지만 변화하는 정세에 대해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야마자키 전투 후 히데요시를 섬겨 고마키-나가쿠테, 규슈정벌,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했다. 전투 직후, 우지사토는 아이즈에 92만석으로 봉해졌는데 큰 상심을 했다고 한다. 사실 영지가 크게 늘어나 가문은 승격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이즈는 사실 교토와 간토만큼이나 떨어져있다. 즉 권력이 중앙에 집중된다는 특성을 생각해봤을 때 우지사토는 이미 위험인물로 찍혀 히데요시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래서 전해지는 얘기로는 우지사토가 히데요시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은 '내쳐졌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내쳐진 이유로는 그가 마음을 읽는 통찰력이 대단하여 히데요시의 경계심을 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592-1593년, 규슈에서 히데요시의 측근에서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말상대를 했다. 1596년, 39살의 나이로 돌연 죽고 말았는데 사인은 병사다.(히데요시의 모살(謀殺)이란 의견도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와카마쓰 성을 축성한 것과 종교는 다카야마 우콘의 추천에 의해 기독교를 믿었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1562~1611
도요토미가의 가신, 아명은 도라노스케로 오와리 출신.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문에 히데요시 다음으로 미움을 받는 인물이다. 히데요시 휘하에 있다 마사노리와 마찬가지로 시즈카타케의 7번창으로 등장, 규슈 정벌과 임진왜란 등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규슈 정벌 후 히고에 영지가 약25만석으로 늘었다.(삿사 나리마사가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은편이었으나 영지가 이웃해 있는 크리스천,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종교상의 이유로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선진으로 출정해 코니시 유키나가와 딴판이었던 북상경로에서도 알 수 있게 한다. 언급했듯이 임진왜란에 거의 초반에 출정해서 한반도의 울산성에서 포위되어 협정을 맺어 빠져나오기 전까지 가장 오래 군사활동(물론 약탈도 포함된다.)을 하여 조선에서 해악을 끼쳤다. 그 때문에 그 당시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아이러니하게 악마를 쫓는 초상으로 그의 초상을 썼는 걸로 그가 얼마나 조선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잠시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일본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있지 않아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1600년, 가토기요마사는 동군의 편에 든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임진왜란 당시 감시역으로 온 미쓰나리에게 질책을 너무나도 들어 감정이 쌓여 버려 미쓰나리에게 원한이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숙적 유키나가가 미쓰나리에게 친하기 때문이라도 사실 기요마사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참전이후 인접해있던 유키나가의 영지를 모두 획득 50만석에 달하게 된다.(훗날 이 영지가 바로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영지가 된다.) 이후로도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어 마사노리와 마찬가지로 히데요리를 곧잘 알현하였다고 한다. 1611년 사망, 사인은 병사라고 보고 있다.(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에야스에 의해 죽었다는 모살설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은하영웅전설의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처럼 마사노리와 함께 ‘쌍벽(雙璧)’이라는 느낌을 준다. 둘다 비슷한 인생을 걸어왔고 전투도 큰 규모도 함께 해왔으며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을 다한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기요마사는 명목적(물론 천하의 주인은 세키가하라 후 이에야스였다.)으로는 천하인이었던 히데요리를 끝까지 보살피다 천수를 다했다가 마사노리보다 일찍 죽었고 마사노리는 결국 자신의 주인까지 죽고 몰락의 인생을 걸었으나 13년을 기요마사보다 더 살았다. 과연 어느쪽이 더 괜찮은 삶을 살았을까. 고바야가와 다카가게 (小早川隆景) 1533~1597
모리 모토나리의 삼남, 형인 깃까와 모도하루와 함께 모리가의 양천(兩川)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와 성이 다른 이유는 고바야가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투에 능하고 다소 지략도 있어 형인 모도하루보다 기량이 낫다고 평가되었고 모토나리 또한 다카카게를 자신의 계승자 데루모토의 후견인으로 삼을 정도였다. 나중에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와의 관계도 아주 좋았는데 이유로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던 혼노지의 변 당시 모리가문은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고 나중에 히데요시가 불리한것을 알자 다카가게가 추격할 것을 반대한것과 도요토미가문의 골칫거리인 히데아끼를 양자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다카가게는 나중에 도요토미 정권하의 다이로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에도 참전, 그러나 조선에서의 실적은 영 지지부진하여 한양은 커녕 전라도 부근에서 계속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중에 전의(戰意)가 없었던 명군을 급습, 그 때문에 다카가게는 고금의 명장으로 불리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1597년에 사망, 세키가하라 일어나기 불과 3년전이었다. 도요토미의 정권의 둘도 없는 충신이었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고바야가와 히데아끼가 동군의 승리의 열쇠를 이에야스에게 넘겨준 사실을 저승에서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고바야가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 1582~1602
고바야가와 가문의 가주. 기노시타 이에사다의 5남으로 히데요시의 처 기다노만도코로(네네)에게 조카가 된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아둔하여 히데요시에게 거의 무시당하는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고바야가와 다카카게가 히데요시의 환심을 살겸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이에 히데요시가 고바야가와라는 명문으로 자신의 일족을 받아 준 다카카게에게 크게 감사했다고 한다. 정유재란시에 명목적인 총대장으로 임명되어 참전했으나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에게 히데아키의 행적을 비난함에 따라 영지가 몰수될 위기에 처하나 이에야스의 중재로 영지가 깎이는 정도로 하여 위기를 넘긴다. 영지는 훗날 히데요시가 죽기 전 다시 증가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고 형식적으로는 서군에 속하여 도리이 모도다다가 지휘하는 후시미성 공략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미쓰나리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막상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이 벌어지게 되자 마쓰오산에서 미쓰나리의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무성의하게 대하다 결국 동군으로 배반, 산을 타고 내려와 오다니 요시쓰구와 우키다 히데이에군을 공격하여 동군이 이기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그 후, 전쟁이 끝난 뒤 히데아키는 그의 변절로 동군이 이기긴 하였으나 모도다다를 공격한 일도 있고 해서 약간의 상급을 받는 것으로 그쳤으나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1602년, 향년 20세로 사망하였다. 무능하다고 알려진데다 도요토미가의 일족중의 하나(네네의 계열이긴 하지만)인 히데아키가 막상 세키가하라의 승리,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요토미가의 파멸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사실은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히데쓰구의 일과 같이 히데요시는 사실 관대하게 보였으나 자신의 직계를 제외하고는 히데쓰구의 예와 같이 일족에게 한 두 번의 실수로 목숨을 끊게 하거나 영지를 감봉시키는 등 자비를 베푸는 일이 쉽게 없었다. 히데아키의 배반은 과연 도요토미가의 미래를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서군이 히데요리가 승인한 도요토미의 정군(正軍)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친척인 히데아키가 배반한 사실은 분명 옳은 일은 아니었고 결국 이는 도요토미가의 파멸을 부르는 최초의 과정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히데아키의 배반은 히데요시의 무자비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할지도 모른다.
고사카 마사노부 (高坂昌信) 1527~1578
다케다가의 가신, 4명신 중 1명으로 신겐의 행적을 다룬 갑양군함(고요군칸)의 저자다. 원래는 가스가 겐고로로 가스가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명문 고사카로 성을 바꾼다. 그러나 훗날 또 다시 가스가 성으로 복성(復姓)하게 된다. 어릴 적 신겐의 측근에서 시동이자 호위무사로 일하였는데 그와의 남색관계로도 유명하며 그에게 보내는 신겐의 편지가 사료로 남아있다. 신겐이 스와가문과 무라카미가문 등이 위치한 시나노를 제패한 이후에는 카이즈성에 거주하면서 북시나노에서 방위를 담당하였으며 대장으로서의 그 기량을 인정받아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당시 딱따구리 전법에서 별동대를 이끌기도 했다. 신겐이 죽고 난 후에는 가쓰요리에게 비난섞인 진언을 자주하여 그로부터 점점 멀어졌으며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한 가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군을 끌고 그에게 가기까지 했으나 결국 신임을 잃어 반 강제적으로 은퇴해야 했다. 1578년, 향년 51세로 병사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루어 놓은 가업이 무너지는 꼴을 보지 않았던 건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남겨놓은 유산을 스스로 싸워 지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해 원통한 일이었을까.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 1568~1623
도요토미-도쿠가와가의 가신, 쿠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에서의 만행으로도 유명하다. 어린시절은 아버지 요시타카가 다른 가문으로 배반해 와서 오다 노부나가에겐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1578년에 아라키 무라시게가 배반하면서 자신을 설득하기 찾아온 요시타카를 감금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요시타카가 배반이라고 의심한 노부나가의 분노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시게하루가 나가마사를 숨겨줌으로써 살아남게 되었다. 이에 나가마사는 이 은혜를 평생잊지 않았다고 한다. 성장하여 1592년, 임진왜란 참전. 1597년, 정유재란에 참전함으로써 조선에서 임진왜란 같은 경우는 황해도까지 북상하여 침략하고 정유재란시에는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 전공을 늘이고자 코베기를 무차별적으로 하는 등 그 행동이 좋지 못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동군에 참가하여 그 당시 요시타카가 은퇴하고 자신이 가주였기에 가문을 대표하여 약 5000을 이끌고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선봉(先鋒)으로 활약하여 전투후 지쿠젠 약 50만석에 임명되어 후쿠오카 번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그 후 도쿠가와 가문에 철저히 충성하여 에도성 개축에 공헌, 오사카 전투에 참가 등 기민한 처세로 도자마 다이묘 출신치고는 별다른 도쿠가와 가문의 압력 없이 평온하게 보냈다. 1623년,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특이 사항으로는 기독교신자였으나 훗날 도쿠가와 가문의 압력에 의해 신앙을 포기했다.
깃가와 모토하루 (吉川元春) ? ~1586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모리가의 양천으로 불리는 사람중에 한 사람이다. 어린나이에 깃까와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1550년에 그 가문을 계승했다. 그의 활동은 주로 모리가문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 참가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오우치가의 유명한 가신 스에 하루카타를 물리치는 미야자마 전투, 아마코가에 대항한 갓산-토다산성 공략전, 비젠-이요 지방 공략전 등 무수한 전쟁 등에 자신의 형제 고바야가와 다카가게와 함께 모토나리 그리고 그의 손자 데루모토를 보좌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나갔다. 이런 공훈이 쌓여 영지가 다소 증가, 모리가문의 영지 북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를 앞세워 일본의 중앙에서 세력을 기른 오다 노부나가가 쳐들어오자 히데요시의 다까마쓰성 공략전 당시 원군을 끌고 도우러 가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결국 모리가문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카가게처럼 히데요시에게 순종하여 시코쿠 공략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586년 사망하였으며 장남 모토나가가 가독을 계승하였으나 불과 1년만에 사망하여 그 뒤를 삼남 히로이에가 이었다.
깃가와 히로이에 (吉川廣家) 1561~1626
깃까와가의 가주, 깃까와 모도하루의 삼남. 처음의 정식 이름은 쓰네노부이다. 1570년, 아마코가 정벌로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1583년, 혼노지변 즈음에 모리가문이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은 전적이 있어 그 이유로 하시바(도요토미)가에 인질로 끌려가기도 했다. 1586-1587년, 아버지 모도하루와 형 모도나가가 차례로 이어 사망해버리자 뒤를 이어 깃까와가의 가주가 되었다. 이즈음에 히로이에로 개명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참전하기도 했다. 장수로서의 히로이에는 전형적인 무골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책사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하여 이에야스에게 모리가문을 온존히 한다는 조건으로 동군에 내통할 뜻을 비췄다. 실제 히로이에는 모리 데루모도에게 동군을 향해 진격하지 말것을 진언하여 그의 결정을 우유부단하게 만들었으며(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군대로 전장에서 모리가문의 군대의 진군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에야스가 약속을 뒤집어 모리가문을 폐적할 것을 결단하나 히로이에 자신이 자신에게 돌아올 스오, 나가토 지방을 모리 가문에게 줄 것을 간청하고 자신은 이와쿠니 지방을 다스리는데 만족하엿다. 1614년, 장남 히로마사에게 가독을 계승시켰다. 1626년, 향년 65세로 사망하였다. 깃까와 히로이에의 역사적 의미는 모리 가문의 보존이라는 것도 있지만 ‘메이지 유신의 창조’에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쿠후 창설 후 자신의 가문은 바쿠후의 절대적인 충신으로 취급받지만 그가 보존시킨 모리가문은 결국 19세기말 다카스키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우)의 신진 군벌에게 장악 당하여 사쓰마와 함께 유신을 일으키는 터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과연 이 당시 스오, 나가토가 원래 히로이에에게 그대로 상급으로 지불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잘하면 우리는 지금에 있어서도 신문 해외란 한 귀퉁이에서 ‘일본, 21대 도쿠가와 쇼군 취임’이라는 글귀를 볼 수 있지도 않았을까.
나오에 가네츠구 (直江兼續) 1560~1619
히구치 가네토요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히구치 가게츠구로 나오에 노부츠나의 양자로 들어가 1581년에 나오에가문의 가독을 상속했다. 어릴적부터 총명해 불과 17세 정도부터 겐신의 부름을 받아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훗날 주군 우에스기 가게까쓰를 꺼리낌없이 풋내기라고 부를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579년, 겐신이 죽고 난 뒤 우에스기 가게까쓰의 파벌에 가담. 오타테의 난에서 승리하고 난 후 최측근이 된다. 히데요시가 죽고 난 뒤, 이에야스가 가게까쓰를 기를 눌러놓을 생각으로 변방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빨리 상경해서 죄를 빌으라 명하자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만한 편지를 이에야스에게 보내 응수할 정도의 기개를 보였다. 하여튼 위와 같이 결국 도쿠가와가에 대항해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세키가하라를 창조시킨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왔다. 도쿠가와에 관한 일을 담당했으며 한 때 도쿠가와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 세키가하라의 패전으로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가 요네자와로 옮겨진 후 6만석을 받고 일하다 곧 은퇴하였다. 1619년, 향년 59세로 사망하였다. 단순한 패배자로 보여질지 모르나 견식이 뛰어나 히데요시 정권당시 히데요시 기준에서는 배신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다이묘들과 동석이 허락될 정도였다고 한다.
