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해방 후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식량문제였다. 수많은 해외동포의 귀국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와 혼란된 사회사정으로 생명과 직결된 식량은 모든 국민에게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남한의 자생적 정치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식량확보와 통제·배급에 나섰다. 왜냐하면 기존의 통제기구나 배급방침을 변경할 경우에는 민심에 불안을 주는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그뒤를 이은 북한 정권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식량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미국식 자유시장원리에 따라 미곡자유판매제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간상모리배(奸商謀利輩)들이 쌀을 매점·매석하여 시중에서는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상당량은 일본으로 밀수출되었다. 1945년 가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년을 기록했지만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국민 대다수가 기아에 허덕였다. 당시 미군정청과 서울 시청 앞에는 "쌀을 다오", "쌀을 내놓으라"는 군중들의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은 1946년부터 미곡의 자유판매제를 철회하고 미곡수집계획을 수립하여 식량을 통제·배급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미곡수집계획은 이전보다 더 큰 혼란을 가중시켰다. 쌀이 도시에 반입될 수 없게 되자 도시민들은 시장에서 쌀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으며, 배급량 또한 일제강점기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보다 큰 문제점은 미곡수집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공출제에서 드러났다. 미군정은 각 도·군에 목표량을 할당하고 수집을 독려했는데, 지방의 친일경찰과 관리들은 지주나 신한공사(일제강점기 최대의 토지소유자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에 대한 공출보다는 소작농이나 영세자작농에 대한 공출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빼앗기게 된 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농민들은 "공출반대"를 외치며 전국 각 지에서 시위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제때 가혹하게 행해졌던 쌀 공출이 각 지역의 친일 인사들과 친일경찰, 친일관리들이 다시 합심하여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는 행위가 일제 때보다 더 가혹하면 했지 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의 노동자 파업이 가혹한 탄압으로 잦아들어가던 중 10월1일 대구에서는 식량대책과 기아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군중시위가 있었다. 이때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피살된 시위자의 시체를 짊어지고 다음날 아침 모여든 군중은 더욱 많아졌다. 경찰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시위대들은 친일 경찰들의 집을 습격하여 잡아다가 고문했고 화형했으며 산채로 껍질을 벗기기도 했다.폭력과 약탈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과 약탈은 친일경찰 친일관원들을 정확하게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다. 시위대들은 약탈한 물건 주로 친일경찰과 관리 상인들이 매점매석했던 집과 창고를 털어 거리에 풀어놓고 시위대들과 거리의 구경꾼들이 나누어 가지고 갈 수 있게했다.
이런 사태는 후에 경북 의성,영천,구미, 왜관,안동,포항,성주, 봉화, 부산,서울 광주,충남 덕산(예산군),홍성, 천안 등지로 퍼져나갔으며 곳곳에서 친일경찰들은 피살당했고 자위역량이 없었던 경찰은 미군정이 구해주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다. 10월말에 이르러 봉기는 강원,전남까지 파급되었다. 남한 농민들의 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거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 이후로 최대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미군정은 북한이 만여명의 조직원을 남파하여 조직적으로
남한에 분규를 일으켰다고 주장했으나 체포되고 투옥된 자들 중에 거주지가 남한이 아닌 자는 한명도 없었다. 남한의 인민위원회와 좌익의 조직적 인원동원이나 지도 역량등이 있기는 했으나
이때의 봉기는 대부분 각 지역 농민들이 미군이 친일경찰과 관리들을 시켜서 제도화한 쌀 공출에 대한 농민들의 폭발적인 분노였다. 실제로 각 인민위원회와 각 지역 좌파조직은 분노한 남한 민중들을 통제하거나 시위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조직적인 지도방침을 가지고 농민들을 지도하고 이끌지는 못하였다.
이때의 가을 추수봉기는 북한의 남파된 간첩들의 선전선동으로 일어난것이 아니었지만 북한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이때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혁명적인 토지개혁과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적인 노동법 개정등으로 사회개혁작업을 해나갈 때였는데 이러한 소식들이 남한 민중들을 충분히 자극하였던 것이다. 당시 남한 민중의 70%는 해방후 통일된 조국이 어떤 사회체제가 되기를 원하느냐는 설문조사에 사회주의체제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사회주의 체제라고 대답한 비율은 교육수준이 높을 수록 더 높았다.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 유학 한학을 공부해온 소위 양반가문 출신에서도 좌익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더 높은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을봉기는 미군정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남한 국립경찰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압 할 수없었으므로 미국 군대,무기, 탱크같은 장비들이 계속 투입되었다. 1946년 가을 남한에 미군이 없었다면 한국은 4년후가 아닌 바로 이 당시에 내전으로 돌입했을것이다.
가을봉기의 손실은 엄청났다. 경찰관 200명이상이 피살되었으며 3개월 사이에 30,000명 이상이 체포당했다. 경북에서만 7천~8천명이 체포당했고 용산 철도 차고에서 하루에 2천명이 체포 당했고 전남에서도 4천명이나 체포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좌파 조직이었다. 봉기의 성공적인 진압은
국립경찰의 생존력에 전환점을 부여해 주었다. 한국 좌파 지도부는 1946년 발생한 놀랄만한 민중의 힘을 흡수하고 지도하고 조직하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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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좌익세력 및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실패했고 계속해서 분파로 갈라졌다. 봉기의 결과
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 빈농들은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