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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16권 21편, 축약분&&&&
통일교회는 탕감교회다
1966년 7월 31일(日), 전 본부교회. * 이 말씀은 서울 제1, 제2, 제3교회 합동예배 때 하신 말씀으로, <성화> 제67호 (1967년 7월호)에 게재된 것과 테이프를 종합하여 실은 것임.
교회 활동의 목적
우리가 이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을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내려오고 우리는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것이 강하게 눌러 주어야 올라가는 것이 쑤욱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닦아 나온 역사적인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제3교회에 가 있다면 제3교회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무리 출세를 해서 세계를 움직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향 땅이요, 부모의 인연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맺어진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 나라의 책임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교회 활동에 있어서의 주의 사항
선생님은 제3교회를 마음으로 후원해 줍니다. 또 제3교회는 소생․장성․완성격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3수가 좋긴 좋습니다. 이 ‘삼(三)’ 자는 바로 쓰면 3단계 성장기간을 상징하고, 옆으로 세우면 ‘내 천(川)’ 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수가 3수로서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원칙 적인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제3교회 식구들은 우리 통일교회의 대표적인 기준에서 움직이고, 모범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전통을 상실하는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그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그 원칙적인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아가야 됩니다.
사람을 지도하려면
이제 선생님이 이야기를 좀 할까요?「예.」
많은 사람을 지도하려면 사탕물, 꿀물만 먹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작용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침도 놓아야 합니다. 찌를 때는 손 끝을 찌르면 안 됩니다. 중앙, 아주 복판을 찔러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뒤에서 몰아야 할 때도 있지만 앞에서 코를 잡아서라도 끌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같이 제도화시켜서,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을 갖추어 조직체를 형성하여 움직이게 되면 쉬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사정과 격식을 차려서 친구로 사귀려면 10년은 걸려야 10년지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나서 대뜸 허물없이 ‘야 이 자식아! 왜 이래?’ 하고, 이마를 맞대고 주먹질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 금방 친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쁜 생활에 언제 사정 따라 인사를 하고 격식을 차리겠습니까?
노래는 하나님과 합하는 근본 재료
그렇게 알고 선생님이 노래 한번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같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선생님 혼자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30퍼센트, 40퍼센트, 50퍼센트가 넘는 것 같습니다. 어디 선생님 혼자 한번 해 볼까요?「예.」그러면 선생님은 아기의 언니 입장이고, 여러분은 아기의 동생 입장이라면 노래하겠습니다. 어른의 마음을 다 벗어 놓고 하겠습니다. 좋아요?「예.」무슨 노래를 할까요? 여러분이 제목을 정하세요.
’빛나는 대한’ 하나 할까요?
딩동댕동 보슬비는 단비를 주고
철썩처얼썩 치는 파도 집터를 닦네
둥실둥실 밝은 달은 길을 밝히고
송이송이 눈송이는 힘을 주누나(이하 다 같이)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구풀구풀 힘찬 산맥 충신을 낳고
굽이굽이 시냇물은 열녀를 낳네
산의 나무 다듬어서 집을 짓고요
들의 곡식 거두어서 진지 짓누나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노래는 하나님과 화합하는 근본 재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할 때 는 도취되는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선생님이 ‘애향가’를 하나 더 부르겠습니다.
조상들이 터를 닦은 이 좋은 산수
개척하자 한데 뭉쳐 지와 성으로
새역사의 깃발도 우릴 부른다
이 생명에 불을 달려 밝게 타보자
아름다운 산과 바다야 정든 고향아
하나님이 가려 주신 만세의 낙토
우리 모두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야지요?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 본 참다운 고향은 아직까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기준
이 운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개인에서부터 천주사적인 모든 복귀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으나 나쁘나 가야 할 복귀의 운명 길에 서 있는데, 이 운명길을 밟고 넘어서서 해방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모든 가정과 모든 민족과 천주 앞에 세워서 ‘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승리적인 한 날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소망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가야 됩니다.
그러면 복귀하는 데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워진 기준입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의 동기도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야 했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이 인류역사의 동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을 품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본연의 기준
하나님은 큰 자리에 서서 천주를 주관하고, 천지의 인연을 세워 가지고 인류와 천주를 사랑하시는 것이 본래의 창조목적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큰 자리를 내버리고 지극히 작은 자리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을 다시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맨 밑창에서부터 이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상과 뜻을 가지고 치리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고는 사탄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완전히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계를 복귀하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기준, 본연의 기준을 중심삼고 시작해서는 안되고 맨 밑창에서부터 시작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이념이 아니고 이 세계를 위한 이념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끝날을 중심삼은 새 시대의 이념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재림하는 그 날에는 지상에 천국이 벌어진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중심삼고 2천년 동안 기독교를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념을 초창기에는 가르쳐 주었지만, 과정에서는 탕감이라는 법도를 세워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탕감교회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탕감교회!
탕감의 기준
또 하나님은 그 나라보다 무엇을 원하시느냐? 세계입니다. 그 나라를 찾아 세우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겠지만 탕감복귀라는 것은 개별적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데는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개체적으로 탕감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의 대표로 보내진 사람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책임진 대표자들인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그 시대에서는 그들이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래서 노아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나가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아브라함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해서는 탕감의 법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가 민족적인 탕감의 사명자로 왔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을 당하더 라도 그들이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망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유대 백성이 전부 일치 단결하여 예수님주의에 화할 수 있는 기준에 서고, 불평불만이 없는 절대 순종하는 자리로 나갔더라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낸 책임자들은 어떠한 입장에 섰느냐 할 때에 그들은 그 시대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십자가를 지우느냐
창조 과정을 볼 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에야 사람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개인적인 십자가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십자가까지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섭리의 중심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를 합해서 지지 않고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핍박을 받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한꺼번에 탕감하게 된다면 가정 완성을 위한 길을 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닦아지는 것이요, 내 개체는 완성의 기준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세우시는 뜻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개인복귀노정을 더듬어 오고, 가정복귀노정을 세계적으로 준비해 나오고, 혹은 민족적인 복귀노정, 국가적인 복귀노정,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더듬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자 하나님은 세계적인 시련 무대에 내세워 탕감시켰습니다. 그 시련의 역사가 다 끝나고 주님 이 다시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십자가의 노정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8년을 중심삼고 이스라엘이 독립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새로운 섭리시대가 지구상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시작되었 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십자가를 진 것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친척 전부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또 그 씨족이면 씨족, 종족이면 종족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나라 그 민족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각 시대의 사명자가 승리하면
천년 묵은 소나무와 일년 묵은 소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천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키가 크고 무성하게 가지가 뻗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가지가 약하고 잎이 몇 개 안 됩니다. 그러나 일년 묵은 것도 소나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 다. 자라는 환경에 있어서 같은 태양, 같은 공기, 같은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자랄 수 있는 같은 시대의 소나무과에 속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 왜 그렇게 시대적인 사명자들을 많이 세웠느냐? 그것은 단계적으로 넓혀 나오기 위해서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이렇게 단계적으로 넓혀 나가야 하니만큼 그 시대에 있어서 사명자가 승리하면 그를 중심삼고 따르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혹은 가정적인 단계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인 아벨의 기준을 완결시켜서 탕감복귀시킬 수 있는 표준적 중심존재로 지금까지 그러한 섭리의 지도자들을 세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큰 것을 위하라
하나님이 지향하는 길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그 기준을 중심삼고 가는 길에는 추호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적인 개인의 감정이 개재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두철미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그 기준에 맞춰 나가지 않고서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국가적인 사명에서부터 세계적인 사명으로 넘어가야 할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지금 현 단계에서는 대한민국만을 중심삼은 활동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개국을 중심삼고 120개소에 성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때가 오기 전에 이에 앞서 우리는 세계 앞에 탕감 조건을 미리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실패가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내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세계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기준에서 통일교회 식구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그런 때는 아직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먼저 나가서 시련과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을 중심삼고 사탄이 참소하기 전에 방비할 수 있는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생과 탕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자기 가족을 위해 하지 않고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 것과 앞으로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자리가 어떤 자리일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그 자리에서 탕감노정을 개척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1호 충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았는데 자기가 실체적으로 행동해서 실적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대해 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 사람들이 몽땅 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과거의 선조들의 죄와 현재의 나의 죄까지 탕감하고서야 자기 시대를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가정의 전통과 생활이 올발라야만 원만하게 사회에 인격자로서 나설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나 하나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탕감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자꾸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에 돌아갈 때는 맨 첫번에 출발하던 기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기준보다 점점 낮아지는 것입니다.
