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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죽음에 대해 알아 보았고 ... 위험한 이야기지만 세간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자
세간인의 죽음은 윤회하는 자의 죽음이다. 윤회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중음신이 있다는 이론이고, 하나는 중음신이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야기가 왜 위험한 이야기 인가 하면 동북아시아의 불교문화권 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중음신 단계를 거친다. 생명이 죽은 뒤에는 중음신이라는 중요단계를 거친다는 것이 오랫동안 불교문화권 속에서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이 죽은 뒤 49제를 지내는 이유가 바로 다음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몸둥아리가 없는 영혼의 단계로, 길게 49일까지 구천을 떠돌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조치를 하기 위해 49제를 지낸다.
그런데 이 중음신(중유)이라는 것이... 우리 불교 내부에서 어떤 부파나 불교학자를 막론하고 이런 중음신 이론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로는.... 중유이론을 주장한 부파가 있고 중유이론이 잘못되었다고 거부한 부파가 있어서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쟁하였던 자료를 발견하였다.
부처님께서도 돌아가신 뒤 100년이 지난 뒤 불교교단은 분열하여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을 일으키고 다시 상좌부에서 열두개 부파, 대중부에서 여덟개 부파가 나오면서 토탈 20개 부파로 분열하게 된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로 약 400년 동안 부파불교 시대가 인도불교를 지배하게 된다. 그 20개 중에서 반은 중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반은 중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중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부파에서는 죽으면 바로 다음 생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랬을 때 중유가 있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부파가 설일체유부라는 부파고 이 유부라는 부파는 중음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유부는 상좌부에서 나온 부파이다. 그러나 이 상좌부의 새끼부파인 유부로 인해 상좌부는 사라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되는 역사가 불교에 있다.
그런데 이 설일체유부는 중음신이 있다고 하고, 원래 모체인 상좌부는 중음신이 없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 유부의 전통을 받은 불교국가가 한국,중국,일본이다. 그리고 그 상좌부가 아직도 남아 있는게 미얀마, 타일랜드, 스리랑카이다. 이곳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49제를 지내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다음생을 받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대해 손댈 수 있겠는가...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본다. 그러나 그들도 일종의 천도제는 지낸다.
종교는 의식의 체계다. 종교는 사색을 통한 표출의 체계가 아니고, 숨을 통한 표출의 세계다. 그래서 우리 불교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이 49제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죽기 때문이다. 병에 들었던 안 들었던,,, 늙었던 늙지 않았든 ...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에 공통이다. 그러하기에.... 죽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기 전에 이 몸둥아리 없이 영가만 떠도는 소위말하는 심식으로만 되어있는 중유단계는 있는건가 없는건가? 이 불교학적 논제와 관련한 중요한 논쟁거리를 학술적으로 한번 규명해 보자
이것과 관련해서 부처님 당신이 뭐라 했는지 자료를 한번 찾아보자
사람이 죽어갖고 다음생을 받는 그 중차대한 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보니....
이 주제와 관련하여 도저히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자료가 하나 발견되었다. 가장 근원적인 자료이고 이것이야 말로 오리지날한 자료이다.
제1의공경이라 하는 곳에 ....(기독교 계열 대학의 한 교수가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해 글을 적은게 있는데 ... '업보는 있는데 지은자는 없다'라고 하였다 ) 업을 지은자는 있고 과보도 있는데 정작 지은자는 찾을 수 없다고 해석 했는데.... 그 해석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학자들도 해석하기 어려워 절절맨게 그 대목이다.
작자(지은자)가 없는데 누가 업을 지어? .....
세상에 업도 있고, 보도 있는데 ... 어떻게 작자가 없나?
작자가 있어야 受(받을)도 있고 보도있지...
부처님은 그렇게 애매모호한말을 하신게 아니다. 존재가 있어야 사건이 있고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사건이 나오나?
예를 들자면 새가 날아간다 할 때.... 새는 존재고 날아감은 일으킨 사건이다. 새가 없다면 날아간다는 일이 있는가 없는가?
그래서 부처님 경전을 보면 지은자와 받는자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경전까지 나온다.
업을 지은 작자와 다음생에 과보를 받는 수자는 하나라고 봐야 하느냐 둘이라고 봐야 하느냐 .... 그것은 작자도 있고 수자도 있으니까,,,,,, 그 다음....같은지 다른지 따지는 것이지 원천적으로 작자도 없고 수자도 없었다면 둘이 같으냐 다르냐를 따질 수 있겠는가?
