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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마게돈 전쟁 (최한나)
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말씀 아멘!
여섯째 천사 : 여섯째 재앙은 그것이 세상 역사의 절정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앞의 다섯 재앙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다가오는 최후의 전쟁 준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실한 백성과, 사탄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사이에 있을 전쟁이다.
큰 강 유프라테스 : “큰 강”이라고 불린 구약의 유프라테스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원수들, 즉 앗수르와 바벨론 사이를 분리시킨 경계선이다. 계 9:14의 주석을 참조하면 된다.. 유프라테스는 고대 바벨론을 가로질러 흘렀다.
계 17:1에서 음녀 바벨론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 렘 51:13에도 “많은 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모두 유프라테스를 가리킨다. 천사는 요한에게 음녀 바벨론이 앉아 있는 물은 세상의 국가적 권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계 17:15). 그러므로 유프라테스 강은 세상의 백성과 마지막 때에 바벨론의 종교적 권세를 지원할 국가적 권세를 대표한다.
강물이 말라서 : 구약에서 물이 마른다는 것은 종종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사를 상징한다. 홍해가 그랬었고, 요단 강이 그러했다(출 14:21, 수 3:14-17).
요한계시록에서 유프라테스 강물이 말랐다는 말은 특히 고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강물을 말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였다(사 44:27-28, 렘 50:35-38, 51:36-37). 이 말씀들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말림으로써 고레스를 바벨론 성에 입성시켜 그 도성을 정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몰락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여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예루살렘과 유다를 재건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고레스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레스는 목자(사 44:27)로 불렸으며,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해방이 사명인 메시야의 한 모형이 되었다(사 45:1).
이 예언들의 역사적 성취는 후에 유명한 헬라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해 기록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고레스의 원통(Cyrus Cylinder)에 의해 확증되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바사 사람 고레스는 그 도시를 관통하여 흘렀던 유프라테스 강을 말림으로써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그가 바벨론에 접근하였을 때, 그는 성벽과 방어가 너무나 견고한 것과 도성 안에 수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레스는 유프라테스 강물의 수위가 낮아졌을 때, 군인들을 시켜 그 강으로 유입하는 물길을 돌려 호수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단 5장에 의하면, 바벨론이 술잔치를 하고 있던 그 밤에 바사 군인들은 도성의 성벽 아래에 있는 마른 하상(河床)을 따라 기습공격으로 그 도시로 진입하여 바벨론 성을 정복하였다. 후에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라 1:1-4).
요한은 실제의 역사적 사건을 이용하여 마지막 때의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이 분명하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 바사 사람 고레스와 그의 동맹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사 41:2, 25).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마름으로 고레스와 그의 동맹군들, 즉 동방에서 오는 왕들에게 길이 열렸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신약에서 동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마 24:27).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누구인가? (아래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모두 재림교 학자들임)
한스 K. 라론델은, 이들은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늘 용사들로서 세상의 모든 왕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오는 왕들이다.
C. 머빈 맥스웰은, 이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이분들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로서 무대에 등장하신다.
랑코 스테파노비치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계 17:14를 제시한다.
아마겟돈 : 이 말은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하르’(산)와 ‘메깃돈’(므깃도)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므깃도는 잘 알려진 성채-도시였으며, 지중해와 갈릴리 바다 사이의 갈멜산 능선에 자리잡은 에스드랠론 평야에서 이스라엘의 북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 도시는 애굽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큰 고속도로 상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그 지역은 유명한 전쟁터 중의 하나로써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굵직하고 결정적인 전투들이 있었던 곳이다. 므깃도에서 바락과 드보라는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격퇴시켰고(삿 5:19-21), 아하스는 예후의 칼을 받았고(왕하 9:27), 요시야는 바로 느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3:29-30, 슥 12:11).
그러나 문제는 므깃도가 산 위에 있지 않고 평야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 “므깃도의 산”은 없다. 그 문제에 대하여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는데 가장 믿음직한 견해는 므깃도의 산은 므깃도에 근접해 있는 갈멜산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갈멜산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들 중 하나가 있었던 곳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 명을 죽인 곳이다(왕상 18장).
