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의 개국시조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중 첫째는 누구이신가? 이 문제로 인해 양씨와 고씨의 위차 싸움은 수백년째 이어오고 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 제주목사 이수동이 탐라 개국시조의 탄생지인 모흥혈에 제단을 세우고 역대 제주목사에 의해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양을나의 위패가 우선하였으나 영조조인 18세기에 고씨 집안에서 임의로 고을나의 위패와 양을나의 위패 순서를 바꾸었다가 왕명에 의해 다시 위패의 순서가 원상 회복하는 사건이 있었다.
현존하는 탐라역사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와 영주지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는 국가기관에 의해 고기의 내용을 정리하여 양성지가 편찬하였고 영주지는 고씨족보의 수필서로 고득종이 지었다. 고려사 지리지와 고득종의 영주지에도 맏이가 양을나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후에 출처가 불확실한 영주지가 편찬되면서 맏이를 고을나라고 기록하였다. 이후에도 국가기관이 주도하여 편찬한 사서에는 맏이가 양을나라고 기록하였고 출처가 불분명한 영주지를 참고한 읍지류등은 고을나를 맏이로 기록하였다.
현대에 와서도 위차 다툼이 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삼성시조제사재단으로 등기하였으나 고양부삼성사재단으로 변경하여 등기하였고 양씨 종친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씨 종친회에서는 삼성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구멍이라는 내용으로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인증을 받았는데 인정서에는 양고부씨가 이곳에서 창설됐다고 기록하였는데 고양부삼성사재단은 한국기록원측에 인증서를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전해들은 양씨종친회는 삼성시조제사재단의 명칭을 고양부삼성사재단으로 변경한 것은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차가 그렇게 중요한지 의문이며 족손이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역사의 기록은 정사가 우선하여야 하며 정사의 기록이 맞지 않는 경우 여러 사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므로 탐라국의 역사는 정사를 기준으로 하여 맏이가 양씨이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고씨 수필서에서도 맏이가 양을나라고 기록하였는데 출처가 확실하지도 않는 영주지와 영주지를 참고로한 사서를 참고하여 고을나가 맏이 이었다는 주장하는 설은 적절할 수 있는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탐라국은 세 씨족 집단에 의해 출발하였으나 이후에 동서로 하여 양씨와 고씨의 두 씨족으로 세력이 제편 되었고 고씨 세력이 대륙의 문씨 세력과 혼인관계로 결합하여 양씨 세력을 약화 시켰고 고씨 세력이 탐라국의 가장 큰 세력이 되었으나 원나라 간섭기에는 양씨 세력이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가 삼별초의 항쟁과 이후 고려의 탐라간섭이 집중되자 다시 양씨 세력은 미력해지고 탐라국의 역사는 끝이 났다.
가장 큰 세력에게 성주의 작위를 주었고 그 다음 세력에게 왕자의 작위를 주었는데 초기 신라로부터 비롯된 작위라고 기록하였으나 초기 신라는 탐라를 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탐라는 씨족사에서 단군 이전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지만 탐라의 역사발전이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고 삼국과 함께 발전하였을 것인데 삼국 통합시기에는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탐라국은 양씨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탐라국 역사 출발이 양씨에서 비롯되었고 당나라에 회맹에 탐라국이 참여하였는데 양씨 씨족사에만 그 내용을 전하고 있으므로 탐라국 초기의 역사는 양씨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고씨 세력이 주도자가 되었는데 양씨 세력은 고려의 간섭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고씨 세력은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탐라국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양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륙의 문씨 세력과 혼인동맹하여 탐라국의 주도자가 되었다.
고려말기에는 양씨 세력이 탐라성주가 되었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칸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고려의 영향력을 벋어나려고 노력하였다. 당대의 탐라성주 양호는 백제의 신하라고 전하였는데 이러한 기록은 양씨 세력은 고려의 영향력을 벋어나려고 하였고 원나라 또한 탐라를 고려로부터 때어내기 위해 탐라와 원나라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탐라의 백성들은 고려보다는 오히려 원나라와 가까웠고 고려의 세력화로 인해 큰 피해를 남기고 양씨 세력은 탐라의 주도자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탐라국의 출발은 양씨 세력이었으나 고려시대 부터는 고씨 세력이 고려와 협력하여 오랜 기간동안 주도자의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그 후손들에게도 위차다툼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
출처: 천 산 원문보기 글쓴이: 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