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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장의 표준으로 만들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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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곤장
신장과 달리 곤장(棍杖)은 임란 이후 군율을 다스리는 용도로 애초에 사용되었다. 17세기에 신장은 군병 아문인 군영⋅진영⋅토포영 등과 경찰 기구인 포도청 등으로 사용처가 확대되면서 군율뿐 아니라 도적을 다스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흠휼전칙(欽恤典則)』에 곤장의 종류는 대곤, 중곤, 소곤, 중곤(重棍), 치도곤(治盜棍)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용하는 기관과 규격을 명시해 두고 있다.
〈표7〉 『흠휼전칙(欽恤典則)』의 곤제도(棍制圖)
종류 | 길이 | 너비 | 두께 | 비고 |
소곤 | 5척 1촌 | 4촌 | 4분 | |
중곤 | 5척 4촌 | 4촌 1분 | 5분 | |
대곤 | 5척 6촌 | 4촌 4분 | 6분 | |
중곤(重棍) | 5척 8촌 | 5촌 | 8분 | |
치도곤 | 5척 7촌 | 5촌 3분 | 1촌 | |
* 전거 : 『흠휼전칙(欽恤典則_』, 곤제지도(棍制之圖) 참조. |
곤장은 길이와 너비, 두께 등 전반적인 규격이 태⋅장 및 신장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특히 포도청에서 사용되었던 치도곤의 규격은 길이가 5척 7촌, 너비가 5촌 3푼, 두께가 1촌으로 다른 곤장에 비해 너비와 두께가 더 컸다.
군영에서의 곤장형은 기강과 군율 등 군무(軍務)를 어긴 병사와 나졸 등을 처벌하는 데 사용되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곤장의 죄를 범한 자라도 10대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재질도 참나무와 같은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그 남용을 극히 제한하였다.
이처럼 곤장은 군영에서 군무의 과실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포도청이 도적을 다스릴 때 치도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서 죄인을 신문할 때 사용하는 고문의 도구로 전용되었다. 다시 말해 곤장이 결심에서 확정된 횟수만큼 때리는 처벌의 형식에서 자백을 받을 때까지 때리는 고문의 형태로 변한 것이다.
포도청이 형문의 도구로 신장 대신 곤장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남용으로 인한 폐단이 예견된 것이었다. 포도청에서 치도곤을 이용한 형문이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자, 심지어 국청 죄인을 포도청에 보내 실토를 받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도청에서 치도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강제로 자백했던 죄인이 국청(鞫廳)으로 돌아오면 증언을 번복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말하자면 치도곤은 ‘도적을 다스리는’ 기능보다 ‘도적의 만드는’ 능력이 컸던 것이다.
김윤보의 〈종로결장치도곤타(鍾路結杖治盜棍打)〉, 〈군수타곤장죄인(郡守打棍杖罪人)〉과 김준근의 〈관장〉 등은 곤장을 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은 곤장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데, 무엇보다도 곤장이 앞서 보았던 장류와는 크기부터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태장형과 신장은 집장사령이 한 손으로 내려칠 정도의 작은 규격이었다면, 〈도27〉처럼 치도곤은 집장사령이 두 손으로 들기에도 힘에 부칠 정도로 거대하다. 김윤보가 다른 어떤 형구에 비해 치도곤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곤장을 다소 과장되게 그렸을 것이다. 한편 바닥에 즐비한 여분의 곤장 4개는 매질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정치⋅경제/생업 > 조선시대 형구와 형벌이야기 > 형정도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미지 - 곤장형집행장면)
태장형과 곤장형은 볼기를 때린다는 점은 같지만, 그림을 통해 볼 때 죄수의 결박 상태와 형판 사용 여부 등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태장형이 죄인을 형틀에 손과 발을 고정한 채로 집행된 것과 달리, 곤장은 형판도 갖추지 않은 맨바닥에서 죄수의 손발조차 묶지 않은 상태로 거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곤장을 가할 때 오히려 죄수의 결박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죄수의 수치심과 고통을 가중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죄수가 곤장을 맞을 때 “소매를 꽉 깨물고 신음하다가 마침내 기절”했다는 A. H. 새비지 랜도어의 증언처럼 〈도29〉의 죄수도 잔뜩 웅크리며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모습이다.
다. 압슬형
조선 시대 신장과 곤장 이외에 죄인의 자백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된 또 다른 고문 방법으로 압슬형(壓膝刑)이 있다. 이는 신장처럼 회초리로 때리는 대신 몸무게를 이용해 정강이를 짓누르며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조선 시대 압슬형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부터 신장과 함께 사용되었던 기록이 보인다. 즉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가 세자에게 불충한 사건으로 신문을 받게 되었는데, 태종은 그에게 처음에는 두 사람을 동원해 압슬을 가했지만 승복하지 않자, 추가로 두 사람을 더 동원했더니 승복했다는 사실에서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1417년(태종 17) 압슬형은 십악(十惡)과 강도⋅살인 등 사용 죄목이 규정되었고, 그 방법도 1차에 2명, 2차에 4명, 3차에 6인으로 처벌 대상과 절차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으로 압슬형은 죄인을 무릎 꿇린 채 판자를 얹고 사람이 올라가 짓눌러 무릎과 정강이를 고문하는 방식이었는데, 〈도30〉처럼 죄수의 허벅다리에 판자를 얹고 그 위에 포졸이 올라서 압박하는 방식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림의 제목으로는 올라간 사람이 양쪽을 널뛰듯 번갈아 밟는 형태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리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자료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 연구자료 > 미술 > 원문정보 > 연구조사보고서 > 프랑스국립기메동양박물관소장한국문화재 (1999_프랑스국립기메동양박물관소장한국문화재_미술.pdf, 116p, 3-바-9. 형벌)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압슬은 압사(壓沙)라고 칭하였는데, “사금파리를 깨뜨려 깐 다음, 사람을 그 위에 꿇어앉히고, 무거운 돌로 누르면서 밟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압슬형은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어 좀 더 가혹해졌는데, 〈도31〉, 〈도32〉, 〈도33〉 등과 같이 바닥에 방두(쌀되) 또는 수키와 등을 놓고 죄수를 그 위에 무릎꿇림과 동시에 그의 웃옷을 벗기거나 심지어 발가벗긴 채 회초리나 닥장 등으로 등과 허벅다리를 때리며 신문을 하고 있다.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정치⋅경제/생업 > 조선시대 형구와 형벌이야기 > 형정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이미지 - 작은형틀집행장면)
1594년(선조 27) 역적모의로 공초(供招)를 받았던 오원종의 경우는 낙형(烙刑)을 받은 후 압슬과 회초리형을 추가로 받았지만 모두 참아내 주변을 놀라게 했던 예외적인 사례도 있지만, 통상적으로 죄인에게 압슬형을 가한 상태로 장형이 추가되면 죄인이 참지 못하고 실토할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
이처럼 압슬형은 주로 정치범에 대한 고문으로 사용되었는데, 영조는 “율문에도 없고 다른 어떤 형벌보다 참혹하다.”며 압슬형을 폐지하였고,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압슬형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위 그림처럼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은밀히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이다.
라. 주뢰형
압슬형에 못지않게 혹독한 고문인 주뢰형(周牢刑)은 주로 강도와 절도범을 신문할 때 사용되었다. 주뢰형은 주뉴(周紐)라고도 하고 흔히 주리라고 부른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주뢰를 “나무토막을 다리 사이에 세워 놓고 위아래를 노끈으로 얽고서 좌우로 노끈을 잡아당기면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죄인의 정강이를 밧줄로 묶어 양쪽에서 잡아 당겨 고통을 주는 고문이었다. 그러나 주뢰형은 줄을 사용하는 대신 점차 나무를 이용해 고통을 증가시키는 교목주뢰(交木周牢)로 변형되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이를 가리켜 “근래에 만들어진 지독한 모양”이라고 꼬집었듯, 두 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고 비트는 방식은 죄수의 정강이 고통을 배가시켰다.
이는 가위처럼 양쪽으로 벌어지는 모양이라 ‘가새주리’ 또는 ‘전도주뢰(剪刀周牢)’라고도 부른다. 흔히 ‘주리를 튼다’고 하면 전도주뢰만을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해 주뢰와 전도주뢰는 원리는 유사했지만,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도주뢰형은 포도청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역적을 다스리는 국옥 사건은 주로 의금부 소관이었지만, 무신란(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원칙을 깨고 역적이 포도청에 이송되어 공초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때 주로 사용되었던 고문 도구가 전도주뢰였다. 결과적으로 전도주뢰의 진가가 무신란을 계기로 드러나게 되었지만, 이전부터 포도청이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정풍속도에서도 두 형태가 뚜렷이 구분되는데 〈도34〉, 〈도35〉 등이 주뢰의 형태인 반면, 〈도36〉과 〈도37〉은 전도주뢰에 해당된다.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정치⋅경제/생업 > 조선시대 형구와 형벌이야기 > 형정도 (네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이미지 - 주리트는장면)
주뢰는 대체로 3인 1조를 이루어 시행하였는데, 죄인을 발목과 무릎을 결박하고, 묶인 팔 사이로 주장을 끼워 한 사람이 붙잡고, 다른 양쪽 나졸은 정강이에 묶인 끈을 반대편으로 당기면서 정강이에 고통을 주었다. 반면 전도주뢰는 죄수의 포박 형태는 같으나 다리 사이에 주장을 끼워 교차한 후 정강이를 짓누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드라마와 영화에 연출되는 주리는 대체로 후자와 같은 전도주뢰의 형태로만 정형화되었는데, 그나마 결정적으로 전도주뢰형에 대한 잘못된 고증으로 시청자들의 오해를 불러 왔다.