윌리암 H. 셰이는 계 16장의 아마겟돈 전쟁과 왕상 18장 사이에 많은 평행구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들면, 엘리야는 누가 참하나님이신지를 밝히기 위해서 아합으로 하여금 모든 이스라엘을 소집하라고 요구했듯이, 사탄의 삼위도 그 추종자들을 아마겟돈으로 불러 모은다. 아마겟돈 전쟁에 연루된 배도한 종교체제가 계 17-18장에서 큰 음녀로 대표되어 있다. 이 음녀는 갈멜산 사건에서 주역을 맡았던 이세벨 여왕에 해당된다. 계 16:13에 의하면 아마겟돈으로 군대를 모으는 일에 있어 거짓 선지자가 주요 역할을 할 것이다. 850 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엘리야를 대적하기 위해서 갈멜산에 모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에 의해 살육되었듯이 사탄의 삼위의 추종자들도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계 19:20-21).
그리스도와 흑암의 군대 사이에 있을 최후의 쟁투를 묘사함에 있어, 이 모든 것들은 요한이 과거 역사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겟돈은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실제로 므깃도의 산이나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세계적인 영적 투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사탄의 삼위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군대에 의해 총체적이고 최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땅은 전쟁터가 될 것이다. 최후의 싸움과 최종적 승리의 장면이 있을 것이다. 여기 이 땅, 사탄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을 이끌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곳에서 반역은 진압될 것이다.” (RH, 1899. 5. 13)
“일차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군대와 사탄의 군대간의 영적 싸움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것은 일찍이 지상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꼭 같은 실제적인 싸움이 될 것이다. 단지 그 범위가 훨씬 더 광범하고 전쟁의 양상이 훨씬 더 격렬할 뿐이다. 악인들은 매우 필사적인 싸움을 싸울 것이다. 여섯째 재앙 하에서 아마겟돈으로 모이는 일이 있을 것이요, 싸움이 극에 달하는 것은 일곱째 재앙이 내리고 있을 때이다. 그 전쟁의 끝에는 전 세계가 황폐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서신 79, 1900)
18. 솔로몬의 기도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열왕기상 3:4-10)말씀 아멘!
기브온 … 산당이 큼이라 :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 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 m 가량의 이스라엘 중부의 주요 성읍이다(수 9:3, 10:2, 18:25, 21:17, 삼하 21:1). 가나안 정복 후 처음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수 18:25), 후에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다(수 21:17). 이곳 기브온의 산당이 특별히 유명하게 된 것은 사울의 놉(Nob) 제사장 학살 사건(삼상 22:11-19) 이후 놉에 있던 여호와의 장막이 기브온으로 옮겨지고 나서부터였다(대상 16:39, 대하 1:3). 즉 그 때 이후로 여호와의 장막(모세의 장막)이 있는 기브온과 여호와의 법궤(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2대 제사 중심기가 되었다. 한편, 즉위 후 솔로몬은 ‘일천 번제’라는 대제사을 드리기 위해서는 ‘놋단’이 있는 기브온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신하들과 백성의 대표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대하 1:2-6).
그 제단에 : 기브온 산당의 모세 성막(출 27:1-2, 38:1, 2) 안에 있던 놋 제단을 가리킨다(대하 1:3-6).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 일천의 숫자가 횟수인지 양(量)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어느쪽이든 엄청난 규모임엔 틀림없다. 솔로몬은 백성들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기 전 무엇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원했다. 따라서 솔로몬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모두 이끌고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가 자신과 백성들을 하나님께 전적 헌신하는 하나의 신앙 고백으로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과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한 것이다. 한편, 번제(히, 올라)는 희생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제사로서, (1)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정립을 원할 때 (2)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기를 원할 때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는 자원제이다(레 1:3).
그러므로 솔로몬도 이러한 목적으로 그의 통치 초기에 왕 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헌신을 위하여 이처럼 기브온 산당에서 이 ‘올라’를 드린 것이다(Tosef).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규모면에서 ‘일천 번제’(히, 엘레프 올로트)라는 전무후무한 성격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전적 헌신의 징표일 뿐 아니라, 즉위 초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과 순종에의 열의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혹자는 이 제사 제물들을 열심히 드린다 할지라도 최소한 칠 일 또는 팔 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J. Hammond). 여하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신하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처럼 충성과 헌신의 표시로 생각되었다(IDB, 시 68:18). 그러므로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믿고 모시는 솔로몬과 백성들의 신앙 고백 행위이다.
그럼 솔로몬이 직접 번제를 드렸는가? 우선 이 본문에는 왕 자신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직접 번제를 드렸는지 여부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왕이 혼자 그 엄청난 수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솔로몬이 그 제단에 … 번제를 드렸다”는 표현은 단지 제물을 드린 주체를 왕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건 왕의 주관 아래 이루어진 일들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경우도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왕상 6:2)하였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왕이 직접 석공과 목수의 일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님은 자명하다.