니와 나가히데 (丹羽長秀) 1535~1585
오다-도요토미가의 가신, 니와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아명은 만찌요다. 어릴적,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일하다 결국 최측근이 되어 일하였는데 군사, 행정 두 방면에 모두 능했다. 우선 행정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 대표적인 아즈치성 축성으로 그가 얼마나 노부나가의 신뢰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상경할 당시 교토에서 내정을 담당했다. 전투 또한 오케하자마전투부터 아사이가 공략전을 거쳐 나가시노 전투까지 왠만한 전투는 나오지 않은데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활약을 보여왔다. 이 공적에 사와산성을 위시한 오미지방에 영지를 수여받았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사망하고 이에 히데요시군에 가담하여 미쓰히데를 공격하였다. 1583년,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 파벌에 가담 그를 지지. 그러나 이 때부터 사실상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굴러떨어졌다. 훗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당시 자신이 몸이 안좋자 아들 나가시게라도 억지로 히데요시측에 종군하게 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즈음에 시바타 가쓰이에가 멸망한 후 가쓰이에가 점유하고 있던 일부영지까지 수여 받아 120만석까지 달했다. 1585년, 향년 50세로 병사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나가히데가 갈수록 히데요시에게 가신취급을 받는 굴욕을 참지 못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병의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했다는 설까지 있어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니와 나가히데가 사망한 후 훗날 니와가는 세키가하라 직전 당시는 12만석까지 영지가 감봉되어 몰락하고 만다. 이런 말이 있다. 일은 함께 이룰 수 있으되 공은 함께 나눌 수 없다고... 니와가의 몰락은 히데요시의 의리없음보다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인 법칙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다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 1513~1585
오토모가의 가신. 뛰어난 명장으로 ‘뇌신(雷神)’이라는 호칭으로도 유명하다. 초기의 이름은 베츠키 아키츠라로 다치바나라는 성은 인근지역의 다치바나가를 멸하고 대신 자신이 그 성(姓)을 칭해서 다치바나씨가 된 것으로 우에스기 겐신과 마찬가지로 그당시 명문을 중요시하고 이름이 정략(政略)적으로 사용되었던 그 당시 시대 성향의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513년에 출생하였으며 1526년에 가독을 계승했다. 1550년에 오도모 소린의 가신이 되었으며 이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주코쿠의 모리, 사츠마의 시마즈 그리고 류조지가 등 주위의 군웅들과 무수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쯤에(아님 이전이나 혹은 45세, 시기가 정확하진 않다.) 낙뢰를 맞아 다리를 잃고 불구(정확히는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사실과 연계하여 도세츠가 애검으로 뇌신을 베었다 하여 자신의 애검을 라이키리(雷切)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전설도 남게 된다. 이런 무명(武名)을 자랑하는 도세츠의 명성을 듣고 집적 만나고 싶어 다케다 신겐이 면회를 신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562년, 오도모 소린을 따라 출가 도세츠란 이름을 가지게 된다. 1570년, 오토모의 분국이라 할 수 있는 다치바나 아키토시가 모리와 내통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멸하고 대신 자신이 다치바나성을 칭하였다. 1575년, 다카하시 소운의 아들 다카하시 무네토라를 양자로 맞이하고 무네토라의 이름은 다치바나 무네시게로 바뀐다. 1581년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후계자로 정식으로 임명하게 된다. 처음에 소운은 이에 극렬히 반대했으나 결국 허용하였고 무네시게는 결국 후에 도세츠의 후계자로 임명받게 된다. 이즈음부터 도세쓰는 주색과 기독교에 빠져 정신나간 소리만 하는 오도모 소린 때문에 골치를 겪게 된다. 내정에 충실히 임하며 능력없는 다와라 치카가타를 중용하지 말것을 권하였다가 신임만 잃게 된다. 그리고 실제 다와라 치카가타는 1578년 미미가와 싸움에서 시마즈군에 총사령관으로 싸웠다 엄청나게 대패. 국력을 크게 상실한 오도모가는 시마즈가에 의해 급속도로 영지를 잃게 되며 다소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류조지가에게 마저 압박을 받게 된다. 이런 고난속에 도세츠는 다카하시 소운과 함께 오도모가를 지탱하며 각지를 뛰어다니며 분전하다 치쿠코 야나가와 성 공략을 앞에두고 1585년에 결국 72세의 나이로 진중에서 사망하게 된다. 맹장이란 평가와 상반되게 관용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 ? ~1642
다카하시 시게타네의 아들로 다치바나 도세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치바나 씨가 되었다. 1585년, 도세츠가 죽고 난 후 다치바나가의 가주가 되어 시마즈군과 맞서 싸웠으며 후에 히데요시 휘하에 들어갔다. 규슈정벌 후 다치바나가는 오토모가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번이 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영지는 치쿠코 지방에 야냐가와성을 성을 위시한 주위의 약 10만석 초반 가량의 영지라고 한다. 1592년-1597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에 참가하였다. 임진왜란에서는 고바야가와 다카카게 휘하에서 김해 일대에서 정유재란시에는 울산성과 같은 한반도 남부를 공격하였는데 그 무용이 뛰어나서 히데요시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한다.(물론 한민족인 우리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가 발발, 서군에 붙었으나 참패. 가이에키 당하고 만다. 그러나 1611년, 오슈지방에 1,2만석 가량에 작은 영지에 다시 봉해졌고 오사카성 전투에서 활약하여 옛 야나가와성의 영지를 회복했다. 그 후 바쿠후에 절대적인 충신이 되어 시마바라의 난에도 참가하는 등 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지내다 1642년에 사망했다. 사실 무네시게는 인망이 크게 높아 영지가 가이에키 당한 후에도 무네시게의 부하들이 그를 떠나지 않고 먹여살리겠다며 죽으라고 붙어있었다고 한다. 히데다다가 이런 무네시게의 인품이 호감을 가지고 내 말상대나 하라면서 1만석 정도를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무네시게는 착실하게 히데다다의 말상대를 해주면서 성실한 태도를 보이다 결국 옛 영지를 받고 인생이 원위치로 되돌아갔다. 권모술수가 아무리 판이 치는 시대라도 사람의 고결한 인품은 어디서나 인정을 받기 마련인가 보다.
다케다 가쓰요리 (武田勝賴) 1546∼1582
다케다가의 가주, 하루노부의 사남. 어머니가 스와 고료닌, 즉 스와 일족이었기 때문에 그 연고로 하루노부의 시나노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어 처음에는 사실 스와 가쓰요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시나노를 다스리게 될 운명일 줄 알고 있었으나 1567년에 자신의 형 다케다 요시노부가 자신의 아내의 이마가와를 치려는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획책하다 실패한 혐의로 유배되어 있다 할복한 후 신겐은 가쓰요리의 아들 노부까쓰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가쓰요리는은 노부까쓰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다케다가를 다스리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실질적인 후계자였다. 이미가와가 점령 후에 호조가문과의 싸움, 미카다가하라에서 도쿠가와가와 맞서 싸우는 활약 등 이 때쯤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3년 신겐이 죽고 섭정에 등극하여 1574년에 신겐마저 점령하지 못했다는 다카덴진성을 점령하여 그 위세가 절정에 다다른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노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삼단철포전술, 기습 등의 연합군에게 처절하게 농락당하고 바바 노부후사등의 명장을 잃는 등, 기세가 크게 꺾여 후퇴하게 된다. 이때부터 가쓰요리는 무분별한 원정을 감행, 점차적으로 가신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국력또한 큰 폭으로 떨어진다. 1581년, 이에야스의 다케덴진 성 함락을 시작으로 하여 1582년, 기소 요시마사가 배반하게 되고 몇 달 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가이로 침공해오기 시작한다. 이에 다케다 가문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지리멸렬하여 가신의 대부분이 항복하거나 도망쳐버렸다.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결국 할복, 향년36세였다. 훗날 살아남은 다케다가의 대표적인 가신, 사나다 마사유키는 가쓰요리의 죽음을 슬퍼하긴 커녕 그의 밑에 있었던게 이가 갈린다는 심정으로 그를 욕했다고 한다. 사나다가문은 다케다 가문이 그나마 총애했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주 마사유키가 이런식으로 말했다는 건 가쓰요리가 단순히 야만스러운 일개 ‘바바리안’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한 대목이리라.
다케다 노부시게 (武田信繁) ? ~1561
다케다가의 가신, 노부토라의 차남. 다케다 24장중의 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유순한 성격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격렬한 성격인 아버지 노부토라의 마음에 들어 신겐을 제치고 후계자로 점찍혀 있었다. 그러나 하루노부(신겐)가 노부토라를 퇴위시키고 나서 후계자투쟁에서 쫓겨났는데 보통의 권력투쟁의 역사처럼 하루노부에게 죽기는커녕 오히려 신임을 받으면서 살아남았다. 이는 노부시게가 하루노부가 배반할 당시 그를 도와 쿠데타에 협력한 탓이 크겠지만 하루노부의 마음에도 들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노부시게는 그 이후로 이렇다할 자립적인 세력은 구축하지 못한다. 후계자로 선정되었을 정도의 인물인 만큼 어느정도의 감시는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신겐 밑에서 수행했던 전투는 주로 시나노 공략이었는데 후지사와 우지치카와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축출하는 데 일련의 공을 세웠다. 또한 가법을 세우기 위해 규주큐 가쿤이란 99개조의 가법을 노부토요에게 남기었는데 이는 다케다가의 가법에도 일부가 흡수되다 최종적으로는 다케다가문의 영향을 받은 도쿠가와가문의 가법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나노의 공략은 결국 다케다가와 우에스기가 사이에 카와나카지마 전투라는 전쟁을 일어나게 하였다. 이 전쟁 중 1561년,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노부시게는 차현진을 구사해오며 돌격해오는 우에스기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노부시게가 죽고나서 처음에는 우에스기 군에게 그의 수급이 넘어갔다가 다케다군이 빼앗아와서 수급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한다. 향년 37세. 특이사항으로는 이 노부시게란 인물의 이름이 바로 사나다 유키무라의 본명이 되었다.(사나다 노부시게)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 1521∼1573
다키가와 가즈마스 (瀧川一益)
오다가의 가신으로 사천왕 중의 일인. 가즈카츠의 아들이다. 그의 등용시기는 대략 1560년 전후가량으로 히데요시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도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재간에 뛰어나 고속출세를 하였다. 주로 이세와 오미근처의 방위전략을 기타바다케씨가 된 노부카츠를 도와 수행했다. 그가 수행한 전쟁의 내역은 기다바타케 공략, 나가시마의 혼간지 세력 토벌, 이가 세력 추출, 나가시노 전투 참가 등이 있다. 내정에도 능해 1578년의 아즈치 성 축성, 1580년의 야마토 지역의 측량조사를 미쓰히데와 함께 실시했다. 1582년, 노부타타를 도와 다케다 가쓰요리를 쓰러뜨리고 그 상으로 우에노 지방과 간토 간레이에 봉해졌다. 그러나 거기 까지가 인생의 최상의 지점이었다. 혼노지의 변이 발발하고 인근 지방의 호조 우지나오와 붙어 패배하였으며 기요스 회의에 불참하여(했다는 설도 있긴 하다.) 중신의 대열에서 제외되었으며 가쓰이에를 지지하다 결국 히데요시의 압력으로 항복하였다. 이 때부터 사실상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84년, 고마키 나가쿠데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부진한 면을 보여 창피만 당하고 은퇴하였다. 몇 년 뒤에 죽었다고 여겨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테 마사무네 (伊達政宗) 1567~1636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1556~1630
오미 출신으로 아버지는 도라다카. 예전에는 높은 가문에 속해있었으나 다카도라가 태어날 당시에는 이미 몰락해 있었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이소노 가즈마사의 가신으로 아사이군에 속해 싸우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후에 오다군에 항복하면서 노부나가의 조카 오다(츠다) 노부즈미를 거쳐 3000석을 받고 하시바 히데나가의 가신으로 들어갔다. 히데나가의 휘하에서는 모리가가있는 주코쿠 공략, 1583년의 시즈카타케 전투, 사이가 공략전, 규슈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이런 공훈들로 인해 3만석으로 소다이묘로 올라섰다. 1591년, 히데나가가 사망하면서 히데나가의 양자 히데야스의 휘하에 들어갔다. 1592년에 임진왜란, 1597년에 정유재란에 참전하였으며 참전 이후 공훈으로 영지가 이요에 있는 오스성을 위시한 8만석으로 증가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을 때 즈음에는 이에야스측으로 전향하였다. 1600년,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기후성 공략과 회전에 참가하여 이에야스 측에서 싸움으로써 그 공훈으로 영지가 이요 20만석까지 증가하였다. 1608년, 에도성 개축과 같은 바쿠후에 대한 충실한 임무수행에 대한 대가로 이세로 전봉되어 33만석에 달하는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1614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초소카베 모리치카를 상대로 싸워 물리쳐 공훈을 세우나 두 아들 다카노리, 우지카쓰를 싸움에서 잃고 만다. 1616년, 이에야스의 임종 당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셨으며 이에야스가 죽을 지경이 되자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한 다음 순사할 결심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다카도라는 에도 바쿠후의 무한한 신임을 받게 된다. 1620년, 이에야스의 손녀 가즈코가 황비(皇妃)로 입궁할 당시 행렬을 이끌었으며 오사카 성을 건축하는 일을 맡았다. 1630년, 향년 74세로 사망하였다. 도도 다카쓰구가 뒤를 이었다. 시바 료타로가 지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보면 이렇게 충성한 도도가는 훗날 도바-후시미 전투이후 관군(유신군)에 투항해 막부로 창끝을 돌려 선봉에서 막부군을 향해 포격을 했다고 한다. 지전2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궁중은 사회의 최상층임에도 불구하고 권력만 추구하면서 영혼조차 포기한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도덕과 신의가 있겠는가?’ 이렇듯 권력층 사이에는 도덕과 신의 따윈 남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에도 바쿠후가 은혜를 베풀었다가 당했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도도가문이 은혜를 저버렸다고 할 필요도 없다. 서로서로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다. 단지 그 뿐이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1540~1591
도요토미가의 가신, 히데요시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다. 히데요시가 오다가에 임관했을 당시 초반에도 형을 도와 이나바 산성공격이나 가네가사키 퇴각전 등에서 여러 가지 활약상을 보이긴 하나 그가 히데요시 파벌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시기는 1573년에 히데요시가 오미에 나가하마성을 수여받은 전후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의 활동은 도요토미가의 대장으로서 나타나는데 야마자키 전투 참가라던가 시코쿠-큐슈 정벌 참가등의 활동이 그것으로 히데요시의 부재시에는 자신이 총대장을 맡는 도요토미 가문내의 사실상의 제2인자였다. 행정관으로서의 능력 또한 유능한 편이라 일상적인 행정을 도맡아 했을 뿐만아니라 도요토미가의 안팎의 다이묘들의 사이의 조정이나 외교등을 도맡아해 사적인 일은 센리큐에게 공적인 일은 나 히데나가에게 말하면 된다는 말을 자신이 할 정도로 그의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나중에 이르러서는 관직은 다이나곤, 영지는 100만석을 받는 성주가 되고 1591년, 히데요시의 장남 쓰루마쓰마루가 죽고 난 후 후계자로까지 여겨지게 되나 자신도 그 해에 결국 병사, 그의 죽음은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앞당긴 한 요인으로까지 지적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賴) 1593~1615
오사카성 도요토미가의 가주. 아명은 히로이로 히데요시의 차남. 어머니는 차차히메로 불리던 요도기미로 아사이 나가마사가 바로 외조부가 된다. 그의 탄생은 시작부터 많은 죽음을 몰고왔다. 그 당시 히데요시는 자신의 장남 쓰루마쓰마루와 히데나가가 차례로 죽어나가 히데쓰구를 후계자로 삼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친자식이 태어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에 히데쓰구는 1595년에 모반이라는 혐의를 받고 할복하고 히데요리는 도요토미가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1597년에 불과 4살이란 나이로 관례를 치뤘는데 이는 그 당시 히데요시의 건강도 문제가 있었지만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빨리 굳혀두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1598년,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도 뒤이어 사망. 도요토미가는 졸지에 가장 큰 지주였던 가주와 후견인을 거의 동시에 잃어버렸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붙어 이 전투는 일부 도요토미계열의 무장들의 영지를 몰수 혹은 감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을 위시한 65만석을 가진 중급다이묘가 되고 말았다. 1603년, 센히메와 결혼하여 잠시 도쿠가와가문과 도요토미가문은 다소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611년, 그 당시부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만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물론 만났고 이 때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의 뛰어난 풍채와 견식에 죽일 각오를 품었다는 설이 있다.) 불온한 기운이 불더니 범종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가다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에게 도망하고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사카 성에 입성하는 등 많은 긴박한 사건이 일어나더니 결국 1614-1615년, 오사카 겨울-여름의 진은 발발하고 말았다. 1614년, 겨울의 진은 뛰어난 축성기술을 가지고 있던 오사카성과 신축된 사나다 마루를 의지하여 그럭저럭 도쿠가와군을 막아냈으나 결국 바깥해자만 메우는 약속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이는 혼다 마사노부, 마사즈미의 부자의 간계(이에야스의 의도도 있겠지만)로 안쪽해자까지 메우는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1615년, 다시 여름의 진이 발발. 사나다 유키무라와 고토 마다베에 등이 성을 나가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오사카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으며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기미와 자살하고 말았다. 향년 22세였다. 센히메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 당시 구출되어 사카자키를 비롯한 여러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시집을 갔으나 결국 결혼생활은 실패하고 여승으로 불운한 생애를 보내야만 했다. 히데요리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무성한데 사실 그는 요도기미와 오노하루나가의 친자식이었다던가 오사카전투후 사실 죽지 않고 성을 빠져나와 사카이나 해외에 도망쳐 이름을 개명하여 상인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히데요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1536~1598
도요토미 히데쓰구 (豊臣秀次) 1568~1595
미요시 요리후사의 아들로 히데요시의 후계자.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얼마없는 친척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오미의 40만석을 받는 다이묘로 봉해졌다. 그의 행적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부터 시작한다. 이 때 일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싸웠는데 아마 그에게 공적(功績)을 일부러 얻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군지휘관으로는 무능해 실적은 없었다. 그 후 히데요시를 따라 시코쿠 공략이나 오다와라 전투와 같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와 달리 행정가로서는 약간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592년, 그 즈음에 히데나가, 쓰루마루(히데요시의 유아로서 장남)가 죽게 되자 실의에 빠진 히데요시에 의해 간바꾸로 임명 받으면서 후계자로 세워지게 된다. (물론 고바야가와 히데아끼도 그 당시에 있었지만 히데아끼는 거의 바보취급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바꾸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가 다이꼬(太閤)라는 지위에 올라 정치를 간섭함으로써 실제 할 수 있는 행동범위는 일상적인 행정이나 의례절차 정도였다. 1593년, 돌연 히데요리가 태어남으로써 히데요시와의 사이가 갈라진다. 왜냐하면 후계자로 막 확정받으려는 상황에서 히데요리가 태어남으로써 후계자와 간바꾸라는 지위가 모호해 져버렸기 때문이다. 1595년, 고야산으로 추방되어 할복하게 되는데 불과 27세였다. 주요 이유는 쿠데타를 꾀한 것과 살생관백이라고 불릴정도의 난폭한 행동 때문이라고 하는데(오늘날에는 믿지 않는 견해도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아마 히데요시가 히데쓰구를 죽인 이유는 그에 별다른 원한이 있어서기 보다는 히데쓰구가 자신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를 경우 히데요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찬밥취급하거나 죽이는게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히데쓰구의 할복에 뒤따라 그의 일가족도 몰살당하게 되는데 남은 사람은 다른 가문으로 입양된 그의 한 살된 딸 하나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히데쓰구를 죽인것에 대해서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한 국가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 히데쓰구를 세우는게 마땅할 것이다. 그가 일찌감치 후계자에 있었으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쉽게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죽이고 도요토미가를 멸문시키는 일도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한 아버지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자신의 친척이나 혹은 조카를 한 세력의 후계자로 세우는 일이 쉬울까. 물론 히데쓰구를 죽이지 않고 그를 퇴출시켜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히데쓰구가 몇 년 간 후계자로 있었던 이상 어느정도의 파벌은 형성되어 있어 히데요리와 히데쓰구간의 권력쟁탈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기 때문에 사실 히데쓰구를 죽이지 않고 히데요리에게 권력을 순조롭게 이양시킨다는 건 어려운일이다. 그러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실 죽이는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자식사랑에 눈먼 아버지의 무분별한 판단이 낳은 참극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히데요시에게서 인간이 숙명적으로 자식에게 갖는 약함을 느끼게 되어 아무말 없이 단지 씁쓸하게 히데쓰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밖에 없다.