즉 주리틀기 장면은 〈도38〉, 〈도39〉와 같이 죄수를 의자나 걸상에 앉힌 상태로 상체와 발목만 묶고, 무릎 위쪽 허벅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고 비트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재연되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이와 달리 〈도36〉, 〈도37〉처럼 전도주뢰형은 3인 1조가 의자 대신 맨바닥에 허벅다리가 아닌 정강이 사이에 주장을 끼우고 압박하는 형태가 그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영조는 “나는 이런 형구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뜻밖에 놀라며 곧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도 모르게 전도주뢰형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것이다. 결국 주뢰형을 모두 혁파할 수 없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전도주뢰형만 없애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조윤선의 논문에 따르면, 이때 폐지된 “전도주뢰형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유효한 고문 도구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주 : 1) 전도주뢰형
마. 낙형
낙형(烙刑)은 단근질 또는 포락형(炮烙刑)이라 불린다. 왕용쿠안(王永寬)의 『혹형, 피와 전율의 중국사』에 따르면, 중국 은나라 주왕이 총애하던 비(妃)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심하다 달아오른 구리 그릇에 기어오른 개미가 바동거리는 것을 보고 착안해 그곳에 개미 대신 사람을 올려 그녀의 웃음을 찾아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승려 해봉을 불에 달군 쇠막대로 발을 단근질한 김집을 오히려 처벌한 것으로 보아 비공식적이지만 낙형이 조선 초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대까지 낙형은 상전이 자신의 노비를 사사로이 고문하는 방법으로 간간히 사용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부터 낙형은 역모자를 심문하는 고문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데, 집권 초반에는 그도 낙형의 사용을 자제한 듯했지만, 점차 주된 고문 방식으로 일반화되었다.
낙형은 1733년(영조 9) 전격적으로 폐지되는데, 그 계기는 다음과 같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종기 치료를 위해 뜸 처방을 받은 후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사료 4-2-5-01〕
“뜸뜬 종기가 점차 견디기 어려움을 깨닫고, 이어 무신년 국문할 때의 죄수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난다. ” (『영조실록』 9년 8월 22일(庚午))
그가 직접 종기를 뜸뜰 때 느껴본 뜨거움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결국 영조는 “법을 벗어나 통쾌한 승복을 받더라도 휼형(恤刑)에는 흠이 된다.”하며 낙형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낙형이 폐지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역옥에 대한 국청에서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낙형은 포도청이 도적을 다스릴 때나, 호세(豪勢)를 부리는 양반이 도망가거나 물건을 훔친 노비를 추심할 때 여전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형과 관련된 형정풍속도는 〈도40〉과 〈도41〉에서 볼 수 있는데, 두 그림 모두 배경은 생략되고 형정 내용만 담고 있다. 〈도40〉는 달군 쇠막대로 발가락을 지지기 직전에 결박된 죄인을 위협하고 있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얼핏 보아 포졸의 손에 들려 있는 막대가 회초리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 단으로 묶인 회초리 모양과 바로 옆에 놓인 막대는 다른 모양이며, 막대의 끝이 약간 뭉툭한 것으로 보아 달궈진 쇠막대임을 알 수 있다. 〈도41〉은 위의 방법과 달리 발가락 사이에 숯이나 화승과 같은 것을 끼워 불을 놓는 또 다른 방식이다.
바. 그 밖의 혹형
앞에서 살펴본 신장, 곤장, 압슬, 주리, 낙형 등은 비교적 알려진 고문으로 행형의 규정이 마련되어 있어 지나친 남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법적 근거 없이 사적으로 은밀히 진행된 고문이 더욱 폭력적이고 가혹했다는 것이다. 혹형(酷刑)은 종류와 방식이 무척 다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국왕의 명령을 특례로 규정해 수록해 둔 『형전사목(刑典事目)』의 「남형금지사목」에 소개된 몇 가지 혹형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료 4-2-6-01〕
『형전사목(刑典事目)』 「남형금지사목」
첫 번째 사례는 죄인의 국부를 나무집게로 집어 고통을 주는 일종의 성고문이었다. 잔인하고 악독함이 주뢰보다 심했다고 하니 그 치욕과 고통이 가히 상상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곤장형의 변칙적인 사례인데, 곤장의 각진 모서리를 이용해 볼기보다 통증을 많이 느끼는 정강이와 발뒤꿈치를 가격하여 고통을 극대화한 고문이었다.
세 번째 사례 또한 곤장형의 변형 사례로 죄수의 볼기를 미리 곤장 양면으로 문질러 생채기를 낸 후, 그 부위를 때려 고통의 강도를 높인 고문이었다.
네 번째 사례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콧구멍에 잿물을 주입하는 고문으로 김윤보의 〈도42〉 〈비공입회수(鼻孔入灰水)〉와 방식과 내용이 일치한다.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정치⋅경제/생업 > 조선시대 형구와 형벌이야기 > 형정도 (다섯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미지 - 비공입회수)
거꾸로 매달기와 콧구멍에 잿물 넣기는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참기 힘든 참혹한 고통인데 하물며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면 아무리 강한 인내력을 가진 사람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사례는 거핵기, 보라목, 노끈, 삼능목 등 다양하고 생소한 고문 도구가 단계별로 추가되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 원리가 정강이와 엄지발가락을 비틀거나 때리는 것으로 보아 변형된 주리형 또는 난장이었다.
앞서 소개한 고문과 또 다른 몇 가지 혹형이 형정풍속도에서 추가로 확인된다. 〈도43〉와 〈도44〉은 ‘학무(鶴舞)’라는 형벌인데 죄인의 형벌 받는 모습이 마치 학이 춤추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에서 유래한 고문 이름이다.
고문은 죄수의 팔을 뒤로 묶은 후 매달아 어깨에 고통을 가하는 동시에 늘어뜨린 발을 회초리로 때려 이중의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이 고문도 매달기와 때리기가 동시에 가해져 이중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혹형의 형태이다.
자료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 주제별 문화원형 > 정치⋅경제/생업 > 조선시대 형구와 형벌이야기 > 형정도 (다섯 번째 줄, 왼쪽에서 첫 번째 이미지 - 학춤집행장면)
김화진의 『한국의 풍토와 인물』에 따르면 포도청에서 죄인을 고문할 때 포교가 주로 은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료 4-2-6-02〕
위와 같이 다양한 고문 방식이 은밀히 진행되었고 위 그림과 일치하는 학춤의 고문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매다는 고문이 실제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조선 후기 일부 탐학한 관리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통해 사적인 부를 축재하기 위해 다른 고문과 함께 사용되었던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1827년(순조 27) 초산 부사 서만수는 백성들로부터 산삼을 징수하기 위해 ‘몽둥이로 치고, 회초리 때리고, 주리 틀고, 묶어 매다는’ 등 온갖 음형(淫刑)을 동원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결국 그는 의금부 조사 결과 2년 동안의 죄상이 착복, 남형, 살인 등으로 밝혀졌고, 곧 추자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물고(物故)되었다.
다음으로 〈도45〉 〈안피지쇄수이살(顔被紙灑水而殺)〉은 죄수의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물을 뿌려 호흡을 방해하는 일종의 물고문이다. 그림 속에서 포졸이 입에 머금었던 물을 죄수의 얼굴에 뿜는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혹형이 물고문을 통해 종국에는 죄수를 죽이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그림의 제목이 밝히고 있다.
난장(亂杖)의 형태는 김준근의 〈도46〉 〈금부난장(禁府亂杖)〉, 〈도47〉 〈피점난장타살(被苫亂杖打殺)〉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재우의 『네 죄를 고하라』에 의하면 난장은 두 가지 고문 방식을 혼용하여 쓰는 말인데, 하나는 죄수의 몸을 집단적으로 무차별하게 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수의 발바닥을 때리는 것이었다. 〈도46〉, 〈도47〉 집단 구타의 형태인 난장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46〉은 의금부 나장 8명이 죄인을 중앙에 두고 신장을 휘두르며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정강이를 가격하는 모습이다. 8명이 동시에 신장을 들고 도는 모습 자체만으로 죄수에게는 위협적이어서 실토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47〉도 포졸 3명이 가마니로 덮은 죄수에게 동시에 몽둥이질을 하는 모습이다. 이는 마을의 규율을 어긴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하는 ‘멍석말이’와 유사하다. 그림 속 포졸들이 치켜든 몽둥이 모양이 곤장과 신장처럼 매끄럽지 않고 거친 모양인 것으로 보아 비공식적인 고문이었으며, 이 또한 제목처럼 결국에는 난장을 쳐 살해하는 고문이었다.
〈도46〉과 〈도47〉은 같은 종류의 난장이었지만, 사용처에 따라 전자는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살인을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노년까지 일관되게 형정의 폐단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는데, 1770년(영조 46) 참독한 난장으로 도적을 다스리는 형정은 조선 밖에 없다고 자책하며 그것을 폐지하였다.
주 1) 인용자 : 국부
주 2) 목화씨를 뽑아내는 기계
주 3) 나무쐐기
주 4) 세모가 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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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살림, 2008.
하인리히 F. J. 융커 저, 이영석 옮김, 『기산 한국의 옛그림-풍경과 민속-』, 민속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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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의 살풍경…인간백정의 역사
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옛날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릴 때 한 사람 죽이고 두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사기> ‘서(書)’) “순임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가야한다. 삼가야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사기> ‘오제본기’)
백성들이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형벌을 가볍게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후대의 군주들도 요순을 따르려 무진 애를 썼다. 예컨대 한나라 효문제는 사람의 몸을 훼손하는 이른바 육형(肉刑)을 없애면서(기원전 168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형벌부터 먼저 가하니….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것인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사기> ‘효문제 본기’)
효문제는 그러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는 <시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은 “백성을 법으로 다스리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서 “도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로 간다”고 충고했다. 어디 중국의 군주들 뿐인가.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던 세종은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 지방관 부임인사차 찾아온 정사와 양서적에게 신신당부한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라. 형벌은 중대한 일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 형벌을 쓰더라도 구휼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억울하게 죽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공자님 말씀일뿐’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요순시대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이다. 예를 들면 공자도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하긴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자님 말씀’이시다. 그런 공자였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손목을 잘랐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그것이 곧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공자 뿐인가. 주문공(주희)도 이런 말을 했단다. “때때로 형벌을 가벼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悖逆)하여 작난(作亂)할 마음만 자라게 된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요순을 닮으라면서 뒤에서는 ‘법대로 처단’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극형 중의 극형이라는 능지처참형을 60번이나 집행했고, 190명에 달하는 사형수로 감옥이 넘쳐났다니….