서울 교회를 분산시킨 뜻
하나님은 한국에 복을 주려고 했지만 한국이 복을 못 받게 될 때는 그 복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한 가정에 있어서 남편이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내를 세우고, 아내가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복귀 섭리에 있어서도 부모가 책임을 못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중심삼고 부모를 찾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아내에게 소망을 두고, 그 아내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그 자식도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섭리적으로 볼 때 한국을 중심삼고 움직였던 은사가 물론 한국에서도 그 열매가 맺힐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일본에서 더 빨리 맺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본 식구들에게 외국에 갈 수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니 3분의 2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 식구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그들이 선두에 섰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이대로 나가다가는 꼼짝없이 일본에게 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작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들이 7년노정에서 책임 못 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는 선생님이 축복가정들을 본부에 못 오게 하고, 역사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하지 말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선민으로 태어나 가지고 탕감조건을 세워 나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선생님은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할 것입니 다. 한국 식구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급박한 때입니다. 한국보다도 세계를 일시에 복귀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많은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희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할 것이냐? 여러분의 조상을 통해서 할 것이냐, 후손을 통해서 할 것이냐?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을 통해서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5, 6년쯤 걸어와 보고는 다 지쳐 자빠졌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지치는 법을 선생님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이 지치는 방법을 스스로 유도해 왔고 또한 사탄의 공략전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사정없이 고생의 자리로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민족복귀의 기준과 국가복귀의 기준까지 세워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념적으로 공산세계와 대결해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 4배가운동입니다.
전진이냐 후퇴냐
전진이냐, 후퇴냐? 여러분들은 통일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앞으로 나갈 것이냐, 가만히 있을 것이냐, 아니면 후퇴할 것이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있으면 떨어지게 됩니다. 섭리는 민족적인 시대에서 세계적인 시대로 자꾸 발전하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가만 있을 때보다 더 열성을 내야 하는데 그 열성이 옛날보다도 못하게 되면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탕감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두고 볼 때 아벨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이지 가인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세계적인 탕감복귀를 해 나가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야 됩니다. 일편단심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가더라도 길을 가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목표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
관계와 탕감
복귀노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중심삼고는 절대로 탕감복귀가 안 됩니다. 거기에는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비참한 일이 있으면 비참함을 당하는 당사자 이상의 비참한 심정을 가져 보았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 인류를 생각하는 그런 생활을 해 보았으며,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져 보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막연하고 관념적입니다. 막연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탕감복귀를 할 수 없습니다. 전후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구해야 되고,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구해야 되 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나라를 구해야 되고, 나라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 해야 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철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구하고, 종족을 구하고, 민족을 구하고, 국가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였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는 기준에 선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의 대표자로, 온 인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그분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심정적인 터를 닦았고, 탕감적인 운명의 노정을 뒷받침하고 혹은 수습하기에 몸부림쳤느냐 하는 것을 생각 하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뜻을 위해서 각오를 했으면 가정을 위해서, 혹은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을 입 장에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갈 길은 뚜렷해야 합니다.
탕감복귀의 기준에 합격한 통일교인이 얼마나 되겠느냐
여러분들은 지금 개인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고, 가정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뭉그러 앉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뜻의 방향과 심정이 일치되고, 뜻을 중심삼고 온갖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서 그 환경을 주관하고, 사회적 십자가 혹은 민족적, 국가적인 십자가를 응당히 받아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넘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준에 합격한 통일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때가 가까이 올수록 여러분들을 무참히 고생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관점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에 동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조건을 세우는데 고생은 불가피 한 것입니다. 괜찮습니까?
세상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해야
선생님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직고하라고 하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선생님은 모든 것의 선후를 가려서 먼저 것은 하나님 앞에 돌리고 나중 것은 나에게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사탄세계의 사람들과 신앙적으로 인연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자기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먼저 사랑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더라도 그 모든 사람이 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식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결부시켜 생각하라
여러분, 홍제동 화장터에 한번 가 보세요. 사람이 얼마나 허무한가! 여러분들도 머지않아 다 죽을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걸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만민들인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가다가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한때 밥을 못 먹고 통곡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때가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여기 있는 여러분들을 키워 나올 때도 밤을 새워 가면서 이끌어 나왔지요? 그것은 만약 오늘 저녁에 이 사람들이 죽게 되면 선생님이 할 말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정성을 다 들인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한국 백성 앞에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전통적인 계대(繼代)를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기도 안 해도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심정적으로 얽어매어 가지고 시대적인 운세를 여러분의 눈물과 더불어 맺고 넘어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탕감복귀가 안 된다는 것을 확실 히 알아야 합니다.
탕감은 실천을 통해서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할 말은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말을 다 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이니 여러분에게 하지 않은 말도 많이 가지고 있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할 일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됩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더라도 청파동이 그립고, 생각만 해도 몸부림칠 만큼 그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면서 이 담벽과 전봇대를 바라보고 눈물짓던 그런 인상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뜻’ 하게 될 때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가슴이 저미어 오는 느낌뿐입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선생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길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당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 들도 이런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등에 얼마만큼 무거운 민족과 세계의 탕감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느냐?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한 것이냐, 민족을 위한 것이냐? 여러분의 마음에 자문자답해 보 면 잘 알 것입니다. 감독자가 필요 없고, 스승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곧 감독자요, 스승입니다.
중심을 향해서 나아가야
각자가 탕감의 짐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전도를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장에서라도 기도하라구요. 물론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삼천 만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갖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분발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을 그런 입장에 빨리 내모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킬수록 여러분은 중심 앞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언제나 이 중심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16권 21편, 원문&&&&
통일교회는 탕감교회다
1966년 7월 31일(日), 전 본부교회. * 이 말씀은 서울 제1, 제2, 제3교회 합동예배 때 하신 말씀으로, <성화> 제67호 (1967년 7월호)에 게재된 것과 테이프를 종합하여 실은 것임.
오늘은 제3교회 식구들이 가장 많이 모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제3교회가 열심입니다. 먼저 알고 모인 교회 식구들보다 오늘 아침에 알아 가지고 연락했어도 많이 모인 제3교회 식구들을 선생님은 치하합니다.
제1교회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제2교회는 줄기와 같고, 제3교회는 가지나 잎사귀와 같습니다. 그래서 제3교회 식구들이 설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제3교회 식구들이 설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의 뿌리나 줄기를 보고 좋아하지 않고 잎을 보고 좋아합 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울 교회를 3개로 나눈 것입니다.
교회 활동의 목적
종교인은 영계를 중심삼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영적 인격의 완성을 제일로 하고 나가는 사람이 종교인인데, 제1교회보다 제2교회에 그런 영통파 들이 많습니다. 여기 처음 오신 분들은 영통파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 다. 영통파란 영계와 문답을 하고, 영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2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3교회만 자꾸 퍼지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퍼지되 뿌리에 속한 줄기가 되고, 줄기에 속한 가지가 되고, 가지에 속한 잎사귀가 되어야 합니다. 뿌리와 줄기는 가만히 있는데 잎사귀만 자꾸 설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올 수 있습니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교회 식구들은 제1교회, 제2교회의 은덕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웃음) 왜 웃습니까?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다가 자기 나무에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나무의 잎사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루에 잎을 수만 개를 접붙일지라도 그것들이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접붙 여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제1교회, 제2교회는 어떻게 되든간에 제 3교회주의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숫자적으로 볼 때 순서가 제3, 제2, 제1, 이렇게 되어 나갑니까? 그것은 제 3교회식인 모양입니다.