‘일천 번제’는 그 제사에 참여한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일 수 있다. 기브온 산당의 제사는 솔로몬 혼자 드린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대하 1:2)과 함께 갔다. 솔로몬은 후에 이보다도 더 엄청난 수의 번제를 드린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 기념 제사를 드릴 때이다. 그때 그가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왕상 8:63)다. 이 모든 제물을 솔로몬이 직접 드렸을 리 없다.
그리고 꿈에 나타나시니라 : ‘나타나셨다’(히, 니레아)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형체를 구체적으로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Bähr, Keil, Hammond). 한편 ‘꿈’(히, 할롬)은 특히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는 특별한 계시 방편으로 자주 등장한다(창 15:12, 28:12, 욥 33:15, 16, 마 1:20-23, 2:12).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인 일천 번제에 이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 큰 일을 하시고자 했음을 의미한다(Patterson). 여기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이제 시작될 통치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려는 목적이 있었다(Keil).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여호와의 뜻에 부합한 정당한 간구를 할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마 6:33, 7:7, 약 4:3).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전에 솔로몬은 먼저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간구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이다.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이다(신 32:4).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었던 2대 비결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cum Deo),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행하였기 때문에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큰 은혜 : ‘큰 은혜’(히, 헤세드 가돌)의 문자적 의미는 ‘크신 친절’(great kindness) 또는 ‘크신 긍휼’(great mercy)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것들은 다만 행한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닌 오직 은총일 따름이라고 솔로몬은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은혜’(히, 헤세드)는 보통 ‘언약’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8:23, 신 7:9, 12, 느 9:32, 단 9:4, 미 7:20 등). 즉 언약 관계에서 주어지는 친절, 사랑, 긍휼, 호의 등이 바로 ‘헤세드’이다. 이런 맥락에서 특별히 여기서는 당신의 언약을 따라 다윗 가문을 선택하셔서 영구한 왕위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호의를 의미한다(1:48, 2:4, 45, 대하 1:8, 9).
주께서 택하신 백성 :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신 7:6).
그들은 큰 백성이라 …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 이 말은 일찍이 조상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며 한 말이다(창 13:16, 15:5, 22:17). 한편, 솔로몬 당시의 인구 수는 확실치 않으나, 다윗이 그의 말년에 인구 조사를 실시했을 때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만 130만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삼하 24:9).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로 ‘땅의 티끌’(창 13:16), ‘하늘의 뭇별’(창 15:5), ‘바닷가의 모래’(창 22:17) 같이 번성하도록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었다.
누가 …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 ‘재판하다’(히, 샤파트)는 성경에서 주로 ‘다스리다’로 번역되었다(삿 12:11, 삼상 8:5, 20). 왕정(王政) 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士師)들의 임무는 재판관(히, 쉐파트, ‘사사’로 번역됨)으로서 사회의 각종 분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왕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재판은 통치의 주된 기능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고대 국가의 왕들은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재판관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후 솔로몬이 한 통치의 첫 업무는 재판이었다(16절 이하). 그리고 그 재판이 곧 왕의 권위를 인정받게 하였다(28절).
듣는 마음 : ‘듣는 마음’(히, 레브 쇼메아)은 문자적으로는 ‘듣는 마음’이다. 그런데 ‘듣다’란 동사 ‘샤마’는 ‘복종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루터(Luther)가 이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서 얻는다고 보기 때문이다(시 119:97-99, 잠 2:6-9).
선악을 분별하게 : 통치자로서 백성들의 제반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만일 통치자가 백성들 사이의 제반 문제에 대해 시시비비를 옳게 가려 주지 못한다면,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무엇보다 통치자로서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 한편 솔로몬이 구한 이러한 마음는 결코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서, 그 일례가 16-28절의 판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주의 마음에 든지라 : 직역하면 ‘주의 눈에 좋았다’란 뜻이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기도를 드린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택한 백성을 맡아 다스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올바른 통치와 재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9절).
19. 음녀의 정체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요한계시록 17:1-7) 말씀 아멘!
요한은 마지막 바벨론의 붕괴를 선언하였다(계 14:8, 16:19, 18:2). 이제 그는 마지막 바벨론의 신원을 밝히고, 이 마지막 종교 체제에 대한 심판과 그것의 종국을 묘사한다.