■사람을 죽여 포를 뜨고 젓을 담가 조리돌렸다
그랬다. 역사는 요순의 이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돌이켜 인간의 역사를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야만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이 든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시신은 다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목이 효수되었다
예컨대 상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의 만행을 보라.
“주왕은 충성스런 신하인 구후와 악후를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갔다. 그리곤 그것을 제후들에게 보내 맛보게 했다. 이를 ‘해형(해刑)’이라 한다. 또한 기름 바른 구리 기둥 밑에 불을 지핀 뒤 그 기둥 위에 죄인을 걷게 했다. 미끌어진 죄인들은 불에 떨어져 죽었다. 이를 ‘포락지형(포烙之刑)’이라 했다.”(<사기> ‘은본기’)
그 뿐이 아니었다. 주왕은 숙부인 비간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자, “성인은 심장이 7개라 하는데, 한번 보고 싶다”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상나라를 멸한 주나라에 들면 형벌은 5가지로 요약된다. <상서(尙書)> ‘여형(呂刑)’을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5가지 형벌, 즉 묵(墨)·의(의)·비(비)·궁(宮)·대(大)가 있었다”고 했다. ‘묵’은 이마에 먹물로 문신하는 형벌이다. ‘경(경)’이라고도 한다. 요즘 성범죄자에게 발찌를 채우는 형벌과 비견할 수 있겠다. ‘의’는 코를, ‘비’는 다리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다.
‘궁’은 성기를 자르거나(남성) 메우는(여성) 형벌이고, ‘대(大劈)’는 참수를 뜻한다. 그런데 이 5가지 형벌에 해당되는 죄는 무려 3000여 가지에 달했다.
주나라 때 형법을 제정한 목왕(976~922)은 “경형(묵형)과 의형에 속하는 죄가 각각 1000가지, 비형에 속하는 죄가 500가지, 궁형에 속하는 죄가 300가지, 대벽에 속하는 죄가 200가지이다. 그러니 오형에 속하는 법조항은 모두 3000가지이다.”(<사기> ‘주본기’)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도>에 그려진 도성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조선시대 사형장은 주로 도성에서 서쪽으로 10리 안팎 떨어진 당고개, 양화, 새남터와 서소문 밖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 전시 사진
■3600회의 칼질로 사형시키다
이 가운데 짐승보다 더 극악한 극형은 능지처참(사)이 아닌가 싶다. ‘능지(凌遲)’란 무엇인가. 그대로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인 것이다.
능지처사의 역사는 깊다. 역시 3300~3000년 전 상나라 말기의 갑골문에 등장한다.
“폭동을 일으킨 강족(羌族) 한 사람의 사지를 찢어죽였다.(책)” “강족 사람 15명을 찢어 죽일까요.(책)”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 즉 책형(책刑)은 능지처참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칼로 차례차례 베어 죽이는 능지처사는 10세기, 요나라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송·원·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능지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극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살을 베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1510년 명나라 환관 유근은 반역음모를 꾸민 죄로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1639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지른 정만이라는 자는 무려 3600회의 절개명령을 받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죽을 먹여가며 칼질을 해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칼질이 아니더라도 죄인의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고 목을 치는 형태로도 이어졌다.
■저잣거리의 칼춤
서소문 밖 형장을 표시해놓은 사진. 서소문밖 형장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 김개남 등도 참수형을 당한 뒤 이곳에서 목이 효수되기도 했다. 영조 때 영조를 맹비난했다는 이유로 당고개에서 참형 당한 목호룡도 이곳에서 다시 효수된 뒤 긔의 목과 사지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졌다.|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전시사진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참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잔인한 형벌이 사람들이 부적대는 저잣거리에서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일벌백계, 혹은 ‘시범케이스’라 할까. 예컨대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장은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의 남문 안에 있는 고가(藁街)였다. 그런데 이곳은 제후국(속국) 사절들이 머무는 만이저(蠻夷邸) 인근에 있었다.
이런 곳에 사형장을 설치한 이유는 명백하다. 한나라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으면 저 사형수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실제로 한나라는 기원전 47년(한 원제 3년) 한나라를 괴롭혔던 흉노왕 질지 선우의 목을 잘라 만이저의 문에 그 머리를 내걸었다.(<한서> ‘원제기’)
이후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고가’는 바로 사형장의 상징어가 됐다. 예를 들어 송나라 충신 호전은 1138년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왕륜·손근·진회 등 세사람의 목을 베어 고가에 달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린 적이 있다. 또 <동문선>의 ‘조칙·인종사부식약합조(仁宗賜富軾藥合詔)’를 보면 “묘청의 난을 진압, 괴수의 머리를 베어와서 고가에 매달았다”는 표현이 보인다.
수괴의 머리를 베어 만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으려 보였다는 것이다.
■“시신 몸뚱아리를 시장바닥에 전시하라”
상나라 시대 갑골문,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내려도 좋을 지를 묻고 있다. 잔인한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깊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1407년(태종 6년)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남녀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당시 반역죄와 강상죄 등은 능지처참 가운데서도 거열, 즉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의 <태종실록>을 읽어보라.
“태종이 ‘법에 능지의 조항이 있느냐’고 묻자 황희는 ‘이전에 거열로 능지를 대신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시골에서 사형을 집행한들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하고 사지를 나누어 지방의 각 도에 보내라’고 지시했다.”(<태종실록)
삼강오륜을 해치는 강상죄나 반역죄를 범한 자는 이렇게 공개처형의 방식으로 죽인 것이다. 본보기를 위해 목과 사지가 떨어진 시신을 시장 바닥에 3일 혹은 6일간 내버려두는 ‘기시(棄市)의 형’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컨대 1728년(영조 4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됐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이 결국 붙잡혀 현장에서 참수된다. ‘나머지 무리’도 일망타진됐다. 영조는 숭례문에 올라 이인좌 등의 수급(머리)를 받는 의식을 ‘자랑스럽게’ 거행했다. 백성들이 앞다퉈 그 장면을 구경하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나머지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보이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영조실록>)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에서 ‘패륜죄지만 범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이니 기시형은 과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강상죄를 범한 죄가 무겁다고 하여 기시형을 허락하고 말았다.(<세종실록>)
■죽음의 서쪽
조선시대의 첫번째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밖 10리였다. “1416년(태종 16년), 예조가 아룄다. ‘사형장을 서소문 밖 성밑 10리 양천 지방, 예전의 공암 북쪽으로 정하소서.’”(<태종실록>)
아닌게 아니라 서쪽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죽음과 어둠을 의미했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죽음과 어둠을 관장하는 반인반수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서쪽 끝 신령스런 산인 곤륜산에 살면서 다양한 재앙을 내리고, 5가지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고보니 사형장으로 이용됐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당고개(당현·용산구 신계동·문배동), 와현(용산구 한강로), 새남터(노량사장·용산구 이촌동), 서소문밖(중구 의주로 2가) 등은 모두 서쪽에 있다. 그것도 대체로 서소문을 기준으로 10리 안팎에 있다. 잠깐 가만히 보니 일제시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 서대문형무소가 아니던가.
소년원과 화장터 역시 모두 서쪽에 있었고, 죽음을 상징하는 고태골(은평구 신사동) 역시 서쪽에 있었으니….
■당고개에선 참형
각설하고 사형장에서 벌어진 갖가지 살풍경을 일별해보자. 1613년(선조 33년) <선조실록>은 “평상시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시행했고 참형은 당고개에서 행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죄를 지은 왜인 2명을 참형에 처하면서 의금부가 임금에게 아뢰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사형장 가운데 당고개에서는 주로 참형이 집행됐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32년(중종 27년) 기묘사화를 전후로 자기 생각을 줄기차게 상소한 이종익이 무고 혐의로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했다.(<중종실록>)
1613년(광해군 5년) 궁중 나인과 간음한 임혁 역시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간음한 궁중나인 영생은 역시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나마 임금을 모신 나인이었다는 것 때문에 은전을 받은 것이다.(<광해군일기>) 1681년(숙종 7년) 기우제에서 “가뭄은 부덕한 한 사람(중종) 때문에 일어났으므로 기도해봐야 물리칠 수 없다”는 제문을 쓴 유생이 모역죄로 역시 이곳 당고개에서 참수됐다.(<숙종실록>)
■능지처참은 군기감 앞에서
그러나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집행한다”는 원칙대로 반역모반죄의 대역죄인은 주로 성문안 군기감(병기제조청·중구 태평로 1가) 앞길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1824년(영조 2년)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하고 수족을 따로 떼어낸 뒤 그 머리는 철물교(종로 2가 사거리에 있던 다리)에 내걸고, 수족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야 한다”는 의금부의 상소를 보라. 문자 그대로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성삼문과 이개 등 사육신 등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인사들의 사형집행이다. 1456년(세조 2년)의 <세조실록>을 보라. “백관들을 군기감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했다. 그런 다음 이개 등을 환열(환裂·수레로 찢어죽임)하고 3일 간 저잣거리에서 효수(梟首·목을 내걸었다는 뜻)했다.”
성삼문 등은 죽음과 맞섰지만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았단다. 그저 “‘나으리’라 하면서 “상왕(단종)이 계신데 어찌 나으리가 나를 신하라 하느냐”고 대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형장으로 주목받은 서소문 밖
반면 서소문 밖 형장은 같은 능치처참 중에서도 약간이라도 가벼운 죄목의 사형집행을 담당했다.예컨대 1844년(헌종 10년) 모반대역죄로 붙잡힌 권시응과 박순수의 형장이 달랐다.‘대역죄를 저지른’ 권시응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반면, ‘대역부도죄를 알았지만 고하지 않은’ 박순수는 서소문밖에서 참형을 당한 것이다.
또 1504년(연산군 10년) 영응대군(세종의 여덟번째 아들)의 종인 만수가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 당했다. 반역죄가 아닌만큼 서소문밖이 형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만수는 주인 댁(영응대군과 그 부인)의 세력을 믿고 살찐 말을 타고 호사스런 옷을 입고 많은 종을 거느리면서 도성을 달리고 대신들을 만나도 비키지 않았다. 또 교만을 품고 사람들을 위협해서 때리고….”