수를 셀 때도 1, 2, 3…… 이렇게 세어 나가니 3교회 식구들은 그러한 관념을 좀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함께 모여 활동하는 것을 선생님이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기질이 맞는 것입니다. 다만 전체적인 인연을 중요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을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내려오고 우리는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것이 강하게 눌러 주어야 올라가는 것이 쑤욱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닦아 나온 역사적인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제3교회에 가 있다면 제3교회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무리 출세를 해서 세계를 움직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향 땅이요, 부모의 인연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맺어진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 나라의 책임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가 제3교회 교인들은 만나면 인사만 하고는 더 묻지도 않고 휙 가 버린다고 하는 말을 선생님이 들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따라와 가지고 서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하고, 말을 걸어 주면 고마워했었는데 그런 심정은 없어지고 쓸쓸한 바람만 휙 분다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러냐? 자기네 교회 발전상을 알면 이 목사가 자극을 받아서 힘차게 움직 일까봐 그런지 인사만 하고는 획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가만히 있어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보고를 하지 않아도 그것을 압니다.
교회 활동에 있어서의 주의 사항
선생님은 제3교회를 마음으로 후원해 줍니다. 또 제3교회는 소생․장 성․완성격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3수가 좋긴 좋습니다. 이 ‘삼(三)’ 자는 바로 쓰면 3단계 성장기간을 상징하고, 옆으로 세우면 ‘내 천(川)’ 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수가 3수로서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원칙 적인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제3교회 식구들은 우리 통일교회의 대표적인 기준에서 움직이고, 모범 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전통을 상실하는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그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그 원칙적인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교회가 발전을 하면 그 발전한 사실을 책임자들이 본 부에 와서 선생님에게 전부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 책임자들이 선생님에게 찾아와서 보고하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선생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봐서 그런지 나타나지도 않습 니다.
그래서 오늘도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시작하면 적어도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걸릴 것입니다. 열두 시간 동안도 이야기를 했던 기록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전부 지쳐서 도망갈 것 같습니다.
얘기했으면 좋겠어요?「예.」얼마나 하면 좋을까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소망인데 그렇게 하려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 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 대여섯 시간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 겠어요?「예.」그렇게 해도 괜찮다면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피곤 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아직 보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보고를 듣고 싶습니다. 보고를 하려면 서너 시간 걸릴 텐데 보고 끝난 후에 선생님이 세 시간 동안 더 얘기하면 여섯 시간 걸립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섯 시간 동안 계속 해서 앉아 있지 못할 사람은 지금 나가도 실례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저 뒤에 있다가 인사 없이 가도 괜찮아요. 아시겠어요?「예.」
그러면 3교회부터 보고하세요. 잘못한 것은 선생님하고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잘한 것을 중심삼고 얘기하도록 하세요.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려면, 주인이 칭찬받으려면 맛 좋은 음식은 전부 손님에게 대접하고 그 남은 찌꺼기는 주인이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이야기를 제해 버리면 좋은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서 잠깐만 보고하도록 합시다. (제3교회, 제2교회, 제1교회순으로 보고)
사람을 지도하려면
이제 선생님이 이야기를 좀 할까요?「예.」
많은 사람을 지도하려면 사탕물, 꿀물만 먹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작용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침도 놓아야 합니다. 찌를 때는 손 끝을 찌르면 안 됩니다. 중앙, 아주 복판을 찔러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뒤에서 몰아야 할 때도 있지만 앞에서 코를 잡아서라도 끌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같이 제도화시켜서,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을 갖추어 조직체를 형성하여 움직이게 되면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한 역사라는 것은 그런 것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앉아 있는 사람을 거꾸로 세워 놓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점잖은 어르신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못난 사람 취급해서 때려잡아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제도화된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의 기준에서 보게 될 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자기들이 이해하고 자기들이 환영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늘나라와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책망해야 할 때 도 있고, 때로는 어린 청소년들을 붙잡아서 기합을 줘야 할 때도 있는 것 입니다. 알겠습니까?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여러분, 무척 덥지요? 선생님도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앉아 있는 여러분보다 더 힘듭니다.
선생님이 가야 할 곳이 또 있지만 여러분들이 꼭 붙들고 못 가게 하는 입장이고,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오라고 했으니 이야기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조는 사람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 와서는 얌전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다 들어야 합니다.
또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마구 조일 때도 있습니다. 꾸중을 하게 되면 선생님은 아주 심하게 할 것입니다, 정이 뚝 떨어지게끔. 그렇더라도 양해하세요?「예.」사실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해야 하는데…. 말이 참 좋긴 좋아요. 한마디 척 해 놓으면 모두 가만히 있고, 내가 칭찬해 주면 가만히 있고, 싫은 소리 한마디하면 이상한 징조가 벌어지거든. 반대할 징조 아니면 정신차리는 징조,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이 전체를 움직이려면 반대자도 있어야 되고, 정신 차리게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농담도 하고 꾸지람도 해야 여러분의 졸음이 다 도망갑니다. 대중을 지도하려면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바짝 긴장을 해서 눈이 삼각형이 되었어요. 동양에서 온 젊은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고 아주 심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런 때는 심각한 이야기를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때에는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여러분들, 모두 노래를 좋아하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노래를 좋아하니 여러분이 하나 해 주기를 바랍니다. 노래 하나 해 줄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식구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다음엔 모두 노래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키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내가 노래 하나 할까요?’ 하고 물으니 모두들 좋아했습니 다. 그렇게 한번 쓱 해 놓으면 그만큼 좋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사정과 격식을 차려서 친구로 사귀려면 10년은 걸려야 10년지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나서 대뜸 허물없이 ‘야 이 자식아! 왜 이래?’ 하고, 이마를 맞대고 주먹질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 금방 친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쁜 생활에 언제 사정 따라 인사를 하고 격식을 차리겠습니까?
대중을 모아 놓고 이야기할 때에도, 점잖게 ‘여러분이 본래는 선한 사람 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에, 악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악한 사람은 싫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욕을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기성 교회식입니다. 언제 그러겠습니까? 통일교회식은 직격탄입니다. 통일탄입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선생님이 칠판에 오늘의 말씀 제목을 쓰겠는데 내리 쓸까요, 옆으로 쓸까요? 내리 쓰는 것은 하늘의 운세가 내려오기 때문에 내리 쓰는 것이요, 옆으로 쓰는 것은 통일교회는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 건너가야 되겠으니 그렇게 쓴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통일교회는 탕감교회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은 탕감이란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여러분도 싫지요?「예.」그러면 여러분은 왜 여기에 앉아 있습니까? 할 수 없이 나와 앉아 있지요? 그렇지만 할 수 없어요. 탕감을 해야 하니…. 통일교회는 탕감교회입니다.
노래는 하나님과 합하는 근본 재료
그렇게 알고 선생님이 노래 한번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같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선생님 혼자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30퍼센트, 40퍼센트, 50퍼센트가 넘는 것 같습니다. 어디 선생님 혼자 한번 해 볼까요?「예.」그러면 선생님은 아기의 언니 입장이고, 여러분은 아기의 동생 입장이라면 노래하겠습니다. 어른의 마음을 다 벗어 놓고 하겠습니다. 좋아요?「예.」무슨 노래를 할까요? 여러분이 제목을 정하세요.
’빛나는 대한’ 하나 할까요?
딩동댕동 보슬비는 단비를 주고
철썩처얼썩 치는 파도 집터를 닦네
둥실둥실 밝은 달은 길을 밝히고
송이송이 눈송이는 힘을 주누나(이하 다 같이)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구풀구풀 힘찬 산맥 충신을 낳고
굽이굽이 시냇물은 열녀를 낳네
산의 나무 다듬어서 집을 짓고요
들의 곡식 거두어서 진지 짓누나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여러분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구풀구풀’ 할 때에는 진짜로 온 몸이 구풀 구풀하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충신을 낳고!」 굽이굽이 시냇물은 무엇을 한다고요?「열녀를 낳고!」그 다음에 무엇을 한 다고요?「산의 나무 다듬어서!」산의 나무 다듬어서 집을 짓고 난 다음 신랑 신부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지고…. 그런 거예요. 알겠지요? (2절 다 시 부름) 요전에 선생님이 미국 갔을 때 미국의 부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데 ‘아름다운 강산이라’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룬다룬 강산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룬다룬’ 하지 말고 정신 차려서 불러야 합니다.
(또다시 2절 부름)
그러면 3절을 불러 봅시다.
