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제2편]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들. '말'은 기호다. 아무것도 아닌 것,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소리들. '말'이 소리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은 항상 무언가의 '이름들'로 온다. 말로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저마다 '이름들'로 와서 의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약 팔십 년 전 한 청년은 '이름'에 관해 이런 시를 쓴다.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境),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별 헤는 밤」은 1941년 11월 5일에 씌어진 작품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부르고 이어서 어린 시절의 벗들과 좋아했던 시인, 그리고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와 같이 친숙한 고향의 동물들을 하나하나 다정하게 호명한다.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들은 멀리 있고, 이들은 타자인 한에서 멀리 있는 존재들이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벗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볼 때, 그 아득하고 미미한 존재들은 호명만으로 환대와 함께 커다란 존재성을 부여받는다. 그 이름들 하나하나는 추억과 그리움과 사랑의 ‘별’들이다. 이들을 ‘별’로 인지하는 것은 그만큼 멀고 아득한 곳에 있다는 뜻인데,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경과에서 ‘별’같이 닿을 수 없는 거리 저 밖으로 멀어졌음을 함의한다. 「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라는 이름을 ‘언덕’에 쓰고 난 뒤 흙으로 덮는다. 이는 제. 이름을 말소하고 망각에 두려는 제의적 행위다. 이 계절은 상징적 ‘겨울’인데, 시인은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제 이름을 묻은 언덕에 풀이 무성해질 희망과 기대를 품으며 시를 끝낸다. 시인이 「별 헤는 밤」을 쓸 무렵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일본 제국주의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면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 공사 기관의 채용, 행정기관에서 민원 사무의 배제, 식량 및 물자의 배급 대상에서 제외와 더불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을 비국민 불령선인으로 단정한다는 것 따위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청년은 창씨개명에 대해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윤동주는 1942년 1월 29일 제 이름을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로 개명해서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에 제출한다. 이로써 ‘윤동주’라는 이름은 공식문서에서 사라진다. 제나라의 말로 호명되는 이름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책임이다. 시인은 창씨개명으로 사라질 제 이름자를 쓰고 스스로 흙으로 덮은 언덕에 봄이 와서 ‘자랑’처럼 풀이 무성해질 기대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서동욱은 「주문(呪文)으로서의 이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다.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본질이고, 그 본질을 육화하는 주문이 바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라면, 이 ‘세계 전체의 본질’을 담고 있는 하나의 이름 역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단 한 번의 발음(주문)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고 세상의 본질을 회복할 수도 있는 그런 이름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신’이 이름을 갖고, 사람들은 이 초월자의 이름을 부른다. 초월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환대, 흠모, 숭배의 제의적 행위다. 이름 가진 것은 다 신의 현전을 반영한다. 우리가 불러준 이름들, 부르다가 죽을 이름들, 초혼의 의식에서도 망자의 이름을 부른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김소월, 「초혼」) 초혼 의식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망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다. 이 세계는 이름 가진 것들의 세계다.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이 세계의 일원에서 배제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를 때 그것은 정체가 모호한 벌거벗은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압도적인 의미의 존재로 거듭난다. 존재는 이름으로 불려짐으로써 열린 세계속으로 들어온다. 열린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익명성에서 기명성에 존재의 형이상학적 전환을 이루며 공적 지평에서의 참여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