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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5-6 영의 생각
우리는 지난 시간에 육신을 따르는 불신자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했습니다.
육신의 일은 중요하지만 불신자들의 문제는 그것 밖에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서관 사역을 하다 보니 불신자들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비교적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책 빌리고, 논술 배우러 오는 것은 용납하는 남편들이 행사가 있어 교회 오라하면 질겁을 합니다.
예배 참석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밤 보러 가자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역이기를 싫어합니다. 혹시 잘못 역이면 인생이 파탄나는 줄로 압니다.
교회를 향한 이유 없는 강한 거부감과 반감과 영혼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불신자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거룩해지고 싶은 강한 소망이 있고 지옥이 무섭고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싶고 더 기도 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가짐과 불신자의 마음가짐은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바로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소극적인 차원에서 로마서가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1956년 미국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5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에 도착한 다음날 원주민의 의해 처참하게 죽은 사건이 전 미국에 전해진 것입니다.
모두 대학공부를 마친 젊은이들이었지만 그 중 29살의 짐 앨리엇은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영성으로 보아 미국 기독교계를 이끌어 갈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개종족을 찾아 에콰도로에 들어갔다가 동료 선교사 4명과 함께 도끼에 찍혀 29세 나이로 죽었습니다. 당시 「Life」지는 이 사건에 대해 무모한 선교 열정을 지적하며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선교를 위해 그렇게나 많이 준비했던 그들은 복음 한번 외치지 못하고 비참히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짐 앨리엇이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오자 부인 엘리자베스 앨리엇은 간호사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자마자 남편을 죽인 바로 그 종족에게로 들어가 의료 선교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족은 여자를 헤치지 않는 풍습이 있었기에 그의 헌신적 돌봄으로 작은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추장이 엘리자베스 앨리엇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며 헌신합니까?” 그러자 “나는 5년 전 당신들이 죽인 앨리엇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남편의 사랑을 안고 당신들을 찾아 왔습니다.”
그 후로 엘리엇은 25년 동안 꾸준히 선교를 하였고, 그 결과 1992년 에콰도르 아우카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축하 예배를 드릴 때, 남편을 죽였던 청년이 목사가 되어 그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남편과 저는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흔쾌히 삶을 바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24일 이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올해 39살의 이성철 선교사가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14년 동안 고아와 소외된 이들을 섬기던 중 일어난 변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부인과 어린 자식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젊음과 시간을 바쳤는데 돌아온 것은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이며 또한 그 나라와 그들 민족에 대하여 얼마나 환멸감이 들겠습니까?
그럼에도 그의 부인 김성경 선교사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그곳에 남아 남편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는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신자에게 예수 믿음은 낭비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고통 스런 상황에서도 낭비란 없고 모두 심는 것이고 투자로 봅니다.
그래서 실패, 질병과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신자를 절망케 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는 감정도 없고 현실 감각이 없습니까? 아니면 광신자에, 맹신적인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신자도 충분히 아픔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며 현실적이며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목숨을 내 던지고, 남편을 죽인 원수들을 위해 고귀한 헌신을 계속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크리스천은 구원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오직 십자가입니다.
지난 시간 본문에서 좇는다고 할 때의 단어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좇으라는 말은 우리를 향한 명령과 의무가 아닌, 우리의 자리를 점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을 좇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을 좇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상태와 자리를 말하고 있음을 확인케 됩니다.
불신자는 죄에 속하여 돈, 정욕, 쾌락의 지배를 받다가 사망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시작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서 하나님의 지배와 인도와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약속하고 있는 구원의 자리요 범위입니다.
사망의 특징은 포기요, 어둠이요, 고정성에 있습니다. 시체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시체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특징은 기대요, 희망이요, 역동성입니다.
6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애장터가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에 대한 최고의 배려는 땅에다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아픔이고 괴로움입니다. .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아이는 팽개쳐 두지 않습니다. 치료하고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며 돌봅니다.