만수가 받은 형은 끔찍했다. 사지가 찢긴 뒤 목이 효수되고, 뭇사람들을 모아 시신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 “만수의 목을 영응대군의 부인에게 보이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 답게 말년에 임금의 사냥구역을 만들어 출입금지 표지인 금표(禁標)를 만들었는데, 이 구역을 넘어온 두 사람을 서소문밖에서 참형에 처한 뒤 금표에 목을 효수했다. 백성을 개·돼지로 취급한 것이다.
■홍경래·김개남의 목이 효수되다
서소문밖이 사형장으로 주목받은 이유가 있다. 도성과 붙어있는 데다 인근에 칠패시장(중구 봉래동)이 있어서 본보기의 형장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613년(광해군 5년)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혐의를 뒤집어쓴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이곳에서 사사됐다.
이때 승정원이 사사할 곳을 묻자 광해군은 “서소문밖”이라 지정해주었다.서소문밖은 이미 형집행을 당한 죄인들을 조리돌리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이것을 추형이라 한다.
홍경래의 난을 간신히 진압한 뒤인 1812년(순조 12년) 5월 7일의 <승정원일기>를 보자.“수괴인 홍경래와 그 무리의 수급을 서소문밖에 3일간 내걸어 뭇사람들에게 보인 뒤 전국 8도로 보내라.”
사실 홍경래는 4월19일 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뒤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한 바 있다. 그러나 비국(비변사)이 “흉적 홍경래의 무리가 이미 참형을 받았지만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정식재판에 의한 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태인 접주)인 김개남은 1895년 1월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했다.그러나 그의 목 역시 서소문밖 사거리에 3일간 현수됐다가 농민운동이 일어난 지방에 본보기로 조리 돌렸다.
■시체의 수족을 다시 자르다
1724년(영조 즉위년)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목호룡은 또 어떤 사람인가. 목호룡은 “영조가 세자시절에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그는 이 고변으로 경종 임금으로부터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국문장에 끌려오는 신세가 됐다. 그는 뼈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국문장에서 “나의 고변은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므로 한 점 부끄럼 없다”고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영조는 목호룡을 당고개에서 참형에 처하고 그의 목을 내버려 두었다. 의금부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호룡의 경우 이미 당고개에서 처참하여 몸뚱이가 교외에 있습니다. 지금 그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성(城) 안으로 끌고 들어와 길거리에 내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斬)한 시체의 수족을 다시 참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法意)가 아닐 듯합니다. 어떻게 하오리까.”
그러나 영조의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목호룡의 죄는 팔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비록 성 안으로는 끌고 들어올 수 없지만 전국 8도에 조리 돌리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의 수급은 사흘간 성문 밖에 내걸어 백성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따라 목호룡의 목은 3일간 서소문 밖에 내걸렸으며, 효수 기간이 끝나자 머리와 수족을 전국 8도로 조리돌렸다.
‘조리돌린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죄지은 자를 망신시키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런데 산 사람도 아닌 시신의 일부를 전국에 돌려보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폭군의 상징인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이 떠오른다. 신하들을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가 제후들에게 맛보게 한 상나라 주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목을 나무토막에 걸어놓고’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자 서소문밖 형장에는 미증유의 피바람이 분다.1801년(순조 1년)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소름끼치는 하교를 내린다.(<순조실록>)
“사학(邪學·천주교)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금수(禽獸)처럼 돼가고 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마땅히 처벌하여 진멸시키라.”
이 하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간다. 이승훈·정약종·황사영 등 천주교인 40명(혹은 31명)이 줄줄이 잡혀 참수형을 당한다. 이 해의 탄압을 신유박해라 한다. 이후 기해박해(1838년·41명)와 병인박해(1866~1874년·13명) 등까지 모두 94명(혹은 85명)이 서소문밖 형장에서 능지처참 혹은 참형을 당했다.
프랑스 선교사 클로드 샤를르 달레(1829~1878)가 전하는 형장의 살풍경을 보라.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이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수레가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수레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렸다.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았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1832~1904)도 비극적인 필치로 서소문밖 사형장을 묘사했다.
“범죄인들이 목이 잘리기 위해 통과하는 문이 있다. 이들의 목은 처형된 뒤 야전 냄비걸이처럼 생긴 꼬챙이에 걸려 며칠동안 전시된다.”(비숍의 <한국과 이웃나라>)
그러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참하게 죽은 천주교인의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800년대 100년간의 천주교 박해 기간 중 전국적으로 1만여명이 희생됐다니까….그 중 상당수가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했고, 충청도의 공주와 홍성·해미 등에서 희생됐다.
그 가운데 청나라 신부 주문모는 새남터(노량사장)로 압송돼 군문효수됐다.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훈련장인 연무장이었다. 군문효수란 국사범을 군법에 따라 처단하고 그 목을 군문(軍門)에 걸어 본보기를 보이는 극형이다. 주문모 신부 뿐 아니라 로랭 엥베르, 피에르 모방·자크 샤스탕 신부와 김대건 신부 등이 줄줄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됐다.
■‘제발 단칼에 쳐주세요.’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으로 이용된 당고개에서는 한 천주교인의 비극적인 순교가 눈물을 자아낸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참형당한 부인 이성례의 이야기다. 천주교인 최경환의 부인이며 두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다. 그녀는 마카오 유학 중인 맏아들 최양업 신부를 제외하고 5명의 자식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런데 옥중에서 3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굶어죽는다.
이성례는 남은 자식 4명을 살리려고 일시적으로 배교하고 출옥한다. 그러나 6~15살짜리 자식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스스로 옥으로 돌아와 갇힌다. 동냥 나간 자식들은 어머니가 참형을 당하지 전날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사형 집행인을 찾아 신신당부한다. “어머니가 고통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달라”고…. 자식들의 부탁에 감동 받은 사형집행인은 밤새도록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에서도 법을 빙자한 대량살륙이 벌어졌다. 즉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신자가 공식적으로 29명에 이르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까지 합치면 177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치가 있다.
이곳 또한 한양~강화가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한강의 조운을 통해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을 저장했다가 재분배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 본보기로서는 적격인 장소였다. 갑신정변 실패(1884년)로 상하이 망명 중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가 다시 능지처참된 뒤 효수된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다.(1894년 4월) 그의 사지 역시 전국 팔도로 조리돌렸다.
■인간백정의 역사
이런 야만의 역사가 동양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아니었다. 로마시대 때도 사형·투옥·태형 등은 사제의 손에 의해 자행됐고, 중세 유럽에서는 사형판결을 공동체가 내리므로 집행 또한 공동체 스스로 해야 했단다.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 처형장이 되었고 시체는 매단채 방치됐다니….예를들어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1715~1757)은 대역죄로 기소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처형당했다.
그런데 처형 당하기 전 가슴과 팔, 넓적다리, 종아리 등이 불에 달궈진 집게로 지져지고, 왕을 찌를 때 사용한 오른손은 유황불에 태워지는 등 처참한 고문을 당하였다. 처형은 4마리 말에 사지가 각각 묶인 채 갈가리 찢겨졌다. 한마디로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역사를 읽으니 문득 자괴감이 든다. 무슨 이런 야만의 역사를 살아왔을까. 사람의 몸 안에 잠재된 짐승보다 못한 인간백정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게 능지처참으로 만천하에 본보기를 보였다고 범죄가 줄어 들었을까. 그 역시 누명을 쓰고 굴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秦)나라 때 법망은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관리들이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사기> ‘혹리열전’)
[출처] : 이기환 <이기완의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초기 부족사회에서는 민중집회에서 재판을 하였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과 10월의 집회 등은 부족들의 연중대회로 가무와 향연을 즐기며, 제천의 종교행사와 아울러 부족적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영고집회에서는 재판을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부족장인 가(加)들의 회의에서 재판을 하였다. 특히 삼한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여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걸어 ‘별읍(別邑)’이라는 성역을 만들고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으며, 죄인이 이 성역으로 피난, 망명한 경우에는 추적, 체포할 수 없게 하여 일종의 비호권이 인정되었다.
부족에 공통되는 법의 제정이나 재판은 영고와 같은 부족집회에서 결정하였고, 부족연맹국에서는 부족평의회를 개최하였다. 신라의 화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회의제적 특징은 왕제국가로 발전한 뒤에도 전제적 왕권이 확립될 때까지 존속하여 왕(부족연맹의 장)이나 재상의 선출·파면·재판, 기타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였다. 그 뒤 관료제적 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부터 일반적 재판업무는 관료제 조직의 일정한 기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율령제적 통치체제의 확립으로 최고의 재판권을 왕에게 귀속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나, 일반적·구체적으로 어떠한 조직 아래 어떻게 재판권이 행사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구려 초기에는 감옥이 없었으며, 부족장인 가의 회의에서 평의하여 처결하였다. 이는 당시의 최고 재판기관이었으며, 각 부족에서는 부족장인 가가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는 고이왕 때 6좌평 중에 형옥을 주관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이라는 사법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처결하지 못하고 반드시 중앙에서 신중히 심리하고 5회에 걸쳐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결정하도록 하였다.
신라도 일찍부터 커다란 사건은 여러 관리들이 평의하여 처결했으며, 화백이나 남당(南堂)에서 국왕의 임석하에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지방관이 재판권을 행사하였고, 수시로 염찰사(廉察使)를 파견하여 재판사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사건 가운데 중대하거나 의심스러운 것은 중앙의 남당에서 합의하여 처결했으며, 특히 중대한 죄는 왕의 재가를 얻도록 하였다.
대체로 율령체제 초기에는 중죄 아닌 사건을 도사(道使)·성주(城主)·군태수(郡太守) 등 지방관이나 촌락공동체에서 고래의 관습법에 따라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이며, 율령체제가 확립된 뒤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 있는 조직을 통하여 행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법과 행정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행정관청이 민사·형사 사건을 재판하였다. 중앙정부의 재판기관을 보면, 태조 때 태봉의 제도에 따라 의형대(義刑臺)를 두었다가 뒤에 형관(刑官)으로 고쳤고, 다시 성종 때의 개혁으로 형부(刑部)라고 하였다.