도쿠가와 노부야스 (德川信康) 1559~1579
이에야스의 장남, 미카와 오가자키성의 성주 생모는 이마가와가 출신의 쓰기야마로 거의 태어나서부터 이에야스를 통제하기 위한 인질로 잡혀있었다. 그러나 오케하자마 전투가 발발, 덕분에 오가사키성에 이에야스가 귀환하게 되고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세력하에 있는 우도노씨를 공격하여 생포함으로써 인질교환의 형식에 의해 오가사키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도쿠가와가문이 본격적으로 동맹을 맺은 바람에 1567년, 노부나가의 장녀인 도쿠히메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노부야스와 도쿠히메사이가 얼마 안가 나빠져 불행한 것이 된다. 노부야스의 능력은 대체로 무난하며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다소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성품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백성을 개 때려 죽이듯이 죽일 정도로 너무나 잔인한 경향이 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에 유배인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순사(殉死)할 가신이 있을 정도로 온화하다는 의견이 있는 등 일치하지 않지만 다소 과격한 면이 있긴 한 것 같다. 이에야스가 거성을 옮기고 난 후 성주가 되었으며 나가시노전투에도 출전하여 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등 후계자로서의 활동을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야스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노부야스가 자신의 어머니 쓰기야마 마님과 다케다가와 손을 잡고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노부야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도쿠히메의 편지에 의해 노부나가에게 전달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다 또한 사카이 다다쓰구까지 노부나가를 대면한 자리에서 노부야스의 인물됨을 이야기 하면서 깎아내렸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이에 결심을 굳혔다. 쓰기야마 모자의 할복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무력하게 수용함으로써 쓰기야마는 호송 중 사망. 노부야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결국 죽고 말았다. 1579년, 향년20세였다. 이에야스는 노년에 내내 가슴을 치며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런말은 사실 하면 안되고 사리에도 맞지 않긴하나 참고로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다다 역시 3년 후 ‘장남’으로서 죽고 말았는데 노부나가에게 장남의 죽음은 어찌보면 노부야스를 죽인 업보가 노부나가에게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귀여운 자식을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해 죽여야했던 사실은 얼마나 한이 되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秀忠) 1579~1632
바쿠후의 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아명은 나가마쓰마루 혹은 나가마루이다. 정실의 소생은 아니나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가 이에야스의 정실이 되었었는데 그 아사히히메의 양자라는 형식으로 들어가 자신이 적남(嫡男)인걸 인정 받았다. 어릴 적 자신의 형 히데야스와 함께 그다지 이에야스의 아들취급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큰형 노부야스가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해 할복하고 자신의 작은형은 히데야스 또한 히데요시의 요구에 의해 하시바 히데야스란 이름으로 양자가 되어 도요토미 가문에 입양되어 버리자 졸지에 가문내에서 실질적인 ‘첫째’가 되어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고마키-나가쿠데 전투 이후 오다와라공략전부터 거의 히데요시가문에 인질로 잡혀 있었으며 관례또한 히데요시에 의해 주관되어 히데요시의 글자인 히데(秀)를 히데다다(秀忠) 이름중 한글자로 받았다. 도중에 인질로부터 풀리기는 하나 그후로도 간간히 히데요시에 의해 오사카에 상경하라는 명령을 받아 그후로도 실제 반인질 상태에 놓여있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다소 자유로운 신세가 되었고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가 발발하자 서군과 대치하고 있는 38000의 군세를 이끌고 이에야스와 합류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이 군세를 사나다가문이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전략적가치가 전혀 없는 마사유키가 거주하는 우에다성을 공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은 공격은 실패한데다가 세키가하라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동군과 합류하고 말았는데 이에 이에야스는 격분하여 히데다다를 만나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후계자로 추대되어 1605년, 2대 세이이다이쇼군으로 임명받게 된다. 사실 ‘쇼군(將軍)’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은 정도로 군사면에서는 ‘얼간이’였으나 장자라 불릴정도의 그의 온화한 성품이 후계자로 추대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쇼군으로 임명된 후 아버지에 명령에 여전히 순종하긴 하나 이에야스의 말년에 가서는 다소 주장이 강해진다. 이는 이때부터 이에야스의 가신이 히데다다로 넘어가서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 오사카전투에서는 히데다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여 서서히 압박하자는 이에야스의 방침과 달리 전투가 급진전으로 전개된다. 오사카 전투에선 결국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죽고 드디어 본격적인 에도바쿠후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1616년, 이에야스 사후 주로 바쿠후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세운다. 이를 위해 시행한 일은 자신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키고 에도를 개발시켰으며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주로 들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은 예전의 도자마다이묘출신의 인물들을 본격적으로 가이에키시켜 권력을 강화시켰다. 1623년, 쇼군에서 은퇴하여 아버지 이에야스와 같이 오고쇼에 자리잡아 여전히 권력을 휘둘렀다. 1632년에 사망, 향년 53세였다. 히데다다는 그의 곧은 성격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여자관계에선 그것이 심해 온갖 연령대의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니던 아버지와 달리 깨끗했다고 하며 아버지가 히데다다를 위해 밤에 여자를 보내주자 히데다다가 이에 응수에 여자를 상석에 앉히고 과자를 대접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는 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아주 다른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아니라 나중에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하나 얻는데 이 아들이 훗날의 호시나 마사유키로 훗날 이에미쓰가 쇼군으로 취임한 뒤 이에미쓰에게 이에미쓰 친동생 다다나가(이에미쓰의 후계자 상속의 라이벌)보다 더 항상 내동생, 내동생하며 아낌을 받으며 에도바쿠후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하는 명군이 된다.
마쓰나가 히사히데 (松永久秀) 1510∼1577
미요시, 오다가의 가신, 전국시대인물 중 하극상의 챔피언인 사이토도산을 능가하는 악명을 자랑하며 최고의 악한이자 책략가로 불리는 인물으로 마쓰나가 단조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미요시가의 가신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야마토 지방을 정벌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하여 실질적으로 야마토 지방에서 미요시가로부터 독립을 하였으며 요시테루가 위험했다고 생각했는지 쇼군을 죽이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독립하는 도중 미요시가와 싸울때 나라지방의 사원을 태워 악명이 더욱 높아졌다. 이렇게 한창 잘 나가나 싶었지만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입성하고 마쓰나가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노부나가에게 항복을 하여 그에게 종속되었다. 적극 협조하는 면모를 보였으나 결국 1573년 다케다 신겐의 서상작전, 1577년 우에스기 겐신의 노부나가영지 침공의 기회를 틈타 두 번 배반을 하였으며 1573년은 실패하여 노부나가에게 용서를 구하나 1577년의 경우는 결국 노부나가에게 굴하지 않고 사망했다. 노부나가가 원하는 다기, 히라쿠모가마를 박살내고 폭사(暴死)해버린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노부나가가 그를 소개할 때 말한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 노인은 세가지 죄를 지었는데 하나는 쇼군(요시테루)을 죽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섬기던 미요시가의 주인을 없앤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라지방의 사원을 불태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松平忠輝) 1592~1683
도쿠가와가의 가신, 이에야스의 육남. 어릴적 다테마사무네의 딸과 결혼했다. 원래의 성은 도쿠가와였으나 마쓰다이라 일족인 마쓰다이라 야스타다에 의해 입양된 뒤 시나노의 18만석이 되면서 마쓰다이라 다다떼루가 되었다. 그 후 1610년에는 62만석이 되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당시 차남 마쓰다이라 히데야스(유키히데야스), 사남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오남 다케다 노부요시(어머니가 다케다 일족이라는 설이 있다.)이 세명이 1610년전에 순식간에 차례로 죽어가면서 실질적으로 도쿠가와 가문내에서 ‘둘째’가 되버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부터 가문내에서 위상이 높아진 자신감 때문인지 히데다다와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오사카성을 탐을 냈었는데 이는 스페인에 자신의 가신을 보낼 정도로 외세 지향적이었던 다테 마사무네의 영향이 크다. 결국 오사카 겨울-여름의 진 이후, 쇼군(히데다다)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구금된다. 그런데 이것은 역시 아마 이에야스가 히데다다를 위해서였었을것이다. 이에야스는 아마 형제들을 거의 다 잃어버린 가마쿠라 바쿠후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교토에서 바쿠후의 대리인 역할을 했던 요시쓰네를 떠올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다다테루를 위험인물로 판단 바쿠후의 정치무대에서 제거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하였으며 어찌보면 죽일 각오를 했을수도 있다. 물론 본격적인 처벌을 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대부분은 다다테루가 할복을 당할것이라 예상을 했으나 다행히 유배로 결정나서 이리저리 몇 년 머물다가 옮겨지다 이런식으로 여러 유배지를 돌아다니다 최종적으로는 시나노의 스와에 정착하였다. 히데다다의 치세의 경우에는 대우가 나쁘지 않았고 이에미쓰 경우에는 아예 3~4만석을 들여 거처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정도면 말이 유배인이지 거의 소다이묘다. 그 후 스와에서 약 60년간을 평화롭게 살다 1683년 향년 91세로 사망하였다. 문예, 노래, 춤 등 기예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683년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치세였으니 다다테루는 도쿠가와 4대를 살다 간셈이다. 나는 예전까지 전국시대를 호조 소운(이세나가우지)의 독립에서 오사카 여름-겨울 진으로 보고 있었고 최초의 전국인은 호조 소운에서 최후의 전국인은 사나다 유키무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범위는 몰라도 역시 최후의 전국인은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다다테루는 전국인의 사고 방식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다테루는 결국 전국시대사람들 속에 팽배해 있던 ‘하극상’이라는 개념, 즉 중앙정권을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오닌의 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국시대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당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이런 이유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아직은 전국시대’라는 여겨지는 세계관이 지배하던 에도 바쿠후 속의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최후의 전국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난 왠지 이 다다테루가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왠지 제1대 ‘미토 미츠쿠니’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식에 대해 더 말하자면 다다테루 뒤로도 3명이 더 있는데 이 3명은 훗날 쇼군을 잇는 가문 고산케(御三家)가 되었고 더 나아가 이 고산케는 8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창시한 고산쿄(御三卿)의 전신(前身)이 된다.
마에다 도시이에 (前田利家) ? ~1599
오다 그리고 도요토미의 가신, 어린시절 이누찌요로 불리며 오다 노부나가와 항상 붙어다닐정도로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젊은시절 혈기에 노부나가가 총애하던 다른 시종을 살해하여 노부나가의 격노로 인해 오다가에서 쫓겨나고 낭인이 되었다. 도시이에는 노부나가의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세우고 나서야 등용되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을 당시 도시이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쓰이에를 배반하고 히데요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가가지방의 영토를 얻게 된다. 도요토미가문이 천하(일본)의 패권을 잡은 이후로 둘도 없는 최측근으로 위세가 대단하여 히데요시가 죽고난 후 도시이에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릴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1599년에 사망, 그 이후 자신의 장남 도시나가는 곧바로 이에야스에게 달려간다. 도시이에는 저승에서 과연 어떤 얼굴로 히데요시를 대했을까.
모리 나가사다 1565~1582
오다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의 삼남. 란마루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어려서부터 고쇼, 그리고 커서는 호위무사로 노부나가의 곁을 지키며 그에게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담력과 지혜가 뛰어나 종종 전략에 관한 진언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요시나리는 1570년 전장에서 일찍 사망하여 형 나가요시에게 의지했다. 처음에는 약 500석 정도의 영지를 받고 일했으나 가쓰요리가 멸망하고 난 후 이와무라 5만석에 봉해졌다. 당시 17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이었다. 시즈카타케에서 승전 후 몇 천석 씩 받은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같은 경우와 비교한다면 감이 올 듯하다. 노부나가와의 사이도 너무나 좋아 남색의 대상이란 말도 있고 성질 급한 노부나가 마저도 란마루가 화를 내면 허허 웃으면서 달래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노부나가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에게 줄을 대기 위해 이 란마루에게 먼저 대접을 하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짧았다. 1582년,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싸우다 자결했다. 그의 동생 2명도 모두 죽었다고 한다. 향년 17세. 너무나 꽃다운 나이였다. 이 사람도 역시 너무나 빨리 죽었기에 유명한 일화로 대신할까 한다. 란마루가 어느날 여러 다이묘들을 대접하기 위해 귤을 가지고 왔다. 그 양이 너무나 많았는지 노부나가는 “귤이 떨어질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말이 마치기 무섭게 소반에서 몇 개의 귤이 떨어졌다. 하지만 사실 란마루가 노부나가의 말이 옳았음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란마루가 넘어졌단 얘기도 있다.) 측근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모리 데루모토 (毛利輝元)
모리 다카모토의 아들로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가문의 가주. 1571년 모토나리가 죽게 되자 집안을 계승했다.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와 깃까와 모토하루의 도움으로 집안을 꾸려나갔다. 집권초기에는 비젠의 우키다와 동맹을 맺고 천천히 세력확대를 도모하여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루모토가 집권한지 얼마안있어 일본의 정세는 어느덧 급반전하여 노부나가가 욱일승천하는 바람에 모리가는 고난을 겪게 된다. 이에 데루모토는 무라카미 수군을 혼간지사에 보내어 노부나가에 대한 견제를 꾀하고자 2번에 걸쳐 군을 파견했는데 처음은 승리하였으나 두 번째 군은 실패하게 된다. 거기다 그 후 신겐과 겐신의 사망으로 노부나가의 전략적 초점이 모리가로 향하는 바람에 큰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는 것이었을까. 하시바(히데요시)군을 맞아 이제 괴멸이 눈앞에 다가와있던 모리군은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히데요시에게 굴복은 하나 살아남게 된다. 그 후 철저히 히데요시에게 충성하여 고다이로(五大老)중 하나가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1600년에 미쓰나리에 의해 미쓰나리에 의해 서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총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안코쿠지 에케이와 깃까와 히로이에의 의견사이에서 갈팡질팡 못하다 결국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아 서군은 결국 패배, 모리가는 36만석으로 강등당하고 데루모토 자신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 말았다. 사실 에케이와 히로이에의 의견모두 일리가 있었다. 에케이의 의견을 충실히 따랐으면 실제 군사전문가들이 예상한 만큼 서군의 승리를 움켜쥘 가능성이 있었고 이에야스를 따르자는 히로이에의 의견 또한 그대로 따랐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의 이에야스처럼 2인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당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세의 두 흐름 중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던 데루모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그에게 가혹하기 그지없다.
