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서촌에 둥지를 튼 아티스트 이서. 그녀는 한옥의 정취와 어우러진 제대로 된 한국적 정서를 느끼고자 마련한 집에 ‘이롭게 펼치는 집’ 이서재(利敍齋)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살림집이자 아틀리에인 이곳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로운 일들을 차근차근 펼쳐갈 예정이다.
이서재의 마당에서 포즈를 취한 이서 작가. 한옥 생활을 시작하며 마련한 검정 고무신이 맞춤한 듯 잘 어울린다. 햇빛과 바람, 흙과 나무가 어우러진 18평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오랜 시간 잠자던 집을 깨우다
프랑스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파리에서 아티스트와 문화기획자로 활동해온 이서 씨는 오랜 시간 서양을 공부하고 이해하다 보니 오히려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것을 모르고서 바깥 것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난겨울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적한 오후, 마당에서 즐기는 ‘햇빛 놀이’는 그녀만 아는 한가로운 호사. 시간대별로 자리를 옮기는 햇빛이 늦은 오후 그녀의 셀프 포트레이트 위에 닿았다. 일렁이는 햇살은 보는 이의 마음에도 작은 물결을 일으킨다.
드넓은 서울에서 집을 찾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의 부동산을 전전하다 살고 싶은 동네를 먼저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자기한 골목이 매력 있던 서촌이 떠올라 이 동네의 밤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에 걷다 보니 어느덧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나던 사람에게 물으니 인왕산이라고 했다. 도시 속 불빛 없는 어둠이 맘에 들어 서촌에서의 삶을 결심했다.
작은 하늘에서 마당으로 쏟아지는 빛, 하루에 50cm나 자라는 대나무, 직접 흙을 갈아 나무 심고 씨앗 뿌려 얻는 가장 ‘자연스러운’ 신비가 이곳에 있다.
집을 계약하고 이사를 온 후 살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만만치가 않았다. 이전에 살던 세입자가 한옥의 추위를 막기 위해 비닐하우스식 외피를 설치하며 사용했던 스카치테이프와 타카 같은 도구들의 흔적으로 집의 외부와 내부는 엉망이었다. 동네에 계시는 한옥 전문 도배사분들을 찾아가 조언을 받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직접 고른 한지로 도배를 시작했다.
한옥에 빠질 수 없는 생활 오브제인 망태. 옛사람들처럼 실제 여기에 감자와 양파, 마늘 등 식재료를 담아놓는데, 통기가 잘되어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다.
한 번에 되는 도배가 아니었고 말려가며 여러 번 배접이 필요했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며 손을 보니 오랜 기간 숨을 쉬지 못했던 집의 기둥이, 벽이, 천장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비닐 더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마당의 대나무가 살아나고, 이사 오기 직전까지 알 수 없었던 창밖 북악산의 봉우리가 그제야 드러났다.
서촌에서의 삶은 파리에서 그랬듯 걷기와 자전거 한 대면 충분하다. 근처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청와대를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들러 창덕궁에 이르는 라이딩은 가슴 벅찬 일상의 산책이다.
약 1개월간 홀로 분투한 시간이 지나 제법 사람냄새 나는 살림집 겸 아틀리에가 마련되었다. 오는 8월 초에는 오픈 스튜디오 & 오픈 하우스를 통해 사람들을 초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마당 입구에 청소용 빗자루와 프랑스에서 가져온 양산을 차례차례 걸어놓았다. 동서양 소소한 사물의 조화로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녀가 처음으로 문을 열며 내놓은 제목은 <귀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가’하면서 그곳의 삶을 담은 마지막 인사 같은 사진들과 작품들을 어떻게 한국의 집과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어우러지게 할지 고민한 흔적들을 펼쳐놓을 계획이다.
집의 서쪽 방에 마련한 다실. 다실의 이름은 평화다방이다. 옷장, 다상, 거울과 방석, 그리고 꽃이 놓인 화병까지 모두 직접 만든 것이다. 가구는 그녀가 디자인한 그림대로 근처 누하목재에 가서 맞추었고, 부속품을 사다 나르고 손수 칠했다. 옷장 뒤에는 LED 조명을 숨겨두어 저녁이면 가구 뒤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온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집
창문을 열지 않으면 바깥의 공기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고 온갖 용도의 가구와 전자 기기에 둘러싸인 삶. 서구화된 현대 생활은 외부와 단절된 실내를 만들었고, 하루 종일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땀 흘릴 틈도 없이 인간의 본능도 함께 쇠퇴하게 된다.
아티스트 이서는 삶과 아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간을 지향한다. 곳곳에 놓인 오브제들 역시 인테리어와 예술 작업의 경계가 없다. 테두리를 동테이프로 마감한 커팅 거울은 설치미술을 하는 그녀의 감각이 엿보이는 한 장면. 최근 새로 시작한 도예 작업을 통해 만든 화병은 오리엔탈 무드의 오묘한 색을 뽐낸다.
오랜 시간 그녀가 생활한 서양의 입식 스타일 속에서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과 나,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마음에 그리게 되었고 한옥이야말로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집의 구조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살 때에는 벼룩시장에 자주 들러 오래된 물건들을 만났다. 그때 구입한 것들을 한국 고유의 오방색 천으로 덧씌운 벽장 위에 올려두었다. 각기 다른 삶을 살던 물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어 낸다.
