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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실로 내려가기 전 여군 부사관을 만났다. 앳돼 보이지만, 당찬 전우였다. 나는 진정 할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고향이 부산 가까운 의령? 집총을 한 자세였는데 병사들에게는 누나 같은 존재이면서도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확립된 간부! 주번사관인 듯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리 먼 전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 리가 넘는 곳에 가서 조국을 지키는 여 부사관! 행여 이 글을 읽는 교우가 있다면, 어머니의 마음으로 아버지으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친김에 얘긴데, 121기갑대대는 파주에 주둔한다. 파주라 하면, 김신조 등 무장공비가 1-21사태 때 침투한 루트가 있는 곳이다. 적군 묘지도 파주 어디엔가 있다. 지나번 예편한 유차영 대령(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장)을 통해서도 이야기 들었다. 중국에 적지 않은 유해를 송환한 후일담을 들으면서 인류애가 뭔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잇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6일에 갔었던 121 공병중대 및 정비 중대는 동두천을 지나 한참 더 들어가는 전곡에 있다. 26사단은 양주시 근처만 커버하는 부대가 아니다. >
<대대 본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다. 가운데 선 노인, 참 보잘것없고 초라하다. 앞으로 손을 맞잡은 중대장이 참 인상적이다. 견장을 단 장교는 지휘관, 나머지는 참모들이다. 과장이란 뜻인데, 지금군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소위로 임관되면 대대에 오자마자 바로 인사참모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초임장교로서 존중을 받는다는 뜻도 있고, 인사를 공정하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할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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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으로 하여금 정말 분에 넘치는 일을 하게 해 준 김화종 중령이 합동참모본부로 전출하게 되었다. 섭섭했지만, 더 큰 역할을 군에서 맡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 맘껏 축하해 주었다. 떠나기 전에 그가 한 말이다.
"작년 안보 강의가 참 좋았습니다. 장병들도 그렇게 평가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거나 군 안보 문제를 어렵게 다루는 강의보다는 안전한 군 생활을 하는 마음의 자세를 쉽게 풀이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금년 말에도 한 번 더 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러면 그렇지, 50년 전에 우리 군생활 그걸 들먹인 게 재미도 있었을 거야. 내복에 득실거리는 이를 잡던 이야기는 소설처럼 들렸겠지."
드디어 12월에 접어 들었다. 나는 결심했다. 이번 기회를 적극 활용하자! 이왕 내친김이니 123기보대대뿐만 아니라, 여단 본부 및 121기갑대대, 57전차 대대까지 가는 거야!
부랴부랴 사단장과 여단장에게 서신을 띄웠다. 부관참모에게까지. 2박3일 부대에 머무를 테니, 부관참모부 생활관에서 하루 자고, 이틀 동안 4개 부대에서 강의를 하게 해 달라고. 이 너무나 황당하고(?) 부담스러운 제안에도 양병희 사단장은 오케이였다. 여단장 김동률 대령은 더말할 나위가 없고. 대신 내무반에서의 1박은 너무 무리니, 부대 숙소에서 이틀을 묵으란다. 계속 고집을 피울 수는 없고 해서 그저 고맙다는 인사로 갈음할밖에. 부산에 상을 받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 사단장이 직접 행정 전화로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부관이나 당번병이 아닌 사단장 자신이 직접 수화기를 드는 것 자체가 어찌 파격이다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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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말 귀한 사진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만남의--.좌로부터 대대장 김화중 중령(교우)/ 예비역 하사 이원우(본인/ 부족하지만 가톨릭 신자)/ 최승호 메다르도 불무리 성당 주임신부(대위-마산 교구에서 파견)/ 73여단장 대령. 손자를 키워 놓고 여든이 다 되어 가면, 마산 교구 어느 본당에 있을 신부/ 국방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할 두 장교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26사단에서의 2박 3일 일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떠난다. 옛날 내가 가르쳤었던 숭지초등학교 출신 이성태 군이 안성에서 차를 몰고 왔다. 새벽 6시. 눈길이 미끄러웠지만 우리는 옛 추억을 되살리며 양주로 떠났다. 양주 역 앞에서 여단 홍보 장교가 대기하고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군인은 시간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1초도 안 틀리게 두 차량은 랑데뷰(?)를 하고 나는 군용 지프에 올라탔다.