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 1497∼1571
주코쿠(中國)의 패자, 모리 히로모토의 차남으로 아명은 쇼쥬마루다. 처음에는 형 오키모토의 아들인 고마쓰마루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어 침공을 받기도 했으나 꾸준한 영토확장을 해나갔다. 1497년, 아키의 요시다코리야마 성에서 출생하였다. 1516년, 형 오키모토가 죽게되자 형의 적자 고마쓰마루의 후견인이 되었다. 1523년, 고마쓰마루가 죽게되자 모리가의 새다이묘가 되었는데 그 와중 가독계승에 걸림돌이 되었던 동생 아이오 모도쓰나를 죽이게 된다. 1525년, 아마코가에서 오우치가로의 전향하였다. 그 후 자신의 적자 다카모토를 오우치가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소호족들과 동맹이나 혹은 정벌을 실시함으로써 영토를 차츰 넓혀나갔다. 1540년, 자신의 일생 중 최대 위기가 닥치게 되는데 아마코가에서 자신의 거성 요시다 코리야마로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온것이다. 이에 모리가는 불과 2,3천명의 군사만 가지고 있어 고전을 하였는데 다행히 오우치가에서 원군을 보내어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541년에 아키의 다케다가에 쳐들어가 멸망 시킴으로써 영토를 확대시켰다. 1542년, 아마코가의 갓산토다성에 오우치가와 함께 참전, 별 소득 없이 패하였다. 1544년에 삼남 다카카게를 1547년에 차남 모도하루를 각각 고바야가와가와 깃까와가에 양자로 보내었다. 모토나리는 외교 또는 모살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두 아들을 이 양 가문의 후계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모리 료카와라 불리는 모리의 양천체제 구축이었다. 1550년, 가문내의 골칫거리였던 이노우에가를 당주 모토카네를 비롯하여 숙청시켰다. 또한 이를 계기로 가신들에게 철저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1555년, 이츠쿠시마 전쟁 발발. 3만을 끌고 온 오우치가의 가신, 스에 하루타카의 병력을 불과 4000로 이츠쿠시마에서 좁은 지형을 이용하여 정면에서는 육지의 깃까와군, 배후의 바다에서는 고바야가와군이 각각 스에군을 공격하여 격파시킴으로써 하루타카는 할복하게 되고 모리가는 마침내 오우치가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1557년, 오우치가에 침입. 오우치가를 멸망시키고 스오우와 나가토2국을 손에 넣는다. 오우치가를 멸망시킨 모토나리는 창끝을 아마코가로 돌려 아마코가의 영지를 침공하였다. 전쟁도중 자신의 아들 다카모토가 1563년에 죽기도 하는 비운을 겪지만 마침내 1566년에 아마코가의 거성(居城) 갓산토다성을 함락시키고 아마코가의 영지를 흡수시켰다. 두 가문의 하찮은 신하에 지나지 않았던 모리가가 마침내 주코쿠의 패권을 손에 쥐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모토나리는 오도모가와 싸우거나 야마나가 유키모리의 반란을 진압하러 다니는 등 결국 일생내내 모략과 전쟁의 일상속에서 보내게 된다. 1571년, 71세의 나이로 평생 모략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모토나리는 죽게 되고 아들 다카모토는 모토나리가 죽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가독은 손자 모리 데루모토로 이어진다. 그를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모토나리가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에게 단결을 강조한 3개 화살의 교훈이 그것으로 사실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세계2차대전이전까지 일본의 국정교과서에 까지 실렸다고 한다. 그것은 가독계승 때문에 어쩔수 없이 죽여야 했던 동생 모도쓰나에 대한 참회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사나다 노부유키 (眞田信幸) 1566~1658
사나다가의 가주, 마사유키의 장남. 젊은 시절은 내내 다케다가에 인질생활, 호조와 도쿠가와가에 대항하는 전쟁 등 고난에 찬 시절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마사유키나 동생인 노부시게(유키무라)와 달리 친도쿠가와파로 결혼도 명목상 이에야스의 양녀인 혼다 다다까쓰의 딸, 고마쓰(훗날의 이나히메)와 결혼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이 발발하고 아버지와 동생 유키무라와 달리 자신은 동군에 참전, 히데다다군에 편성되어 우에다성을 공략했다. 동군의 승리 후 마사유키의 영지를 자신이 받았다. 이 때 이나히메가 판도가 결정지어진 후 찾아온 시아버지 마사유키를 쫓아낸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때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에게 구명을 탄원,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구해낸 이 두명의 뒷바라지도 열심히 하였는데 특히 마사유키의 경우 점차 까탈스러지면서 요구가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가산을 내어 도와주려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 후 철저히 도쿠가와가에 충성하여 훗날 오사카 전투에도 오사카성에 틀어박힌 유키무라를 공격하는데 자신의 아들에게 군을 붙여 도쿠가와 가에 참전시켰다. 1622년, 약15만석 가량으로 마츠시로한으로 전봉되었다. 1658년, 향년92세로 사망. 사나다가문의 가계는 메이지까지 이어진다. 노부유키란 인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역시 전국시대 다이묘들이 가진 처세술이 낳은 표본이라 할 것이다. 마에다가문 역시 사나다가와 비슷하게 아들들이 동군과 서군이 갈려 참전하여 이긴쪽인 도시나가쪽으로 마에다 가문의 영지가 옮겨졌다. 즉 진쪽의 사람은 안된 일이긴 하나 어찌됐든 양다리를 걸침으로써 가문의 보존을 꾀하는데는 성공했던 것이다.
사나다 마사유키 (眞田昌幸) ? ~1608
다케다가의 가신으로 사나다가의 다이묘, 유키다카의 3남으로 원래는 다른 가문의 양자였으나 위의 두 형이 나가시노에서 죽음으로써 가주(家主)가 되었다.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가쓰요리로 이어지는 다케다 가문을 섬겼으나 가쓰요리가 죽고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뒤 독립을 하여 반독립적인 성격(우에스기-도쿠가와-호조를 왔다갔다 하는)인 다이묘가 되었다. 처음에는 우에스기-도쿠가와-호조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꾀하며 잘 버텨왔으나 결국 이에야스가 호조와 연합하여 누마타성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쳐들어온 도쿠가와 군을 격퇴시키기 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세력의 열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장남 노부유키는 도쿠가와가로, 차남 유키무라는 우에스기가로 보내어 세력간에 강화를 꾀한다. 이 시기 동안 어느새 일본의 정세는 변화하여 천하인이었던 노부나가를 대신해 하시바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을 쓰면서 일본의 패권을 잡았다. 마사유키는 이를 기화로 삼아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도요토미가의 배신(직신의 신하 혹은 그 신하의 신하)이 아닌 직신이 되어 가문의 위상을 격상시킨다음 1590년의 호조가의 정벌에도 참여해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영지도 히데요시로부터 하사받아 얼마간 넓혔다. 하지만 그것까지였는지 가세(家勢)는 어느덧 기울어 마침내 1600년,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하여 우에다 성에서 히데다다를 상대로 분전하여 패퇴시켰으나 서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자신의 차남 유키무라와 함께 영지를 몰수당하고(자신의 장남 노부유키에게 넘어감) 쿠도산에 유배를 당한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1608년 사망하였다. 마사유키는 유배당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잡을 기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배당한 뒤 날로 쇠약해져 주변 사람들에게 약한 소리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훗날 전국시대의 최고의 효웅(梟雄) 중에 하나로 평가받는 사람인 만큼 자신의 야망을 이루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사나다 유키무라 (眞田幸村) 1567∼1615
사이토 도산 (齋藤道三) 1494∼1556
미노 지방의 다이묘로 사이토가의 가주. 호조 소운,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더불어 하극상의 챔피언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람의 젊은 시절의 행적은 사실 모호하다. 밑바닥부터 올라왔다는 통설과 달리 본래부터 주요 가신이었다가 아버지와 도산 자신을 거쳐서 다른 가신들과 주인과의 몇 차례 정쟁(政爭)으로 다이묘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실 밑바닥부터 그렇게 배신하면 그런 사람을 누가 고용하겠는가. 하지만 일단 통설을 소개하기로 하자. 본래의 성(姓)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마쓰다나 니시무라와 같은 성을 썼다고도 하는데 아마 무명의 지방무사의 아들이었거나 평민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절 생활을 하다가 절에서 도망쳐나와 교토에서 기름 장사를 하게 된다. 그 후 미노지방으로 근거를 옮겨 기름 행상을 그만두고 미노에 있는 중신들을 섬기게 된다. 어찌하여 나가이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나가이 노리히데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이 때 도산이 자신의 주인 나가이씨를 배신하여 다이묘인 도키에게 일러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찾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후 미노의 슈고다이로 있던 사이토가문이 단절되자 그 뒤를 이어 사이토 히데타츠가 되었다.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도산은 마침내 1540년 전후 쯤에 미노의 도키 요리나리를 몰아내고 진정한 미노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런데 그 몰아낸 요리나리가 오와리로 간 바람에 도산은 미노 침공의 명분을 얻은 오다 노부히데와 대립하게 된다. 1547년 같은 경우는 가노쿠치에서 오다 노부히데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토는 결국 노부히데-노부나가 2대에 걸쳐 오다가와 전쟁을 벌이다가 자신의 딸 노히메를 노부나가에게 시집을 보내어 오다와의 전쟁을 마치게 된다. 인생의 말년에 가서는 서로 불화가 있었던 장남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계승했으나 요시타츠와의 불화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불화의 큰 원인으로 요시타츠의 어머니가 도키 요리나리가 첩이었는데 도산으로부터 온지 얼마 안되어(약10개월) 요시타츠가 태어나 버려 도키의 아들인지 도산의 아들인지 모호해져버렸던 것을 원인으로 들고 있다. 소위 출생의 비밀로 인한 갈등인 것이다. 1556년, 결국 요시타츠는 도산을 공격해오고 도산은 나가라강에서 요시타츠와 맞붙어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로 죽고 말았다. 효웅다운 죽음이었다.
사카기바라 야스마사 고헤이타 (神原康政小平太) 1548~1606
도쿠가와가의 가신으로 사천왕중의 일인. 히데요시를 향해 오만한 격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어릴 적 시동으로 이에야스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미카와 지방의 잇키, 아네가와 전투, 미카다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 이에야스가 실질적으로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 있을 기간동안에 큰 전투에는 모두 참가하여 서서히 동년배인 혼다 다다까쓰와 함께 도쿠가와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시대가 변하여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패권을 잡기 시작하고 결국 도쿠가와가와 하시바(도요토미의 전성)가 사이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라 말하는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 때 야스마사는 바로 오와리 근방에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 곳곳에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말고삐를 잡으며 뛰어다니는 신분으로 시작하여 출세하는 큰 은총을 받았음에도 삼남 노부타카를 자결케하고 차남 노부까쓰까지 없애려 하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격문을 세우게 하여 히데요시가 이를 화내어 야스마사의 목에 10만석을 걸었다. 야스마사는 이 전투에서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대(前隊)의 중진급인 이케다 쓰네오키를 베어 무공을 떨쳤다. 1586년, 결국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고 오사카 성에 상경할 시에 같이 동행하였는데 히데요시에게 쉽사리 용서받고 종5위하 시키부 다이유에 봉해졌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에 참전. 그리고 이 당시 이에야스가 간토에 전봉되었는데 이이나오마사 다음으로 2번째로 많은 영지인 고즈케지방의 타테바야시성 10만석을 받았다.(다다까쓰와 동급이다.) 1590년대 초반부터 1600년 당시에는 이에야스가 규슈에 있었기에 주로 간토의 안정을 돌보는데 주력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가 발발하고 야스마사는 히데다다에게 배속되어 세키가하라 전장까지 종군했으나 우에다성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전장에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야스마사가 훗날 히데다다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급랭해졌을 때 야스마사가 중재를 했다고 한다. 1606년, 향년 58세로 사망. 야스마사는 이 즈음에 이에야스가 영지를 가봉시켜 준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 이에야스가 크게 감동받았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 (酒井忠次) 1527~1596
도쿠가와가의 가신이자 사천왕의 필두. 유능한 장수로서 가문 중에서 지위가 높아 이에야스가 미카와에 있던 시절 주요성의 성주나 군진(軍陣)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가의 진영에 야습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둘 정도로 군략에도 뛰어났다. 그 밖에도 고마키 전투에서의 활약, 히데다다를 동반한 상경 등 가문내에서 위세는 절정에 달해 있었으나 이에야스가 간토로 전봉된 후 영지로 하사받은 것은 고작 5만석이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다다쓰구는 이에야스에게 다른 동료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좀 더 늘려줄것을 요구했으나 이에야스는 “자네도 자기 아들(그 당시 명목상의 가주는 다다쓰구의 아들)은 귀여운가 보지?”라며 단숨에 물리쳤고 다다쓰구는 이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로부터 약10년전 쯤 이에야스에게는 노부야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다다쓰구는 오다 노부나가를 방문할 시 노부야스를 자주 폄하를 하였는데 나중에 노부나가가 노부야스에게 시집간 도쿠히메의 편지를 받고 불안해진 상태에 다다쓰구의 언급에 노부야스를 할복시킬 것을 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다쓰구는 이에야스의 고모와 결혼하여 가문내에서 그 지위가 상당히 높아 이에야스가 하는 일에 자주 간섭을 하고 반대를 하였다. 가신의 권세가 군주를 뛰어넘으려하면 반드시 화를 입는 법. 사카이 가문의 몰락은 이에야스의 보복심리가 아닌 다다쓰구의 오만한 처세술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시마 사콘 (島左近) ? ~1600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신으로 미쓰나리에게 과분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자로 기요오키, 도모유키, 카츠타케 등 오히려 알려진 본명들이 너무나 많아 시마 사콘으로 더 유명하다. 처음에 쓰스이 준케이의 가신이었으나 준케이가 사망한 후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 그의 아들 히데야스를 전전하다 마침내 미쓰나리의 가신이 된다. 그 당시 시마 사콘이 미쓰나리의 가신이 된 건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당시 희대의 명장이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애송이에 지나지 않은 미쓰나리의 가신이 되었다는 건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시마 사콘은 미쓰나리에게서 미쓰나리의 영지의 반가까이 되는 녹봉에 제안을 받아 크게 감동을 받아 등용되었다고 한다. 사실 미쓰나리의 영지의 반이라고 해봤자 몇만석으로 오히려 시마사콘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녹봉이지만 이 일화는 미쓰나리의 인물의 크기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마사콘은 미쓰나리의 가신이 된 후 도쿠가와를 암살할 것을 진언하거나 동군을 급습하는 등 참모나 무장으로서의 능력이 모두 1급이었으나 결국 세키가하라 초반 당시 알수 없는 이유로(유력한 설이 총상) 전사하고 만다. 이 인물은 사실 크게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없어 흔히 세키가하라에서 총맞아 죽었다라는 허무한 인상만 남기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세키가하라 당시 사람들은 전략가를 세 명 꼽았는데 바로 나오에 가네츠구, 사나다 마사유키 그리고 시마 사콘이 바로 그 세명이다.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1535-1619
시마즈가의 가주, 다카히사의 차남.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해 히데요시, 기요마사, 유키나카, 다카가게 바로 그 다음쯤으로 미움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전투에 능해 젊은시절에 형 요시히사가 남규슈의 패권을 다지는데 일조했다. 젊은 시절 내내 형을 도와 남규슈의 통일을 위한 전쟁으로 가득했다. 요시히사는 마침내 남규슈의 패권을 확립하고 북규슈의 오토모 소린을 몰아넣게 되었으나 어느새 중앙에 있던 히데요시가 규슈로 진출,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패하는 바람에 자가(自家)의 영지는 쪼개지고 은퇴한 형대신 가주가 되었다. 그 후, 모리가와 비슷하게 일관되게 충성하여 임진왜란에도 적극 참전하였으며 충무공(이순신)이 없을 당시의 수군의 거북선을 격파하는 등 임진왜란에서의 전공이 커 일본내에서 전투에 관한한 인물은 ‘오니 시마즈’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세키가하라가 발발 서군의 편을 들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서군은 패하긴 했으나 여기서 요시히로는 엄청난 노익장을 과시하는데 즉 서군에서 동군의 진영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자신의 영지는 최남서쪽이므로 당연히 자신의 진영이 서쪽에 있었던 만큼 서쪽으로 도망가야 할 것을 엄청난 무용을 과시하며 동군을 가로질러버렸던 것이다. 그 후 나라방면까지 도망쳤다가 서쪽으로 진로를 변경해 마침내 자신의 영지에 도착, 이 무공에 기가 질려버려 이에야스가 영지를 깎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세키가하라의 패전에 책임을 지고 은퇴, 가독은 자신의 아들 다다츠네에게 물려주었다. 1619년에 사망, 항년 84세였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에야스가 요시히로의 영지를 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에야스가 요시히로의 무공을 두려워하여 깎지 않았단 말이 있긴하지만 내 생각엔 아마 오키나와 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키가하라 발발 후 1609년, 오키나와 섬에 있던 류큐가 시마즈에 의해 마침내 점령당하고 만다. 알다시피 이에야스가 바쿠후를 창설하고 난 뒤 전쟁을 엄금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에야스가 요시히로를 무사히 둔건 아마 오키나와를 일본의 영지를 끌어들이기 위한 이에야스의 계략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시마즈 요시히사 (島津義久) 1533-1611
