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좋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의 아들이 되자.
세월호 일주기가 다가온다. 세월호(世越號)란 뜻은 세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세월호의 주인은 그리스도인이다. 세월호는 세상을 초월해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는 것을 의미하니, 출애굽, 곧 구원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는 노아의 홍수 때의 구원의 방주이다.
그런데 2014년 4월 16일 인천을 출발해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인근 바다에서 침몰했다. 수학여행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해 탑승객 476명 가운데 295명이 사망했다. 구원의 방주가 죽음의 방주가 되었다. 다른 의미에서 세상을 초월한 것이다.
이 사고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진입을 앞둔 국가에서 일어난 후진국형 사고였다. 속도에 매몰돼 원칙을 무시했던 한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업계 유착과 비리 원인으로 지적된 ‘관피아(관료+마피아)’ 논란에 정부는 진땀을 흘렸다. 2014년 11월11일 수색이 종료됐지만 9명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아 세월호 유가족을 직접 위로했다.
고통 자체는 결코 유익이 아니며, 그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은 눈물과 고통 없는 세상을 천국으로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 자체가 유익이 아닐지라도 고통이 유익하게 사용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고통을 겪은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겪은 다른 이를 잘 위로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으로부터 진심어린 이해와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일까?
지금도 주위를 둘러보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자주 보게 된다. 내 작고 평범한 인생이 결코 겪어보지 못한,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절실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고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쉬이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자식을 잃은 슬픔, 일터를 빼앗긴 고통, 집을 쫓겨난 비애, 이 모든 고통 앞에서 비교적 평범하고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감히 어떻게 위로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위로는 반드시 같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소설집 <대성당> 중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위로에 대한 색다른 관점을 들려준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부부는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생일 케이크를 빵집에 주문한다. 그러나 아이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며칠을 보내다 결국은 죽게 된다. 이를 알 리 없는 빵집 주인은 밤마다 케이크를 가져가라 독촉전화를 걸었고,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부부는 빵집 주인을 찾아가 화를 쏟는다. 사정을 알게 된 불쌍한 빵집 주인은 어쩔 줄 모르고 사과하고 부부에게 자신이 만든 따뜻한 빵을 대접한다. 그리고 부부는 신비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작가는 빵집 주인을 자식도 없이 외롭고 힘들게 중년을 보낸 사람으로 설정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그런데 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부를 위로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삶의 외로움을 길게 얘기했을 때, 그가 만든 빵을 먹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부는 진정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탁월한 번역의 원문은 ‘a small, good thing’이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똑같은 고통을 겪지 못했다고 위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좀 더 용기를 내보도록 하자. 작고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는 좋은 것, 나만의 그 무엇으로 누군가는 생각보다 엄청난 위로를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차피 위로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 내 작은 몸짓이 그 통로가 되면 그뿐이니까.
성경에서 위로자를 세 명 볼 수 있다. 첫 번째 위로자는 바나바이다(행 4:36). 아람어인 바나바는 그 의미가 예언의 아들이며,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유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말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초대 교회 때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그 돈을 나눠 줌으로 그는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로서 인정받았다.
두 번째 위로자는 두기고이다(엡 6:21-22). 두기고는 주님의 섬기는 종으로서 신실한 사역자였다. 그는 사도 바울의 사정을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또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가 한 사도와 성도들의 교통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들 간의 이러한 사랑의 관심이 회복되어야 한다. 또 주님의 섬기는 종으로서 신실한 사역자는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이 주시는 위로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 위로자는 바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시작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3-7)라고 말한다.
위로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는 이유는 이 서신이 고린도의 믿는 이들의 회개로 말미암아 사도가 위로의 격려를 받고서 쓴 위로와 격려의 서신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가 책망하고 정죄한 의도는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께 돌이키게 하고 그리스도를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담겨있는 위로와 격려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당한 모든 환난은 우리를 애통하게 한다. 우리가 애통할 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 5:4)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좋은 것’으로 위로하는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좋은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나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은사로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은사로 받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좋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의 아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