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꽃을 아시나요 / 안영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개울 이쪽과 저쪽만이 분리되어 어디쯤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휴일이라 작업이 중단되어 있기에 찬찬히 둘러 볼 수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저절로 입술에 매달린다.
길을 내려고 산허리를 깎아 허물어뜨린 곳이 처참해 보인다. 그곳에 살던 말 못하는 곤충들과 식물은 땅 밑에 매몰 되지 않았을까.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 들이 발아하여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십 여 년 전에는 집과 사업장이 있었던 곳이다. 엘에이치공사에서 개발하여 거의 열배 정도 오른 가격으로 계약을 하였는데, 운 좋게도 컴퓨터 추첨에서 당첨이 된 것이다. 그동안 수 십 여 년 동안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갇혀 살았다.
집을 짓게 된다면 마당에는 금란초, 금낭화, 돌단풍, 동의나물, 눈 속에서 봄과 밀회하는 복수초, 메발톱, 자란, 제비꽃, 풍로초, 아침이면 밝은 종소리를 울려 잠을 깨워줄 초롱꽃, 아 참, 할미꽃도 심어야겠다. 고추 몇포기, 가지 몇포기, 오이 몇 포기 심어 여름 반찬도 해야지. 담장 옆엔 대추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그리고 불루베리도 심어 산새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다. 대문 옆엔 목련과 금목서, 은목서, 자귀나무와 함께 살며 친구로 지낼 작정이다.
투명한 담장엔 장미 넝쿨과 능소화도 올리고 수 십 년 화분에서 답답하게 자라고 있는 좀 마삭 줄, 칼 마삭, 꽃 마삭 줄도 키 재기를 하며 담장 위로 마음껏 발을 뻗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사랑해야 보이고 자세히 보이야 보이는 누운 주름의 자잘한 꽃들과 눈을 맞출 참이다.
작고 가난한 정원이지만 따뜻한 봄날과 남풍이 안부를 전할 것이다. 스산하지만 낙엽 지는 가을을 맞이하게 될 때, 보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 흰 구름 떠가는 차 한 잔을 나누며 허기진 그리움을 다독이고 싶다.
바지 끝에 흙먼지를 매달고 한참을 올라가니 옛길이 얼굴을 보인다. 돌담과 자주 만났던 숲속의 식당도 나타난다. 이십 년도 더 된 시간에 놀이 공원으로 개발 하다 방치된 곳이다. 시설은 녹이 슬고 화장실도 막아 놓았다. 누군가가 급했든지 합판을 뜯어 낸 흔적이 섬뜩한 느낌을 들게 한다. 변하지 않은 건 게으름 부릴 줄 모르는 개울만이 졸졸대며 소리 내어 반긴다.
계곡 옆 길가에 푸른 하늘이 내려와 앉아있다. 가을 하늘을 닮은 투구 꽃이다. 긴 목을 빼어 나 여기 있다고 손짓 한다. 늦가을이라 꽃이 곧 질 것 같다. 뿌리는 다치지 않게 몇 송이 꺽어 등산 가방에 고이 넣었다. 폭우로 움푹 페인 산길을 오르니 겨우 몸 하나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 있다. 매일 산에 오르는 나와는 달리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 나무들이 놀라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산 중턱 비탈진 곳을 쳐다보다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곳에는 투구꽃 무리들이 푸른 투구를 쓴 채 비탈진 곳을 오르는 병사 모양으로 사열하듯 피어 있다. 언덕을 기어오르듯 피어있는 투구꽃들의 기이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겨 힘든 것도 모르겠다. 신라 낭도들의 넋이 현현하여 파란색으로 자신을 은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투구꽃은 이름 그대로 로마 병정의 투구를 닮았다. 우리 조상들이 쓰던 남바위와 생김새가 유사하며 영문이름인 ‘Monk,s hood’는 수도승의 두건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식물 가운데 가장 독성이 강하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화살에 독을 바를 때 투구꽃의 뿌리를 갈아 사용 했다고 한다.
한 시간을 더 걸어 장군봉 가는 갈림길을 만나고 고당봉 밑을 지났다. 남편에게 여기까지 왔으니 고당봉 정상까지 가자고 했더니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어쩔 수 없이 금샘 옆을 지나 북문으로 왔다. 북문 근처엔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역병으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가 산인 것 같다. 산바람이 불어온다. 바이러스를 흔적없이 날려 버릴 기세다.
가을 단풍이 일렁거린다. 마치 사람들에게 고운 손을 내밀며 위로 하는 듯하다. 단풍잎들도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은 모양이다. 따스한 온기가 마음속에 전해져 온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고당봉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았다 한다. 산비탈에 무리지어 핀 투구꽃들은 김유신이 훈련시키던 낭도들의 넋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신라의 낭도들 넋이 비탈진 산야에 푸른 투구꽃으로 피어나 김유신과 훈련에 열중하던 곳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의 푸른 기상이 보라색이 되어 내 마음을 훑는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무서운 꽃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코로나 불루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은유하는 것 같다. 어쩌면 투구꽃이 바이러스를 물리쳐 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투구꽃 군락지를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있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