이윽고 사령부에 도착! 정문의 위병들이 집총을 한 채 맞는다. 공격! 공격! 공격! 옛날 모습 그대로인 영병장을 지나서 부관참모부로 직행. 김현주 부관참모를 비롯한 장병들이 일어서서 노병을 맞는다. 공격! 공격!
세상에 여군도 둘이다. 소위와 대위(진). 한데 참 인연이란 게 희한해서 둘 다 부산 출신이고 한 학교를 졸업했단다. 싱거운 잘문을 던지고 싶었다.
"내가 부산에서 수십 년 교편을 잡다가 교장으로 퇴임했거든? 초등학교 졸업할 때 교장 선생님 성함 알아요?"
둘은 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농담을 던지고 우리는 크게 웃었다.
"둘 다 머리가 나쁜가 봐."
부관참모는 사무실 칸막이 저쪽으로 가더니 군복을 한 번 내온다. 내 뚱뚱한 체격을 보았었으니 그의 눈짐작이 맞았다. 다만, 허리가 너무 쪼여서 불편했지만, 참기로 했다. 하기야 전립선암을 수술한 지 6개월 남짓이라 운동을 제대로 못했으니 자업자득이다.
<중대장으로부터 교육 준비 끝 보고를 받고 있다. 대대 규모 부대에는 교회만 있고, 성당이 없다. 절이 있는 대대도 있다는데-.언제 대대에 성당이 들어서는 시대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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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참모에게도 신고. 옛날 같으면 하늘같이 높은(?) 분인데-.그래서 그런지 사단장 앞에서보다 더 떨렸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부관참모는 3군사 부관참모부로 전출했었는데, 지금은 그 부서가 없어지고 인사참모처로 통합되었단다. 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대신 인사참모처에 근무하던 이정택 대위는 우엲 두 번이나 만났다. 피부과와 오뉴 병원 밑의 약국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여 55사단 (대대 이름 생략)작전과장으로 부임했다. 나는 군인을 보면 무조건 좋다. 아들 손자가 따로 없다.
조금 있다 사단장실로 향해 출발. 50년 전에 내가 부관참모부에 근무할 때 모필병이라, 엄청나게 많은 사단장 표창장을 써서 들고 오르내렸던 곳이지만, 위치는 약간 달랐다. 온통 '공격' 투성이다. 입구에서부터 장교와 부사관 사병 할 것 없이, 거수 경례와 공격! 접견실에서 10분쯤 기다렸을까? 내가 정말 훌륭한 사단장으로 여겨왔던 양병희 소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접견실로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일어서서 부동 자세. 그리고 26사단 어느 장병보다 우렁찬 목소리로 신고를 하였다.
"공격! 반세기 전에 제대한 일반 하사 이원우, 사단장님이 뵙고 싶어서 부대에 복귀했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공격!"
나는 베레모를 벗었다.사전에 언질을 주었지만 설마했는데, 일흔에 두어 살을 보탠 노병이 머리를 병사보다 찗게 깎은 걸 보고 사단장은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나도 놀랐다. 나는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기 예사였으니까. 차가 나오는가 싶더니 때 맞추어 내가 사는 용인의 3군사령부로 전출하는 김형주 부관참모를 비롯한 하사 이상의 간부들이 다 모였다, 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했다. 특히 50년 전의 부대 모습을 내 입으로 그려 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 시절 군대 생활도.
부관부로 내려 오니, 참모가 이른다.
"선배님, 옛 추억을 되살려 표창장 한 번 써 보시지요."
그는 붓펜을 내민다. 붓보다 덜 익숙한데 어쩐다? 그러나 지금 부대에는 붓 따위(?)가 없다. 전부 컴퓨터 처리지 않는가? 종이 크기도 너무 작다. 그래도 혼신의 힘을 쏟아 표창장 한 장을 써 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 주기에 얼떨떨했다.