시마즈 가문의 가주이자 시마즈 타카히사의 장남. 남규슈에서 시마즈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데 공헌했다. 1533년에 태어났다. 요시히사 밑의 형제로는 요시히로, 도시히사, 이에히사가 있으며 이 3형제는 모두 형 요시히사에게 심복하였다. 1566년, 타카히사가 은거하자 가독을 계승하였다. 1572년, 규슈의 오케하자마라 불리는 기자키바라 전투에서 3000명을 끌고 침공해온 이토 요시스게의 동생 이토 스케야스를 불과 동생 요시히로와 함께 300명으로 격파, 이에 이토가는 급속도로 세가 약해져 오도모 소린에게 망명을 신청하며 몸을 의탁하였다. 그 후 기모츠카가 등 각자의 다이묘를 격파시키고 1577년, 산슈 통일을 완성시킨다. 1578년, 이런 시마즈의 확장에 위협을 느꼈는지 오도모 소린이 다와라 치카가타를 총대장으로 세워 43000명의 군세로 시마즈의 영지로 쳐들어오고 요시히사는 이에 30000명의 군사를 동원시켜 미미가와에서 싸워 오도모가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오도모가는 국력을 크게 상실하고 시마즈는 이에 힘입어 오도모가의 영지를 잠식해 간다. 그 후 사가라, 아소 씨 등의 소다이묘들까지 평정시키고 남규슈에서의 패권을 확립시킨다. 1584년, 북규슈에 위치한 류조지가에 따르던 아리마가가 시마즈를 따를 것을 알려오고 이에 류조지가 분노하여 류조지 다카노부는 군사(25000~30000)를 이끌고 아리마의 영지로 쳐들어온다. 이에 시마즈가는 시마즈 이에히사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3000명을 파견하여 아리마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류조지가를 대패시킨다. 거기다 다카노부까지 죽이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1586년, 이에 힘입어 이름난 명장 다카하시 소운까지 격파시키며 오도모가의 영지를 잠식시켜간다. 이로 인해 규슈의 통일도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1587년, 마침내 일본의 중앙을 제패한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총대장으로 내세우고 군사(12만~20만)를 딸려 오도모가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시마즈가를 압도적인 병력을 내세우며 격파시켜간다. 이에 요시히사는 항복할 것을 선언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이름을 류하쿠로 고친뒤 히데요시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사쓰마를 위시한 주위의 30만석가량을 제외하고는 시마즈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였다. 너무나 손쉽게 무너지고 만 대망이었다. 1595년, 요시히로에게 정식으로 가독 계승. 그러나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와 권력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며 시마즈를 다스렸다. 1611년,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이에야스가 요시히로를 평가한 일화가 있는데 대장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가신을 통솔하는 지휘봉을 가지고 있다. 요시히사는 이런점에서 바로 대장의 거울이라 할만한 인물이다라며 이에야스는 평(評)했다.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勝家) 1522∼1583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오다가의 최고중신, 오다 노부히데을 모셨으며 나중에 노부히데가 죽고난 후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의 파벌에 속해 있으면서 노부나가와 적대했다. 그러나 나중에 노부나가에게로 전향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하며 나중에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시키고 아사쿠라 가문의 영토에 임명된다. 또한 아사이 나가마사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내였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시를 아내로 삼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미쓰히데를 없애는데 실패하여 기요스회의에서 히데요시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를 옹립하고 히데요시와 항전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세력의 열세로 시즈가타게에서 히데요시에게 패하고 자신의 거성에서 사랑하는 아내 오이찌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만다.
아나야마 바이세쓰 ((穴山梅雪) ? ~1582
다케다가의 가신. 본명은 노부키미로 아나야마 노부토모의 아들이자 신겐의 사위다. 어머니는 노부토라의 딸인데다 자신의 아내는 신겐의 딸로 다케다의 친족을 제외하면 다케다가문에게는 제일 가까운 일족이었다. 신겐의 둘도 없는 가신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나 미카다가하라 전투와 같은 왠만한 중요한 전투는 다 참가하였다. 그 공훈으로 스루가의 영지 일부를 할당받았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스루가의 에지리 성을 맡아 도쿠가와 군에 저항한다. 1582년, 결국 가쓰요리를 배반하고 도쿠가와 군에 붙었다. 이 때 오다-도쿠가와 군의 가이 침공의 길 안내를 한 대가로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자신의 아들 가쓰치요를 다케다가의 가주로 인정받아 다케다가를 부활시킬 꿈을 꾸고 있었다 한다. 다케다가의 최측근 가신이 다케다가를 멸망시킨 주춧돌이 된 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의 초청으로 오다가를 방문하여 동행하게 되었는데 이 때 혼노지의 변이 발발하였고 자신은 다른 경로로 도망치다 인근 토착민에 의해 죽게 되었다. 다케다가문이 멸망한 건 바로 그해, 불과 몇 개월을 더 살겠다고 몇 십년의 충성을 버렸던 것이다.
아사노 요시나가(?野幸長) 1576~1613
도요토미가의 가신으로 아사노 나가마사의 장남. 1576년에 태어났으며 1590년, 14살의 나이로 오다와라 공략전에 진출하여 공훈을 세웠다. 1592년, 아버지와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울산성에서 항전한 1597년까지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런 공훈들로 인해 1593년에 가이의 17만석에 봉해졌다. 그러나 1595년에 히데쓰구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되게 되는데 자신의 아내의 동생이 히데쓰구의 첩인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후에 도시이에와 네네가 히데요시에게 진언하여 용서를 받게 된다. 1599년,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자신을 포함하여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의 7인의 장수들이 미쓰나리를 습격하였다. 그 이유는 미쓰나리가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 등과 함께 자신의 정적(政敵) 대상인 요시나가를 싸잡아서 그 공훈을 폄하했기 때문에 그 원한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시 동군에 참여하여 모리 히데모토를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에 키이쿠니(현 히로시마)에 위치한 와카야마지방을 위시한 37만석을 받게 된다. 이 사람도 마사노리, 기요마사와 같이 히데요리에게 충성하였으며 1611년, 히데요리와 이에야스 대면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단검을 품고 이에야스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613년, 항년 37세로 사망. 가독은 자식이 없어 자신의 동생,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계승하였다.
아사이 나가마사 (淺井長政) 1545∼1573
아사이 히사마사의 아들로 무능력한 아버지를 쫓아낸 가신들의 추대로 다이묘가 되었다. 나가마사는 롯카쿠씨에 쩔쩔 맸던 아버지와는 달리 손쉽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사이토가에 쳐들어갈정도로 위용을 떨쳤다. 그 후 주변세력과 전쟁을 하며 세력을 넓혀나가다 오다 노부나가까지 만나게 되는데 분쟁을 거듭하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한 뒤 중단하였다. 그 후 노부나가의 둘도 없는 동맹자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노부나가가 아사쿠라를 침공하자 옛날의 인의를 지키기 위해-사실 노부나가의 세력확장을 두려워한 것이겠지만-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파기, 진군중인 노부나가를 습격한다. 그 후 복수를 하러 온 노부나가에게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배한다.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3 년간 그럭저럭 잘 버텨내나 다케다 신겐이 죽게 되자 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노부나가는 오다니성을 공략, 나가마사는 오이치의 그의 세 딸을 노부나가에게 돌려 보내고 죽게 된다. 그의 사후는 비참하여 노부나가에 의해 그의 해골은 금박을 칠한 술잔이 되고야만다. 그러나 이 인물을 아주 역사적으로 패배자로 볼수 없는 이유가 재밌는데 차녀는 그럭저럭 시집을 갔으나 장녀 차차히메는 히데요리와 같이 죽긴하였으나 이에야스로부터 쇼군이 되기 전까지 인사를 받는 명목상으로는 천하인의 어머니가 되었고 삼녀, 다쓰히메는 도쿠가와 히데다다의 아내가 되어 중앙집권이 극에 달한 최고의 권력을 지닌 3대 쇼군 이에미쓰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역사에서 승리자는 패배자를 멸절시키는게 아니라 융합해나가면서 나아간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 1536~1565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무로막치 바쿠후의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장남. 검성쇼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어릴 적 신변의 안전을 위해 교토 주변 지역으로 이리저리 피난을 하며 다녔다. 아버지 요시하루가 호소가와 가문과의 갈등 끝에 퇴위당한 후 그를 대신하여 무로마치 바쿠후의 13대쇼군이 되었는데 이미 교토에서의 근거지는 빼앗겼기 때문에 오미의 사카모토성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하고 나서의 몇 년간은 호소카와가문을 배반하고 세운 미요시가문의 가주,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계속되는 전쟁이었다. 둘 다 쉽사리 승부는 나지않아 요시테루가 교토에서 거주했다 쫓겨났다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는데 결국 나가요시가 우세한 위치에 있음에도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쇼군을 죽였다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하여 요시테루가 교토에서 거주하되 자신이 고문이자 후견인이 된다는 조건을 내걸고 요시테루와 화해를 하였다. 교토에서 거주한 후로는 제법 명목적으로나마 최고통치자로서의 해야할 일을 그가 할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 하였다. 각지의 다이묘들을 화해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유명 다이묘의 자제에게 하사하는 등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559년, 노부나가와 겐신이 교토로 상경하게 된것은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1564년, 나가요시가 아들을 잃은 실의로 병을 얻어 죽게 되자 요시테루는 서서히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미요시가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나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경계하였다. 1565년, 마침내 히사히데가 요시테루를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일 것을 결단. 니죠성을 포위하고 요시테루를 습격하였다. 요시테루는 이에 한자루 칼을 들고 분전, 그러나 결국 힘이 다하여 살해 당하고 말았다. 향년 29세였다. 난세에서 군웅들이 활약하는 나라의 ‘명목적인 최고통치자’의 대부분은 항상 나약하게 그려진다. 삼국지의 헌제가 대표적인 예리라. 그러나 요시테루는 어린 나이에도 미요시가와 당당히 맞서서 교토에 들어갈 것을 결단하고 고개를 숙이긴 하나 쉽게 굴하지 않았으며 각지의 다이묘들이 요시테루가 집권한 후 우에스기 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다이묘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긴 했으나 기나긴 역사속에서 ‘망국의 군주’가 가져야할 모습은 이런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朝倉義景) 1533∼1573
에치젠(越前)의 명문(名門)인 아사쿠라가(朝倉家)도 겐키(元龜) 원년(1570),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한 후 세력을 잃고 만다. 텐쇼(天正) 원년(1573), 맹우(盟友)인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가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자, 오다니성(小谷城)을 구원하기 위해 출전하지만 노부나가에게 투항하는 가신들이 속출하면서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본거(本據)인 이치죠다니성(一乘谷城)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추격 앞에 패배를 반복하다가 결국, 일족(一族)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影鏡)의 배반으로 인해 포위당한 후 자살을 택한다.
아케치 미쓰히데 (明知光秀) 1528∼1582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오다가의 가신이자 반역자, 고레토 미쓰히데로도 불린다. 사이토가를 모시고 있던 동미노의 아케치 미츠쿠니의 아들로 처음에는 사이토가를 모시다 나중에 아사쿠라가로 주인을 바꾸었다. 1566년, 요시아키를 위해 전령노릇을 하다가 노부나가에게 등용되어 뛰어난 능력을 보임으로써 히데요시와 거의 맞먹는 고속출세를 하게 된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크게 중용했으나 그에게 모욕이라던가 약속을 뒤집는 등 저지른 악행 역시 만만찮아 점점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에게 악의를 가지게 된다. 1582년, 결국 주코쿠 공략을 앞에 두고 미쓰히데는 노부나가를 혼노사에서 죽이게 된다. 현재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미쓰히데가 혼노사의 변이 일어나기 전에 서서히 반항적인 행동을 보였다하니 아주 우발적인 행동은 아님에 분명하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역시 노부나가에 대한 쌓인 원한이 폭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의 패권도 3일천하에 불과 했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예상과 달리 주코쿠에서 화의를 맺고 재빨리 회군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를 쓰러뜨리고 얼마 후 미쓰히데는 도망중에 농민에 의해 죽게 된다. 역사책에서는 주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암살했다는 식으로 반역자의 이미지로만 나오지만 실제 그는 오다가의 최고의 인텔리였다한다. 축성, 와카, 군사, 행정 전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가리켜 일을 맡기게 되면 속도가 다소 느리긴 하나 빈틈이 없다하여 크게 칭찬했다한다.
안코쿠지 에케이 (安?寺?瓊) ? ~1600
아키 지방에 있었던 다케다가의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승려가 된 이후에 고속 출세를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속출세를 시켜준 가문이 바로 자신이 속해있었던 가문의 원수 모리 가문이었다. 모리 모토나리의 총애를 받은 이후 에케이는 주로 외교 방면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최초로 활약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히데요시-모리 강화 교섭이었다. 그 이후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이요 지방에 영지를 하사받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이후 이에야스의 동군과 미쓰나리의 서군이 대결하고 있었는데 에케이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미쓰나리의 서군에 참가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자신의 계산과는 달리 자신도 직접 얼마간의 군사를 지휘했고 주코쿠 지방의 대영주 모리가 참가했던 서군은 대패, 안코쿠지 에케이는 잡혀 참수당하고 만다. 흔히 나라를 말아먹은 괴승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한심한건 데루모토쪽(정확히는 그의 아들 히데모토)이다. 세키기하라 이후 현재에 와서는 이 전투를 평하기를 서군의 포진이 유리한데도 불구하고 ‘재상님의 도시락’이라 불릴정도로 모리 히데모토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패배를 불러왔다는 의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야규 도시요시(柳生利?) 1579-1650
야규가의 가주, 세키슈사이의 손자이자 세키슈사이의 장남 요시까쓰의 아들. 야규 집안의 적손(嫡孫)으로서 정파 오와리 야규류의 계승자이다. 야규 효고노스케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1579년, 야규 요시까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야규 세키슈사이로부터 검을 직접 사사받았다. 세키가하라 후 1603년부터 1607년까지 가토 기요마사에게 임관하였다. 1606년, 야규 세키슈사이가 죽음으로 야규 신카케류의 적류인 오와리 야규류의 계승자가 된다. 그 후 일본 각지를 유람하고 다녔는데 이 당시 당대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와 대결했다는 말이있다.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남이며 오와리번의 시조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에 사관했다. 여기서 도시요시는 남은 여생의 대부분을 요시나오에게 신카케류를 수여하며 병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후에는 은거하여 선(禪)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1650년, 향년72세로 사망하였다.