부모가 없다면 모를까 부모 있는 아이는 보호 받으며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나려고 발버둥 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부모의 돌봄이 아이를 자라나게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모든 형벌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애장터와 같은 광야에 버려 놓고, 이제부터 천국을 찾아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영의 선택을 하고 영의 일을 해야만 따뜻한 천국 아버지의 품으로 가게 되는 것으로 십자가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몰라 고아 같이 생각될 뿐 우리는 사실,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서 보호되며 자라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을 방해하고 포기케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의 지배를 받는 자의 결과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예전에 가난하던 시절, 농촌에서는 지금 이 무렵부터 점심에 고구마를 많이 먹었더랬습니다.
겨우 네 먹을 고구마를 웃 방에 큰 메꾸리에 가득 담아 놓습니다. 쪄서 먹고 깍아도 먹었습니다.
이렇게 먹다 보면 고구마에 싹이 올라옵니다. 따뜻하고 습기가 적당히 유지되면 쑥쑥 올라옵니다.
생명은 그런 것입니다.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 있으면 크게 되어 있습니다.
김장담글 때 밭에 큰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왕겨를 바닦에 깔고 무를 넣고 흙으로 묻습니다.
이게 무 저장법이었습니다. 그것을 틈틈이 꺼내다가 생채도 하고 무나물도 해 먹고 무국을 끓여 먹습니다.
한 겨울 눈을 헤치고 꽁꽁 언 땅을 곡괭이로 판 다음 삽으로 흙을 떠내면 그럼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납니다.
그런데 일단 한번 파고 난후 다시 덮었다가 다음번에 파낼 때 보면 무에 싹이 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번에 팠을 때 따뜻한 땅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서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조건만 주어지면 자라나고 크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크리스찬은 자라납니다.
아무리 캄캄해도, 아무리 절박해도 참된 크리스천에게 퇴보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목숨과 생명입니다.
목숨은 말 그대로 목에 붙어 있는 숨, 육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숨이 헐떡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만이 전부인 사람들은 목숨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목숨을 넘는 영원한 생명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말을 했습니다.
목숨 밖에 없는 저 불신자들은 목숨에 위협이 되거나 해가 되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우리는 목숨을 넘어서는 데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짐 엘리엇이나 이성철 선교사가 그 생명이 있기에 목숨을 버렸고
그들의 부인들이 계속해서 헌신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엡 4:21-24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옛 사람을 벗어야 하는 책임과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명령과 이 책임이 구원 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오직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들었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야 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책임은 예수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에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리까지 가도록 인도하고 보호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었으니까 믿음으로 출발하고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것으로의 책임이 벗고 입으라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내 힘으로 하려는 오해를 합니다.
내가 잘하고 있으면 구원이 잘 붙은 것 같다가도 내가 못하고 있으면 구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붙었다 떨어졌다. 달랑달랑한 믿음의 특징은 자라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공기, 적당한 습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자라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썩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믿음을 키우지 않으면 썩습니다. 자라나야 할 때 자라지 않으면 썩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은혜로 받지만 자라나지 못한 채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구원을 부끄러운 구원이고 불 가운데서 겨우 건져낸 구원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구원이 틀림없이 내게 이루어졌고,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환경에서도 방해 되거나 좌초되지 않는 영광스런 열매를 맺게 됩니다.
67년 경기도 연천에서 무장공비 토벌 작전이 있었습니다.
이 때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운봉 소위는 척추를 크게 다쳐 결국 하체를 쓰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 씨는 오랜 병원 치료 기간 중에 그를 담당했던 신앙 좋은 우갑선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양가의 극심에 반대에 부딪치고 그들의 사랑은 깨어질 위기에 쳐하게 됩니다.
그 때 우씨는 극진하게 이씨를 간호하며 양쪽의 어른들에게 3년 동안 매일 편지를 보내 결혼을 허락받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씨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씨는 통증을 잊기 위해 몰핀을 사용하고 있었고 우씨는 장기간 감기약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이들은 초음파 검사를 합니다. “애기의 손가락과 다리가 자라지 않는 기형아입니다.”