형부는 법률에 관한 사항과 민사재판인 사송(詞訟) 및 형사재판인 상언(詳讞)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전법사(典法司), 형조, 언부(讞部), 이부(理部)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종 때는 노비에 관한 소송을 관장하는 도관(都官)을 설치하였고, 충선왕 때 언부에 병합되었다가 노비송(奴婢訟)이 폭주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원종 때부터는 형조 외에 필요에 따라 특수한 사건을 관장, 재판하는 임시관청을 두었다.
즉, 1269년(원종 10)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1281년(충렬왕 7)의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 1318년(충숙왕 5)의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과 1320년의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1365년(공민왕 14)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正都監) 등이었다.
지방재판기관으로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는 개경부윤이 공양왕 때부터 일체의 민사사건을 재판하였다. 지방에서는 서경은 분대(分臺), 기타는 수령인 유수관(留守官), 부사·목사·지주군사(知州郡事)·현령·감무(監務), 동서의 주진(州鎭)에서는 각계의 병마사(兵馬使)가 초심기관이었으며, 안렴사(按廉使, 按察使)와 계수관(界首官)은 관내 수령의 형정을 감독함과 동시에 2심 재판기관이었다.
성종 때는 각 도의 전운사(轉運使)도 형정사무를 관장하였고, 각 도에 파견되는 안무사(按撫使, 巡撫使)나 공양왕 때 경기지방에 파견되던 염문사(廉問使)도 민형사사건의 상소심으로서 재판하였다.
그 밖에 충렬왕 때 몽고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둑 체포와 금란(禁亂)사무를 관장하도록 설치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도 민간인이 서로 다투는 사건과 소나 말 살해사건은 물론 실제로 권한을 넘어서 노비송을 관장한 일이 있었다.
심급이나 재판 절차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며, 형사재판에서는 작은 일은 5일, 그다지 크지 않은 일은 10일, 큰일은 20일, 도형(徒刑) 이상에 해당하는 죄는 30일 안에 판결하도록 하는 형사재판 정한법(定限法)이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근친간에는 재판관과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게 하는 상피제도(相避制度), 일반 형사사건은 반드시 3인이 합의하여 처결하게 하며,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왕에게 세 번 상주하여 왕과 함께 합의 후 재판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의 폐단이 심하였고, 형사정책은 엄격하지 못하여 사면령이 빈번했으므로 형벌의 권위를 잃었다.
행형제도로 중앙에는 전옥서(典獄署)가 있고, 이를 대리시(大理寺)라고 칭한 때도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수령이 관장하였다.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둥근 집이었고, 수금중인 승중자(承重者: 아버지·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장손)가 부모·조부모상을 당하거나 처가 부상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고, 수금중인 부인이 산월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는 휼형제도도 있었다.
민사소송 절차는 조선 초기의 법에 의하여 추정할 수 있다. 당사자주의이고 변론과 증거, 특히 서증(書證)에 따라 재판하였으며, 판결문은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승소자에게, 1통은 관에 비치하였고, 판결의 확정력의 제도는 불안정하였다. 민사재판에서 적용되는 실체법은 대부분이 확립된 판례법이나 관습법이었다.
실체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판도 민사와 형사로 완전히 분화되어 있지 못하였으며, 모든 재판은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는 있으나 형벌을 결과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재판은 형사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판은 옥송(獄訟)과 사송(詞訟)으로 구별된다. 옥송은 오늘날의 형사상의 범죄를 다루는 재판으로 재판의 최종 목적이 공형벌을 과하는 데 있었으며, 사송은 오늘날의 개인간의 생활관계인 민사상의 분쟁을 다루는 재판으로 분쟁 해결이 재판의 최종 목적이었다.
사송을 재판하는 것을 청송(聽訟) 또는 청리(聽理)라고 하여 부동산·노비·소비대차에 관한 것이며, 전토송(田土訟)·산송(山訟)·노비송·채송(債訟) 등이 사송에 속한다.
법전에도 그 절차에 관한 규정을 소원 혹은 청리라는 편목 밑에 규정하였다. 옥송을 재판하는 것을 결옥(決獄) 또는 절옥(折獄)이라 하여, 옥송은 사송과 제도상으로 형식 절차로나 실질적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사송상의 분쟁, 예컨대 상속재산의 독점, 토지가옥의 침탈, 채무 변제의 불이행 등에는 행위의 반도의성·반사회성이 수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그러한 행위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소송 진행중에 또는 소송 종결 뒤에 부수적이나 병행적으로 형사 처벌을 과하였다. 또 당사자도 소장(訴狀)에서 민사적 분쟁 해결을 요구함과 동시에 형사 처벌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제도나 사안이 민사적 관계를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형사적인 것이 있고, 한편으로는 형벌과 관계없는 순수한 민사적인 것이 있어 둘이 대별되었다.
그러나 사송이라는 하나의 절차에서 사안(事案)의 민사면과 형사면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처리될 수 있었다는 점에 특성이 있으며, 형사적인 사안이 부수될 때마다 처벌함으로써 관령(官令)의 위엄을 세우고, 또 승소자는 같은 소송에서 같은 절차를 통하여 민사적 구제를 받았으며, 동시에 패소자를 처벌함으로써 분쟁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재판기구에서는 근대적 삼권분립이 없었으므로 국가의 행정기관이 재판을 관장하였다.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인 통치기구에서 사법적·행정적 통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궁극적으로 국왕으로부터 권한이 부여되고, 임면되는 관료에 의하여 행해졌다.
주·부·군·현은 관료기구의 말단으로서 수령인 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이 사송과 태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였고, 재판·금령·형구·죄수·감옥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는 형방서리인 아전(衙前)이 수령의 재판사무를 보좌하였으며, 사송도 형방을 경유해야 했기 때문에 아전의 판결에 대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수령은 심급적으로는 제1심이며, 동시에 관찰사로부터 반려된 사건과 전임 관리의 심리사건을 재판하였다. 도(道)에서는 관찰사가 관내의 행정·사법·군사를 통할하고 수령의 감독기관이었으며, 검률(檢律)과 형방서리가 사법사무를 보좌하였다. 관찰사는 도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고, 그 이상의 중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사송사건에 관해서는 제2심이며,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의송(議送: 항소)의 절차에 따라 항소할 수 있으며, 의송에 대하여 관찰사는 실질적 복심은 하지 않고 당해 수령에게 재심 여부를 지시할 뿐이었다.
한성부는 수도의 일반 행정기관인 동시에 사법기관이지만 뒤에 이르러서는 한성부 관할 밖의 토지·가옥에 관한 사송에 대하여 전국에 걸쳐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제1심·제2심의 기능도 하여 형조와 대등한 기관이 되었다.
형조는 법률·상언·사송·노비를 관장하여 사법 행정의 최고감독기관인 동시에 수령이 관장하는 일반 사송사건의 상소심으로서의 재심기관이며 합의제기관이었다. 유죄(流罪) 이하의 옥송은 직결하나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 범죄의 재심기관이었다.
형조 밑에는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隷司)·율학청(律學廳)·전옥서·보민사(保民司)·장례원(掌隷院) 등의 예하 관청이 있고, 장례원은 노비송만을 관장하는 독립 관청으로, 1764년(영조 40)까지 존속하다가 형조에 병합되었다.
의금부는 왕족의 범죄, 국사범, 모역반역죄, 관기문란죄, 사교(邪敎)에 관한 죄, 다른 모든 재판기관에서 적체되거나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 등을 심리하는 특별 형사재판기관이었고,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에 대해서는 제3심이었으며, 왕명에 의해서만 개정하였다.
사헌부는 원래 행정 규찰과 시정 논핵 등 일종의 검찰사무를 관장하며, 재판기관은 아니었으나 판결이 심히 부당한 경우에는 사헌부에 상소할 수 있었다. 사헌부는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재판관을 규탄하며, 이 규탄에 따라 왕명에 의해 지정된 관청 혹은 관리들이 재판했으므로 일종의 검찰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왕은 위 모든 기구 위에 모든 권한의 근원으로, 최고·최종의 재판권은 국왕이 보유, 행사하였으며, 국왕에 대한 상소를 상언이라 하고, 신문고·격쟁(擊錚)·상언 등 특례도 인정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반적 재판기구 외에도 필요에 따라 특별재판기관을 설치하는 일이 있었고, 병사(兵使)·수사(水使)를 비롯한 각 하위 관청, 그리고 형조 이외의 각 조 등에서도 각기의 관할에 관계되는 사소한 민형사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특별재판 관청과 형조에서만 사법기관의 분화가 있었을 뿐이고, 국왕과 지방관에서는 재판도 행정사무 일반과 함께 같은 사람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형조는 사법기관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사무의 분장이라고 하는 일반적 현상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기구는 행정기구의 한 측면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어떻든 가장 통일적으로 일관성 있고 명확하게 이용, 운용된 것은 한성부와 도 이하의 지방관청 뿐이었다.
이와 같이 재판권은 일반 행정기관이 관장하지만, 그 기구 및 심급구조는 법전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경우는 월소(越訴)라고 하여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수령-관찰사-형조, 또는 사헌부-상언의 순서를 밟아야 하며, 그것도 그 기관에서 소송을 수리하지 않거나 폐소하여 소송을 심히 지연시킨 경우에 한해서 상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일이 많았으며, 봉건적 신분관계, 인간관계, 파벌 등으로 자의적 운영에 기울기 쉬웠으므로 재판의 독립성이 약하였다.
요컨대, 사법제도의 특색은 기본적으로 제도로서의 객관적 구조를 갖지 못했으며, 사법권의 내용이 광범하여 행정권을 포함한다기보다는 행정권의 내용에 재판권이 포함되어 있는 점, 즉 행정권의 일부분으로 나타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국가로 지향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조직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4년의 갑오개혁부터이다.
갑오개혁은 또한 사법제도의 개혁이 특히 두드러졌다. 오직 권한 있는 사법관의 합법적인 재판 절차에 의해서만 형벌을 과하고 민사 분쟁을 처결하도록 하였다.