일곱 천사 중 하나 : 이 천사는 바벨론의 붕괴를 선언한 일곱째 대접을 가진 천사일 것이다. 이 천사가 계 17-18장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여섯째 재앙 때 묘사되었던 것(계 16:12-16)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다. 1세기의 로마는 많은 나라들을 정복함으로써 그의 힘과 주권을 행사했다는 의미에서 그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배하게 하려는 마지막 바벨론은 더욱 그러하다.
음녀 : 음녀는 계 17:5에서 “큰 바벨론”이라고 하였다. 요한은 마지막 때 국가와 동맹한 세상의 지배적인 배도한 종교체제와 그것과 관련된 권세들을 묘사하기 위해 바벨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마지막 때의 바벨론은 사탄의 삼위 즉 사탄, 바다짐승, 그리고 땅의 짐승 또는 거짓 선지자와 연합한 세계적인 종교적 동맹체이다. 세계를 지배한 강국들은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단 7:2) 때에 올라오는 맹수들로 선지자 다니엘에게 나타났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 한 천사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계 17:15)고 설명하였다. 바람은 전쟁을 표상한다. 그리고 네 바람이 바다에 크게 몰려 부는 것은 모든 나라에서 세력을 잡기 위하여 일어나는 정복과 혁명의 무서운 장면을 표상한다.
땅의 임금들 : 여기에서 말하는 땅의 임금들은 바벨론이라 칭하는 배도한 종교체제를 돕는 일에 그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할 세상의 지도적 정치 권세들을 상징한다. 그들과 바벨론과의 관계는 음행으로 묘사된다.
바벨론은 또한 ‘땅의 임금들’로 더불어 불법적 관계를 맺는데 대하여 비난을 받고 있다. 일찍이 유대교는 주님을 떠나 이교도로 더불어 동맹을 맺음으로 음녀가 되었는데, 로마교도 그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권력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 타락함으로 그와 동일한 죄의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음행의 포도주 : 구약에서 음행은 종종 배도한 도시들과 국가들 간의 연합과 충성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사 23:17, 나 3:4). 음행은 종종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 간의 관계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사 1:21, 렘 3:1, 겔 16:28-29).
계 17-18장에 나오는 마지막 바벨론과 세상의 지배 세력들 간에 있을 연합에 대한 묘사는 구약의 이 비유에 기초되어 있다. 세상의 정치세력들은 바벨론의 오만과 매력적인 부와 사치에 미혹될 것이다. 바벨론은 그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약속한다.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는 세상 나라를 취하게 하여 제대로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마지막 바벨론은 그의 기만으로 세계의 열국들을 지배할 것이다.
영원 지옥설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 마시우고 있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거짓 교리 중 하나이다(계 14:8, 17:2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이단설을 받아들이고 거룩한 단에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마치 거짓 안식일을 로마교에서 받은 것처럼 그것도 로마교로부터 받았다.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받은 빛은 우리가 받은 빛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시대에 주어진 빛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비치는 빛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버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가르쳤다는 이유로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바벨론에 선고된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는 바벨론의 가증한 독주를 마시게 된다.
지금 온갖 종류의 기만술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이 인위적인 잡다한 이론들로 말미암아 그 모습이 가리워져 있다. 치명적인 오류들이 마치 모든 사람들이 굴복해야 할 진리이기나 한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참된 경건에 대한 단순성은 인간의 유전 밑에 깔려 있다. 영혼 불멸설에 대한 교리는 영혼의 원수가 인간을 기만하고 있는 한 가지 오류이다. 이 모순된 오류는 거의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이 교리는 사탄의 회에서 날조해 낸 거짓말들 중의 하나이며 악의로 가득찬 바벨론의 설계도이다.
땅에 사는 자들 :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 자주 나오며, 이것은 악인들, 즉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핍박한 자들에 대한 전문 용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계 3:10, 6:10, 8:13, 11:10, 13:8, 14, 17:2). 반면 요한계시록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늘에 사는 자들”(계 13:6)로, 그리고 하늘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계 1:6, 5:9-10).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이 말은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르짖는다는 뜻인가? 성경에 나오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가(눅 23:34, 행 7:59-60).
순교자들도 모두 스데반처럼 예수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자신을 죽인 원수들을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순교자들의 호소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원통함을 풀어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온 우주 앞에서 누가 옳았는지를 보여주고 판결하는 것이다(눅 18:7-8).