부처님 경에 그렇게 말씀 해 놓고 제1의공경에 가면 업보는 있는데 작자는 없다고 때리고 있으니 미치겠더라..... 불교를 덮어버리고 싶었다.
여태껏 한자 경전에만 나와 있는 내용이었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는 원문이 발견되었다. 인도말 원문에서 유업보이무작자를 내가 확인을 했다. 그 책이 1967년도에 세상에 나와서 그로부터 30년 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서양말과 인도말은 관계대명사 용법이란 것이 있다. 관계대명사 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제한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이라는 게 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이 확 바뀌어 버리는게 제한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이다.
산스크리트문법에 관계대명사가 사용되어서 서술을 하는데 이걸 서술적 용법으로 하면 '업보는 있는데 작자가 없다' 가 되고.... 제한적 용법으로 하면 '업보는 있는데 이러이러한 작자는 없다'라고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자가 없다는 말이 제한을 받게 되면 제한을 받은 그런 작자만 없다는 뜻이지 .. 무턱대고 '작자가 다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하지만 서술적 용법을 써버리면 '작자란 작자는 다 없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한자경전안에는 관계대명사를 기술 할 수 있는 그런 문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대개 서술적 용법으로 해석이 돼 버린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이 한자경전을 보며 '업보는 있는데 작자는 없다'고 해석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문 경전을 보니 제한적 용법이더라.
업보는 있는데 어떤 작자가 없다?.....[차음이 멸하고 이음이 상속하되 속수법을 제하는 그런 작자는 없다]는 것 이야아~! 아무 작자나 모두 없는 게 아니라.... 그러니 작자도 있을 수 있고, 수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그 작자가 어떤 작자냐 하는 대목이 나온다. [차음이 멸하면 이음이 상속한다...]
중음에서 그때의 음도 [차음이 멸하면 중음이 상속할 때]의 그 음자와 같다.
차음이 멸하고 중음이 상속할 때 한가지 법칙이 적용되니 그 법칙을 속수법이라 한다. 그 속수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연기법이라 한다. 12연기의 법칙에 입각해서 이생에서 죽은 뒤 다음생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죽으면 이 생에서 죽고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어떤 법칙에 입각한다?....연기의 법칙인 속수법이다. 그런데 그 연기의 법에 입각할 때 중음신이 나온다고 해야하나,,,,안나온다고 해야하나?..........나와야겠죠?
그 연기의 법칙에 입각해서 생사의 교차순간을 보라고 하는 게 이게 부처님의 중음신이다. 그 연기의 법칙에 입각해서 보면 중음신은 있나 없나? 그건 내가 말 못한다. 난 여러분이 연기의 법칙에 정통하고.... 나면 중음신설에 진실을 알게 될것이다 ....라는 정도로만 여러분께 말씀 드린 것이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왜냐고?.... 부처님께서 긍정도부정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정통하면 그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딱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그 연기법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연기의 이론을 펼치는게 화엄경의 법계연기설이다.
그런 입장에 선다면 하나는 중음신이 있다는 경우, 하나는 중음신이 없다는 경우가 된다.
중음신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49제를 지내야 한다.
우리 영가가 49제를 잉태한 중음신설에 입각하면 육체를 버리기 때문에 심식이 굉장히 밝아진다. 그러니 그 순간에는 뭐든 다 알아듣는 일종의 지혜의 눈이 다 열린다. 그 순간에 법문을 청해 듣고 수승한 지혜의 말씀을 들으면 그 영가가 평소에 알아듣지 못하다가도 그때는 알아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생을 받는다고 했을 때 지혜로운 심식의 거취라고 하는 것은 월등한 우선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49제를 모신다.
그런데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나?
그게 바로 남방불교의 무중음신설에 입각한 불교의식의 메카니즘이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천도제를 지낸다. 그때 남방불교권에서 지내는 천도제는 아귀를 겨냥한 천도제이다. 아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축생보다 아귀가 더 못하다는 경우도 있고,,,, 축생보다 아귀가 더 낫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남방불교에서는 축생보다는 아귀가 더 나은 것으로 본다.
우리가 윤회할 때 어떻게 윤회하나? 5도가 기본이다. 6도 윤회라는 말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중 아수라를 빼면 5도가 된다. 지옥-축생-천상-인간 그리고 가운데 어중간하게 있는게 아귀이다(중음신이 아니고).