먼저 중앙에서부터 사법권의 행정권으로부터의 형식적 분리를 실현하고 재판소라는 새로운 명칭과 제도를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사법제도의 근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수많은 갑오개혁 법령 중에서 법률 제1호가 「재판소구성법」이었다. 과거 군수나 감사에게 맡겨져 있던 행정관 재판이 인권 침해의 근원이었으므로 「재판소구성법」은 재판사무를 행정사무로부터 분리하여 재판사무 전담기관인 재판소를 창설, 공정한 재판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안전을 보장하고자 한 입법이었다.
재판소라는 독립기관은 동양 법제에는 없던 서구식 제도로 지방관이 평소에 하는 사무의 대부분이 재판사무였던 것을 생각할 때 재판사무의 분리는 지방관 직무의 태반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사법의 근대화가 특히 구체제에 잘 융합되지 못하고 저항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서구의 근대 법학교육을 받은 재판사무를 전담하는 법조인이 결여된 상태였으므로 사법제도개혁의 실익을 거둔다는 것은 장래에 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재판소구성법」의 공포는 근대적 사법제도 최초의 도입을 의미하는 획기적 입법이었다.
이 법은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개항시장재판소·순회재판소·고등재판소(뒤의 평리원)·특별법원의 5종 2심제를 예정하고 있었으나, 독립된 재판소로는 한성재판소만이 설치되었다. 고등재판소는 법부에 합설하고 재판장을 법무대신 또는 법부협판 겸임으로 하여 간판을 붙였다.
각 지방재판소는 각 도 관찰부에 합설하고, 각 개항시장재판소는 인천을 비롯하여 각 개항시장의 감리서(監理署)에 합설해서 재판관은 관찰사와 감리가 겸하고 재판소 간판만 붙여 놓았다.
순회재판소와 특별 법원은 임시기관으로 한두 번 임시 개설한 일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성재판소를 설치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간판에 지나지 않았고, 수령과 감사는 여전히 구식재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신풍은 「죄인을 신문함에 있어 고형(拷刑)을 금하는 건」(1894년 7월)을 공포하여 고문하는 악습을 금지하였다.
또 이와 같은 시절에 공포된 「각 부, 각 아문, 각 군문의 체포와 시행을 불허하는 건」·「각 부, 아문, 군문에서 함부로 체포, 시형하지 못하게 하는 건을 각 관(宮)에 적용하는 건」 및 「사법관의 재판 없이 죄벌을 가하지 못하는 건」 등 일련의 진보적 법령의 공포로 관청이라고 관(官) 자만 붙으면 마구 잡아가고 때리고 형벌을 가하던 누습을 근절시킨 것은 구조적인 인권 침해를 구제한 것이며, 사법 근대화의 일대 공적이었다.
갑오개혁 법령인「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검사직제의 공포에 의하여 한성재판소를 비롯하여 각급 재판소에 판사·검사를 임명, 배치하는 한편, 판사·검사의 직업 법조인 양성을 위한 법관양성소이 신설되어 재판기관의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재판에 필요한 기준 법규로서의 실체법과 재판 수행의 절차법이 제정된 것이었다. 절차법은 실체법과는 달리 재판제도 근대화를 위하여 당장 필요한 법률이었다.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동시에 우선 「재판소처무규정통칙」이 제정·공포되었고, 계속하여 「재판소 용지(用紙)에 관한 건」이 고시되어 판사·서기 등 재판소 직원의 사무처리방식이 법령으로 규정되었고, 재판소 특유의 용지까지 지정되어 행정사무에서 완전히 재판사무가 분리, 특유의 사무체제가 확립되었다.
재판의 진행과 소송사무처리에 관해서는 역시 일본인 고문관의 협력을 얻어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통합하여 간략하게 44조로 집약하고 압축한 「민형소송규정」과 소송물 가격 50냥 이하의 소액사건은 구두로 제소할 수 있게 한 「민형소송절차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민형소송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판결과 소환장 등 재판소 서류의 송달, 판결의 집행, 재판 법정의 규율유지 등의 목적으로 그 해 7월 「집행처분규칙」과 「정리규칙 廷吏規則」 등이 공포되어 각종 소송법규가 정비되었다.
실체법으로는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동시에 「명률을 축조 고정(考訂)하는 건」이 공포되었다. 이는 명률을 형사·민사·군율(軍律)·행정법규 등으로 가려내고 분류하여 국한문으로 형법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드디어 그 해 6월 「법률기초위원회규정」이 공포되었고, 법부에 법률기초위원회가 신설되어 우선 형법전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당장 필요한 특별법을 만들어 사회적·제도적 개혁 요구에 응급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법률이 제정·공포되었다.
1896년 4월 「절도처단예」·「형률명례(刑律名例)」, 1896년 8월 「전보사항범죄처단예」, 1897년 7월 「체신사항범죄처단예」, 1898년 11월 「의뢰외국치손국체자처단예(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 1900년 1월 「철도사항범죄인처단예」이다. 이들 각 법은 특별 형법에 속하는 것이며, 일반 형법으로서의 『형법대전』은 드디어 1905년 4월에 공포되었다.
원래 『형법대전』의 제정은 홍범 제13조 ‘민법형법을 엄명제정할 것’에 기원을 두는 것이며, 1895년 3월 「명률을 축조 고정하는 건」은 그 정신을 이어받은 입법정책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명률을 고정하여 입법하는 과도기적 형법전의 기초는 일본인 고문관의 협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일제 세력이 물러간 뒤에도 기초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 뒤 1904년 러일전쟁 시작과 더불어 일제의 내정간섭이 다시 시작되어 그 해 10월 고종은 각부부관제(各部府官制)를 개정하기 위해 관제이정소(官制釐整所)를 특설하는 한편, 형법교정소를 설치하고 법부대신 김가진(金嘉鎭)을 형법교정 총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형법교정관으로 이재곤(李載昆)·김석규(金錫圭)·이상설(李相卨)·정명섭(丁明燮)·윤성보(尹性普)·조경구(趙經九)·김낙헌(金洛憲)·조창진(趙昌鎭) 등을 임명하고, 갑오개혁 이래의 기초로 이미 되어 있는 형법 초고를 다시 추가 교정하여 1905년 4월 총 680조의 『형법대전』을 공포하였다.
『형법대전』은 그 기초자나 형법교정관이 근대 법학지식이 결핍되었던 관계로 『대전통편』이나 『대전회통』과 『대명률』의 조문에 한글로 토만 달았을 뿐 난삽한 구율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형법규정뿐 아니라 형사소송·민사소송 또는 친족상속·제사상장·예법 등에 관한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민사상의 채무자를 처벌하는 규정, 태형·유형 등의 전근대적 형벌도 그대로 두고 있어 구율에 너무 집착한 면이 있었다.
또 전체적으로 형벌이 너무 준엄하고 형법에 정조(正條)가 없어도 율에 근거해서 처벌할 수 있다는 조문을 그대로 두는 것 등으로 보아 과도기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만 『형법대전』은 법부 관원들이 오랫동안 걸려서 기초한 자주적인 입법으로 국권 상실 뒤, 1912년 3월 「조선형사령」이 공포될 때까지 재판소에서 적용한 유일한 실정 형법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입법이었다.
1904년에 접어들자 한국 재침략 기회를 노리던 일제는 그 해 2월 인천항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수도 서울에 침입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그 해 2월 공수동맹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의 조인을 강취하고 한국에 대한 보호권 설정을 현실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일제는 러일전쟁의 순조로운 진척에 발맞추어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에 대한 보호권의 확장과 경제적 이권의 탈취, 한국 내 자국민의 직접 보호를 목적으로 고문정치를 시작하려고 기도하였다. 따라서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일본 공사가 ‘한일외국인고문용빙협정’을 그 해 8월에 체결한 뒤부터는 일제가 추천하는 일본인 고문관과 그 보좌관을 각 부는 물론 각 지방 관청에까지 배치하고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실익을 더욱 굳히기 위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정감독기관을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그 해 11월 ‘을사조약’의 조인을 총칼로 강취하였다. 그리고 1905년 2월 서울에 통감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1906년 9월에는 한국 사법제도를 개혁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고문정치를 재판소에까지 확대하여 법부에 일본인 참여관과 다수의 보좌관을 두었다.
또 각 도재판소, 각 개항장재판소에는 법무보좌관 또는 법무보좌관보를 배치하고 재판소 운영의 실체를 조사, 재판문서에 가인권(加印權)을 행사하여 재판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을 양위에 몰아 넣고, 그 해 7월 전격적으로 이완용(李完用)으로부터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의 조인을 받아냈다.
이 조약으로 일제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는 권한과 이 조약에 붙인 부속 서류인 ‘실행각서’로 재판제도를 개편하여 일본 재판제도 그대로, 대심원(1개 소)·공소원(控訴院, 3개 소)·지방재판소(8개 소)·구재판소(중요 군청 소재지)와 같은 3심급 4종의 각급 재판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원장과 소장은 전부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판사와 서기도 다수 일본인 판사와 서기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각급 재판소에 부치되는 검사국의 장도 일본인 검사로 임명할 것은 물론, 검사와 서기도 일본인을 대량으로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정미7조약’은 실행 각서의 내용으로 보아 재판소를 통한 사법권 쟁취에 목적을 둔 것이 분명했으며, 이 조약에 의거하여 그 해 12월 「재판소구성법」과 「재판소설치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2월부터 각급 재판소와 검사국의 장은 물론 많은 일본인 판·검사가 임명되고, 8월에는 각급 재판소와 검사국이 일제히 개설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국 재판소란 이름뿐이고 알맹이는 일본 재판소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사법권의 실질적 쟁취에도 만족하지 않고 1909년 7월 추밀원(樞密院) 의장으로 복귀한 이토 히로부미는 신·구 통감 이취임식 전에 참석차 방한한 기회를 타고 사법권 강탈의 기정 방침에 따라 이완용을 불러 강압하고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 이른바 ‘을유각서’를 7월에 교환하였다.
을유각서는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재판소를 없애고, 그 대신 한국에 일본법에 의한 일본 재판소를 신설하고, 한국 재판사무를 빼앗아 일본 재판소(통감부재판소)가 담당한다는 사법권 탈취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법권은 일제에 탈취당하고, 그 해 10월 「통감부재판령」·「통감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통감부사법청관제」·「통감부감옥관제」 등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부터 통감부재판소로 고등법원·공소원·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가 개설되었으며, 한국 정부의 대심원·공소원·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는 각각 폐지되고, 계류중인 소송사무와 그 요원은 각급 통감부재판소에 그대로 인계되었다.
