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그 사소한
綠雲 김정옥
기다리던 신발이 도착했다.
곧바로 신발을 신고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강다짐하듯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런 다음 하루하루에 순서를 매겼다. 1일 차, 2일 차, 3일 차…. 7일 차를 지나서 15일 차를 넘어 21일 차까지 신고 다니면 끝나는 게임이다.
얼마 전, 해외여행을 같이 가기로 한 후배가 ㅇㅇㅇ 신발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그 신발을 신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무리 오래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았다며 내게도 신어보라고 권했다.
두 달 전 발목을 다쳐 한 달이나 깁스하고 있었다. 깁스를 풀고 난 후에도 한동안 쩔뚝거리며 고생하고 난 뒤라 후배의 말에 솔깃했다. 그것도 한 켤레는 거의 공짜로 구입할 수 있다는 소리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신발을 구입해 신고, 21일 동안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소감과 함께 카페에 올리면 신발값만큼 적립금으로 돌려준다는 조건이었다. 중간에 하루라도 거르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지키는 것쯤이야 별문제가 아니다.
21일 동안 사진 찍고 소감 몇 줄 쓰는 게 뭐가 어려우랴. 특별히 바쁜 일도 없는데, 매일 신발 신고 집 밖으로 나가면 될 것을. 업체에서 상품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해 볼일은 없지 싶었다.
곧장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갔다. 요것조것 살피는데 올리브그린 색 제품이 눈에 들어온다. 자석에 끌리듯 냉큼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신발을 받은 날부터 신고 다녔다. 비가 오면 우산을 받치고,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며 신발을 신고 발품을 팔았다. 동네 산책하던 중에 사진을 찍고, 평생교육원에 수강하고 오면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대고, 장 보러 나가면서 걷는 모습도 동영상에 담았다. 보도에 뒹구는 다홍빛 단풍잎을 배경으로 신발을 신은 나를 연출하기도 했다. 시작할 땐 하루하루가 마디게 가더니 활시위가 당겨졌는지,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는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신발 한 켤레 공짜로 얻어 보려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지나고 보니 신발 신은 내 모습 사진과 나만의 느낌을 적어 올리는 일이 곰실곰실 재미가 있었다. 숙제처럼 반복했지만 21일 동안 뭔가를 꾸준히 해낸다는 것 자체가 뿌듯한 보람으로 다가왔다. 공짜 좋아하는 속물적 시도가 나름 의미를 부여하는 도전의 행위가 되는 것 같았다.
어미 닭이 알을 품어 부화하기까지 21일이 걸린다고 한다. 껍질 속 어둠의 상태에서 성체成體가 되어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다. ‘어떤 반복적인 행동이 습관으로 정착하는데 드는 최소한의 시간도 21일’이라고 한다. 어쩌면 21일은 일상의 기적을 잉태하는 기간일지 모르겠다.
나의 일상에도 21일의 주기가 있다. 손톱을 다시 깎아야 할 때이고, 들쑥날쑥 자란 머리를 다듬고, 하얗게 센 머리에 염색할 날이 돌아오는 시점이기도 하다. 21일 주기로 반복되는 사소한 일이 일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김치가 일정 기간 숙성되어야 감칠맛이 나고, 밥은 뜸을 들여야 고슬고슬한 맛으로 거듭난다. 며칠 전 써 놓은 설익은 글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21일쯤 걸리지 않을까. 내 안에서 뒹굴뒹굴 구르던 글감이 사유로 익어가고, 구슬 꿰듯 문장이 하나씩 영글어가는 시간이 21일이라면 좋겠다.
기적의 발아도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던가. 세줄 일기 쓰기부터 도전해 볼까. 생수병을 아령 삼아 팔의 근력을 키우는 건 어떨까. 고전 문학 읽기도 의미가 있겠다. 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상상하는 것으로도 내 그릇의 부피가 풀잎 한 장쯤 늘어나는 것 같다.
마지막 21일 차, 한 편의 수필을 쓰듯 긴 소감문을 올렸다. 고작 신발 한 켤레 때문에 시작했던 시시한 도전에서 ‘나도 해냈다’는 소소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며칠 후, 결혼 50년 차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커플 신발을 신었다.
첫댓글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커플 신발의 위력은)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군요. ㅎㅎ
새신을 신고 뛸 나이가 못 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손톱 발톱을 깍고 머리 염색을 하는 사소한 것부터 병아리 부화하는 것까지 21일이 꽤 의미있는 주기네요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