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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중요 사건 |
선정 이유 |
비고 |
1 |
고려 건국 |
고려는 우리 겨레사의 첫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로서 주체성과 개성이 뚜렷했던 귀족중심의 통치 국가이다. 한반도에서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거란, 몽골, 명, 왜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 교육 기관의 설립, 과거제도의 실시, 화폐제도의 시행, 학문과 산업장려 등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건국은 [고려왕조]의 제 1대 중요 사건으로 꼽을 만 한 의의를 지닌다. |
918∼1392년 |
2 |
귀주대첩 (구주대첩) |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강감찬의 지략과 고려인의 용맹성으로 물리쳐 승리한 싸움이다. 993년(성종 12년) 소손녕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 때,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하였으나 강동 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할 목적으로 1010년(현종 1년) 성종이 제 2차 침략을, 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계속 되는 패배로 병력의 손실을 크게 입어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구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세 차례로 이어지는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낸 고려인들의 불굴의 기상과 의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 |
1019년(현종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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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팔만대장경 조판 |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불교를 진흥 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타개함으로써 호국(護國)하겠다는 염원에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시기에 240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을 통하여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으로,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
1236(고종 23) ~1251년 9월 완성 |
4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1135∼36년 고려 서경(西京:평양) 출신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인종이 15세에 즉위하여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였으며,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가 고려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를 자아냈다. 또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이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은 더욱 더 기강이 어지러워졌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 묘청의 난은 약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
1135~1136년 |
5 |
삼국유사의 편찬 |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추정되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을 만하다. |
1281년 (충렬왕 7년) |
6 |
만적의 난 |
1198년(고려 신종 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이다. 만적의 난이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시와 같이 신분계급이 엄격한 시대에 그들이 품었던 생각, 즉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그 구상과 그들이 나타낸 투쟁의욕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
1198년(고려 신종 1) |
7 |
청자상감기법개발 |
상감기법은 세계각지에서 기원을 전후로 하여 목칠·금속공예품·유리공예품 등에 사용된 시문기법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것이지만, 자기질(磁器質) 청자에 유약을 입히기 전에 시문한 것은 고려시대에 창안된 독자적인 기법이다. 고려청자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다른 나라의 도자기제품에는 유례가 없는 기법을 창안해낸 고려 문화의 찬란한 역사를 알 수 있다. |
10세기 후반 ~ 11세기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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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과거제도의 실시 |
고려의 과거 제도는 광종(949-975) 때 중국인 쌍기의 건의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제술과, 명경과, 의과, 복과를 두었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다같이 문신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으나 일반적으로 경학보다는 문예가 더 숭상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제술과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기술관 등용을 위한 잡과는 그 격이 가장 낮았다. 또 음서 등의 제도 때문에 그리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지만, 신분에 의한 등용만이 아닌 능력에 따른 관리 선발의 기능을 갖춘 과거제도 실시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958년(고려 광종 9) |
9 |
화통도감 설치 |
최무선은 스스로 중국인 화약 기술자인 이원에게서 제조법을 배워 1377년 정부에 화통도감을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화약과 각종 무기를 만들었다. 그 후 왜구가 쳐들어오자 부원수가 되어 그 화기들을 사용, 적함 500여 척을 전멸시켜 그 공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화학무기의 개발과 사용은 당시 고려의 과학기술의 우수성과 실용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이의 계승과 발전이 후에 조선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끄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
1377년(우왕 3) |
10 |
해동통보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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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숙종 7) 만든 동전으로, 한국에서 처음 사용한 엽전이다. 송나라와 거란이 전폐(錢幣)를 사용한 것을 참고하여 1102년 12월 1만 5000관을 만들어 재상, 문무양반, 군인에게 나누어 주고 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개경 좌우에 술집을 두며, 거리에는 점포를 열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해동통보 외에 삼한통보, 동국통보, 해동중보 등의 동전도 함께 사용하였다. 유통 상품의 교환 및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필수적인 금속 화폐의 제작과 보급은 당시 고려의 활발한 상업 활동과 경제생활의 실용성을 알 수 있다. |
1102년(숙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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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발표자 : 김유라, 이정미
다음 발표 주제 : [전기조선왕조]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임진왜란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첫댓글 수고했군요. 그런데 다음 발표에 대한 사항이 누락되어 있군요. 보완하세요.
수정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