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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있어야 출세도 하고 일도 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깨달아서 아는 것이 참으로 귀합니다. 그래서 공부합니다. 여행합니다. 경험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알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몰라도 될 일들을 알아서 염려하고 걱정하여 마음과 몸에 병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때에 한국에서는 ‘알면 다친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데, 그 비밀을 알게 되므로, 비밀의 진실을 덮고자 하는 세력은 비밀의 진실을 밝히려 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억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비밀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몰라도 될 일에 대하여 지나친 호기심이 문제가 되는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즉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1)라고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했던 모양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근 지역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믿음의 본을 보였던 성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가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문은 단순한 호기심보다는 매우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기와 때를 알 수 있다면 그 분이 오시는 것에 것에 대해 매우 쉽게 준비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심판날을 대비해서 적절한 준비를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순진한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순히 그 때와 시기를 아는 것에 있지 않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결론을 말하자면 ‘아무도 그 날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그리고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36)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후에 사도들에게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아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시 구구절절 언급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2절에 말하기를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2)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합니까? “이미 너희는 아무도 그 때와 시기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그 날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또 다른 것을 은근히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요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색다른 무언가를 첨가하고, 알게 되면 더 좋지 않겠느냐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학자 가운데 벵겔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성경 해석을 아주 잘하는 분으로 책도 많이 저술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학자가 성경 해석 작업을 잘하다가 끝에 가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날짜를 계산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과거의 공적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탐구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령하고 열심 있어 보이지만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 수 없다’ ‘몰라도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무슨 날짜,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 이런 것을 계산해서는 ‘예수님께서 언제, 몇 시에 오신다’고 예언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경을 인용하고,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사람의 마음이 끌립니다. 복잡해 집니다. 그리고는 호기심을 가지고 마음이 동하여 끌려 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언제, 몇 시에 온다”라고 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있으면 아예 관심조차도 가지지 마십시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알 수 없는 시기와 때를 두 가지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입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2)
예수님께서 똑같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나옵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43)
다른 성경에서도 그런 의미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다”(벧후 3:10)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라고 했습니다.
도적들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서 ‘내가 며칠 몇 시에 당신네 집을 방문해서 도적질을 하겠오’라고 하고서 도적질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경고장을 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주님의 날, 주의 다시 오심이 그러합니다. 주님의 날은 예상치 못하게 오는 것이 특징입니다.
둘째는,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오는 것 같이 홀연히 주님께서 오십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전적으로 편안하다 안전하다고 자신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시느냐 하면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온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의료기술이 발전해서 무통분만이 있다고 하지만 과거에는 임신한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산고를 통해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 밭에서 해산의 신호가 오면 급히 집으로 가서, 신을 벗고서 방으로 들어갈 때에 자신이 벗어 놓은 신을 한동안 쳐다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기를 무사히 낳고서 저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진저리 치는 고통이 오고 겪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산모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단연코 겪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날을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면서 일상에 젖어 안전하다 편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1년 2년도 아니고, 오랜 동안에 노아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다 투자해서 큰 배를 만들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노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거기서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오?”
“배를 만듭니다”
“아니, 배를 강이나 바닷가도 아니고, 산 꼭대기에서, 아니 무슨 배를 그렇게 크게 짓고 있오?”
“앞으로 비가 와서 물이 여기까지 차 올라 옵니다. 이 배는 그때에 뜨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희한한 소리를 다 하는 사람도 있네, 무슨 비가 그렇게 많이 온다는 거요. 내 털 나고 처음 듣는 소리요”
“이 땅 위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신답니다”
그렇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신한 여자에게 진통이 와서 아기를 갑자기 낳게 되는 것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임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방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홍수의 심판을 결단코 피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떤 사람도 노아의 말과 행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사람,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시집 가고, 장가 가면서 편안하다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이 안전하고 편안하십니까? 옛날에 비하면 오늘은 살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제는 “주님, 지금 내가 살만하니 오지 마십시오. 내가 좀 누리고, 재미를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좀 늦게 오십시오.” 혹시 이런 마음은 없습니까?
내가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점점 약해져 갑니다. 좀 각오하고 기도를 해도 5분을 넘기지 목합니다. 기도할 제목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 속에 세상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영적 갈급함이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사로 잡혀서 그저 편안하다 안전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 전체 카톡에 올린 적이 있는 동영상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강연입니다. 한번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한 달 전에 나침반을 가지고 어린이 시간에 설교를 했습니다. 정상적인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쉬지 않고서 바르르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시 오실 주님께 맞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갑자기 오셔서 반드시 세상을 결단코 심판하시므로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내 인생의 바늘이 오실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 져서 주님으로 인해서 파르르 떨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제대로 살고 있는지, 나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대로 하고 있는지, 주님께 시선을 두고 파르르 떨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 주의 날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