중유라고 할 때 중유는 유부에서는 이생과 저생의 가운데라 해서 가운데 중자를 썼으나 남방불교에서는 인간 천신과 같은 선치(?)와 축생과 같은 아주 안 좋은 재생처의 중간쯤으로 중자를 썼을 확률이 있다. 그러므로 이쪽이든 저쪽이든 중간이란 개념은 모두 갖고있는 것이다. 단지 유부계통에서는 시간적인 가운데를 잡아 중음신이 있는 것이고, 남방상좌부불교에서는 공간적 내지 위치의 가운데를 잡아 아귀가 있다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방유부에서도 지옥중생은 중유가 없다고 한다. 또 천상중에서도 아주 좋은 천상.... 색계나 무색계의 천상에서는 중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업이 아주 악해서 극악한 업을 지었을 때 그 업이 맹렬하고 날카로워서 중유를 받을 겨를이 없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중생은 49제가 근본적으로 빗나간다. 천상에 가는 사람들로 22처에 떨어지는 중생들은 선업이 맹렬해서 죽자마자 그 세상으로 환생해 버린다.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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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헷갈린다니까요... 새가 날아간다는 문장으로 철학적 논쟁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읽어봤었고...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태 업보는 있으나 업을 일으키는 자도 없고 업을 받는자도 없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업과 보가 있다면 업을 일으키는자도 있고 보를 받는자도 있다고 하니..... 다시 헷갈리기 시작해요....
방문객님: 어차피 견해는 불자마다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이치를 따져 스스로의 견해를 선명하게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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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온이라는 경험이 조건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다보면, 관찰하는 마음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업과 보가 있다 하더라도 업력이 소멸되는 것을 보면...업를 짓는자도 사라지고, 보를 받는자도 사라진다고 봅니다
제가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서...사실 글도 이곳의 글이 아니면 거의 안읽어요... 그러다보니...최봉수 교수님을 전혀 모르구요... 그래서 참...뭐라 말하기 그런...
어쨌든...[업과 보는 있지만, 업의 배후에 업을 일으키는 주체는 없고 보의 배후에 그것을 받는 당사자는 없다]와 같은 번역은, 한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상좌불교권에서도 그렇게 번역하는 편이구요. 그러다보니 영어권등에서도 그렇게 번역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위 본글의 [서양말과 인도말은... 관계대명사 용법은 두 가지.. 제한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 ... 한자경전안에는... 그런 문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는 낭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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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제1의공경이 나오는데...그 내용이, 일차적으로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요. 업보는 있지만, 그 배후의 주체나 당사자는 없습니다. 그 정도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주 쉬워요...
업은 조건발생에 따라 오는 곳이 없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조건소멸에 따라 가는 곳이 없이 소멸합니다. 마찬가지로...보는 조건발생에 따라 오는 곳이 없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조건소멸에 따라 가는 곳이 없이 소멸합니다. 여기서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을 칭하는 것이 속수법입니다. 유전연기와 환멸연기인 거죠...
즉 업과 보는 각각, 오는 곳이 없이 발생하고 가는 곳이 없이 소멸합니다. 하지만 보는 업을 조건으로 발생합니다.
업은 그것을 발생하게 하는 또 다른 조건이 있어요. 소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즉 의지한 것에서 오거나 의지한 것으로 가는 것등은 아니지만...연기의 이치에 따라 (자성이 없어 비어 있으므로 전적으로 다른 무엇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의지하여 소멸한다는 겁니다. 업을 조건으로 보가 발생하지만, 보는 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업이 없는 것을 조건으로 보가 소멸하지만, 보가 업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연기의 이치는 함께 할 뿐, 어느 일방에서 오거나 가는 것은 아니예요. 인중유과와 차이점이죠...인중유과에서 결과는, 원인보다 앞서 존재해 원인의 안에서 나오잖아요.
차음이 멸하고 이음이 상속하되 속수법을 제하는 그런 작자는 없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작자는 없다는 것과 해석이 많이 다르네요. 원어를 보았다니 그런 해석이 바른것 같습니다.
즉 업과 보의 배후에 어떤것이 따로 있지 않다. 방문객님 설명대로 보면 "연기의 이치에 따라 (자성이 없어 비어 있으므로 전적으로 다른 무엇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의지하여 소멸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배후를 의미하게 되어 부처님 설명과는 반대의 의미가 되는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