마음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마 24:48)고 말한 종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라고 공언했다. 그는 마음으로는 사탄에게 굴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한 종이었다. 그는 조롱하는 자처럼 진리를 공공연하게 부인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생애를 통하여 주님이 더디 오리라는 마음 속의 감정을 나타낸다. 추측 때문에 그는 영원한 유익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그는 세상의 처세훈을 받아들여 그 습관과 관습을 따른다. 이기심, 세상의 자랑, 야망 등이 지배적이다. 그의 형제들이 자기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설까 두려워서 그는 그들의 활동을 헐뜯고 그들의 동기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동료 종들을 때린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분리됨에 따라 그는 점점 더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연합한다. 그는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며, 세상 사람들과 연합하고 그들의 정신에 동참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속임을 당하여 육적인 안락 가운데로 빠져들고 망각과 무관심과 나태에 정복당한다.
성령으로 : 요한은 이곳을 포함하여 모두 네 번이나 성령의 영향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계 1:10, 4:2. 21:10). 이것은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사람의 뜻이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에 의해 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다(벧후 1:20-21).
본문의 광야는 마지막 바벨론을 심판함에 있어 매우 적절한 배경인 것 같다. 그곳은 1260 일의 예언적 기간에 교회를 박해하던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이 있었던 곳이다(계 12:3, 6, 14). 이 광야에서 요한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짐승을 본 것은 그 짐승이 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이 짐승은 계 13장의 바다 짐승과 비슷하다(계 13:1). 이것은 이 짐승이 로마교와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 붉은 색은 계 12:3의 붉은 용과 같은 색깔이며, 유혈과 압제의 색깔이다(계 6:4 주석 참조). 이곳의 짐승은 마지막 때 마지막 바벨론을 섬길 정치적 세력들을 상징한다(계 13:1의 주석을 참조하라). 여자가 짐승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녀가 세상의 정치세력들의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음행과 술 취함을 통해 세상의 지배적 정치 세력들은 미혹되어 마지막 바벨론과의 연합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 신약에서 신성 모독의 형태는 다음의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
첫째,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함(요 10:33).
둘째,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함(눅 5:21).
자주 빛 : 고대에 자주(紫朱)색은 종종 왕의 복장에 사용되었다(삿 8:26, 더 8:15, 단 5:7). 음녀는 오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계 18:7) 이것은 그녀가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권력들을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붉은 빛 : 고대에 붉은 옷과 사치스런 치장은 유혹하기 위한 음녀의 모습이었다(렘 4:30). 또한 구약의 음란한 도시들은 호사스러움과 사치가 어우러진 부와 번영이 특징이었다. 마지막 바벨론의 장신구는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오만의 표현이다. 음녀가 꾸미고 있는 금과 보석과 진주는 새 예루살렘을 단장하고 있는 것들이다(계 21:11-21). 이것은 음녀가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모조하여 온 세상이 자신을 따르도록 함을 의미한다. 금 잔은 가장 맛있는 술을 약속하지만, 마지막 바벨론이 들고 있는 금 잔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렘 51:7). 바벨론은 기적과 거짓 교리 등을 이용한 설득과, 설득으로 안 될 경우 강제적인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그리스도교국의 모든 왕들에 대하여 여러 세기 동안 전제적 세력을 휘둘러온 세력은 로마이다. 그 자주빛과 붉은 빛이며, 금과 보석과 진주는 거만한 로마 법왕에 의하여 취해진 존귀와 일반 임금들보다 뛰어난 위세를 여실히 묘사해 준다.” (각 시대의 대쟁투, 382)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 이것은 공창에게 이름을 새긴 이마 장식을 매게 했던 로마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마의 상징적인 의미는 성격과 품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의 비밀은 바벨론은 용과 바다짐승과 땅의 짐승으로 구성된 마지막 때의 세계적 종교동맹체로써 비밀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연합은 비밀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어미 : 이 사탄의 삼위(용, 바다짐승, 땅의 짐승)는 모든 배도적인 종교 체제들을 연합시킬 것이다. 이런 연합의 결과로 바벨론은 땅의 음녀들의 어미가 된다. 그래서 이곳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우리의 어머니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갈 4:26).
바벨론은 ‘음녀들의 어미’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면 그 음녀의 딸들은 그 음녀의 교리와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그 음녀의 모본을 따라 세상과의 불법적 인연을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께서 인정하시는 바를 희생하는 그러한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빛 가운데서 행하고자 노력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바벨론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교파의 교회들이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해로운 교리들, 곧 오류의 포도주를 품어 왔다. 오류의 포도주는 영혼 불멸설, 악인의 영원한 형벌,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기 전의 선재성에 대한 부인,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성한 날 대신에 주일 중 첫째날을 주장하고 높이는 것, 등과 같은 거짓 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오류들이 여러 교파에 의해서 세상에 증거되었다.
