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의 소통
송 희 제
젊은 시절 오랫동안 장애인 복지 서설에 봉사하러 다닌 적이 있다. 거기는 대전에서 가까운 연산에 있는 천주교 복지시설로 있는 '성모 마을'이다. 성당에서 기도와 액션 봉사 단체인 레지오 활동으로 단원들 여럿이 봉사를 다녔다.
그곳에 가서는 거동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냥 애들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점심때면 밥을 먹이는 것이다. 누워 있거나 움직임이 시원찮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입을 벌리게 하여 수저로 입안에 떠먹였다. 몸이 비정상이라 누워만 있는 아이들은 음식을 먹이려면 아이에 따라 방법을 다르게 해야 했다. 어린 아기처럼 내 품에 안거나 비스듬히 받쳐 있게 하여 음식 수저를 들이밀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갈 때마다 지정석처럼 내가 맡아서 하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이 '0규'였다. 인물도 훤한데 몸이 장애였다. 당시 6~7살쯤 되어 보이는 남아였다. 그 애 이름이 우리 둘째 아들과 이름이 같아 내가 더 정이 갔다. 늘 그 아이는 누워만 있어 미음을 떠먹여도 위 기능이 약하여 어느 땐 음식을 못 받아들여 반사적으로 내게 품어댈 때도 있었다. 그곳에는 그 `0규`란 아이보다 다섯 살쯤 더 먹은 남자도 장애인데 그 애는 `0규` 란 아이의 친형이라 했다. 그 형은 동생보단 장애가 덜하나 열 살이 넘었는데도 크지 못하고 언어도 제대로 못 하여 좋고 나쁜 것을 표정으로만 나타냈다.
언젠가 내가 봉사하러 갔던 가을날이다. 그날 마침 거기에서 돌봄을 받는 장애아들의 보호자가 온 날이다. 키도 크고 건장한 중년 남자가 복도와 넓은 홀을 두 아이를 번갈아 가며 돌보고 있었다. 힘들게 업기도 하고 안기도 하며 얼굴엔 그래도 아이와 아빠의 표정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직원들 말에 의하면 맏아들 때 장애아가 선천적으로 장애로 태어나 몇 년간 임신하지 않다가 둘째를 낳았다. 둘째는 여자로 정상아여서 안심하고 셋째를 또 낳았단다. 그 옛날에는 요즘같이 태아의 자세한 건강 감별하기가 어려웠던 시기다. 셋째도 정상아일 줄 알았는데 또 장애로 `0규`란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아마도 염색체에 이상 때문 같다고 했다. 매달 한두 번씩 그렇게 서울에서 아이들 아빠가 그 고향에 와서 온종일 두 아들을 보듬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힘들 때는 여러 아이 틈에 두 아들을 내려 눕힌다. 거기 넓은 홀이나 복도에는 걷지 못하는 장애아들이 뒤로 누워서 양팔을 힘겹게 비벼가며 움직인다.
그 두 애들은 남과 몸이나 머리가 부딪치면 얼굴을 찡그린다.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면서 제 형제끼리 손끝이 닿거나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 미소로 반가운 접촉을 좋아한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거동도 맘대로 못 하면서도 신체접촉만으로 부자간, 형제간 혈육의 정을 느끼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두 어린 아들을 멀리 시설에 보내고는 자주 와보지도 못하는 그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당시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봉사하고 귀가하면 나는 저절로 천사표 엄마가 되기도 했다.
요즘은 세상이 몰라보게 더 발전하고 다양하다. 지구는 여러 각도로 변화하며 공해 또한 온 세계를 지배한다. 그에 따라서 세상살이도 힘들어 자녀 출산도 꺼리며 인구 또한 줄어들고 있다. 옛날 우리 부모님 시절에는 사촌 육촌 사이도 한 울안에서 살며, 밥 수저도 같이 떠먹었다고 한다. 같은 부모님에게서 피를 이어받아 태어난 동기간들은 얼마나 큰 인연인지 모른다. 이렇게 언어나 육신의 장애로 정상적인 활발한 소통은 못 해도 그 안에 흐르는 이심전심의 정은 끈끈하다.
난믄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콧등이 시리도록 짠하고 가슴 뭉클했다. 점점 변화하며 각박해지기도 하는 삶에서 서로의 가슴이 이심전심으로 진심이 통하는 세상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