억천만년 길이길이 살아지이다
자자손손 널리널리 퍼져지이다
손에 손에 괭이 들고 이 땅을 파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힘있게 살자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2절과 3절을 반복해서 부름)
노래는 하나님과 화합하는 근본 재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할 때 는 도취되는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선생님이 ‘애향가’를 하나 더 부르겠습니다.
조상들이 터를 닦은 이 좋은 산수
개척하자 한데 뭉쳐 지와 성으로
새역사의 깃발도 우릴 부른다
이 생명에 불을 달려 밝게 타보자
아름다운 산과 바다야 정든 고향아
하나님이 가려 주신 만세의 낙토
우리 모두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야지요?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 본 참다운 고향은 아직까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기준
여러분들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옛날에 살았던 고향 땅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있고 백성이 있고 국토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향에는 부모와 친척과 잊을 수 없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자랐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국가면 국가, 혹은 고향이면 고향을 중심 삼고 느끼는 그 기준만큼 어느 한때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느껴 보셨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 아직까지 그런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그러한 한 날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후손들이 슬픔의 역사 과정을 엮어 나왔고, 슬픈 환경에서 지금까지 자기의 생애를 지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의 고향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 기준만큼 사랑할 수 있고, 또 당신의 주권을 세워 가지고 이 세계를 치리하실 수 있는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 복귀란 말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복귀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복귀해야 될 것이냐? 나 개인부터 복귀해야 됩니다. 나 개인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나 개인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되기를 소망하는 그런 기준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겠다는…. 내 개인이 복귀 되어야 하고, 내 가정이 복귀되어야 하고, 내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온 천주가 복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개인에서부터 천주사적인 모든 복귀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으나 나쁘나 가야 할 복귀의 운명 길에 서 있는데, 이 운명길을 밟고 넘어서서 해방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모든 가정과 모든 민족과 천주 앞에 세워서 ‘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승리적인 한 날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소망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가야 됩니다.
그러면 복귀하는 데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 기준은 여 러분이 좋다 하는 기준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가 좋다 하는 기준도 아닙니다. 혹은 과거에 왔다 갔던 성인 현철들이 제시해 놓은 어떤 인격적인 기준도 아닌 것입니다. 그 기준은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 세워진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워진 기준입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의 동기도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야 했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이 인류역사의 동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을 품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본연의 기준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본연의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는 자리에 있어서 타락하지 않았으면 참부모가 되어 참자녀를 낳아 참다운 가정을 형성하고, 참다운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참다운 천주의 기준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타락한 인간세계에서는 그 기준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인에서부터 본연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기준을 복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타락한 인류를 부여안고 ‘복귀’라는 명사를 중심삼아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세계를 먼저 찾고 싶고, 나보다도 가정을 먼저 찾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기준 앞에 부합될 수 있는 보다 큰 절대적인 기준이 나오기를 무엇보다도 더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기준을 어디서부터 이루어 나갈 것이냐 할 때에, 큰 자리 에서부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자리에 서서 천주를 주관하고, 천지의 인연을 세워 가지고 인류와 천주를 사랑하시는 것이 본래의 창조목적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큰 자리를 내버리고 지극히 작은 자리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을 다시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복귀해야 하느냐 하면 맨 밑창에서부터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중간에서부터 복귀해 나온다면 그 밑 부분이 남아지기 때문에 맨 밑창부터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도 이러한 일면에서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밑창은 어떤 곳이냐? 역사를 가만히 들춰 보면 역사 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는 반드시 기울어져 가는 한 시대의 문화와 접하는 곳에서 발생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문화권의 중심지는 새 시대의 중심이 못 됩니다. 옛날의 문화권에 상극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하려고 대립하던 경계선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되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끝날이 되면 될수록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역사적인 종말시대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이 세상이 그냥 그대로 있어야 된다는 것은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맨 밑창에서부터 이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상과 뜻을 가지고 치리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고는 사탄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완전히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계를 복귀하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기준, 본연의 기준을 중심삼고 시작해서는 안되고 맨 밑창에서부터 시작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이념이 아니고 이 세계를 위한 이념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끝날을 중심삼은 새 시대의 이념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재림하는 그 날에는 지상에 천국이 벌어진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중심삼고 2천년 동안 기독교를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념을 초창기에는 가르쳐 주었지만, 과정에서는 탕감이라는 법도를 세워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탕감교회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탕감교회!
탕감의 기준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느냐? 여러분 개인보다도 가정을 원하십니다. 가정보다도 종족을 원하시고, 종족보다도 민족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민족보다는 국가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국사는 누구를 위주로 해서 기록합니까? 대개 주권자를 위주로 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의 역사를 논위(論謂)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역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논위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주권자의 역사는 국가 기준에서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권자의 역사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천운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타락한 세계일망정 그 나라의 주권자를 중심삼아 움직인 것이 역사의 주류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고생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이 나라를 세계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주권국가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 나라보다 무엇을 원하시느냐? 세계입니다. 그 나라를 찾아 세우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겠지만 탕감복귀라는 것은 개별적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데는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개체적으로 탕감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의 대표로 보내진 사람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책임진 대표자들인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그 시대에서는 그들이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래서 노아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나가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아브라함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해서는 탕감의 법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가 민족적인 탕감의 사명자로 왔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을 당하더 라도 그들이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망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유대 백성이 전부 일치 단결하여 예수님주의에 화할 수 있는 기준에 서고, 불평불만이 없는 절대 순종하는 자리로 나갔더라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낸 책임자들은 어떠한 입장에 섰느냐 할 때에 그들은 그 시대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개인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가정을 찾기 위해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세우시는 것도 그 개체를 완성시킴과 동시에 가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개체에 대한 탕감과 가정에 대한 탕감, 이중 적인 탕감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탕감을 받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탕감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이렇게 우 리에게는 이중적인 탕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십자가를 지우느냐
그런데 누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우느냐 할 때 내 개체에 있어서는 내 몸뚱이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운다는 것입니다. ‘야, 하나님이고 뭐고 그 뜻이 언제 이루어진단 말이냐? 죽은 뒤에 천당이고 지옥이고 가는 건데고 생할 게 뭐냐?’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나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일 가까운 집안 식구가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탕감 할 수 있는 분량만큼 들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통일교인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승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 너는 승리한 자격자다.’라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승리한 개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환경적인 터전을 먼저 닦아야 됩니다.