<김동률 여단장님. 동영상 씨디도 보내 주시고 이렇게 멋진 사진도 틀에 넣어 보내 주시고--.무운 장구를 기원합니다. 불무리 맹호 여단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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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님, 미안합니다. 사진을 올려서는 안 되는 줄 압니다만, 워낙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단장님이라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여겨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26사단은 사단장님 지휘 하에 모든 게 순조롭고, 전투력 또한 날로 증강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이 노병은, 딸을 가진 부모의 입장으로 돌아가 여군으로 근무하는 부사관과 장교들의 안전을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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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진 오른쪽 맨앞은 준위(준사관) 박종각 박사. 요즘은 박사 학위을 받은 부사관도 많다. 참 좋은 현상이다. 박종각 박사 뒤로 전문하사가 보인다. 전문하사란 병장으로, 제대를 당분간 보류하고 연장 복무하는 제도다. 전문적인 지식이 기술을 더 익힐 수 있고,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얻는 준비를 하는 데 도움도 얻을 수 잇고, 봉급도 많단다. 영외 거주도 가능하고-.무엇보다 군 전투력 증강에 도움이 되니,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하지 않은가? 중앙에 사다장과 본인이 앉아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점싱도 식당에서 같이 먹었다.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전문하사와 병사들 몇이서 걸어가고 오는데, 장교들이 나보고 경례와 공격! 무슨 사연이 있어 들어온 노병이려니 짐작한 모양이다. 눈도 치우고 표창장도 쓰고, 내가 내민 봉투에서 떼어 사 온 햄버거도 먹고--.하루는 그렇게 삽시간에 흘러갔다. 저녁도 역시 군대 식당에서 먹었고말고. 여군들과 함께.
내가 치약이 없다고 하니 여군 소위가 사 주겠다며 PX로 안내한다. 한데 몸집이 뚱뚱한 병사들이 삼상오오 모여 빵이며 콜라 등 칼로리가 높은 것들을 앞에 수북이 쌓아놓고 식탐 삼매경. 할말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쯧쯧, 저 녀석들을 어쩐다지?
치약을 산 여군과 함께 계산대로 갔다. 병사 하나가 나를 보더니 황급히 일어서서 부동자세, 그리고 공격!
"자네, 왜 그렇게 놀라지? 난 50년 전에 이 사단에서 제대한 일반하사일세."
"예, 일병 김**, 저는 예비역 장군이 오신 줄 알았습니다."
내 묵주 반지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반긴다. 자기도 성당에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일렀다.
"미사에 빠지 말게. 은총을 받을 수 있고말고. 내가 기증한 책도 상당수 꽂혀 있어. 내가 쓴 수필집도 좀 있지. 그리고 <천주교야 노올자>는 신앙체험기니 꼭 읽어보게."
다시 여간 홍보장교를 따라 부대 숙소로 갔다. 2층 아늑한 방 하나. 나 같은 촌늙은이게는 호텔과 다름없었다. 짐을 풀고 숙오에서 나와 성당으로 갔다. 군종병으 바뀌어 있었다. 김민구 아론 일병은 가톨릭대 재학중에 입대했었는데, 이비 제대를 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베일 주소뿐이다. aaronmango@naver.com 충주가 집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지만 확실치 않다. 그가 만약 사제 서품을 받게 되면, 그 자리에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직접 집전하는 미사에도 참례해야 할 것 같고. 그때까지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로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창을 통해 보니, 50년 전의 부관부 내무반 위치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생활관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나는 어느새 눈시울이 젖는 걸 느꼈다.
세상 모르게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묵주를 손에 쥐고서.
< 50년 만에 잡아보는 붓(?), 붓펜은 손에 안 익었지만, 그래도 표창장 한 장을 써 냈다. 나애심이 위문 왔을 때 감사장도 내가 썼었다. 노래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다. 정원이 '허무한 마음'을 불러서 히트를 쳤는데, 그도 얼마 전에 저승으로 떠났다. '뜨거운 안녕'의 주인공 쟈니리도 잊을 수 없다. 작년에 그를 직접 만났다. 가수 협회에서다. 모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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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햄버거! 교회에 가면 햄버거를 주고, 성당에 가면 초코파이--.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 불무리 성당에 갔을 때, 병사들은 주임신부가 미사를 봉헌하는 중에도 꾸벅꾸벅하더라.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런데 같은 시간 교회에선 병사들이 햄버거를 기다리는데 성당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고작 초코파이다. 우체국으로 달려갈 교우는 없을까? 천주교 군종교구 유지재단 102996-01-001220로 소액이라도 보내면 모아서 26사단 가톨릭 교우 병사들에게 햄버거를 선사할 수 있는데--.전화 031)879-2383! 우리 시절엔 라면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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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장교 둘이 다 공교롭게도 부산 출신, 같은 학교 출신! 두 장교의 미소가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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