통감부재판소는 3심급 4종으로 과거 한국재판소와 같으나, 다만 대심원의 명칭만을 고등법원이라고 개칭하였을 뿐이다. 통감부재판소와 검사국의 판사와 검사는 일본 법제에 의한 유자격자(고등고시 합격자)라야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 판검사의 채용은 유자격자 장벽에 부딪쳐 임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해 10월 「통감부판검사임명에 관한 건」을 제정·공포하여 한국인은 유자격자가 아니라도 판검사에 특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 해 11월부로 고등법원장 이하 각급 재판소장, 고등법원 검사장 이하 각급 검사장과 각급 판검사가 앉은 자리에서 새로 통감부의 임명장을 받는 형식을 취하여 한국 재판소를 인수 인계하였다.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같은 날 「법관양성소규정」이 공포되었다. 이는 근대 법학 도입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재판소를 운영할 판사·검사 등 직업적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법부참서관을 소장에 겸무시키고, 6개월간의 단기 속성으로 법학통론·민법·형법·민형소송법 등 근대 법학을 강의하였다.
그 해 4월 법관양성소가 개설되어 제1기생으로 50명을 입학시켰고, 계속해서 6월에는 제2기생 50명을 입학시켰다. 제1기생은 1895년 11월 47명이 졸업하였고, 제2기생은 1896년 4월 38명이 졸업하였으나 때마침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제 세력이 갑자기 후퇴하게 되어 법관양성소는 2기생의 졸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1903년에 이르러 일제의 재침략과 때를 같이 하여 법관양성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03년 2월에 학생을 모집하여 일부는 다음해 7월에 제3기생으로 졸업시키고, 일부는 1905년 12월에 제4기생으로 졸업시켰다.
1905년 4월에는 「법관양성소규칙」을 제정하여 수업연한을 3년으로 개정하고, 제5기생과 제6기생을 졸업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학칙이 변경되어 법부 소속의 법관양성소는 폐지되고, 학부 소속의 법학교로 계속하다가 전수학교로 변경되었으며, 나중에 법학전문학교로 되어 많은 법학도를 양성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과 때를 같이하여 최초의 「변호사법」이 공포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신제의 재판소와 판검사의 관직이 창설되었지만, 변호사직은 탄생하지 못하였다.
이 「변호사법」의 공포는 사법제도 근대화를 진일보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호사법」이 공포되었지만 변호사 등록이 개시된 것은 1906년부터이며, 그 해 등록한 변호사는 홍재기(洪在旗)·이면우(李冕宇)·정명섭(丁明燮) 3명이었다. 1907년에 등록한 변호사는 심종대(沈鍾大) 이하 17명이었다.
원래 변호사는 변호사회에 가입해야 변호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변호사법」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들 최초의 변호사들은 회조직 직전에 먼저 탄생한 것이다. 변호사회가 생긴 것은 1907년 9월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면우 이하 10명의 변호사가 최초의 변호사회, 즉 전국 유일의 한성변호사회를 조직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1909년 4월 「변호사법」이 새로 공포되어 일본 변호사법과 같이 각 지방재판소 단위로 변호사 등록을 하도록 개정되었다. 따라서 변호사회는 지방별로 조직하게 되었다. ‘을유각서’로 사법권을 강탈한 통감부는 1909년 10월 「통감부변호사규칙」을 새로 다시 공포하고, 한국 변호사뿐 아니라 일본인 변호사도 같이 등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10년 8월 일제는 한국을 강점함과 동시에 통감부를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공포하고, 통감부 재판소의 간판을 각급 조선총독부재판소로 바꾸었으며, 통감부재판소 사무를 조선총독부재판소에 인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개정하여 고등법원 아래 공소원을 복심법원이라고 개칭하고 초심인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이전의 구재판소를 지방법원 지원으로 변경하여 재판소를 3종3심제로 정비하였다. 각급 검사국을 각급 법원에 부치하고 지방법원 지원에는 검사국 분국을 부설하였다.
재판소의 명칭을 법원으로 통일한 이 제도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이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사법제도가 전시체제로 바뀔 때까지 33년간 계속 존속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점점 가열되어 말기에 접어들자 일제는 1944년 「재판소구성법 전시특례」를 제정하고, 민형사재판을 전면적으로 2심제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 해 2월 조선총독부도 「재판소전시특례」를 제정, 공포하여 그 해 3월부터 시행하였다.
전시특례에 의한 재판소의 개편을 보면, 민형사사건 재판에 대한 전면적 2심제 채택은 물론, 지방법원 단독판사의 재판관할권을 대폭 확장하였다.
그리고 복심법원을 상고재판소로 하고 지방법원 단독판사의 재판에 대한 상고사건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고등법원은 지방법원합의부사건에 대한 상고만을 심리하도록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과 더불어 그 해 9월 서울에 들어온 미군은 미군정의 시행을 선언하고 초대 군정장관에 아놀드(Arnold,A.L.)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일제강점기의 악법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예방구금규칙」·「치안유지법」·「출판규칙」·「사상범보호관찰규칙」, 기타 정치적 탄압이나 민족적 차별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을 폐지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사법기관의 재건에 관해서는 미군 장교를 법무국장에 임명하고, 사법행정사무를 시작하였다. 미군정 방침으로서는 법무국장과 그 보좌관을 제외하고는 법무국의 구성은 물론 각급 법원과 검사국의 구성을 전부 조선 법조인의 자치와 자율에 맡겼다. 1946년 3월 조선총독부 각 국을 부로 승격하는 바람에 법무국은 사법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법부장 코네리는 사법부장 밑에 행정·법무·법제의 3차장을 두고, 행정차장은 총무국·감찰국·변호사국을, 법무차장은 법원국·검찰국·형사국을, 법제차장은 소청국(訴請局)·법제국·법률조사국을 담당하게 하고 재야 법조인을 대거 기용하였다.
법원에 관해서는 독립국가에 알맞는 재판소 구성을 목표로 연구 끝에 구 고등법원을 대법원으로, 복심법원을 공소원으로 개칭하고, 그 해 10월 일본인 법관의 일체 철수로 비어 있던 각급 법원의 판사를 상급 법원부터 충원하였다.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또는 조선변호사시험 등에 합격한 기성 법조인이 다수 있었던 관계로 사법부 상급 요원은 쉽게 확보할 수 있었으나 하급 판검사로 취직하는 일은 기피하고 있어 다년간 서기직에 있던 직원을 다수 등용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일제 통치의 반동으로 제도면에의 일제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정치적 목표였던 관계로 재판소 및 검사국의 기구개혁은 일찍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1946년 8월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는 법조인을 대표하여 3심제 부활, 재판소와 검사국의 분리, 사법권의 독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법부 기구개혁건의서를 군정장관 앞으로 제출하였다.
군정장관의 인준을 얻어 그 해 12월 사법부장 명령으로 법원과 검사국의 명칭을 대법원·고등심리원·지방심리원·대검찰청·고등검찰청·지방검찰청 등으로 바꾸고, 대법원판사는 대법관, 기타 판사는 심판관, 검사는 검찰관 등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명칭을 변경하는 데 문제점이 많았으나, 검찰기관을 재판소 부설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뛰어난 견해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미군정은 기본권 인권 옹호에는 처음부터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정치적 자유의 보장, 언론의 자유, 노동운동의 계몽 등에 공헌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개혁은 불법 구속에 대한 국민의 자유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한 1948년 3월의 ‘형사소송법의 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정의 목적은 ‘구속적부심사제도’의 도입에 있는 것이며, 구속적부심사제도는 제1공화국 이후 사법제도로 정착되었다. 이는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으로 일단 폐지되기도 했으나, 제5공화국 헌법에서 복구, 환원되었다.
미군정의 또 하나의 공헌은 사법제도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군정 말기인 1948년에 접어들어 그 해 5월 「법원조직법」과 「사법서사법」, 그 해 7월 「변호사법」, 그 해 8월 「검찰청법」을 제정, 공포한 것이다.
「법원조직법」은 법률심사권을 대법원에 전담시키는 것이며, 사법 우월주의의 미국식 사법제도를 지향한 진보적 입법이었으며, 재판소의 명칭도 법원으로 환원하고 법관도 판사로 환원하였다.
1948년 7월 공포된 제1공화국 헌법은 사법권 독립을 확립하였다. 사법권은 법관에 의해 조직된 법원이 이를 행사하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독립하여 심판하며,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하고, 법관은 탄핵·형벌 또는 징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정직 또는 감봉되지 아니한다.
법령심사권에 관해서 법원은 명령심사권만 가지고, 법률의 위헌 여부에 대한 법률심사권은 별도로 설치한 헌법위원회의 관할에 맡기기로 하였다.
새 「법원조직법」은 대법원·고등법원·지방법원의 3심제를 채택하고, 대법원에는 9명 이내의 대법관을 두며, 대법관의 임명과 대법원장 보직은 대법원장·대법관·고등법원으로 구성된 법관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하고, 판사의 임명은 대법관회의의 결의에 의해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하며, 판사의 보직은 대법원장이 행하였다.
대법관회의는 이러한 임명·보직뿐만 아니라 법원규칙 제정에 관한 사항, 법원행정처장·차장 및 대법원 서기국장의 임명에 관한 사항, 판례의 조사·수집·간행에 관한 사항, 예산 및 결산에 관한 사항 등을 처리하는 사법부 최고의 결의기관이었다.
별도로 대법원에는 법원행정사무처리기관으로 법원행정처를 설치하고, 총무국·법정국을 두었으며, 총무국에서는 서무·인사·회계·용도 등의 사무를, 법정국에서는 호적·등기·집달리·사법서사 등에 관한 사무를 하게 하였다.
1962년 12월에 공포된 제3공화국의 개정헌법은 헌법재판소를 폐지하고 법률을 포함한 모든 법령심사권을 대법원의 전속 관할로 환원하였다. 또한, 대법원으로 하여금 법의 통일과 확립을 기하는 사법우월제를 택하고, 대법원장의 임명권을 확장하여 법원과 법관의 독립은 물론, 법원행정의 독립도 인정하였다.