창조 과정을 볼 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에야 사람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개인적인 십자가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십자가까지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섭리의 중심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를 합해서 지지 않고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핍박을 받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한꺼번에 탕감하게 된다면 가정 완성을 위한 길을 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닦아지는 것이요, 내 개체는 완성의 기준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4천년의 역사적인 탕감복귀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4천년의 역사적인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여 하나님의 완성한 아들로서 오신 그가 핍박을 받아야 되었느냐? 그 개체가 미비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니요, 미완성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적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랑 신부라는 상대적인 이념을 남기고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 입니다. 즉 완전히 탕감조건이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탕감해 주어야 하느냐? 이 땅에 있는 신부가 대신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즉 오신 신랑을 추방해 버린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신부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인 탕감을 재차 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계사적인 책임자로 오셨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복귀의 노정을 완결지을 때까지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은 개인적인 십자가로 부터 가정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 그리고 세계적인 십자가를 개척 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양면적인 십자가를 붙들고 몸부림쳐야 된다는 것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하나의 민족을 중심삼고, 한 나라를 중심삼고 뜻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키우기 위해 그를 추방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 나라를 위해서 세움받은 사람을 그 나라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에게 그 나라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보다도 세계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작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지게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세계를 하루빨리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민족은 세계로 흩어져서 탕감 제물의 역사를 엮어 내려왔기 때문에 유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세우시는 뜻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이 자기의 속죄를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제물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 물로 바쳐지려면 피를 보아야 합니다.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찌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 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그 탕감을 완성하는 날에는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대신해 탕감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의 수많은 민족에게 복을 나눠 주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방으로 추방해서 탕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개인복귀노정을 더듬어 오고, 가정복귀노정을 세계적으로 준비해 나오고, 혹은 민족적인 복귀노정, 국가적인 복귀노정,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더듬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자 하나님은 세계적인 시련 무대에 내세워 탕감시켰습니다. 그 시련의 역사가 다 끝나고 주님 이 다시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십자가의 노정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8년을 중심삼고 이스라엘이 독립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새로운 섭리시대가 지구상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시작되었 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십자가를 진 것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친척 전부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또 그 씨족이면 씨족, 종족이면 종족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나라 그 민족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종적으로 흘러온 6천년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는 역사(役事)를 대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책임진 선생님이면 선생님이 탕감 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개인을 대하는 것은 개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배후의 가정을 소망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완전히 뜻 앞에 서서 불변의 자체가 된 후에는 가정적으로 책임지워서 중심사명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운행하는 방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개체로서 하나님 앞에 탕감복귀의 조건 을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가정적인 십자가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자 기의 개인적인 십자가도 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다음은 친척, 교회, 종족, 나라 전체로부터 반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인들이 개인적인 핍박은 물론이요, 가정적, 친척적, 교회적, 국가적으로 핍박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통일교회에 대해 전부가 핍박했다는 것은 일시에 개인 완성, 가정 완성, 종족 완성, 민족 완성, 국가 완성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터전을 지금까지 준비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적 외적 승리의 기준을 결정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도를 중심삼고 내적 승리의 기준을 결정해 나온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을 탕감복귀하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을 7년 동안에 모아서 밀고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각 시대의 사명자가 승리하면
시대적으로 보면 모세 시대는 민족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민족 앞에 서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까지 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5단계의 책임을 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었는가? 그것은 모세가 중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는 개인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가정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종족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민족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국가적인 완성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전체 사탄 편을 대표한 사탄과 대결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개인을 위주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사적 천주사적으로, 전인류를 대표해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모세 한 개체의 승리가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적인 승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과 국가까지 반대한 가운데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에 민족적인 승리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민족이 언제 개인적인 시대, 가정적인 시대, 종족적인 시대, 민족적인 시대에 동참했습니까? 동참하지 않았지만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선 모세를 그들이 완전히 믿고 접붙임을 받기만 하면 같이 혜택권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40년 탕감조건을 4일 만에 탕감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천년 묵은 소나무와 일년 묵은 소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천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키가 크고 무성하게 가지가 뻗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가지가 약하고 잎이 몇 개 안 됩니다. 그러나 일년 묵은 것도 소나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 다. 자라는 환경에 있어서 같은 태양, 같은 공기, 같은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자랄 수 있는 같은 시대의 소나무과에 속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 왜 그렇게 시대적인 사명자들을 많이 세웠느냐? 그것은 단계적으로 넓혀 나오기 위해서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이렇게 단계적으로 넓혀 나가야 하니만큼 그 시대에 있어서 사명자가 승리하면 그를 중심삼고 따르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혹은 가정적인 단계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인 아벨의 기준을 완결시켜서 탕감복귀시킬 수 있는 표준적 중심존재로 지금까지 그러한 섭리의 지도자들을 세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계복귀의 사명을 갖고 오셨었는데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영적 가나안 복귀를 이루고 가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완전히 믿으면, 지금까지는 사탄권 내에 있었더라도 예수님을 완전히 믿으면 그때부터 세계 적인 영적 이스라엘권 내로 타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역사노정을 두고 수많은 선조들이 다리 놓아 온 공적의 터전을 밟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 느냐? 탕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큰 것을 위하라
이제 선생님의 관심의 대상이 한국만으로 국한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기도를 해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한국을 위해서는 3분의 2만큼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서는 3분의 1을 기도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한국을 위해서는 3분의 1만큼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서는 3분의 2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시련과 핍박의 십자가를 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국제정세라든가 공산당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한 관심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싸우고 영적으로 책임지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책임진 자가 가야 할 정식적인 방향은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향하는 길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그 기준을 중심삼고 가는 길에는 추호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적인 개인의 감정이 개재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두철미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그 기준에 맞춰 나가지 않고서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국가적인 사명에서부터 세계적인 사명으로 넘어가야 할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지금 현 단계에서는 대한민국만을 중심삼은 활동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개국을 중심삼고 120개소에 성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때가 오기 전에 이에 앞서 우리는 세계 앞에 탕감 조건을 미리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실패가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내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세계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기준에서 통일교회 식구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그런 때는 아직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분이 먼저 나가서 시련과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을 중심삼고 사탄이 참소하기 전에 방비할 수 있는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또 개인복귀시대에 있어서 가정적인 십자가만 지는 것이 아니라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까지 첨부해서 지게 되면 개인복귀노정은 자연히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7년노정은 이러한 내용이 적용될 수 있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내 한 개체의 완성을 위해 걸은 탕감노정이 가정과 종족과 민족적인 탕감 기준에까지 연결되는 특혜를 입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 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때가 다 되고 핍박이 다 지나 간 후에는, 즉 국가적인 기준에 서면 공로를 세울 수 없습니다. 따라가는 백성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통일교회보다 세계 교회를 원하고 세계 인류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땅만이 아니라 하늘의 수많은 영계와 앞으로 올 후손 들까지 찾아 세우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은 영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함부로 했다가는 복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민족적인 기준에 섰다는 것을 안다면 종족적인 기준까지 영인들에게 기도해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민족적인 기준에 서 있는데 영인들에게 국가적인 축복을 해 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축복기도를 못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급에 있는가를 알기 전에는 함부로 축복기도를 못 해 줍니다.
고생과 탕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영계를 접해 보면 기도 제목이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을 통계를 내 보면 기도의 방법과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맨 처음에 기도할 때에 세계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고 하면 꽝 하고 나가자빠집니다. 처음에는 제일 가까운 사람, 즉 부모와 사랑하는 아들딸과 남편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지나가서 발전하게 되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자기 가족을 위해 하지 않고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 것과 앞으로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자리가 어떤 자리일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그 자리에서 탕감노정을 개척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1호 충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았는데 자기가 실체적으로 행동해서 실적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대해 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 사람들이 몽땅 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감옥에 끌려 가더라도 그 감옥의 제일 밑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노정이기 때문에 탕감해야 할 것이 백이라면 그 이상, 즉 천 만의 심정 기준을 하나님 앞에 세워 가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지방에 나가 전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생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쿠, 그 부락을 위해 내가 전도를 했는데 그 부락이 전부 다 반대하고 한 사람도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낙심하는데 천만에!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듣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탕감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지리 고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보내 주어도 고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식도 있고 외모도 좋고 안팎으로 갖추어져 있어서, 어떤 자리에 가든지 대표자가 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지지리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은 개인은 통일교회와 인연되었지만, 그 에게는 아직까지 완전히 중심과 접할 수 있는 자리에 못 들어온 선조가 있 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선조의 탕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조 들의 탕감을 하고 나서야 자기가 탕감되는 것이 복귀역사의 원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지 않고 세상 사람만 욕하면 안 되는 것입 니다. 그럴 때에는 선조의 죄를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하늘에 속한 신앙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 선조들이 정성들인 기준 이상으로 자신이 선조들의 잘못을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역사적인 공인을 받은 자리에 서서 자기의 탕감을 받아야만 비로소 개인복귀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아집니다.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에 대한 탕감의 조건을 빨리 세워 놓아야 개인완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도 모든 원소들을 지어 놓고 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야 정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바탕이 정상적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죄와 자기가 지은 죄를 솔직히 전부 회개해야만 됩니다. 그러한 기간이 얼마나 걸리든지간에 탕감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축복을 받고서도 지지리 고생하는 것입니다. 탕감의 고개는 어차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과거의 선조들의 죄와 현재의 나의 죄까지 탕감하고서야 자기 시대를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가정의 전통과 생활이 올발라야만 원만하게 사회에 인격자로서 나설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나 하나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탕감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자꾸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에 돌아갈 때는 맨 첫번에 출발하던 기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기준보다 점점 낮아지는 것입니다.