소파나 침대 등을 두어 현대식 생활처럼 익숙하게 꾸미는 대신 앉아서 생활하는 전통의 방식을 택한 그녀. 침대가 없는 한옥에서의 좌식 생활은 아침부터 다르다. 눈을 뜨면 꽃잎이 심어진 한지 벽지 위로 창호지 바른 창을 투과한 부드러운 빛이 드리운다.
집의 대청마루이자 작업실인 중앙은 한옥의 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원한 공간이다. 이서재의 모든 조명은 간접조명인데, 작업실에는 네 개의 조명을 두었다. 간접조명은 사람에게 직접 비추지 않고 시선의 끝이 밝아질 수 있는 장소에 놓는다. 작업실이라면 손 주변이 밝아지도록 놓는 식.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곱게 개는 것은 건강한 에너지를 모으고, 활기찬 시작을 알리는 혼자만의 의식과 같다. 방 한쪽에 단정하게 개어 이불을 정리해놓으며 그녀는 매일 아침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다.
침실에 놓인 단 하나의 가구이자, 직접 만들지 않고 구입한 유일한 가구인 수납장. 그녀는 가구 한 점, 소품 하나도 항상 신중하게 고른다. 하나의 가구를 제대로 사거나 만들어서 오래도록 쓰고 싶어 한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옥도 종국엔 집의 재료인 흙과 나무가 허물어지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구조물이지요. 삶이 자연 속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아요. 집 안의 문밖과 문 안이 겨우 나무틀 하나로 경계 지어지는 것을 보고 밖이 안이고 안이 밖인 삶,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 선조들이 누리고자 했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어요.”
정갈하게 놓인 한 채의 이불은 그녀가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개어 직접 수놓은 커버로 한 번 더 감싼 것이다. 매일 아침 이불을 마치 하나의 작품 더미처럼 방 한쪽에 놓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온몸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집과의 소통. 집 안에서 햇빛, 바람, 비 등과 닿으며 느끼는 감각들은 한옥에 살며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경험이자 일상이다.
집은 살아가면서 조금씩,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직 완벽하게 다듬지 못한 욕실은 은은한 천으로 가려 한옥의 정취를 살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침실 창 너머로 북악산이 그림처럼 있다. 겸재 정선이 260년 전에 그린 북악산 모습 그대로이다.
마당 위에 내리쬐는 햇볕이 하루 종일 조금씩 이동하는 모습, 벽에 일렁이는 햇빛의 그림자, 대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바람 소리, 비가 오는 날이면 달라지는 한옥의 정취, 자연의 풍경에 맞추어 음악 혹은 음식 또는 특별한 누군가와 함께하는 한옥에서의 삶에 아티스트 이서는 지금 푹 빠져 있다.
주방 역시 그녀의 손길로 거듭났다. 벽의 칠과 싱크대의 시트지, 벽면 타일을 시공하고, 펜던트형 조명과 찬장 아래 LED 등으로 간접조명을 주었다.
평범한 날들을 변화시키는 일상의 예술
작지만 독창적이고 우아한 멋을 풍기는 한옥, 이서재는 이서 작가가 한 달의 시간을 침낭에서 보내며 직접 공사해 만든 작품이다. 도배를 하고, 타일을 바르고, 가구를 만들어 여기까지 오면서 또 다른 방식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보람을 느꼈다고. 작은 한옥이라 주방 역시 좁지만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개조하는 동안 자신이 일할 동선을 고려하여 선반과 싱크대, 오븐을 두는 등 정리 정돈과 수납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좁은 주방을 넓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수납과 장식 효과를 겸하는 선반이다.
또 벽에 선반을 달아 커피포트와 찻잔, 말린 허브 통을 두어 수납과 장식 효과를 겸했다. 가스오븐레인지 하나면 그녀가 자신 있는 동서양의 음식을 모두 할 수 있고, 커피머신과 무쇠솥을 구비해, 프랑스식 빵과 수제 잼으로 여는 서양식은 물론 갓 지은 밥에 달걀말이를 올린 동양식 아침밥까지 그날그날 다르게 준비할 수 있다.
한옥을 선택하고부터 그녀의 삶은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한옥 마당에 놓인 소반 위에 그녀가 직접 요리한, 와인에 절인 도토리묵 살구샐러드와 생강을 섞어 맛을 낸 아이스망고 콩포트, 수정과가 놓였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채소는 마당 텃밭에 심은 허브잎을 따서 활용한다.
8월 초 집을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선선해지는 가을에는 이서재를 프라이빗 레스토랑으로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시작한, 레시피 없이 즐기는 편안한 메뉴에 계속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식재료를 배합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색다른 맛을 선사할 예정. 또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곳저곳에서 만난 지인들과 함께 소규모의 문화 세미나, 공연, 영화 상영 등 동서 문화가 교차하는 문화 교류의 장을 열어가고자 한다.
여름밤 한옥 마당에서 즐기는 와인 파티. 오래전 프랑스에서 만난 친구인 불문학 박사 이채영 씨가 찾아와 얼마 전 파리의 친구로부터 소포로 받은 와인을 함께 나누었다. 간접조명과 양초의 은은한 불빛 안에서 음악을 듣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복잡한 대도시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여유롭고 느긋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서재는 이미 창작을 자극하는 수많은 오브제가 놓인 생활공간이다. 그간 시각 미술, 연극, 퍼포먼스, 클래식 음악, 한국무용, 일본 춤인 부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두루 섭렵한 집주인의 감각이 생활공간과 예술공간의 경계에 위치한 지점으로 사람들을 이끌 것이다. 이서재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시작하는 일상의 예술이 평범한 날들을 변화시키는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