20.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8:1-3) 말씀 아멘!
요한계시록은 17장은 “큰 바벨론”(계 17:5)이라 칭하는 마지막 때의 배도한 종교 세력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큰 바벨론은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 세상의 지배적인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을 미혹하는 음녀로 묘사되었다. 바벨론의 멸망은 속임을 당한 것을 깨달은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이 지원을 철회하고 바벨론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18장은 앞 장의 주제를 계속 이어간다. 이 장은 마지막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이 영적 바벨론의 붕괴를 묘사하면서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고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사용한 언어와 에스겔이 두로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사용한 언어를 쓰고 있다. 이곳 18장에서는 역사적 바벨론의 심판이 마지막 영적 바벨론의 심판의 모형이 되고 있다.
다른 천사 : 이 천사는 17장을 해석해준 천사가 아니라 큰 권세를 가지고 특별한 기별을 선포하려고 내려오는 천사이다.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 하나님의 기별은 세상을 환하게 하는 복음이다. 그것은 악인들에게는 어두운 사망의 소식이지만 의인들에게는 밝은 희망의 기별이다(롬 7:10).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하는 천사는 그 영광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한다. 온 세계적 범위의 사업이 비상한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 여기에 예언되어 있다. 1840년에서 1844년까지의 재림운동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광스럽게 나타났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세계의 모든 선교지에서 증거되었다. 그리고 어떤 나라들에서는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어떤 곳에서 있었던 것보다 가장 큰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셋째 천사의 마지막 경고 아래 이루어질 큰 운동은 그것보다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각 시대의 대쟁투, 611)
“오순절에 부어 주신 성령은 이른비였다. 그러나 늦은비는 더욱 풍성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당신을 구하고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타나야 한다.” (실물교훈, 121)
“나는 갑주를 입은 그 사람들이 큰 능력으로 진리를 전하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나는 매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어떤 아내들은 남편에게, 어떤 자녀들은 부모에게 매여 있었다.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제지되거나 방해를 받고 있던 정직한 사람들이 이제는 열성적으로 그 진리를 붙들게 되었다. 친척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오직 진리만이 그들에게서 높임을 받았다. 진리는 생명보다 더욱 가치있고 귀중했다. 그들은 진리를 얻고자 주리고 목말라 했다. 나는 무엇이 이처럼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 물었다. 한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늦은비,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유쾌하게 되는 것, 곧 셋째 천사의 큰 외침 때문이다.’” (교회증언 1권, 182-183)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 천사는 힘찬 음성으로 마지막 위조품인 종교체제의 붕괴를 선언한다. 이것은 이사야의 말씀을 상기시킨다(사 21:9). 또한 둘째 천사의 기별을 반복한다(계 14:8). 이 말은 헬라어에서 미래의 사건을 선언하는 부정과거이다. 이것은 미래의 사건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과거시제로 표현하는 용법이다. 이것은 장차 있을 바벨론의 붕괴가 임박하였고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란, 악한 영, 즉 악한 천사들의 소굴이 바벨론이었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로 현대 강신술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강신술이 오늘날의 유명 무실한 그리스도교를 더욱 잘 모방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큰 기만과 유혹의 세력을 갖게 된다. 사탄은 현대의 감각에 맞추어서 스스로 변장한다. 그는 빛나는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강신술의 매개체를 통하여 이적들이 행해지고 병 고침을 받게 되고 부인할 수 없는 많은 기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영들은 성경을 믿는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의 제도들에 대한 존중심을 표명할 것이므로 그들의 활동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처럼 인정될 것이다.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유사하게 묘사하고 있다(사 13:21-22, 렘 50:39). 마지막 바벨론의 붕괴와 몰락은 고대 바벨론의 몰락과 황폐처럼 확실하다. 고대 바벨론의 멸망이 이스라엘에게 좋은 소식이었고 그 결과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은 하늘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바벨론이 멸망한 원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만국을 취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벨론의 기만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그것으로 백성을 미혹하고 종교적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둘재, 땅의 왕들을 유혹하여 그들과 음행하였다. 이것은 세상의 지배적인 정치세력들과 배도한 종교체제와의 불법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셋째, 땅의 상인들이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다. 앞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국면의 바벨론의 영향력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마지막 종교체제와 세상의 지배적인 정치세력 간의 연합의 배후에 경제적 안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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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등으로 너무 잘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