서울 교회를 분산시킨 뜻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통일교회의 뜻은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점점 세계적으로 펼쳐 나아가는데,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심정적으로 옛날에 내가 왜 그랬던가, 옛날 기성교회에 다니던 것이 차라리 좋았구나 하고 멍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운을 차릴래야 차릴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없어집니다. 누가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해도 감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하면 힘이 나고, 배고픈 줄 모르고 항상 새로운 것 입니다. 사춘기의 청춘 남녀처럼 자기가 지은 시의 내용이 좋든 나쁘든 자기 마음에는 어떤 세계적인 시인이 쓴 것보다도 더 고차적인 시같이 느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서울 교회를 제1교회, 제2교회, 제3교회로 나눈 것도 섭리적으로 볼 때 어떠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만 이렇게 있으면 있을수록 국가적인 문제, 세계적인 문제를 책임지고 뛰쳐 나갈 수 있는 기백이 없어지니 할 수 없이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발전하면 앞으로는 가정적으로 다시 나눌 것입 니다.
본부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가정적으로 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단체 활동에 있어서 통일교회의 이름으로 나갈래야 나갈 수 없는 개인적인 입장으로 내려갑니다. 그랬다가 다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리고 뜻을 대하여 앞에 서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제는 국가적으로 넘어갈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보다도 일본에서 활동이 더 잘 됩니다. 하나님은 한국에 복을 주려고 했지만 한국이 복을 못 받게 될 때는 그 복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한 가정에 있어서 남편이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내를 세우고, 아내가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복귀 섭리에 있어서도 부모가 책임을 못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중심삼고 부모를 찾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아내에게 소망을 두고, 그 아내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그 자식도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섭리적으로 볼 때 한국을 중심삼고 움직였던 은사가 물론 한국에서도 그 열매가 맺힐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일본에서 더 빨리 맺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빨리 교류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12명 이상의 간부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교류해서 같은 은사의 권내에서 지낼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본 식구들에게 외국에 갈 수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니 3분의 2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 식구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그들이 선두에 섰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이대로 나가다가는 꼼짝없이 일본에게 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작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들이 7년노정에서 책임 못 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는 선생님이 축복가정들을 본부에 못 오게 하고, 역사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하지 말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선민으로 태어나 가지고 탕감조건을 세워 나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선생님은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할 것입니 다. 한국 식구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과정에 처해 있는데 지금까지 책임하지 못했던 것을 연결시키고 충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이라도 있어야 다시 수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축복받고 책임을 못 한 사람보다도 이제 들어온 사람을 하나님은 더 가까이 대해 주려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탕감교회로서 탕감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은 때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지금은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적인 시대로 넘어가는 때인데 나 자신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여러분은 여기서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자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대신 고생하는 자리에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선생님도 이 길, 복귀 노정을 걸어갈 때, 탕감복귀의 원칙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께 고생할 자리가 있으면 나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통일교회를 책임지려고 해 보았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지 자기 스스로 잘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급박한 때입니다. 한국보다도 세계를 일시에 복귀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많은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희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할 것이냐? 여러분의 조상을 통해서 할 것이냐, 후손을 통해서 할 것이냐?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을 통해서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5, 6년쯤 걸어와 보고는 다 지쳐 자빠졌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지치는 법을 선생님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이 지치는 방법을 스스로 유도해 왔고 또한 사탄의 공략전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사정없이 고생의 자리로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민족복귀의 기준과 국가복귀의 기준까지 세워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념적으로 공산세계와 대결해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 4배가운동입니다.
전진이냐 후퇴냐
여러분은 탕감복귀노정을 기필코 가야 됩니다. 안 가면 안 됩니다. 안 가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참소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영화 ‘영광의 탈출’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할 민족이 저렇게 처참하게 된 것은 옛날 이스라엘 족장들이 책임 못 한 천륜의 죄가 아직까지 탕감되지 못하고 남아서 저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때, 지금의 통일교회가 맡겨진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후대에 또다시 저와 같은 짐을 넘겨 주겠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시대에 책임져야 할 문제를 여러분이 달성하지 못 할 때에는 그것이 후손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은 전체적인 책임은 못 하여도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은 절대적 으로 하고 넘어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으로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내 자신이 지금 어떤 입 장에서 무슨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민족복귀․국가복 귀․세계복귀를 해야 할 때이므로 하늘은 어떤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시느 냐 하면, 민족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고, 세계를 구 하려는 선봉장들이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누가 세계복귀를 책임지겠습니 까? 여러분이 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개인탕감복귀에 대해서도 등한히 하는 입장에 있고, 가정, 종족의 탕감복귀에 대해서도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민족, 국가적인 탕감복귀를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전후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현재의 입장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것을 하겠다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는 절대로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나깨나 어디를 가나 그러한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볼 때에도 그런 관점에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데 있어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주면 주었지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앞으로 책임자들은 자기가 지고 있는 책임에 대해 심정적인 조건이라도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도 희미해져 갑니다. 심지어 선생님은 선생님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귀시대의 인연을 중심삼고 동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길은 둘밖에 없습니다. 전진이냐, 후퇴냐? 여러분들은 통일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앞으로 나갈 것이냐, 가만히 있을 것이냐, 아니면 후퇴할 것이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있으면 떨어지게 됩니다. 섭리는 민족적인 시대에서 세계적인 시대로 자꾸 발전하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가만 있을 때보다 더 열성을 내야 하는데 그 열성이 옛날보다도 못하게 되면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탕감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두고 볼 때 아벨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이지 가인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세계적인 탕감복귀를 해 나가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야 됩니다. 일편단심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가더라도 길을 가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목표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이러한 사명을 놓고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그 생각을 해야 하며, 잠도 그 목적을 위해서 자야 됩니다. 오고 가는 전부, 생각하는 전부, 느끼는 감정 전부가 그 목적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 속 에서 전후를 거꾸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관계와 탕감
복귀노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중심삼고는 절대로 탕감복귀가 안 됩니다. 거기에는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복귀라는 것은 무엇이냐? 아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도 어떠한 입장의 아벨이 되어야 하느냐? 개인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가정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종족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혹은 민족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국가, 세계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해 보았습니까? 30억 인류를 위해서 여러분의 자식들이 죽어 간다는 그런 심각한 심정으로 기도해 보았습니까?
세상에 어떠한 비참한 일이 있으면 비참함을 당하는 당사자 이상의 비참한 심정을 가져 보았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 인류를 생각하는 그런 생활을 해 보았으며,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져 보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막연하고 관념적입니다. 막연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탕감복귀를 할 수 없습니다. 전후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구해야 되고,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구해야 되 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나라를 구해야 되고, 나라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 해야 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철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구하고, 종족을 구하고, 민족을 구하고, 국가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였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는 기준에 선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의 대표자로, 온 인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그분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심정적인 터를 닦았고, 탕감적인 운명의 노정을 뒷받침하고 혹은 수습하기에 몸부림쳤느냐 하는 것을 생각 하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뜻을 위해서 각오를 했으면 가정을 위해서, 혹은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을 입 장에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갈 길은 뚜렷해야 합니다.
전진하는 복귀섭리에 있어서, 종적인 탕감조건과 횡적인 탕감조건의 두 가지 탕감조건을 중심삼고 전후․좌우․상하관계를 어떠한 방법으로 처리 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당면 문제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공부하는 이상으로 이 민족을 사랑했느냐? 남편은 부인 이상, 부인은 남편 이상 나라를 더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느냐?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고, 내 개인을 생각하는 것 보다 세계를 더 사랑했느냐? 전부 다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전부 다 보게 되면 자기 중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탕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직까지 개인의 자리를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사적인 탕감을 짊어지고 계신데, 그 길을 다 가 가지고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전에는 개인적인 자리로 영원히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2천년 동안 탕감노정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 그 탕감노정을 걷는 책임을 다해 가지고 안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의 인간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또다시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의 기준에 합격한 통일교인이 얼마나 되겠느냐
여러분들은 지금 개인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고, 가정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뭉그러 앉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뜻의 방향과 심정이 일치되고, 뜻을 중심삼고 온갖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서 그 환경을 주관하고, 사회적 십자가 혹은 민족적, 국가적인 십자가를 응당히 받아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넘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준에 합격한 통일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들은 가정을 갖고 살더라도 자기 가정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이 민족, 이 국가, 세계 인류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서 자기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충성을 다하고 나서야 자기 가정을 위해 정성을 다해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탕감복귀노정을 걸어가는 탕감복귀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그런 기준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선생님은 영계에 있는 여러분의 선조들을 동원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을 동원해 가지고 탕감 길을 가는 여러분을 협조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뜻에 대해서 변치 않고 가겠다는 식구들이 많으면 그런 식구들에 의해 어느 한때 불상사가 많이 일어나리라고 봅니다.