야규 무네노리 (柳生宗矩) 1571~1646
도쿠가와가의 가신, 야규 세키슈사이의 오남. 에도야규류의 창시자이다. 무네요시 대신 20대초반에 야규가를 대표해서 하타모토의 취급을 받고 이에야스의 직신이 되었다. 맡은 일은 히데다다의 병법스승 즉, 2대 쇼군의 병법사범이었으나 사실 막상 했던 활동은 정치가에 더 가까웠다. 여러 가지 일을 했겠으나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각지의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이후 공적으로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몰수되어 있던 옛 야규 영지를 물려받았다. 1606년, 세키슈사이가 사망하고 야규신카케류는 여러 분파가 갈라지게 되는데 자신은 에도에 분파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분파(分派)인 에도 야규류다. 왜냐하면 도장의 후계자는 세키슈사이에 의해 무네노리의 조카 야규 효고노스케 도시요시가 임명되었으며 이 오와리 야규류가 야규류의 정파(正派)로서 전해지게 된다. 히데다다의 집권시 히데다다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는데 각지의 다이묘의 감시역, 오사카전투에서의 보디가드, 평상시의 사범 등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무네노리는 검술로 유명하여 오사카전투에서 히데다다를 대신하여 7명을 순식간에 베어버린다던가 검술에 의한 자식에 대한 훈계 등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하여튼 히데다다는 이 유능한 가신에게 영지를 계속 가봉시켜주려 했으나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3대 쇼군, 이에미쓰에 다다라서는 지혜가 날로 더해져 주로 보좌역으로 이에미쓰 곁에서 활동을 하곤 했는데 이 때 영지가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12,500석으로 되어 소다이묘가 되었다. 이 때 그의 검술은 고령임에도 실력이 그다지 쇠퇴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기술보다는 하나의 도(道 )에 달해 있었다. 1646년, 향년75세로 사망. 이에미쓰가 이에 크게 비통해하였다고 한다. 무네노리의 자식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미츠요시인데 이 사람이 바로 8천석을 맡은 하타모토인 .‘애꾸눈 야규 쥬베에’다. 야규 무네노리가 1만 2천 5백석을 쪼개 버린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무욕이나 상속 문제 때문이라고는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무욕에 대한 문제를 들자면 사실 무네노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무결하다는 그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게 마치 비서실장과 같이 정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 경로를 보자면 권력에서 초월하여 세속에 때묻지 않고자 한 무도자의 자세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상속문제 또한 차남을 장남의 가신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내 생각엔 야규는 이 때 새로운 권력질서를 발견하게 된게 아닌가 생각한다. 바쿠후 이전에는 몇석, 몇만석으로 정치의 영향력이 달리 작용되었다면 이제부터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몇석이 중요한게 아니라 쇼군 측근에 있는 관료집단의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은 영지는 최고 집권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요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 에도 바쿠후 내에서 쇼군 측근의 관료집단의 힘은 커져 훗날 메이지 말기에 바쿠후 멸망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바쿠후의 대표가 되어 협상을 한 자는 불과 봉록 ‘몇 십석’의 가츠 카이슈였다.
야규 세키슈사이 무네요시 (柳生宗嚴) ? ~1606
야규신카케류의 창시자. 본명은 야규 무네요시로 세키슈사이는 호이다. 카미이즈미 히데쓰나(훗날의 노부쓰나)와의 대결로 유명하다. 16살 때 무네요시는 그의 가문이 쓰쓰이 가문에 패해 잠시 그를 섬겼으나 훗날 그를 배반하고 미요시 밑에 들어갔다. 1563년,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그가 카미이즈미 히데쓰나와의 만남이다. 여기서 무네요시는 히데쓰나와 그의 제자 히키다에게 모두 패배한다. 야규는 히데쓰나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히데쓰나도 그에 응해 무네요시는 히데쓰나와 제자 히키타에게서 2년간의 수련을 거쳐 신카케류의 인가를 획득하게 된다. 노부쓰나가 죽고난뒤 신카케류를 계승하고 또 훗날 야규신카케류를 창시하게 된다. 1594년, 시간을 흘러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는 무네요시를 교토로 불러 그와 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에야스는 간단히 목검을 빼앗기고 무네요시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실로 스스로를 무도(無刀)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솜씨였다.이에야스는 야규에게 사범이 될 것을 요청했으나 사양하고 대신 그의 오남(五男) 무네요리를 추천하였다. 1606년에 사망, 그러나 야규가문은 그를 시작으로 쇼군의 검술가문으로 계속 번창하였다.
야마나가 유키모리 (山中幸盛) 1545~1578
아마코가의 가신으로 야마나가 미츠유키의 차남, 시카노스케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다소 설화적이긴 하나 자신을 달의 아이라 생각하여 애검과 함께 숙적 모리를 멸절시키기 위해 모든 고난을 짊어지겠다고 달을 두고 한 맹세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가 성년이 되어 장수로 전국시대에서 활약을 시작하게 될 때는 이미 아마코가의 국운은 기울어진 상태였다. 모리가문이 이즈모방면의 아마코가로 침입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유키모리는 구원군을 끌고 다니나 실패하고 마침내 본성에 갇히게 된다. 이 때 유명한 대결, 시나가와 다이젠과의 대결이 펼쳐지고 마침내 다이젠을 물리쳐 “사슴이 늑대를 죽였다!”라는 훗날 유명해지는 말을 외치며 그의 무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무용이 전국(戰局)을 변화시킬 수 없는 법, 결국 본성은 함락되고 추방되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유명한 달의 맹세가 이뤄지는 때다. 아마코 가쓰히사를 내세우고 저항을 계속하다 오다군에 가담, 하시바(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모리, 우키다가문의 영지방면으로 참전한다. 이에 대한 전공으로 히데요시에게서 고즈키성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고즈키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다. 곧바로 모리군은 아마코가의 고즈키성으로 쇄도해 들어오고 노부나가의 고즈키성으로의 원군을 포기하라는 군령에 의해 고즈키성은 손쉽게 함락된다. 가쓰히사는 자살, 유키모리는 작은 영지를 받고 쫓겨나는 걸로 그친다. 하지만 깃까와 모도하루가 유키모리에게 자객을 파견, 향년33세로 사망하였다. 이 인물은 왠지 모르게 망국의 상황에서 끝까지 촉을 재건하고자 했던 삼국지의 강유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습은 역사적인 올바른 행동과 정당성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한다.
야마모토 하루유키 (山本晴幸) 1493~1561
다케다가의 가신, 간스케라고도 불린다. 미카와 태생으로 각지를 떠돌다 다케다 하루노부(훗날의 신겐)을 섬기게 되었다. 등용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설이 도는데 가장 유력한 것이 이미가와의 배신(倍臣)이었다가 하루노부와 대면할 기회를 가졌는데 하루노부가 하루유키의 식견에 반해 등용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젊은 시절은 꽤 실력있는 검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등용될 당시 나이도 많은데다 이미 몸이 크게 상해 주로 군사로서 활약을 했는데 시나노 정벌, 무라카미가 공략과 같은 무수한 전투에서 주로 허보나 위약(違約)과 같은 책략을 진언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61년,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발발한다. 신겐에게 2만의 군대를 둘로 나누는 소위 말하는 탁목조(딱따구리)의 전법을 진언하였는데 즉 12000의 분견대를 사이조산에 주둔하는 겐신을 공격하고 나머지 8000의 본대를 하치만바라에 주둔시켜 퇴각하는 겐신을 괴멸시킨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하여 우에스기 겐신은 신겐의 본진으로 차현(車懸)진을 형성해오며 돌진해 들어오고 하루유키는 책임을 느끼며 직접 창을 들며 싸우다 전사했다. 훗날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다케다 24장(將) 중 일원이 된다. 이 인물은 사실 평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인물이 없었다는 식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가 많아 평하는 것 자체가 오류가 될 수 있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평하라 하면 역시 시대가 낳은 인물이란 말이 가장 들어맞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1534∼1582
오다 노부타다 (織田信忠) 1557~1582
노부나가의 장자. 1576년에 노부나가로부터 오와리 · 미노와 기후성 및 그곳의 모든 자원을 물려 받았다. 노부나가는 오직 천하포무의 야망만으로 아즈치성을 쌓아 올렸고, 그 후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정벌, 이시야마 혼간지 등을 공격해 하리마(播磨) 계략, 고우슈 타케다 정벌 등 각지에 출진했다. 훌륭한 가신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였다고 자주 말해지기도 하지만, 가신을 다루는 능력은 충분히 있어 2 대째로서는 일단 합격이었다. 괴상한 아버지와는 달리 가신들로부터도 어느정도 친밀감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에서 아버지가 급사. 니죠성의 고쇼(二條御所)에 있던 노부타다는 아버지를 구원하려 하지만 구원에 실패하고, 마지막에는 사네히토(誠仁) 친왕과 기찌보시만을 탈출시키고 죽임을 당했다.
오다 노부타카 (織田信孝) 1558~1583
오다 노부나가의 삼남. 이세의 간베 도모모리(神戶具盛)의 양자로 들어가 가독을 계승. 혼간지 변후에는 시바다 가쓰이에와 결탁.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대항하나 형 · 오다 노부카츠에게 패해 자해로서 생을 마감했다.
오다 노부카츠 (織田信雄) 1558~1630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보다 늦게 태어났으나 혈통이 다소 나아 둘째가 되었다. 1570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모략에 의해 기타바다케가의 양자가 되었다. 1575년에 정식으로 가주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가신들을 이용해 명목상의 아버지였던 도모노리를 죽이고 기타바다케가의 안에서의 권력을 확립했다. 1579년에는 이가에 일차로 침공하였으나 노부나가의 꾸중만 들었을 뿐 소득이 없었고 1581년에 성공하게 된다. 1582년에 혼노지의 변으로 아버지 노부나가를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 노부카츠가 아즈치성을 태웠다는 소리도 있는데 유력하긴 하나 아주 확실하진 않다. 1583년, 기요스 회의의 결과로 인해 오와리, 이세, 이가의 삼국을 경유하게 되나 1584년,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거치면서 결국 히데요시에게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이세, 이가는 히데요시에게 뺏기고 오와리하나만 남게 된다. 1590년, 히데요시의 전봉명령을 거부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퇴출되어 중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러나 다시 히데요시에게 용서받아 그의 보호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1595년에는 그의 아들 히데카츠가 에치젠의 오오노에 4만 5천석에 봉해져 다소나마 다시 신세를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서군의 편을 드는 바람에 서군 패배 후 영지를 몰수당하고 만다. 1614-1615년, 오사카 겨울-여름의 진에서 히데요리를 배반하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 공적으로 5만석 가량을 받으며 유유자적하며 살다 1630년에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세간의 평가는 이마가와 우지사네와 맞먹거나 혹은 버금가는 바보취급을 받고 있으나 어쨌든 중요한 건 결국 일단 노부나가의 오다가문이라고 간주되어 지금의 나날까지 전승되는 계열은 결국 노부카츠의 계열이란 것이다. (얼마전 신문에선 이 계열의 당주가 다케다 신겐의 가문의 당주와 가문사이의 원한에 관해 화해를 해서 기사로 나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능력이 중요한 난세에서 노부나가의 아들 중 오늘날 가장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노부카츠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역시 아이러니라고 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비록 다소 못난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노부나가의 핏줄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역시 노부카츠는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게 아닐까.
오다 히데노부 (織田秀信) 1580~1605
노부나가의 적손이자 노부타다의 아들, 아명은 산보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죽고난 후 기요스 회의에서 명목적인 오다가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물론 오다가의 영지를 그대로 계승하진 못하고 기후성을 위시하여 주변지역의 5만석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그후로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 가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서군에 붙게 된다. 그러자 가신들이 그럼 이왕 붙을거면 그나마 기후성에서 농성을 하자고 진언하자 그마저 “조부 아래 오다가 아래 그런 풍도는 없었다!”는 식의 어이없는 말을 하며 출전, 동군의 선봉에게 간단히 패퇴하고 거성 기후성을 이케다 데루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동군에게 빼앗겼다. 자신이 성이 점거당한 후 고야산으로 은거하고 중이 되었다. 그런데 멸망하기 직전 가신들의 앞날에 도움이 되라고 표창장과 추천서를 작성, 약간의 노부나가의 숨결을 손자 히데노부에게 느낀 가신들은 울며 감동하지 않은자가 없었다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후 불과 2년후에 사망. 오다 노부나가의 적통은 끊기고 말았다. 오다 히데노부가 서군의 편을 든 것으로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히데노부는 오다가의 정권을 빼앗은 히데요시를 원망하기는커녕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동군에 붙기를 원한 가신을 물리치고 히데노부가 서군에 붙은 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히데요시를 좋아했다면 사실 서군에 붙어야 했다’라는 명제를 발견할 수 있다. 어리석은 히데노부도 사실 히데요시를 생각한다면 그의 유아 히데요리를 위시하고 있는 서군에 붙는게 ‘그나마 낫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동군에 있었던 옛 히데요시의 맹장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즉 미쓰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동군에 붙었는데 히데요리의 멸망을 불러올지 몰랐다는 말은 사실 변명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돈을 주어 기른 용맹스런 가신보다 자신이 영지를 뺏았던 옛주인의 손자가 충성스런 신하가 되어 히데요리에게 훨씬 도움이 되었단 사실을 과연 히데요시는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았을까.
오다니 요시쓰구 (大谷吉繼) 1558~1600
오다니 교부라고도 불린다. 출신과 등용과정은 사실 모호한 편이다. 출신은 오토모나 롯카쿠 계열로 보고 있고 등용과정은 친우(親友) 미쓰나리에 의해서라고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소설에서의 그의 최후나 게임 때문에 얼핏 장군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문관에 더 가까우며 규슈정벌에 수송을 담당하거나 임진왜란에 미쓰나리와 함께 감시역으로 보내질 정도로 문관으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났다. 1583년, 시즈카다케 전투 참가 1587년, 규슈정벌의 수송역 1590년, 간토정벌 참가. 말그대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나 1590년 이후에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사이의 행적은 거의 묘연하고 간간히 조정역으로서의 역할만 보이고 있다. 원인은 알다시피 1590년을 전후로 하여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버리고 만 흰 붕대의 원인, 문둥병이 발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부터 사실 내쳐져 도요토미가의 핵심 권력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서기관, 오봉행(五奉行)에도 임명되지 못했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고 미쓰나리에게의 설득이 실패하여 처음에는 동군에 참가할 것을 마음먹고 있었으나 결국 서군에 참여, 고바야가와 히데아키 진영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고바야가와 히데아키는 배반, 그의 배반을 예상하고 있었던 요시쓰구는 그를 막으려고 그가 진을 쳤던 산정상 아래에서 결사 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실패, 죽게 된다. 전사했다고도 하고 할복했다고도 한다. 향년 42세였다. 특이사항은 딸이 유키무라에게로 시집가있었다. 오다니 요시쓰구는 1590년전까지 핵심적인 권력 중추에 있었던 만큼 권력쟁탈에 대해 누구보다 훤히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동군에 참가할 의지또한 충분하였다. 하지만 미쓰나리의 우정이 그의 모든 이성적인 계산을 무너뜨리고 서군에 참여시킬것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요시쓰구가 서군에 참여하게 된 원인이 출세가도에서 낙오된 자포자기적인 심정에서 나온 반항적인 행동의 표출인지 미쓰나리와의 다도사건(따로 기술하기로 합니다.)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 미쓰나리와의 우정 때문이라면 미쓰나리의 인간적인 크기와 요시쓰구의 올곧은 행동이 낳은 아름다운 얘기로 남을 것이다.
오우치 요시오키 (大內義興) 1477~1528
오우치가의 가주, 전국시대 초기의 인물 1477년에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오우치 마사히로로 그 당시 오우치가라면 스오우 지방에 최대 명문가였다. 1492년에, 롯카쿠 토벌전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위해 종군한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였다. 1494년에, 가독을 계승(아버지는 1495년에 사망)하였다. 1507년에 간레이 호소가와 가즈모토에게 쫓겨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호하며 군을 일으켜 그 다음해인 1508년에 복위시켰다. 그 후로 수도에 거주하면서 덴노와 쇼군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지 근처에 있었던 아마코 쓰네히사가 영지를 침입해오자 1518년에 귀국하였다. 아마코가와 약10년 동안 소모전만을 되풀이하다 1528년에 진중에서 병을 얻어 본거지 야마구치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51세, 아들 요시다카가 그 뒤를 이었다.