애기를 포기하라는 주변의 수많은 말들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애기를 낳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애기는 짧은 다리, 짧은 팔에 조그만 살덩어리처럼 붙어 있는 짧은 손가락, 양손 합쳐 4개!
그것도 4 손가락 중 마디가 있는 손가락은 달랑하나 나머지는 관절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그 딸을 믿음으로 키우며 6살 되었을 때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마디가 있는 손가락은 달랑 하나, 나머지는 마디가 없다보니 힘이 피아노에 전달이 되지 않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 팔에 힘을 실어 피아노를 내리 쳐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온몸을 다해 내려치다 보니 몸살로 눕는 일이 다반사고 네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3개월여가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정화한 음정과 박자의 피아노 연주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연주가 끝나는 순간 가족과 선생님은 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피아노는 휴일도 없이, 새벽과 오후로 나눠 10시간에 이르는 지옥훈련으로 이어집니다.
피나는 연습과 함께 아이의 네 손가락 연주는 계속 발전합니다. 이제 음악 콩쿨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음악 콩쿠르 참가 신청 자체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신청하여 드디어 92년도 전국학생음악연주평가회에 참가해서 와이만의 ‘은파’를 연주, 유치부 최우수상을 탑니다.
그리고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행진이 계속됐습니다.
다음 곡에 도전 할 때마다 불가능 또 불가능하게만 여겨졌지만 그는 자라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여기 평택에 있는 국립재활복지대학 멀티미디어 음악과에 입학하고 헬렌켈러처럼 자신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섬기는 꿈을 꾸며 피아노를 내려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희아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를 다니며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나누는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도움만 아니라 수익의 다수를 장애인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헬렌켈러입니다.
어떻게 이런 장애를 가진 여인이 정상인들도 하기 어려운 이런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비록 육신은 자랄 수 없는 장애자였지만 그 부모와 그녀 자신의 믿음은 전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구원의 축복을 그들은 믿었으며 그 믿음이 자라나는 만큼 그들은 영광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앞길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떤 문제와 고통과 장애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축복을 준비해 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예비 되어 있는 우리들의 복입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지원한 젊은이를 진찰한 의사가 그에게 말합니다.
‘이런 병약한 몸으로 목회를 하면 1년도 못가서 죽을 겁니다. 목회를 그만 두십시오.’
그러나 젊은이는 순교할 각오로 복음을 증거 했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구제 사업을 펴며 무려 84세까지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구세군 교회를 창설한 윌리엄 부스입니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었을 때 의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의사를 버렸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이 믿음이 나를 지켜주었다.”
만약 윌리엄 부스가 의사의 말을 따랐다면 그의 인생은 병약한 사람으로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구세군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플 때 병원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의사, 좋은 병원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때로 근심과 걱정이 가득할 때, 병원에서도 어렵다고 손을 들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지옥에 빠진 내 삶을 억지로, 강제로라도 끌어내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이젠 틀렸다 싶을 때에도 믿음을 붙들면 우리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역사로 살리시는 그런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한 현실, 절망적인 현실, 망한 현실, 가난한 현실, 불행한 현실을 꿈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원인과 이유를 따지고 문제를 문제로 지적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성공을 손에 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비전을 갖고 소망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습니다.
한번 실패한 사람이 계속 실패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못났거나 때를 잘 못 만나서가 아닙니다.
실패하는 생각, 실패하는 습관이 큰 실패들을 자신이 만들고 있고,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회는 축복입니다. 기회는 현실 속에서 항상 불행이라고 하는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때가 기회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자의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옆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절망적 상황이십니까? 더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은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캄캄함이 , 절망이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저 세상 사람들이 있는 자리와 얼마나 다른지를 아시고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방향 속에서 더 진실해지시고 간절해지시는 신앙의 진보를 보이십시오.
세상이 결코 넘볼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전진하시고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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