앞으로 자기를 중심삼고 탕감하려고 해도 자기 개체를 중심삼고 탕감하지 않고 가족을 중심삼고, 종족을 중심삼고, 김 씨면 김씨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탕감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 몇몇 사람이 책 임하겠다고 기도하게 되면 종족적으로 탕감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 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선조들이 재림해서 협조하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이 빨리 복귀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후손들을 때리고 희생시키는 이런 일이 벌 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개인적인 책임을 못 하는 통일교회 교인들 에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 일이 안 벌어지는가. 원칙 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고생하는 조건만 세우게 되면 벗어나게 되는 것입 니다. 세계복귀가 완결될 때까지는 탕감의 짐을 벗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이 돌아오려고 하면 그 복을 사탄세계에 가서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 복귀되는 것입 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세계는 자꾸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방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시는데, 인간들이 고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손해 보면 싫다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이 올수록 여러분들을 무참히 고생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관점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에 동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조건을 세우는데 고생은 불가피 한 것입니다. 괜찮습니까?
세상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해야
앞으로 이 7년노정이 끝나면 선생님은 해방됩니다. 선생님이 뜻을 위하여 출발한지 만 21년이 됩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도 만 21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금년부터 명년까지 뜻적으로 볼 때에 사탄세계와 대등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앞으로 이념적인 면에서 통일교회가 앞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권이 어떻게 바뀌든간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선생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고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의 자리를 세계적인 제단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지만 단순히 가정에만 머물러 있는 부인이 아니며, 직장에 있지만 단순히 직장에만 머물러 있는 남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직장을 대신한 하나님의 용사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직장에서 처음에는 모두가 여러분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나중에는 그들을 전부 굴복시켜야 되고 칭찬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터전을 닦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먹어도 자기 혼자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먹어도 민족을 앞에 놓고 먹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같이 먹는다고 해야 합니다. 가인의 걸음과 아벨의 걸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의 관계는 몸을 중심삼고 먼저 들어왔으면 다 아벨인 줄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양심에 물어 보면 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뜻에 접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나에게 가까운 것을 멀리하고, 먼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세계에 보내어 세계를 구하면 이것이 세계적인 탕감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전도를 할 때에도 먼저 제일 가까운 가족을 중심하고 전도하려 하지 않고 제일 먼 사람부터 전도하려 했습니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책임을 하면 그 사람들을 내세워서 먼데의 사람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후 기독교는 이방 사람들을 중심삼아 복귀의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처하고 있는 그 자리가 개인적인 자리라 할지라도 지금은, 이 시대의 운세는 민족복귀의 기준을 넘어서는 때이니만큼, 여러분의 일체의 생각은 삼천만 민족에게 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삼천만 민족과 만날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바라보시는 기준만큼 있는 정성을 다해서 이 민족을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회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자신의 친부모, 친형제, 친자식을 대하는 기준 이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마음이 진정으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때에는 자신의 부모나 자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마음으로 선생님과 관계를 맺고 선생님과 끈을 묶어 끈에 달려 넘어가야 합니다. 앞서 나가는 선생님의 기준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수고를 한다고 해도 탕감 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직고하라고 하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선생님은 모든 것의 선후를 가려서 먼저 것은 하나님 앞에 돌리고 나중 것은 나에게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사탄세계의 사람들과 신앙적으로 인연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자기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먼저 사랑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더라도 그 모든 사람이 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식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을 보게 되면 자기 부모같이 생각하고, 그들에게 불쌍한 일이 있으면 그들을 붙들고 같이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이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결부시켜 생각하라
얼마 전 신문에 일가족 자살 사건에 관해서 보도가 됐는데 그러한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기를 낳아 키워 본 사람들은 더욱 실감 있게 생각했겠지만, 사랑하는 자식들이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파서 밥을 달라고 할 때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자살 했을 것입니다. 복귀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이 그러한 안타까운 부모의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또한 하나님도 이러한 딱한 입장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며,
복귀노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자리에 나가는 것을 보고 도 손을 못 대고 참고 나가야 하는, 이러한 억울한 입장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러한 딱한 일이 있거든 혼자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결부시켜서 생각하십시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 노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눈물로 기도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서라도 그 일을 매듭짓고 넘어가야 됩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그 일과 더불어 인연맺고 넘어가서 탕감의 조건으로 세워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 앞에 탕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쌓아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빚진 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요즈음 우리 공장에 자주 가는데, 어떤 때는 날씨가 덥고 피곤 하여 거기에서 한 30분 잡니다. 그러면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 보기에 죄인 같고 불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피곤해도 공장에서 자지 않습니다.
내가 이와 같은 마음의 각오가 없으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을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것이 끊어지면 통일교회는 발전을 못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지방의 각 집회소를 중심삼고 전도를 하고 있는데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저 사람들이 오늘 저녁 죽으면 어떻게 하나! 지옥에 갈 것인데….’ 이런 마음이 듭니까? 저들이 여러분의 형님이고 여러분의 아들 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안타까움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홍제동 화장터에 한번 가 보세요. 사람이 얼마나 허무한가! 여러분들도 머지않아 다 죽을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걸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만민들인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가다가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한때 밥을 못 먹고 통곡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때가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여기 있는 여러분들을 키워 나올 때도 밤을 새워 가면서 이끌어 나왔지요? 그것은 만약 오늘 저녁에 이 사람들이 죽게 되면 선생님이 할 말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정성을 다 들인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한국 백성 앞에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전통적인 계대(繼代)를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기도 안 해도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심정적으로 얽어매어 가지고 시대적인 운세를 여러분의 눈물과 더불어 맺고 넘어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탕감복귀가 안 된다는 것을 확실 히 알아야 합니다.
탕감은 실천을 통해서
이번에 축복받은 노인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이 다녀간 모양인 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만히 생각하니까 처량했던 모양입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국수 한 그릇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생 각났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습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곳에 다녀와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선생님도 머지않아 영계에 갈 것인데 그때는 어떠할 것인가?
현재 살아 있을 때에는 모실 수 있지만 자기들이 책임을 못 하고 영원히 작별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입장에 서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소원을 중심삼고 천번 만번 권고할 때,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저나라에 가서 꼼짝할 수 없이 꽁꽁 얽어매여서 갈래야 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은 들었고, 그것이 마음에 짐이 되고 있고, 뜻대로 행동은 못 했고…. 그렇다고 그러한 말들이 해방해 주겠습니까? 탕감이라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있지만 반면에 제일 무서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일날도 보면 늦게 와 가지고 맨 뒤에 가서 앉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탕감교회요, 통일교회 교인은 탕감하는 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서 탕감할 것인지, 결정해 놓은 것이 있는지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가정을 대표해서, 혹은 종족을 대표해서 자신이 책임을 다하여 탕감 완성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생님에게 접붙여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할 말은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말을 다 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탕감복귀는 모두 털어놓고 넘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가정의 비밀 이상, 종족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종족의 비밀 이상, 민족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민족의 비밀 이상, 국가를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국가의 비밀 이상, 세계를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세계의 비밀 이상의 것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선생님과 하나님과의 사이도 그런 입장에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생님이니 여러분에게 하지 않은 말도 많이 가지고 있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할 일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됩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더라도 청파동이 그립고, 생각만 해도 몸부림칠 만큼 그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면서 이 담벽과 전봇대를 바라보고 눈물짓던 그런 인상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뜻’ 하게 될 때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가슴이 저미어 오는 느낌뿐입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선생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길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당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 들도 이런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등에 얼마만큼 무거운 민족과 세계의 탕감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느냐?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한 것이냐, 민족을 위한 것이냐? 여러분의 마음에 자문자답해 보 면 잘 알 것입니다. 감독자가 필요 없고, 스승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곧 감독자요, 스승입니다.
