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할 일 없는 노인들은 무료하기 그지 없다. 자고나면 누구와 어디서 무엇으로 소일하며 점심은 무엇으로 떼 울 지 걱정이 태산 같다. 더러는 방콕(방에 콕 들어 박혀 지냄)이 상책인 노인도 있겠지만 대다수 노인들의 고민은 하루를 어떻게 소일하느냐에 있어 보인다.
알고 보면 노인들의 하루 일과는 각양각색이다. 복지관이나 노인정을 드나드는 노인들은 그곳 일정에 맞춰 소일하면 되고 그렇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와야 하는 노인들의 일과는 천차만별이다. 복지관을 찾는 노인들의 경우 노래교실 바둑 스포츠 댄스 독서 서예반에서 각자 수준
높은 취미생활을 할 수 있으나 마음에 맞는 친구와의 만남이라면 모르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대체로 노인정이나 복지관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회복지시설 이용은 그렇다 치고 무작정 집을 나선 노인들의 향방은 어떤지 궁금하다.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휴식공간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여름철엔 종로 3가 파고다 공원이나 남산이 기다리고 때로는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기원을 찾아 천하를 요리하는 기쁨도 쏠쏠할 것이다.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주머니 사정이 좋아야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최소한 1만원 한 장은 필수다.
지하철을 이용해 여가를 선용하려는 노인들의 경우 역 종점까지 갔다 돌아오는 왕복 코스를 즐기고 있어 서울 근교 지하철 종점엔 항상 노인들로 붐빈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의 경우는 멀리 소요산에서, 아니면 온양 온천 또는 아우내 장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4 호선은 멀리 오이도 종점에서 돈은 좀 들지만 바다 바람 정도 즐기다 조개구이 바지락 칼국수로 입맛을 돋우면 신선 놀음이 따로 없다. 지하철로 춘천까지 갈 수 있으니 춘천 막국수에 닭
갈비 소양강 처녀를 대하는 기쁨도 남다를 것이다.
경의 중앙선이 개통된 뒤로는 이 노선을 이용하는 나들이가 인기다. 문산 종점에서 1인당 1만 원 이상 점심을 들고 그 영수증만으로 도라산 역, 땅굴, 두부마을 등을 둘러 볼 수 있는 관광 상품까지 생겨나 문산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문산 종점은 그렇다 치고 경의 중앙선 종점 용문산 역에 내리면 장날(5일장)은 장날대로 눈요기를 할 수 있고 역전에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차를 이용해 용문산까지 공짜로 갈수 있다. 용문산 식당 들이 경쟁적으로 손님을 유치하고 있어 요령껏 이용하면 하루 소일은 식은 죽 먹기다. 다리품을 좀 팔아야 하지만 전통시장 돌아보기도 노인들 건강을 위해 권장할만하다. 지하철 공짜겠다 풍부한 눈요기에 식욕 댕기는 먹거리로 배를 채울 수 있어 10년은 젊어 진
기분일 것이다.
경강선을 이용해 수원 여주에 들러 관광을 즐기거나 곤지암 역에서 화담숲(입장료 경로우대 8000원)까지 셔틀 버스를 잘 만 이용하면 크게 교통비 안들이고도 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다. 화담숲은 고 구본모 엘지 그룹 회장의 야심작으로 매일 관광객이 넘쳐 난다. 곤지암 소머리 국밥도 입맛을 돋우지만 여주역에선 여주시가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세종대왕릉, 명성황
후 생가, 신륵사를 순회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면 하루가 잠깐이다.
공항철도를 이용한 소일거리도 짭짤하다. 여름철 겨울철 할 것 없이 인천 국제공항은 쾌적한 휴식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좀 더 발전하면 을왕리 해수욕장 모래사장 트레킹 코스나 용유도 해변 가 식당들의 조개구이가 일품이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차이나 타운이 반기고 유원지에서 운이 좋은 날이면 남녀 간 마음에 맞는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으니 일석 3조다. 산책을 즐기고 싶으면 과천 서울 대공원이나 아차산, 안산 둘레길이 말 그대로 딱 좋은 코스다. 안산 둘레길은 유모차까지 다닐수 있어 노인들에겐 환상의 둘레길로 통한다. 북한산 둘레길도 코스에 따라 노인들 수준에 맞는 산책이 가능하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근처 도서관을 찾는 것도 좋은 여가 선용이다. 국회도서관이나 마을 독서실, 서울의 경우 교보문고에서 하루가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독서삼매경에 빠진 노인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난다.. 지난 여름엔 국립 도사관이 피서지로 적격이었다니 이런 여가 선용은 문자 그대로 신선놀음이 아닌가. 1주일에 하루쯤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문화인 다
운 여가 선용. 관람료 4,000원(경로우대) 점심 6,000원이면 해결된다.
노인들의 건강은 여가를 어떻게 즐기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방콕만 찾다보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치매로 발전하거나 고독사(孤獨死)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열심히 걷다보면 건강도 좋아지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일본 주부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후 집안에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오치 누레바’(濡れた落ち葉, 우리말로 ‘젖은 낙엽’) 라고 부른단다. 마른 낙엽은 산들바람에도 잘 날아가지만 젖은 낙엽은 한 번 눌어붙으면 빗자루로 쓸어도 땅바닥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고 집안에서 쓸어내고 싶어도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니 부담스런 존재가 바로 노인들이라는 뜻이다.
병고(病苦),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올 데 갈 데 없이 죽는 날만 기다리며 무료한 나날만을 보낸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주말엔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라도 나가보면 저절로 애국심이 용솟음칠 것이다. 100세 시대 고령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요즘 실버들의 건강 챙기기와 다양한 여가 선용 프로그램 개발이 아쉽다.
<2018. 12. 18 정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