오쿠보 다다요 (大久保忠世) ? ~1593
도쿠가와가의 가신. 다다카즈의 아들로 오다와라번의 초대번주. 도쿠가와 16장 중의 한 명이다. 히로다다가 다다요가 그 당시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기에 죽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은 이에야스가 마쓰다이라가의 본성인 오가사키 성에 입성할 때 즈음부터 시작한다. 그의 활동은 여러군데에서 보이는데 주된 활동은 미카와 영지 잇키 진압, 미카다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히데요시가 집권하기 전 마사유키가 있는 우에다 공략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해 왔으며 특히 미카다가하라는 신겐의 나가시노 전투는 노부나가의 감탄을 자아냈다. 행정관으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전략상 중요 위치에 배정받아왔다. 다케다가에 대항하기 위한 후마마타성, 부교로서 활동한 신슈의 코모로성 그리고 히데요시군을 방비하기위한 오가사키 성을 맡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도쿠가와가내에서 위치가 하락하기 시작해 1590년, 간토 전봉당시에는 사가미의 오다와라성, 4만 5천석밖에 수여 받지 못했다. 이것은 역대의 가신임에도 불구하고 다다까쓰, 야스마사, 나오마사 즉 훗날 삼걸(三傑)이라 불리는 신진세력인 이 세 사람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1593년에 사망, 영지는 아들 다다치카로 계승되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바로 이 다다요가 자신의 가문을 파멸시키는데 원흉이 된 사람, 미카와 잇키 이후 떠돌던 혼다 마사노부를 불러들이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오쿠보 다다치카 (大久保忠隣) ? ~1628
오다와라의 성주로 오쿠보 다다요의 아들. 어릴적부터 이에야스를 따라 아네가와, 미키다가하라, 고마키 전투 등에서 싸웠다. 그 공적으로 1593년, 아버지 다다요와 함께 오다와라 근방의 영지를 받게 된다. 초대 번주는 다다요로 다다치카는 뒤를 이어 2대 번주가 된다.(4만석, 6만석, 7만석 등 그 의견이 다양하다. 아마 다소 증감을 감안하면 6만석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 이후 점차 신임을 얻으면서 중신으로 등극, 이에야스에게 히데다다로 후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혼다 마사노부와 마사즈미 즉 혼다부자에 의해 오쿠보 나가야스사건 등의 이유로 점차 몰락해가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와 히데다다에게도 모반의 징조가 있다는 소문에 의해 신임을 잃어 위기에 빠지게 된다. 1614년, 마침내 선교사 바테렌을 추방하러 교토에 가던 도중 오다와라의 영지가 몰수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오다와라 성은 파괴되었다. 1628년, 결국 용서받지 못하고 유배지인 오미에서 사망했다. 다다치카가 실각한 이유로는 당시 마사즈미에 대한 아리마 하루노부의 뇌물사건이 다다치카가 자신의 가문으로 끌어들인 오쿠보 나가야스에게 맡겨져 이 사건을 심하게 나가야스에게 추궁당한 마사즈미가 앙심을 품고 오쿠보가를 공격하여 실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참고로 몰수당한 오다와라 영지는 아베, 이나바 가문을 거쳐 73년만에 다시 오쿠보 다다모토에게 수여된다.
오쿠보 타다타카 (大久保忠數) 1560~1639
통칭 `히코자에몬`.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열여섯 살부터 이에야스를 섬겼다. 형 타다요를 따라 출전하여 종종 공명을 세웠지만, 좀처럼 상을 받지 못했다. 고참 가신으로서 쇼군에게 종종 직언했기 때문에 '천하의 존의尊意 파수꾼'이라고도 불렸다.
우에스기 가게까쓰 (上杉景勝)
나가오 마사케게의 차남이다. 1579년, 겐신이 죽게되자 일명 미타테의 란이라고 불리는 후계자 싸움을 일으켜 호조가에서부터 보내져온 우에스기 가게토라를 자살시키고 우에스기가의 가독을 상속받게 되었다. 겐신과 달리 전투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여 오다가에게 압박을 받아오다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교를 맺어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도 영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일본이 히데요시의 천하가 된 후로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나중에는 아이즈100만석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지가 옮겨졌다. 후에 5대로에 임명되고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서군에 참전, 그러나 서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100만석이 넘던 영지를 잃고 나오에 가네츠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석으로 옮겨갔다. 다소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되긴 하나 가신의 반란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나오에 가네츠구에게 풋내기라 불리면서 질질 끌려다닌 걸 보아하면 분명 유능한 다이묘는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우에스기 겐신 (上杉謙信) 1530∼1578
에치코의 용, 아명은 도라찌요로 나가오 다메카케의 막내로 태어났다. 전국시대의 가문을 분쟁을 막는 특성상 형인 하루카게는 가독을 상속하고 겐신은 절로 보내졌다. 하지만 하루카게는 유약한 터라 겐신은 가신들에 의해 추대되고 형을 은퇴시켜 자신이 새로운 다이묘가 된다. 에치코의 통일을 완수하고 그 후 시나노의 호족이 다케다 신겐에 의해 쫓겨와서 보호를 청하자 시나노를 두고 혈전, 이것이 바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로 제4차 나카지마 전투는 특히 손수 검으로 신겐의 철선을 내리쳤다는 전설이 정해질 정도로 신겐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그 역시 많은 군사를 잃어 퇴각하고 신겐에게 시나노를 내준다. 그 후 겐신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져 오다와라 정벌 같은 경우 호조 우지야스가 꼼짝없이 성에 틀어박혀 농성할 정도로 전투에 관해서는 겐신을 따를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후 관동관령에 취임하고 우에스기를 칭하게 된다. 한마디로 우에스기라는 성은 자신의 성이 아닌것으로 이는 이름마저 전국시대에서 처세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겐신은 관동관령에 취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토(관동)를 자신의 직할령으로 만들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간토에 문제가 있을때 겐신이 출정할 시는 간토의 다이묘들이 겐신을 따르다 겐신이 간토에서 물러나면 호조가를 섬기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그의 의(義)를 보여주는 행동으로 보일지 몰라도 전체적인 전국의 정세에 관해서는 겐신과 간토의 다이묘 양쪽에게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1577년, 테토리가와 전투에서 자신보다 많은 오다가의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의 군대를 격파, 노부나가에게 충격을 주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과음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 겐신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아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후 후계자 분쟁, 오타테의 란(미타테의 란이라고 많이 언급)의 원인이 된다. 우키다 나오이에 (宇喜多直家) ? ~1582
비젠지방의 패자, 우키다 오키이에의 아들. 우라카미가의 가신출신으로 아버지는 우라카미 무네카게에게 목숨을 잃었다. 처신을 신중히 하여 처음에는 작은 영지를 배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군 무네카게와의 관계를 신경쓰면서 미무라, 마쓰다와 같은 주위에 있는 영주들과 싸워가면서 영토를 서서히 넓혀나가고 오카야마성을 자신의 거성으로 삼게 된다. 세력을 확장하고 난 뒤 주군을 배반, 텐진산에서 추방하고 모리와 협정을 맺은 뒤 마침내 비젠의 패자가 된다. 그러나 이 효웅의 비상도 여기까지였을까 어느덧 천하의 패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서부로 출전,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오다가와 강화를 맺고 비젠에서의 패권을 인정받는 대신 아들 히데이에를 오다가에인질로 보냈다. 1582년 사망, 아들 히데이에가 후사를 이었다.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우키다가의 가주. 우키다 나오이에의 아들. 고다이로 중의 한명. 어린시절은 아버지 나오이에가 그당시 패했기 때문에 히데요시 아래 인질로서 지냈다. 이 때 우키다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의 지위를 확정받았다 한다. 바로 히데이에의 이름 중 히데(秀)는 히데요시(秀吉)의 이름 중 첫글자를 딴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나 알 수 있다. 그리고 후계자로 지명받지는 못했으나 히데요시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1582년, 아버지 나오이에가 죽게 되자 가문을 계승했다. 거의 이 당시부터 히데이에는 히데요시를 따라 모리세력으로의 침공, 규슈나 오다와라와 같은 전쟁에 참가하여 도요토미가의 신임을 쌓아 나갔다. 1594년, 쥬나곤에 봉해지면서 고다이로로 임명되었다. 이즈음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2차에 걸쳐 조선에 총지휘관의 자격으로 쳐들어갔다. 히데요시가 죽고난 후 고다이로 중의 한명으로 서군을 편들어 영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군사를 이끌고 무기력한 분위기가 팽배한 서군 가운데서 누구보다 분전했으나 고바야가와 히데아키의 습격을 받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 후 히데이에는 시마즈의 영지로 도망을 갔으나 1603년에 발각되어 이에야스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나 다행히 1606년에 하치죠섬에 유배를 당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약 50여년간을 유배 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유키 히데야스 (結城秀康) 1570~160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아명은 오기마루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히데요시의 요구로 일찍이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성격은 다소 난폭한 편으로 히데요시의 가신이 그에게 사소한 경쟁을 신청하자 구애없이 단칼에 없애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장군으로서는 유능하여 규슈 정벌시 히데요시에게 칭찬을 받았다. 히데요시의 보호 아래 있을 시 구속을 받았을거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자신의 가신이 히데야스에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넘어간 예로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받았던 사랑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이어져 이에야스가 언짢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동생 내동생하며 끔찍이 위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보호 아래 있다 유키 하루토모의 양자가 되고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에스기 가게까쓰를 견제하는 등 도쿠가와 집안의 한 축으로도 활약했다. 1604년, 마쓰다이라씨로 복성(復姓)하여 에치젠에 약70만석 가량을 받았다. 그 후 매독에 걸려 34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히데야스에 관해서 도쿠가와 가문계승에 관한 논쟁은 항상 언급된다. 사실 여러 연구서에 관해서는 어머니가 천하다느니 히데다다가 인품이 온화해서라니 말이 많지만 사실 그렇게 따지면 히데다다의 어머니 역시 출신이 별로 좋진 않았고 히데다다란 역시 인품이 온화한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세키가하라 당시 한 추태를 생각해보면 무능력하기 짝이 없었으니 능력또한 뒤지지 않았다. 다른 성을 칭했던(유키) 사실 역시 이에야스 또한 상징적으로나마 히데요시에게 ‘하시바(히데요시의 도요토미 전의 성)’란 성을 받았으니 그리 말할 것은 못 될 것이다. 또한 계승문제 당시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인물은 그 당시 도쿠가와 가문의 최고위 가신, 혼다 마사노부였다. 능력, 지지층 등 어느모로 봐도 히데야스가 계승자로서의 차지하는 위치는 히데다다보다 월등한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승자로서로 한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이에야스에 의해 만들어진 ‘친히데요시, 히데요리 파’라는 것이다. 사실 이에야스 자신이 무능해서 그런결과가 빚어진것임에도 불구하고 큰 약점(물론 약점이 이것 뿐만이 아니겠지만)이 되어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의 인생은 역시 외부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미가와 요시모도 (今川義元) 1519∼1560
스루가, 도도우미 쿠니의 다이묘로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오남. 가독상속의 특성상 처음엔 젠토쿠사의 승려로 있었다. 그러나 우지지카의 뒤를 이은 큰 형인 우지테루가 죽자 나중에 환속하여 다른 형제과 가독상속을 위한 싸움을 거쳐 이긴 후 새로운 이마가와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 집권 초기에 친 다케다 반 호조 정책을 펼쳐 노부토라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고 다케다 하루노부(훗날의 신겐)의 가문계승에 끼어들어 동맹을 굳건히 하고 다케다의 지원을 바탕으로 하여 호조가 있는 간토방향으로 진출해 나갔다. 그러나 훗날 호조와 평화조약을 맺고 더 나아가 이마가와-호조-다케다로 이어지는 삼국동맹을 맺게 된다. 그 후 전략적 방향은 서쪽을 향하게 되어 아즈키자카 고개 전투 등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싸우게 된다. 1560년, 마침내 압도적 국력을 바탕으로 서진을 결단. 마쓰다이라 모도야스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오다 노부나가가 있는 오와리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이 요시모도가 노부나가를 짓밟아 버리고 나아갈 거란 예상과 달리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사망했다. 과연 일을 꾀하는 건 사람이되 이루게 하는 것은 하늘이라는 말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경우리라. 흔히 전국시대군웅물에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노부나가의 위상을 높여주는 들러리로 인식되지만 정치?행정가로서의 면모는 결고 노부나가에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순뿌성 내에 치안이 무척 안정되어 있었으며 토지측량조사로 생산성을 늘렸으며 특히 문화면에서는 교토를 옮겨온 것과 같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시까와 가즈마사 (石川數正) ? ~1609
도쿠가와, 도요토미가의 가신. 이에야스를 어린 인질시절일적부터 섬겼다. 이에야스가 오케하자마 전투후에 독립한 이후로는 중신의 하나로서 이에야스의 가족을 구하는 등 수많은 활약을 했다. 유능한 행정가이자 사신으로 이에야스진영에서 히데요시를 상대로 활약하였으나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이후 돌연 배반하여 히데요시 진영에 참가했다. 그 때문에 도쿠가와군은 군대의 행정체계를 모조리 다케다식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 후로 1609년에 사망, 노년엔 탈출 당시 도쿠가와가에 남았던 자신의 아들 야스미치(1607년 사망)와 살았다고 한다. 그의 배반은 크게 두가지 의견이 지배하는데 한가지는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강대한 세력에 압도되어 넘어갔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그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조속적인 동맹을 목적으로 도쿠가와군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배반했다는 설인데 군제를 개혁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수반한다는 면에서는 어느 쪽이든 분명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이 나오마사 (井伊直政) 1561~1602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1575~1615
도사의 번주, 모도치카의 사남. 모도치카의 장남 노부치카가 요절하게 되어 대신 후계자로 임명받았다. 1590년, 오다와라 공략전에 참전.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1599년, 모도치카가 사망하게 됨에 따라 초소카베가를 계승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에 참전하여 싸웠으나 깃까와 히로이에의 저지에 의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다. 거기다 자신의 형인 츠노 치카타다를 권력투쟁의 논리에 의해 죽여 이 두 개가 원인이 되어 이이 나오마사를 통해 용서를 빌려고 했으나 결국 도사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그 후로 교토에서 살다가 1614년, 오사카의 진이 발발하자 여기에 참전하였다. 꽤 분전하였으나 1615년의 여름의 진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다 붙잡힌뒤 교토에서 참수당하였다. 향년40세였다.
코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 ~1600
도요토미가의 가신, 열렬한 기독교 신자로도 유명하다. 출신은 사카이의 약을 도매하는 상인의 아들이다. 만나게 된 경위는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적으로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해 강화할 당시 유키나가가 조정역으로 나섰는데 그 때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발탁되어 등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87년, 규슈정벌에 참가하여 히고지방의 영지를 얻었는데 북히고는 그의 영원한 숙적 가토기요마사, 남히고는 자신이 차지하여 기요마사, 유키나가 모두 약 25만석 가량을 얻었다. 이때부터 기요마사와 갈등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그 당시는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던 시기로 기요마사 또한 열렬한 니치렌의 신자로서 히데요시의 명령에 편승해 자기 지방에 기독교를 믿는 백성을 탄압하였는데 탄압당하여 남히고로 도망온 백성을 유키나가가 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아니꼬울 수 밖에 없는 기요마사와 소위 사탄(?)으로 기요마사를 보던 유키나가 사이는 좋아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권유에도 개종할 것을 거부, 워낙 히데요시가 유키나가의 재능을 아까워 했기에 다카야마 우콘과는 달리 유키나가는 가이에키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1592년, 유키나가는 소 요시도시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조선과의 화평을 유지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실패, 제1진이 되어 조선을 침략한다. 1진이 된 이유는 도요토미가 내에서 그나마 수군을 많이 그리고 오래 지휘해서라고 한다. 기요마사는 동쪽의 경로를 자신은 서쪽을 택했다. 주경로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상주를 잇는 경상도의 좌편을 경유한다음 충주에서 기요마사와 집결 다시 기요마사는 우측으로 두만강을 향해갔고 자신은 경기도를 향해 진격, 한양함락 그리고 평양성 함락까지 성공시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충무공의 등장으로 보급로차단, 명의 침입으로 남으로 도망, 결국은 조선과의 휴전으로 귀국한다. 정유재란 때 다시 침입, 결국 또 충무공에 의해 노량해전에서 박살나고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결국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 발발. 6000의 군세를 이끌고 서군에 참여하여 싸웠으나 패배, 후방의 이부키산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다케나가 시케카도(한베에의 아들)에게 잡혔다. 기독교인이었기에 그라시에처럼 자살은 하지 않고 교토에서 참수당하였다. 출생년도가 정확하지 않아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약40살이라고 한다.
