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교회력으로 오늘은 주현절 제1주, 세례주일입니다. 주현절은 한자어로서, 주인 주(主)자에 나타날 현(顯)자를 씁니다. 영어로는 Epiphan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에피파네이아’라고 하는 헬라 말에서 왔습니다. 역시 ‘나타난다. 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에피파니란 말은, 예수님의 신성이 공식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조금 차이는 있지만, 서방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주현절에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그리고 몰약을 드리며 경배한 것을 기념합니다. 이 동방박사 이야기는 예수님이 장차 세상을 구원할 위대한 왕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주현절의 첫 주일인 오늘은 우리가 세례주일로 지키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의 신성이 공개적으로 드러났고, 세례와 함께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으로 그 존재를 나타내셨습니다. 공생애가 드디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외에도 주현절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라든지,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신 사건 등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 가운데 예수님의 신성이 공개적으로 나타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탄절 이후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지는 주현절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현절 제1주로서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세례주일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3장을 읽었는데, 이 3장 본문에는 1절부터 12절까지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오고,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3장 첫머리에 보면,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세례 요한은, ‘주님의 구원의 날이 가까웠으니,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회개를 선포하면서 요한은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하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며 독설을 쏟아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전문가로서 민중의 교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백성들의 존경에 취하여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율법의 정신에서는 멀리 빗나가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의 제사장들로서 역시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형식적인 제사만 강조하고 집례할 뿐이었고,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물질적인 이익이나 사회적인 권위를 지키기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그에게 온 것인지, 아니면 심상치 않은 광야의 분위기를 살피러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하며 공격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이고, 진정 중요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킨다든지, 형식적으로 성전에 나가서 제사를 드린다든지, 아니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을 타고났다고 하는 것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나 제사, 혹은 세례나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삶’이라고 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의미없는 형식ㅇ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은 회개였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나라가 임할 터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뉘우칠 회’, ‘고칠 개’입니다. 사전적으로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입니다. 성경의 희랍어 원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입니다.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슈브’를 옮긴 말인데, 그 뜻은 “돌이킨다”,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뉘우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전환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저 마다 삶의 어떤 방향을 설정하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갔음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뉘우칠뿐 아니라 그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돌이켜 걸어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그 시대의 풍조를 따라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더많이 버는 것이 선이라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비하고, 소비가 가져다 주는 쾌락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구원이 소유와 쾌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방향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구원의 길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저마다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탐심과 정욕을 좇아서 제멋대로 걸어왔던 자신의 인생길을 뉘우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여 걸어가기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출발하는 예식이 바로 요한이 베푸는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예수님이 백성들과 똑같이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요한은 깜짝 놀라서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래서 요한이 허락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회개가 필요치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를 받으시려 하십니까? 그것도 죄사함의 세례를, 요한이라고 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굳이 받으시려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제 허락하라”는 말씀은, ‘지금은 내 말대로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이 맞지만, 지금은 당신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의를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란 말은 ‘옳다, 바르다’는 뜻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바른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른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바른 도리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의’는 너무도 다릅니다. 자신의 처한 진영이나 입장에 따라 해석도 다르고 처방도 다릅니다. 사람이 양심에 따라 살아가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내가 양심을 따라 살면 옳고, 바르고, 바른 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이미 타락한 양심입니다. 원죄론이 바로 이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다고 뱀은 유혹했는데, 과연 그 유혹에 ㄴ머어가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선악을 자기가 마음대로 구별한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선이라고 믿고 고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른 도리가 저 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자기에게 유악하면 선이고, 자기가 손해를 보는 일이라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의 표준은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요한으로부터 죄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자기 의를 나타내기에 기를 씁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물어뜯습니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은 악마로 만들어버립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가짜 뉴스들, 사람들이 주고 받는 험한 비난과 조롱의 언사들이 그렇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 교수는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랜드스탠딩’이란 “남들의 관심을 얻고, 자기과시를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저자들은 특히 ‘도덕적 그랜드스탠딩(moral grandstanding)’이라는 현상을 다루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저마다 SNS나 다른 매체 수단을 통해서 자극적이고 큰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도덕성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인정받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하여 그렇게 큰 소리로 비판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임을 과시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자신의 삶은 그리 도덕적이지도 않은 게 문제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허세와 그랜드스탠딩은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를 불러옵니다. 사회를 분열시키고, 냉소주의를 불러옵니다. 하지만, 자기 의를 드러내고 인정받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잠시 대중을 속일 수는 있어도, 역사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 허구성이 언젠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과 계명을 율법주의로 대체하고, 율법을 자기 의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은 지금 세례 요한으로부터 죄사함의 세례,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스스로 낮아져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죄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아지셔서 당신 스스로 죄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들을 치유하고, 세리나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진정한 사랑,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은 죄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났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세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늘이 열렸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서 계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그 고통스런 순간에 하나님은 그 고통을 스데반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바빌론 땅 그발강가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던 에스겔은 어느 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여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권면하는 귀한 사명을 감땅할 수 있었습니다. 밧모섬 유배지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의 열린 문을 보았고 장차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의 환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하늘을 여시고, 이 땅의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위로와 용기와 사명을 베풀어 주시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과 이 땅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교통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예수님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스스로 낮아지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위로하며, 마침내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이 땅에서 당신의 사역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들렸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관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례를 받는 이 순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의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들과 동일시하시고 세례를 받으신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 속한 탐심과 정욕, 자기 의를 고집하는 도덕적 교만과 허영심은 죽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다시 한 번 기도하고 결단하며 우리의 인생 길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바로 이것이 세례 주일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영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의 현장에서 들으셨던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는 그 음성을, 오늘 우리가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은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위로와 권능을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세례자의 삶인 것입니다.