중심을 향해서 나아가야
선생님이 공장에 가서 일하는 청년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 기준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 하나의 물건을 만들 때는 눈물 어린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이 물건이 어찌하여 수많은 공장 가운데 통일교회의 공장에 들어왔느냐? 어찌하여 내 손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 앞에 소요될 수 있게 되었고, 경제적인 터전을 닦는 데 협조할 수 있게 되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 정성 어린 심정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요즈음 공장에 자주 다니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다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공장에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은 바쁘신데 무엇 하러 매일같이 공장에 나오시나? 매일같이 안 오셔도 될 텐데.’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 니다. 어제 저녁에 본 것과 오늘 아침에 보는 것이 별 차이가 없겠지만, 어제보다도 오늘에 발전한 것이 있으면 그 차이에 감흥을 느끼는 것입니다. 같은 기계를 만들더라도 어제보다 얼마나 잘 됐나 봐 가지고 조금이라도 발전한 것이 있으면 신나거든. 이것은 우리의 깃대를 꽂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준까지는 선생님이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나아갈 때 우리가 계획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잘리 든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든지 해서라도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협조 여하에 따라서 길이 열리거나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의 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모험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를 중심삼고 어떠한 탕감을 해 주십시오.’라고 해야만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하나님이 드리라 해서 제물을 드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진해서 또 제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하나님께서 제 물을 드리라 해서 드리는 것은 탕감하기 위한 제물이지만 자기가 자진해서 드리는 제물은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자신이 민족적인 책임을 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삼천리 반도를 돌아다니며 눈물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 나라, 이 민족이 얼 마나 아버지 앞에 가까운 자리, 사랑받는 자리에 있는가! 이 나라, 이 민족이 기뻐하면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날은 아직까지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만을 중심삼아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거쳐와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각자가 탕감의 짐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전도를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장에서라도 기도하라구요. 물론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삼천 만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갖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분발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을 그런 입장에 빨리 내모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킬수록 여러분은 중심 앞에 가까워진다는 320 통일교회는 탕감교회다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언제나 이 중심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 도> 뜻을 향하여 가는 날들이 아버지의 영광의 날이 되옵기를 저희 들이 마음으로 무척 바랐지만, 이 해에도 그런 날들이 많지 못한 채 수많은 날들을 보내고 나니 서러운 마음이 앞서 아버지 앞에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을 이해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이 뜻하신 길을 어차피 가야 할 것을 알고, 오늘도 내일도 가려는 마음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 리옵니다.
사방으로 헤어졌던 당신의 자녀들이 이 청파동 교회에 다시 모여서, 새로운 입장에서 다시 결의할 수 있는 이런 날을 부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아버지! 복귀노정의 역사 가운데는 얼마나 슬픈 일이 많았사옵니까?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쇠고랑에 얽매여 가지고 몰림을 받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역사노정에 왔던 우리의 선조들이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피땀으로써 쌓아 올린 이 제단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천만사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 앞에 눈물짓고 다시 과거의 부족함을 뉘우치게 되옵니다. 오늘 그러한 무책임한 자신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긍휼의 아버지이옵고 심정의 아버지인 연고로, 많은 실적을 가져 와서 자랑하는 자보다도 머리를 숙여 눈물 어린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감히 머리를 들어 바라볼 수 없는 서글픈 자신의 탄식의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라 부르는 자를 언제나 찾아 주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만을 간절히 바라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들의 심정도 자식을 채찍질하고 나서는 채찍질하기 전에 사랑하던 것 이상의 마음을 품고 그를 위하고 싶은 것이거늘, 하물며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 저희에게 책임지라고 명령하신 그 자리에서, 저희가 맞고 쫓김받을 때 위로하고 싶은 아버님의 심정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을 세워서 심정세계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고 싶으신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통일교회의 노정은 슬픈 노정이었사옵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아버지의 분부대로 따라 나오는 걸음이 얼마나 처량하였는가 하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말로써 위로하여도 그칠 수 없는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는 그런 노정이 었사오나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될 때인 것을 알았사옵고, 역사를 더듬으면서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 당신의 소원이 아닌 것을 알았사 옵니다.
그러기에 슬픈 역사를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그날이 와야만 될 것인 데 그런 날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슬픈 마음을 느끼게 되오며, 아버님도 역시 그러하실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황공하옵니다. 오늘 통일의 무리를 모아 놓고 이와 같은 제단을 움직일 때까지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사옵니까? 노는 자는 채찍질하여 권고하셨고, 조는 자는 깨워 주셔서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을 아옵니다.
지금도 그런 역경의 환경에서 저희들을 다짐하게 하시고, 저희들을 내몰아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서러움이 우주 사적인 탕감의 노정으로 남아 있음을 알고 있사옵고, 개인을 추스려서는 가정을, 가정을 추스려서는 종족을, 종족을 추스려서는 민족을, 민족을 추스려서는 국가를, 국가를 추스려서는 세계를 대신하여 가라고 명령하셔야 할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길에서 쓰라린 탕감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입장이 얼마나 딱하신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그 입장을 알고 있는 효자가 없기 때문에 명령할래야 명령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분부하실 그 목적을 향하여 명령 전에 스스로 준비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참다운 자녀가 이 자리에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삼천리 반도에 그런 아들딸이 있거든 당신의 사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붙들고 통곡의 심정을 다하여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방패를 세워서 그들을 조롱하던 원수를 갚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것보다도 당신의 자녀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옵길 원하옵고, 나의 요구보다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을, 아버지,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날이 어서 빨리 와야 되겠사옵니다. 지루한 장마가 며칠만 계속되어도 그것을 싫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늘, 6천년 복귀노정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참고 나오신 그런 지루한 자리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남아질 수 없는 우리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어서 그 지루한 탕감의 역사노정을 끝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온 저희들이 핍박의 빗발을 받으면서도 감사하고 폭풍우 앞에서도 그것들을 맞으면서 나 홀로 그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 칠 줄 아는 당신의 참다운 충효의 자녀가 많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오니, 그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이 수없이 배반한 그 자리에서도 외로운 길을 따라 나오는 소수의 무리와 함께 아버지를 위하여 울부짖던 그 시대가 회상될 때마다, 많은 무리를 모아 놓고도 아버지의 심정을 가까이 접할 수 없는 환경이 얼마나 서러운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회상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 옵소서 .
지난날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참다운 심정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렇지 못한 자유스런 환경이 저희들 앞에는 도리어 얼마나 불우한 입장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핍박보다도 내 스스로 내 몸을 치고, 내 스스로 환경적인 십자가에 부딪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하겠사옵니다.
이제 남아진 이 길은 탕감의 노정으로서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임을 스스로 자각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아버지! 수많은 역사의 노정을 얼마나 많이 참고 나오셨사옵니까! 이스라엘을 키우기 위하여 4천년의 역사를 더듬어 오신 아버지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으며, 수많은 민족 앞에 배반당하던 유대민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만들기 위하셨던 수고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종결지으려 하였사오나, 예수께서 몰림받고 또한 민족적인 터전 이 무너질 때 아버지의 슬픔과 서러움이 얼마나 크셨던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민족들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는 한 날이 왔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이 다시 아버지를 모셔 놓고 찬양드리며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제2의 건 국의 날이 와야 할 것을 저희는 아옵니다.
아버지, 이제 여기에 다시 그 한 날을 맞아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과정에 있어서 저희들이 뒷받침이 되고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철두철미 한 사상을 갖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비록 제한된 자리에 처해 있을망정 그 자리는 제한된 자리가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의 운명을 연결시켜서 하늘과 땅을 저울질하는 그런 초점의 자리에 자기 자신들이 서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가야 할 탕감의 노정, 복귀의 노정을 더 큰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나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시대의 운세가 커 감에 따라 지희들도 조급한 마음이 더하여서, 아버지 앞에 간절한 마음이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을 이와 같이 모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다시 만날 때에는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모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한 각지에 당신의 자녀들이 뜻을 중심삼고 싸우는 모든 전체의 일들 이 아버지께서 경륜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세계에 널리어 외로운 자리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자녀들이 많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바라는 소원을 어서 이루어 주시어서 당신의 해원성사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을 영광으로 받아 주시옵고, 새로운 각오로 탕감의 노정을 스스로 다짐하며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 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