호소카와 다다오키 (細川忠興) 1564~1645
호소카와가의 가주, 후지다카의 장남. 아내는 전국시대 최강의 미모였다고 하는 호소카와 그라시에(본명은 오다마,玉)다. 집안을 언급하자면 그당시로 따지면 말그대로 초명문의 집안으로 아버지 후지다카가 들어간 호소카와가는 오닌의 난 당시 야마나가와 대립하여 싸운 총대장의 가문이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따지면 오다, 마쓰다이라는 따위는 말할 것도 없는 엄청난 집안이었다. 어릴 때 노부카츠(노부나가의 차남)를 도와 이가산 공략에 참가하거나 아버지를 도와 단고지방을 공략하는 데 참가 했다. 1580년에 후지다카가 단고지방에 영지가 확정되어 질 쯤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상대자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3녀, 아케치 다마(훗날의 호소카와 그라시에로 가라샤는 일본식 발음)였다. 당시 다다오키는 16세, 오다마는 18세로 훗날 다다오키가 심한 의처증 증세를 보이는건 나이의 요인도 약간 있으리라 생각한다. 노부나가도 사실 이 결혼은 아케치-호소카와라는 연대의 가신 세력이 커질 수 있는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다마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재녀였으리라. 1582년에 혼노지의 변이 발발하고 다다오키는 아케치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의 편을 든다. 이 때 당연히 다마는 아케치의 딸이였음으로 유폐되는 신세에 놓이게 되나 히데요시의 중재에 의해 다시 재결합하게 된다. 1583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참가, 1590년 오다와라 공략전에 참가하여 히데요시군의 주력이 된다. 1592-1593년, 이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자신도 조선으로 넘어가 도공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런데 바로 이 맘 때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해지게 되는데 아마 주요요인은 이에야스가 다다오키가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의 빚을 갚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다들 알다시피 그 맘때쯤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 히데쓰구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히데쓰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숙청이 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00년, 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자신은 이에야스의 동군에 참가 1601년에 북규슈의 부젠에 37만석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인 그라시에는 사망. 이유는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미쓰나리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천주교인 이유로 가신에 의해 살해된다는 명목으로 죽었다. 1614년에 오사카 겨울-여름의 진에 참가, 1632년, 히고의 구마모토성에 54만석을 받는 대영주가 된다. 1645년에 사망, 향년81세였다. 다다오키는 역사, 무구(武具), 와카, 다도, 전투 등 모든 분야에서 능한 소위 올라운드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다도는 히고풍이라는 말이 생길정도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한다. 다다오키를 언급할 때는 항상 그라시에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그라시에에 대한 사랑은 소위 ‘귀신같은 남편에는 뱀같은 마누라’라는 일화(따로 기술)가 전해질 정도로 그 사랑이 지극하여 거기다 불같은 성격까지 더해져 한시도 가만두려하지 않았고 감시를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다다오키의 왜곡된 사랑 때문이었을까. 둘의 사이는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다오키의 사랑은 훗날까지 이어져 죽고 난 뒤 어느날 기요마사가 천주교를 욕한적이 있었는데 다다오키가 이에 크게 반발하여 기요마사와 싸운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라시에가 믿은 종교마저도 그녀의 일부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실제 호소카와가는 전통적으로 명문집안이라 신토를 믿는편임에도 불구하고 다다오키는 천주교를 믿는 영지의 주민을 그다지 박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후지다카 (細川藤孝)
미츠부치 하루카즈의 아들로 호소카와가에 입양됐다. 호소카와 유우사이라는 호로도 유명하다. 아시카가 바쿠후아래의 중신인 명문집안인 만큼 자신도 아시카가가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요시테루를 모셨으나 얼마 안있어 요시테루가 히사히데에게 암살당했기에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1568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끌고 교토로 상경하자 다시 아시카가 바쿠후에 종사했다. 종사하는 도중 무력한 아시카가 바쿠후에 환멸을 느껴서일까. 1573년,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하자 자신은 곧바로 노부나가에게로 전향. 충성을 다하며 일하여 결국 1580년, 오다가영지의 서북부쪽의 약10만석에 달하는 영지를 하사 받았다. 얼마있지 않아 1582년, 혼노지의 변이 발발. 자신의 아들 다다오키의 아내 그라시에가 미쓰히데의 삼녀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였으며 이 결정은 옳은 것이 되어 살아 남았고 며느리 그라시에 또한 히데요시의 관용에 의해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주로 히데요시 곁에서 신임을 받으며 참모격으로 전투, 회의, 다회(茶會)등에 참가하였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예상과 다르게 서군이 아닌 동군에 가담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단고에 있는 자신의 거성, 다나베 성에서 포위당하는 위기를 겪게 된다. 그 당시 자신의 아들 다다오키가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5000명의 군세나 끌고 도쿠가와가 측에 가담한 바람에 성에 병력이 얼마 없어 얼마간 저항하다가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기 며칠 전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만다. 얼마 안 있어 결국 동군은 승리하고 자신은 항복한 탓인지 몰라도 본격적으로 은퇴하여 차나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한가롭게 여가 생활을 보내다 향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요시테루의 암살부터 세키가하라의 전투까지 가장 치열한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그가 난세에서 보여준 처세술은 분명 달인의 그것이었다.
호조 소운 (北?早雲) 1432∼1519
고(後)호조씨의 초대 당주, 일본전국시대의 인물로 하극상의 난세를 연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으로 사실 본명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호조라는 성(姓)도 살아있는 당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태어난 년도도 1432년이라던가 1456년이라는 등 불분명한데다 어린시절도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등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호조소운은 배신의 대명사 혹은 센코쿠다이묘의 대표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오닌의 난 전후로 쇼군을 죽이거나 자신을 모시는 다이묘를 죽이는 등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자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센코쿠 다이묘의 시조로 취급받는 이유는 그가 시행했던 경제성장이나 민생안정에 주력하는 가신이나 백성들을 위한 정치활동이 그 후에 나타났던 센코쿠 다이묘들의 큰 지침이 되었고 그의 일생이 평민이나 다름없었던 떠돌이에서 한 지방의 성주가 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어난 년도는 불명(1432~1460)이나 1432년이라는 설이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가 너무 나이가 많고 비현실적이라 하여 1450년 후쯤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신 역시 유랑하는 낭인에서 아시카가 바쿠후의 이세가의 후손이라는 설까지 있고 이세가의 후손이라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긴 하지만 불분명하다. 젊은 시절의 근거지는 이세 아니면 빗츄 쯤으로 보고 있다. 젊은 시절 호조소운의 경로는 2가지로 보여지는데 아시카가 바쿠후의 막신으로 살았다는 견해와 말그대로 천하의 풍운아를 자처하며 교토에서 살다 6명의 가신과 함께 오닌의 난으로 교토를 빠져나와 이마가와 요시타다의 가신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476년, 요시타다가 전쟁으로 죽고 그의 아들 우지치카와 요시타다의 사촌 오시카 노리미츠의 가독계승에 대한 분쟁이 발발하였고 가신인 소운은 이를 중재했다.(혹은 막신의 자격으로) 그러나 결국 노리미츠가 이마가와세력의 권력을 내놓지 않자 1487년, 우지치카의 편을 들어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당주로 세우게 되었다. 이에 우지치카는 소운에게 감사를 표하며 스루가에 있는 고코쿠지(興國寺) 성을 수여하고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는 훗날 호조가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1493년, 바로 유명한 사건이 터지는데 바로 그것이 ‘이즈습격’으로 호조 소운이 이마가와 가의 도움을 받아 이즈에 있는 호리코시 쿠보의 수장 아시카가 차차마루를 죽이고 이즈를 빼앗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 다이묘가 자기의 윗선에 있는 가문을 죽이고 힘으로 영토를 빼앗은 하극상의 시작으로 꼽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 편으로 차차마루의 상대편에 있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호조의 세력은 더욱 커지고 차차마루는 결국 궁지에 몰려 자살하기 된다. 1495년에는 오모리 후지요리를 토벌하고 호조가의 거성이 되는 유명한 성 오다와라 성을 공략한다. 여기에도 전설이 있는데 소운이 사슴사냥을 빙자하여 사슴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오다와라 근방에 자신의 군세를 이동시키게 하여 오다와라성 근처에 인근에 적이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성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여 탈취했다는 사건이 그것이다. 그리고 소운은 이때부터 점차 이마가와가와 멀어지면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시작한다. 1512년, 마지막 위업인 사가미공략에 착수, 미우라 요시아츠를 공격하여 오가사키, 스미요시 그리고 가마쿠라까지 공략하여 미우가를 궁지에 몰아넣고 1516년, 미사끼성까지 함락 마침내 사가미쿠니는 소운의 손에 들어오고 호조5대의 토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났고 생각했는지 1518년에 가독을 우지쓰나에게 상속시켜 주었다. 1519년, 향년88세로 사망. 과연 풍운아라 할만한 삶이었다. 호조소운에 대한 논란은 나이, 전설의 진위 여부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정도까지 되고 나면 어디가 진실인지 어디가 거짓인지가 모르게된다. 이것은 마치 삼국지 연의가 분명 역사가 아님에도 사람들에게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한 점을 느끼게한다. 이는 전설이 역사에게 역사가 전설에게 융합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호조 우지마사 (北條氏政) 1538~1590
호조가의 가주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 전투에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외교 및 행정분야에서의 능력은 제법 뛰어났다. 한동안 명목상의 가주였다가 1571년, 정식으로 가주로서의 활동을 시작. 때론 다른 다이묘의 조력자 혹은 중재자로서 가문의 수성을 잘 해나갔다. 그러나 1578년부터 일은 소위 말해 꼬여갔다. 자신의 형제 우에스기 가게토라(우에스기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의 우에스기 가문의 가주를 세우는데 실패. 가쓰요리와의 의미없는 전투. 이에야스와의 시나노 및 가이 영토의 쟁탈전에서의 패배 등. 그야말로 제대로 되는게 없었다. 1584년부터 외교마저 실패, 히데요시에게 종속하여 이에야스를 칠 생각은 하지말고 중립 유지. 이에야스로부터 히데요시로의 종속권고 거부. 히데요시의 상경요구 거부. 모두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동을 저질렀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아 1590년,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실시되어 약100년 전통을 자랑하던 호조가는 일명 ‘오다와라 회의’라는 의미없는 분쟁만을 거듭하다 어이없게 항복. 우지마사는 할복하고 호조가는 멸망하였다. 그 광활한 간토영지를 한마디로 말아먹은 우지마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면죄부를 주는건 아니지만 처세술이 부족했을 뿐 히데요시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기백도 제법 있었고 행정적인 능력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이는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가서 간토를 통치할 때 호조가의 선정에 감화받은 백성의 저항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거기다 그 때는 무엇보다 히데요시란 인물의 그 당시 능력이 최고로 빛을 발하던 때였다. 아마도 우지마사의 결점은 그가 ‘보통사람’이라는데 있지 않았을까.
호조 우지야스(北條氏康) ? ~1571
호조가의 3대당주, 호조 우지쓰나의 아들이다. 군사, 행정 두 부문에 모두 능했다. 특히 행정부문은 민정가로 불릴정도로 뛰어났다 한다. 1541년, 아버지가 죽게 되자 가독을 계승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세력이 약해서 주변에서 자주 침략을 받았으며 특히 1545년에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호조 쓰나시게가 다스리는 가와고에성에 침략하는 일까지 생기나 야습으로 격퇴시키는 등 위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서쪽의 이마가와, 북쪽의 다케다, 우에스기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후에 이마가와, 다케다와 삼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영토확장에도 신경을 써 초반에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오다와라 본성까지 위협까지 당하는 치욕까지 겪게 되었으나 후에는 시모우사 지방의 사토미 요시히로를 압박하는 등 주변 다이묘들을 공격하여 꾸준히 주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571년, 아들 우지마사에게 실질적으로 가독을 물려주고 사망했다.
혼다 헤이하치로 다다까쓰 (本多忠勝) 1548~1610
혼다 마사노부 (本多正信) 1538~1616
이에야스의 모신으로 혼다 도시마사의 장남이다. 원래 이에야스를 섬겼으나 종교문제로 미카와의 종교분쟁 때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그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에야스에게 돌아와 그를 섬겼으며 젊을 때의 상처로 무장으로서의 활동은 하지 못하나 이에야스의 참모, 다시 히데다다의 측근이 된다. 세키가하라에서의 이에야스와 히데다다의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주재하는 등 도쿠가와 부자에게는 특히 이에야스가 나의 친구라고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으나 왠지 도쿠가와의 가신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오쿠보가의 사건 등 모든 가문 내의 불화의 중심에 서있을 정도로 신뢰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성격과 제안하는 계략자체가 음험한 탓이 크다. 1617년에 사망하였으며, 아들 마사스미가 가독을 계승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1561~1624
오와리 출신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부의 아들. 흔히 말하는 시즈카다케의 칠본창 출신의 한 사람. 어려서부터 도라노스케라고 불렸던 가토 기요마사처럼 이치마루라 불리며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의 손으로 키워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시즈카다케전투부터 본격적으로 데뷔하여 이요 지방에 영지를 받으면서 히데요시를 철저히 따랐다. 1590년-오다와라 공략전 참가(정확하게는 니라야마성 포위),1592~1593년-임진왜란 참가등의 공훈으로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엔 오와리의 기요스성 주변에 영지를 할당받았다. 1600년, 그 당시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까쓰가 반항적인 움직임을 보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우에스기 가게까쓰를 치기 위해 종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군도중 미쓰나리가 후시미성에 있던 도리이 모도다다를 공격하여 죽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첫째로 목소리를 놓여 눈치를 살피고 있던 각 다이묘들에게 이에야스님의 휘하에 들어가서 간적 미쓰나리를 치자고 주장, 자신은 기후성 공략에서 공훈을 세웠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아키지방에 50만석의 영지를 받았다. 그후로도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어 히데요리를 정기적으로 문병을 가거나 알현을 하였다.그러나 이때부터 가세는 점점 몰락해간다. 1614년, 오사카공략에 참가를 이에야스에게 거부당함 1619년, 히데다다로부터 멋대로 히로시마성을 개축했다는 이유로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싸움터였던 시나노의 카와나카지마의 4만 5천석으로 축소, 그 후로도 이것저것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영지는 계속 줄어든다. 1624년에 사망. 이 때 바쿠후로부터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여 후쿠시마가문은 말 그대로 박살났다고 한다. 후쿠시마의 인간성이나 도요토미가에 대한 배신이냐 아니냐하는 문제는 흔히 많이 언급하니 덮어두기로 하자. 도대체 도자마다이묘 출신으로 50만석이나 받았던 이 잘나가던 아저씨의 몰락의 이유는 어디 있을까? 단순히 신판다이묘나 도자마다이묘 사이의 충성심 문제였을까. 그렇게 따지면 구로다가문은 왜 근근이라도 버텨나갈 수 있었을까. 사실 마사노리의 인생은 1600년의 동군참가를 처음부터 다이묘들에게 선동을 했을 때부터 결판이 났다고 봐야 한다. 첫 번째로 참가하자고 충성심을 선언했으니 포상을 받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를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마사노리가 만약 훗날 반역을 일으킬 때 만일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따르는 다이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심어줄정도로 후쿠시마의 실력은 강하다는 뜻도 된다. 그럼 군주는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사노리는 1600년의 아이즈정벌 회의 당시 주위의 상황을 좀 더 살피며 기다렸다가 이에야스의 은근한 압박에 마지못해 행동했다는 입장을 취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에는 이에야스에게 마사노리는 둘도 없이 고마웠을지 몰라도 그 후에는 얼마나 경계의 대상이 됐을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간다. 마사노리의 비참한 말로는 이에야스로부터 히데다다에게 전승된 ‘도자마 다이묘에 대한 경계심’이라기 보다는 마사노리, 자신에게 찾아야 할 것이다. [NO1-070131] |
첫댓글 잘읽고 갑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총집합 시키셨군요.... 이중 도꾸가와이에야스가 제일 멋진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