즉, 법관추천회의를 창설하여 대법원장은 이 회의의 추천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서 임명하고, 대법원판사(종전 대법관)는 이 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하며, 일반 법관은 대법원장이 직접 임명하도록 하였다.
대법원은 대법원장 및 15인의 대법원판사로 구성하고 상고사건, 각종 항고사건, 기타 법률에 의하여 대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사건 등을 종심으로 재판하였다.
고등법원은 서울·대구·광주에 두고, 지방법원 및 가정법원 합의부의 항소사건 및 항고사건, 기타 법률에 의해 고등법원에 속하는 사건을 재판하였다.
지방법원은 서울에 민사지방법원·형사지방법원·가정법원을 두고, 춘천·청주·대전·대구·부산·광주·전주·제주에 각 지방법원을, 중요 도시에는 지원을 두어 제1심 소송을 담당하였다.
검찰청은 「검찰청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검찰청·고등검찰청·지방검찰청 및 지청을 각 법원 소재지에 설치하고, 대검찰청에는 검찰총장을, 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에는 검사장을 두었다.
검사는 법령에 의하여 그 권한에 속하는 사항 외에 형사사건에 관하여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의 수사, 공소의 제기 및 유지에 필요한 행위, 범죄수사에 관하여 사법경찰관리를 지휘·감독하고,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의 청구, 재판 집행의 지휘·감독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상사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검찰총장과 검사장은 소속 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처리하거나 또는 다른 검사에게 처리시킬 수 있었다.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으로 검찰총장도 지휘·감독하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에 개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은 대법원의 법령심사권을 수정하여 다시 헌법위원회를 신설하고, 법률심사권과 탄핵 및 정당 해산을 관할하게 하여 제1공화국의 제헌헌법으로 돌아갔다.
또 법관의 임명에서 임기 6년의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 이외 임기 10년의 일반 법관은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법관의 보직도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행하는 것으로 개정하여 임명권과 보직권을 대통령이 장악하게 하였다.
1973년 1월 비상국무회의는 해산된 국회의 입법권을 대행하고 「법원조직법」·「법관징계법」·「검찰청법」·「변호사법」·「형사소송법」 등 사법에 관한 5개 법률을 개정하였다.
「법원조직법」의 개정에서는 지방법원합의부 관할의 소송물 가격을 인상하고, 각급 법원장과 부장판사의 임명 자격인 법조 경력도 인상했으며, 법관의 정년은 인하하였다.
「검찰청법」의 개정은 「법원조직법」의 개정에 맞춘 것이고, 「변호사법」의 개정은 변호사에 대한 사명규정 신설과 법률사무취급단속법을 변호사법에 편입시키고 벌칙을 강화한 데 있다. 「형사소송법」의 개정에서는 인권 보장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구속적부심사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보석·구속취소·구속집행정지결정 등에 대한 검사의 즉시항고권이 신설되는 등 인권에 관한 주목할 만한 개정이 많았다.
재판 수행에 필요한 기본법으로는 실체법인 민법·상법·형법 등과 절차법인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행정소송법 등 무수한 법률과 명령 등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출범부터 모든 법전을 만들어야 했지만, 광복 초기의 국가로서 기본 법전이 공백에 가까웠다.
하루아침에 이러한 많은 법전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미군정에서도 1945년 11월 “종래의 법령 및 조선총독부가 공포하였고 유효한 법령은 군정 명령으로 폐지할 때까지 존속한다.”로 그 많은 일제 법령을 적용하고 존속시켰다.
전례에 따라 신헌법도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경과규정을 두었다. 그러므로 일제 법령에 대치할 기본 법령을 속히 만드는 입법사업은 국회와 신정부의 우선적인 중대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 기본법의 입법작업은 지지부진하여 1953년 9월 「형법」, 1954년 9월 「형사소송법」, 1955년 7월 「행정소송법」, 1958년 2월 「민법」, 1960년 1월 「부동산등기법」·「호적법」과 같은 민사법과 형사법을 제정, 공포하는 데 그치고, 많은 법령을 조선총독부 시대의 일본어로 된 법령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법 제정에 크게 공헌한 것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최고회의였다. 최고회의는 1961년 7월 「구법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구법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해 12월까지 일제 치하의 모든 일제 법령과 미군 정치 아래의 군정 법령을 모두 정리하여 기본법을 비롯하여 각종 법률·명령·규칙·규정 등을 우리말로 고칠 것은 고쳐서 새 법령으로 공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하여 구 법령 정리를 끝내도록 한 것이다.
정리 결과를 보면 일본 법률 79, 일본 칙령 71, 일본 제령 103, 총독부령 243, 구도령(舊道令) 18, 미군정 법령 35, 기타 66을 정리한 대신, 이에 대치할 신법률 213, 신각령 84, 신부령 8을 제정, 공포하여 한꺼번에 기본법 제정 문제를 해결하였다.
1945년 10월에 미군정 명령으로 일본인 판검사가 일제히 해임되어 판검사 자리의 태반이 비게 되자, 각급 법원과 검찰의 장을 비롯하여 상급 법관은 대부분 재야 법조인으로 충당이 가능했으나, 하급 판검사는 크게 모자랐다.
우선, 상급 판검사를 임명하여 각급 법원과 검찰국을 인수인계하고 개청하기에 바빴다. 모자라는 판검사를 충당하기 위해 대법원에서는 1946년 3월에 6개월간의 단기 속성교육을 위하여 사법요원양성소를 신설하고, 그 해 7월 50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시설과 예산 부족으로 당초의 교육계획을 포기하고 모집생 전원을 그대로 ‘사법관시보’에 임명했다가, 다음해 4월 모두 판검사로 임명하였다. 그 해 9월 대법원장은 사법부장과 협의 끝에 서기를 판검사에 등용하기로 하고, 판검사 특별 임용시험을 실시하여 법원과 검찰의 서기를 대량으로 판검사에 등용하였다.
사법부장은 조선변호사시험을 부활하기로 하고, 1947년 3월 「조선변호사시험규칙」을 공포한 후, 그 해 7월 제1회, 1948년 7월 제2회, 1949년 7월에 제3회의 조선변호사시험을 실시하여 100여 명의 합격자를 배출해서 대부분을 판검사로 등용하였다.
1948년에 수립된 신정부는 「정부조직법」으로 고시위원회를 특설하고 고급공무원 자격의 고등고시를 고시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1949년 8월 「고등고시령」을 공포하여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으로 판검사·변호사의 자격시험을 대치하게 되어 변호사시험은 3회로 폐지되었다. 그 해 12월 제1회 고등고시(사법과 시험)를 실시하여 16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게 되자 그 해의 고등고시는 중단되었고, 판검사와 변호사로서 이북으로 납치된 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그 해 12월 부산에서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법」을 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고시위원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고등고시를 부산에서 계속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를, 1952년 제3회를 시행하였으며, 이는 정부의 서울 수복 때까지 계속 실시되었다.
1952년에는 고등고시와 아울러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법」에 의한 제1회 임용시험도 실시하여 합격자를 공석중의 판검사에 임명하였다. 이 임용시험은 1956년에 정부가 수복된 뒤에도 판검사직의 공석이 많았으므로 제2회 특별임용시험을 실시한 바 있다.
수복 후에도 고등고시는 꾸준히 계속되어 법조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제3공화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개정, 공포되어 고시위원회가 없어지게 되자, 1963년 3월 제16회 고시로 고등고시제는 폐지되고, 1963년 5월 「사법시험령」이 공포되었으며, 그 해 7월 제1회 사법시험이 실시되어 25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 때부터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인시대가 개막되었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뒤 법조인 양성 전문의 교육기관이 탄생하였다. 이는 1962년 2월 「국립학교설치령」 개정에 의하여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서울대학교에 사법대학원이 설치된 데에서 비롯된다.
그 해 4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구내에 수업연한 2년의 사법대학원이 개설되고, 그 해 4월 고등고시 사법과 제14회 합격자 42명이 제1기생으로 입학했으며, 9월에 고등고시 제15회 합격자 38명이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63년 3월에는 고등고시 제16회 합격자 62명이 제3기생으로 입학했으며, 9월에는 사법시험 제1회 합격자 30명이 처음으로 입학하였다. 계속해서 1970년 4월 사법시험 제14기생까지 입학시켰으나, 1971년 1월 대법원에 사법연수원이 개설됨에 따라 사법대학원은 폐지되고, 사법연수원에 인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5년 11월 「광무변호사법」이 처음으로 공포된 뒤 변호사법의 변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 11월 「광무변호사법」, 1909년 4월 「융희변호사법」, 1909년 10월 「통감부변호사규칙」, 1910년 12월 「조선변호사규칙」, 1936년 4월 「조선변호사령」, 1945년 11월 미군정 명령 「조선변호사에 관한 명령」, 1948년 7월 미군정 법령 「변호사법」, 1949년 11월 대한민국 「변호사법」, 1973년 1월 「변호사법」 개정 등이다.
이처럼 한국의 변호사법은 폐지와 공포를 거듭하여 다양한 법적 연혁을 거치게 되었다. 현행 「변호사법」은 「광무변호사법」 이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는 변호사인가제를 고집하고 있던 것을 폐지한 것, 각 지방 단위의 변호사회밖에 인정하지 않하던 구 제도를 깨고 전국적인 변호사회의 연합회를 설치한 것, 변호사의 사명규정을 신설하여 변호사의 긍지를 높여준 것 등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적인 변호사법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 변호사법제와 같이 변호사 등록의 자유, 변호사 징계의 자치, 변호사회칙 제정의 자유, 변호사회의 회의와 의사결의의 자치 등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현행 「변호사법」은 이들 사항이 모두 법무부 장관의 감독 아래에 있다.
변호사제도에 관하여 특기할 만한 일은 1970년 12월 간이 절차에 의한 「민사분쟁사건처리법」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의 공포로 인하여 변호사는 서울에서는 5인 이상(지방에서는 3인 이상)이 합동하면 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할 수 있고, 동시에 합동법률사무소는 공증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법제도 [司法制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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